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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나 커넥션 2-4 | 아리나 커넥션 (한백)

monocrop 2011. 5. 31. 23:19

글: 아리니 (tiger2020)

 

2011. 05. 31 / 출처 및 원문보기

 

2-4


훙디(紅帝)와의 첫 번째 조우는 그렇게 무사히 넘어갔다. 훙디는 나와 에이미의 실수를 인간의 것으로 보아 넘겼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훙디 역시 자신의 행동을 피드백하며 진화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에이미가 판정한 天자의 갑골문을 자세히 검토하고 싶었다. 만일 내 판단이 옳다면 한국어의 많은 어원들을 갑골문과 매치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이미는 내 작업을 거부했다. 내가 명령을 내릴 때마다 에이미는 “검토중”이라는 메시지만을 띠운 후 결론을 유보했다.


“로직투쟁이 있는 거죠. 에이미 내부에.”
마리나는 내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 메시지를 보내왔다.로직투쟁이라니..
“또 다른 에이미가 미스터 한의 에이미에게 따지고 있다고 보면돼요.둘 사이에 결론이 나지 않으면 대답이 유보되죠.”
나는 마리나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 天의 갑골문을 ha nar로 읽을 수 있는 95%의 가능성 가운데 기각할 수 있는 5%를 다른 에이미가 따지고 있어요.”
"가설이 신뢰구간안에 있는데 왜 기각률이 문제가 되는 거죠 ?"
내 질문에 마리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


" 가정이 다르면 결론도 다르죠 .한 로직체계에서 타당성있는 서로 다른 가정들을 전제하면서 하나를 기각하라고 하면 결론을 낼 수 없어요. 에이미의 추론 시스템은 오로지 제시된 한 가지 가정만을 상대로 대답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죠."


"예를 들면?"
마리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는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대답했다.


"해가 지면 밤이 온다라는 가정과 달은 밤에 뜬다라는 또 다른 가정을 놓고 이 중 어느 하나를 기각하라고 하면 미스턴 한은 어떤 것을 기각하겠어요?
나는 발락이 배후에 있다고 직감했다. 그건 분명한 방해였다.내가 발락을 호출했을 때 그는 이전의 모습과 태도가 아니었다. 심각해 보였고 눈빛은 예전과 달리 날카로웠다.


“이유가 뭐죠?”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미스터 한은 좋은 사람입니까?”
발락의 질문은 뜬금이 없었다. 좋은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란 말인가. 나의 짧은 침묵에 발락이 말을 이었다.


“우리의 목적은 중화주의 해체이지 한국어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스터 한은 갑골문의 기원이 한국어라는 잘못된 전제를 하고 있어요. 우리로서는 상당히 유감스러운 일이죠”

나는 발락의 주장을 수긍하기 어려웠다. 갑골문과 한국어의 관계는 진실 속에서 판명될 문제였다. 진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맨 얼굴로 드러날 것이고, 따라서 예단할 필요가 없었다.진실의 얼굴이 싫다면 우리가 그 것과 마주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발락은 내 반론을 묵묵히 듣더니 모니터에 어떤 상형문들을 출력했다.
“이 문자들을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발락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왼쪽부터 갑골문,금문,전서체로 된 旦(단)자였다. 모두 아침을 뜻했고 그 모양은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이미 내가 모두 찾아 본 익숙한 문자들이었다.


“에이미, 이 갑골문을 고대 투르크어로 읽을 수 있는 조합을 찾아줘”
명령을 내린 것은 내가 아니라 발락이었다.


Tan kün: Rising Sun / Sun at dawn ”(떠오르는 태양)


에이미가 내용을 출력하자 발락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고대 투르크어에서 Tan은 새벽하늘을 의미합니다. Tan은 天의 갑골문을 읽을 수 있는 유력한 후보죠.

kün은 고대어로 태양입니다. 우리는 이 Tan kün 이라는 조합으로부터 Tengri khan(텡그리 칸)이라는, 오랜 투르크 전통의 고대 천신(天神)과 영웅 박딸(Vaktar)의 개념을 설명할 수 있었죠.

그것이 바로 갑골문     (天)의 기원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발락의 설명에 나도 모르게 한 숨이 새어 나왔다.

발락의 주장은 天의 갑골문   이 태양신을 뜻한다면 그것은 바로 旦(단)의 상형문으로부터 을 Tan kün이라는 고대 투르크어로 읽을 수 있고 결국 이 갑골문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Tengri khan(天主)이라는 설명이었다.

 

도대체 어쩌자는 건가.

이들이 단군신화라도 연구했다는 말인가.

 

위구르 반군의 지도자 오마르로 부터 박딸(Vaktar)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내가 이제는 발락으로 부터 단군(Tan kün)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발락에게 한국의 단군에 대해 아느냐 물었을 때 그는 관심 대신 그런 게 있었느냐는 듯, 뻘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가락 사이에 길게 방치된 담뱃재가 키보드에 떨어졌다. 어쩌면 이들과 나는 다른 길을 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누구 하나가 다른 누구 하나에게 딸린 존재여야 한다면 말이다.

 

이들과 함께 맞서려는 중화주의 앞에 투르키즘(Turkism)이라는 예상치 못한 장벽이 있음을 직감했다.
아마도 그것은 중국인들의 그것보다 더 어렵고 단단한 상대일 것이다. 다시 한 번 한 숨이 배어나왔다.
얼굴을 돌려 모니터의 마리나를 바라봤다. 마리나는 내 눈길과 마주치자 시선을 힘없이 떨궜다.

 

마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