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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황금보검>특별전을 보면서,신라인들의 정체는 누굴까

monocrop 2010. 4. 16. 00:50

<황금보검>특별전을 보면서,신라인들의 정체는 누굴까

 

불경 원어, 산스크리트어 알파벳은 우리가 초등학교 때 배운 한글과 너무도 흡사하다.

<꺼커거,찌쳐져,떠터더,뻐퍼버,셔허>

 

게다가 산스크리트어의 알파벳은 우리 한글처럼 ㄱ 으로 부터 시작해 ㅎ 으로 끝나고 있다.

더욱이 산스크리트어는 음성까지도 어쩌면 우리나라 한글과 닮았다.

산스크리트어 알파벳 발음은 입과 목구멍의 모양에 따라 구분된다고 한다.

즉 <커>처럼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처>처럼 입천장에서 나는 소리,<뻐> 처럼 입술에서 나는 소리로 구분된다고 했다.

 

이는 어쩌면 훈민정음의 오음체계 '아설순치후'와 닮아있는지 기가막힐지경이다.

가야국 허황후 인도 아유타국 공주설, 석가모니 활동처인 <부다가야>와 같은 <가야>지명, 인도 물고기 문양과

김해 수로왕릉 납릉문에 그려진 '쌍어문'과의 유사성도 산스크리트어와 드라비다어, 한글과의 관계에 연관지어 볼 때 역사적으로

상위 시대인 단군시대 가림토문자와의 전래설을 뒷받침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가름해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옛글자(古篆)>의 기원설에 <범자(梵字)기원설>이 충분히 생겨날만하다. 히브리말과 한국어의 유사성의 증거로 현재 이스라엘말로

엄마는 <이마>, 아버지를 <아바>라 한다. 수수께끼이다. 그 혼란스런 비밀을 풀 수 있는 원칙은 역시 단군시대 창제된 가림토문자의

인정을 전제로 가림토 문자를 가진 민족의 이동을 생각해 볼 때 문제의 궤(軌)가 그려질 수 있다.

 

<수메르 민족>이 <숲뫼(森山>민족>에서 상상의 나래가 한없이 펼쳐진다.

지중해에 연한 <가라海>가 <흑해(黑海>로 <가라말(馬)>이 <검은 말(馬)>인 것처럼, <가라>가 <검다>란 한국어.

<바그다드>가 <밝다(광명)>로 광명족의 이동이 남긴 흔적.

터어키어(투루크/돌궐)와 한국어,일본어는 교착어란 동질성을 가진다.

<박혁거세>가 <밝은 거서간>

<수리수리마하수리>의 <수리>가 <독수리><김수로><정수리>의 <수리><수로>

<나락(奈落)/NARAKA/지옥>란 범어는 한국어 <내려가>

<집시(GYPSY)>의 어원설이 여러가지지만 역시 <집없이>란 한국어와 유사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檀君王(단군왕)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다름 아닌 天을 나타내는 丸을 훈독하여 "댕그란"으로 읽고, 이 "댕그란"을 음사(音寫)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어와 같은 동일어 이동 영역이 넓다는 사실이 불가해(不可解)하다.

 

현재(2010.4.7일)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펼쳐지고 있는 <황금보금>을 해부하다를 둘러보았다.

 

1973년 대릉원 동편의 계림로(쪽샘마을과 대릉원 사이의 도로)를 새로내는 공사 중에 많은 신라의 무덤들이 노출되었다.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 독무덤 등 모두 55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황금보검은 종래 보지 못한 특이한 것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1978 년 보물 635호로 지정되었다.

기존에 출토된 신라 칼은 한쪽 날 (刀 -도) 이었지만  이 황금보검은 양날이 있는 검(剑)이었다.

황금판으로 검집을 만들고 그 위에 보석을 넣어(감입) 장식했다.

 

발굴 당시 검집 일부와 장식만 남아 있다고 판단했지만, 최근 5년 동안 집중적인 보존 처리 결과 검집 아래 나무처럼 보였던 것이 철로 만든 검이라는 점도 새롭게 밝혀냈다 

쇠(철)로 만든 단검, 나무로 만든 검집, 검집 앞면 나무 위에 황금판으로 장식했다.
윗면과 옆면에 입힌 황금은 순도 99 %. 여기에 보석과 유리를 촘촘하게 박아 장식을 했다.

 

어떻게 두 명이 함께 묻혔을까?

 

출토품으로 보아 두 사람의 지위가 비슷하고 나란히 묻힌 것으로 보아 순장은 아닌 듯하다

일반적으로 가는고리 귀걸이를 달고 긴 칼을 찬 사람은 남성이며 굵은고리 귀걸이를 달고 목걸이를 한 사람은 여인이다.

여기 묻힌 두 사람은 모두 가는고리 귀걸이를 달았고 긴 칼을 차고 있어 둘 다 남자로 보이므로 부부 사이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전염병이 돌아서 함께 죽은 부자사이일까? 아니면 전쟁터에서 함께 죽은 친구 사이는 아닐까?

 

이들은 어떤 신분 이었을까?

 

이 황검보검은 제작 수법으로 보아 신라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고 흑해 연안에서 중앙 아시아에 걸치는 지역의 한곳에서 만들어저 수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수입품을 가질 정도의 신분이면 대단히 높은 지위의 사람일 것이다 

정밀조사 결과 황금보검의 뒷편 아랫쪽에서 보검에 붙어 있는 한 조각의 직물을 발견하였는데 이 직물은 무늬가 있는 비단 능 (綾)이다

신라사회가 철저한 신분사회로 신분에 따른 의복이 달랐던 점이나 남자의 겉옷에 비단장식을 할 정도라면 적어도 진골이상의 귀족, 최상류 신분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골 이상의 계층).

금실과 은실로 입사한 말갖춤(마구)과 비단 날개로 장식한 화려한 화살통도 함께 묻혀 있어 이 황금 보검의 주인은 신라 최고의 귀족 계급에 속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무덤의 주인공는 외국인일까?

 

혹자는 이 무덤의 주인공이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온 서역인이 아닐까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이도 있으나 문물의 이동이 곧 사람의 이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황금보검은 오히려 신라시대의 왕성한 대외 문물교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계림로 14호분의 출토품중에서 이 황금보검을 제외하고는 외국에서 수입된 유물은 없다.

유리로 된 제품은 기본적인 형태가 신라의 스타일이고 감색 유리 역시 신라에서 활발하게 만들어진 유리구슬과 같은 형식이다.

무덤의 축조 형식도 신라의 전통적 돌무지덧널무덤이며 머리를 동쪽으로 두는 것도 신라의 전통형식이므로 묻힌 사람은 신라인인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이 보검은 어디에서 만들어 졌을까?

 

경주 박물관 측은 보존 처리 과정에서 황금 보검의 검집 속에 숨어 있던 철검을 찾아냈다. 칼이 칼집에 꽂힌 채 발굴된 것을 분리했다.

신라의 전형적인 대도는 칼의 한쪽 면에만 날이 있지만 철검은 양날이있는 단검으로 신라에서는 출토된 적이없는 구조이다

 

이런 칼과 칼집에 대해 국립 경주 박물관은 중앙 아시아 지역 카자흐스탄 보로보예 지역에서 출토된 (검집 중앙부 분만 출토) 것과 유사하고, 중국 신장성 키질 천불동 69 호 벽화, 우즈벡 사마르 칸트 아프라시압 벽화에서 이런 형태 의 칼을 찬 벽화가 남아있다는 점, 러시아 남서부 지역 흑해 연안에서 보석과 유리를 감입하는 장식 기법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뤄 중앙 아시아에서 흑해 연안의 어느 지역에서 제작된 황금 보검이 신라로 들어왔던 것으로 추정했다.

 

황금 보검을 더욱 빛나게하는 것은 보검에 박혀있는 붉은색 보석과 유리이다.

6 세기 경에는, 유리가 금보다 더 귀한 보석이었으며 보검에 박힌 붉은 색 보석은 처음에는 마노로 알려졌으나 이번 분석 결과 석류석으로 밝혀졌다

석류석은 인도와 스리랑카가 원산지로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유물 중 석류석은 아직 없었다.

 

 삼국유사 기록에 나타난 '미추왕과 죽엽군'에서 죽엽군의 정체를 찾아보자

 

삼국유사 기록에 보검에 관련된 기마군들을 찾아보자.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항상 이상하게 생각했던 "죽엽군'의 정체에 관해 계림14호분의 정체와 연관시켜보았다.

계림14호분은 미추왕릉 바로 뒷편에 자리하고 있다. 미추왕은 어떤이인가. 필자가 미추왕릉과 계림14호분에 누워있던 이들과 연계시킨 이유가 있다. 첫째는 미추왕은 김알지의 7세손이며, 김알지계통이 처음으로 왕이 된 사례이다. 김알지는 정체가 문무왕릉비(현재 경주국립박물관 소장)에 의하면 김일제의 후손이다. 김일제는 훈족(흉노족)계통이다. 중원지역에서 무슨 변화가 생겨 김알지계통은 신라땅에 정착하였다.

훈족(흉노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 권 기이제1 미추왕과 죽엽군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제 13대 미추이질금이 왕위에 오른 지 23년 만에 죽었다. 제 14대  유리왕대에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우리(금성)는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막았으나 오랫동안 대항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댓잎 귀걸이(皆珥竹葉)를 한 군대가 도우려 와서 우리 군대와 힘을 합쳐 적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군대가 물러간 후에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제서야 선왕(미추왕)이 음덕으로 도와 공을 세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능을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 

 

그 후 37대 혜공왕 대인 기미년(779년) 4월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무덤 속에서 어떤 사람이 준마를 타고 나타났는데, 장군과 같은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또 갑옷 차림에 무기를 든 40여 명이 뒤를 따라와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죽엽군이라 불리는 군대들의 정체가 알 수 없지만 댓잎귀고리를 단 갑옷 차림과 준마를 탄 40여명이란 정보를 알 수 있다. 김유신 공의 무덤, 미추왕과 관련된 정체가 알 수 없는 기마병임엔 틀림이 없다. 김유신도 김해 김씨로서 김일제의 후손들이다. 또한 훈족(흉노족)계통의 가야 족들이다. 김일제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소호김천씨의 후예들이다. 중국 고사에 나오는 태호복희씨와 관련있는 인물이다.

 

계림14호분에 누워 있는 2사람의 귀고리에 주목하자, 가는 여기 묻힌 두 사람은 모두 가는고리 귀걸이를 달았고(삼국유사 기록의 '댓잎 귀고리'라 아닐까) 있어 둘 다 가는 고리 귀걸이와  큰 칼을 옆에찬 무사였다. 옆에금실과 은실로 입사한 말갖춤(마구)과 비단 날개로 장식한 화려한 화살통도 함께 묻혀 있어 이 황금 보검의 주인은 신라 최고의 귀족 계급에 속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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