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련 글들/한국사관련 글들

[스크랩]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 했다<3>

monocrop 2010. 3. 28. 13:02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 했다<3>

신라 왕도는 변산반도 부안으로 밝혀졌다

 

 

◈ 신라 왕도는 변산반도 부안으로 밝혀졌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신라 천년 왕도로 인식된 경상북도 경주(慶州)의 부산성(富山城), 주사암(朱砂巖), 원효굴은 거짓이고, 전라북도 변산반도(卞山半島)의 부산성(주류성,우진산성(禹陣山城)이 신라 천년의 왕도로 밝혀졌습니다. 먼저 조국을 배신하고 죽을때까지 일본왕에게 충성했던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만행을 깨닫지 못하면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시대 역사를 올바로 납득 할 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뒤틀린 현행 국사교과서의 실상부터 관찰해 봅시다.  

◈ 기자조선(箕子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 
 우리나라 고조선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이 있다. 연(燕)나라 사람 위만은 (1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따라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등국사 36쪽 도움글] 

➤ 철저한 패배의식의 망국적 치욕의 식민지국사입니다.
현행 국사를 살펴보면 고조선의 단군왕검은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다스린 부족장이며, 또한 단군에 대한 역사적 행적은 전연 없으며, 고조선 역사는 오래 되었다 뿐입니다. 더구나 곰의 아들이 단군이기 때문에 단군은 국조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류문명은 기원전 3,500년 전부터 발달했으나 우리나라는 기원전 4세기(400년)경에 철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국가가 성립되었다.특히 고조선은 요서지방을 경계로 하여 기원전 3세기경에 부왕, 준왕이 등장하여 연나라와 대립 할 만큼 강성하였다. 

그 후 연나라에서 도망쳐온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평양성)에 쳐들어와 고조선 변한의 준왕을 몰아내고 BC 194년 스스로 조선왕이 되었다. 또한 계유(BC 108년)에 漢(한)의 劉撤(유철)이 수륙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여 왕검성(평양)이 함락되어 위만의 손자 右渠(우거)를 멸망시키고 한무제(漢武帝)는 북한지역에 한4군을 설치하고, 고조선을 식민지로 다스리고 조공을 바쳤다. 라고 고조선의 역사를 요약 할 수 있습니다. 일제와 이병도의 참으로 기막힌 작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     © 박병역 칼럼니스트
즉 우리나라 정통역사의 기자성군(箕子聖君)은, 8조금지법을 제정하여 대문을 닫지 않아도 도적들이 없었고, 백성들에게 양잠기술을 가르쳐 비단옷을 입게 하였습니다. 거룩하신 기자성군(箕子聖君)은 국사에서 삭제하고. 연(燕)나라에서 도망쳐 조선으로 망명해 온 후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와 “고조선 변한의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조선왕이 된 날강도 같은 위만을 우리나라 조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을 철저히 비하시키고, 식민지역사로 구성된 우리역사를 그대로 교육하고 있으니 도대체 우리 민족은 제정신이 있는 민족인가? 얼빠진 민족인가?


     이병도는 ➤ 기자 성군(聖君)의 역사는 말살하고,
     왕권을 탈취한 위만 도적을 우리 조상으로 삼았다.

현행 국사의 고조선 역대 제왕을 살펴보면 제1대 단군왕검(BC 2333)의 2천여년 역사는 공백이고, 제2대 준왕은 제3대 위만에게 패하여 BC 194년 멸망합니다.  즉 고조선의 역사 주인공은 단군(檀君)➜준왕(準王)➜ 위만(衛滿) 세 사람 뿐입니다.

단군왕검의 고조선은 BC 2333년부터 진한, 마한, 변한의 삼한(三韓)이 건국되었으나 삼한 중 변한(弁韓)의 준(準)왕이 멸망한 역사부터 기술하여 한나라의 식민지 역사부터 청년학도들이 배우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한 민족의 국사입니다.

즉 고조선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게 된 위만은 자신의 세력이 커지자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한(漢)의 군사가 쳐들어오려고 하니 기준 왕을 보호할 수 있게 해달라고 거짓 보고를 올리고 B.C 194년 준왕의 왕도 왕검성(王儉城)에 쳐들어가서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현재 대한민국 땅을 다스렸던 고조선의 箕子(기자) 성군(聖君)이 계승한 무려 929년의 역년은 말살하고, 기자(箕子)의 후손 준왕(準王)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배반하고, 조선의 왕위를 찬탈했던 배은망덕한 날강도 위만을 고조선을 계승한 우리나라 조상으로 삼았습니다. 즉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조국이 일찍 멸망해야 자손만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도적 위만을 우리조상으로 삼아 우리나라 정통 역사의 맥을 끊어 버렸습니다.  

또한 이병도는 [삼국의 성립]에서  삼국 중 제일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다. 라고 했습니다. 현행국사에서 신라는 BC 57, 고구려는 BC 37, 백제는 BC 18년, 라고 분명히 표기돼 있으나 어찌하여 고구려가 제일 먼저 국가체제를 정비했단 말인가? 우리나라는  1세기 후반 고구려 태조왕(서기 145년)부터 왕국이고,  백제는 8대 고이왕(서기 234~285)부터 왕국이 시작됩니다. 가야는 시조 수로왕(서기42)부터 10대 구해왕과 마지막 말왕(532년)의 역사는 처음부터 삭제했습니다. 

 신라는 박,석,김 3성의 여러 세력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나라였기 때문에 신라는 시조부터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국가적 통합이 비교적 늦은 17대 내물왕(서기 356~401)부터 왕국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고조선 삼한 중에 [진한과 마한]이 멸망에 이르자 신라의 박혁거세 성인(聖人)은 진한의 전통적 제례의례 문화의 천부소도(天符小都:천제단(天際壇:원구단)를 설치하고, 하느님에게 제천의례(祭天儀禮)를 행사했습니다. 

또 신라의 혁거세왕은 달구(達丘:대구)에 조시(朝市)를 설치하고, 율포(栗浦=蔚州(울주)에 해시(海市:해물 시장)를 열어, 육해 교역의 제도를 수립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건국 년대가 제일 빠르고 특히 성인(聖人)이 건국한 신라는 그 어느 나라보다 황금문화를 꽃피웠던 군자국을 이 처럼 철저히 비하(卑下)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7천만 국민을 우롱하는 기만적 작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지금부터 일제와 이병도의 만행을 살펴보시고,  우리나라 ➤ 정통 역사의 맥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 기자조선과 기준왕의 마한 영토
▲     © 박병역 칼럼니스트
중조선 제 1세 太祖文聖大王(태조문성대왕) 箕子(기자)부터 41세 箕準(기준)까지 무릇 929년을 역년하고, BC 194년 위만에게 패한 기준왕은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배를타고 전라남도 해남으로 들어가 익산 금마(金馬)에 도읍을 정하고 마한왕(馬韓王)이 되었다. 제1세 마한왕 箕準(기준)부터 9세 계왕(稽王-B.C 32~B.C 17年)까지 211년을 역년하고 백제의 온조왕에게 멸망하였다. 즉 箕子(기자)와 그의 후손 箕準(기준)왕은 현재 대한민국 영토를 다스린 우리역사의 정통맥입니다. 
 

◈ 고조선 후 3한시대

 [1]. 기준(箕準) 마한(馬韓) 건국
현행 국사는 위만에게 패한 준왕이 해남(海南)으로 들어가 바다에 빠져 죽은 것으로 기술돼 있습니다. 그러나 마한은 기준 왕부터 제 9세 계왕까지 무려 211년을 존속한 마한 세계(馬韓 世系)가 뚜렷이 전하며, 한반도 전체를 통치했습니다. 소위 마한 54개국과 진한, 변한의 각 12개국의 78개국은 모두 다 기준왕의 나라입니다. 

➤ 기준(箕準)왕은 平壤(평양)에서 27년 재위하고 B.C 194년 위만(衛滿)에게 왕험성(관미성)을 빼앗긴 후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전라남도 海南(해남)에 들어가 금마(金馬)에 도읍을 세우고 마한(馬韓)을 건국한 후 그해 돌아가셨다. 

마한의 제 8세 元王(원왕)의 諱(휘)는 勳(훈)이고 계해(B.C 58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는 26년이다. 마한의 8세 원왕(元王)과 9세 계왕(稽王)은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으나 후손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의 鮮于氏(선우씨)는 黃龍國(황룡국)에서 들어왔고 또 한 사람은 韓氏(한씨)라 칭하고 한 사람은 奇氏(기씨)라 칭했다. 수유족(須臾族)은 원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다.

마한왕의 후손 중 일부는 수유족(須臾族:조선왕 기자족)을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다 하여 성을 선우씨(鮮于氏)로 하였다. 조선의 변한왕 기준(箕準)이 마한(馬韓) 지역의 금현성(錦峴城:전북 익산)에 도읍을 정하고 한왕(韓王:마한왕)이라 칭하여 성을 한씨(韓氏)라고 불렀다. 기자족(箕子族)은 원래 수유족(須臾族)이라 칭하며 箕子(기자)의 성은 기씨(奇氏)이며 箕(기)와 奇(기)는 같이 쓰인다. 9세 稽王(계왕)의 휘는 貞(정)이다. 기준왕이 3한(한국)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정통적 왕이다.


◆ 기준왕이 건국한 마한(馬韓)의 세계(世系)

1世 武康王(一云 哀王) 諱準 丁未(B.C 194年)
移都馬韓其年薨哀王己入於都平壤 四十一世 則馬韓王位八世.
2世 康王 諱卓 惠帝二年 戊申(B.C 193年)立 在位 四年 --
3世 安王 諱龕 惠帝六年 壬子(B.C 190年)立 在位 三十二年
4世 惠王 諱寔 文帝後元七年 甲申(B.C 157年)立 在位 十三年
5世 明王 諱武 景帝十三年 丁酉(B.C 144年)立 在位 三十一年
6世 孝王 諱亨 武帝二十八年 戊辰(B.C 113年)立 在位 四十年
7세 襄王 諱燮 宣帝本始元年 戊申(B.C 73年)立 在位 十五年
8세 元王 諱勳 宣帝神爵四年 癸亥(B.C 58年)立 在位 二十六年
9世 稽王 諱貞 成帝建始元年 己丑(B.C 32年)立 在位 一十五年(B.C 17年)

➤ 마한 1세 무강왕(애왕) 기준(箕準)왕은 平壤(평양)에서 27년 재위하고 B.C 194년 위만(衛滿)에게 왕험성(관미성)을 빼앗긴 후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전라남도 海南(해남)에 들어가 금마(金馬)에 도읍을 세우고 마한을 건국한 후 그해 돌아가셨다. 마한은 1世 武康王(무강왕:기준)부터 9세 계왕(稽王)까지 무릇 211년을 계승했다. 한편 북부여 천제 해모수 왕은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은 유화
(柳花:사소(娑蘇)이며, 동신성모(東神聖母),혹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를 아내로 맞이하여,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과 고구려 시조 고주몽(추모왕)을 낳았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은 고조선의 삼한 유민(遊民)들의 추대로 甲子(BC 57년:기준왕이 건국한 마한 원왕 22년)에 전라북도 변산반도(卞山半島)의 부산성(변산,주류성),우진산성(禹陣山城)에 도읍지로 정하고, 금성(金城)이라 칭했다. 

그리고 B.C 37년 고주몽(추모왕)은 갑신(B.C 37년)년에 졸본천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또한 고구려 시조 고주몽(동명성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B.C 17년에 왕위에 올라 기준왕의 마한 땅 錦峴城(금현성:부여 금성)이 백제 온조왕에게 공격을 받아 마한의 9세 稽王(계왕)이 항복하므로서 결국 목지국(마한)은 멸망하고 말았다.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된 결정적 증서

[1], 지리산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의 전설
◈지리산(智異山)은 방장산(方丈山) 또는 '두류산(頭流山)' 이라고도 하며, 구역상으로 구례(求禮), 남원(南原), 산청(山淸), 하동(河東), 함양군(咸陽郡) 등 3개 道 5개 郡에 걸쳐있는 큰 산이다. 옛날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왕의 어머니인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가 거쳐하는 영산(靈山)으로 전한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민족적 숭앙을 받아 온 민족 신앙의 영지(靈地)였다. 지리산의 영봉인 천왕봉에는 신라의 시조 혁거세 왕을 낳은 선도산 성모를 추모하는 성모사(聖母寺) 사당과 성모석상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선도산 성모를 모시는 남악사에 천제(天際)를 올리는 노고단(老姑壇)이 있다.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는 풍농(豐農)과 자식을 점지해 주는 삼신(三神)이기 때문에 "삼신 할매"라고 불렀다.

[2]. 혁거세왕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삼국유사 제5권 감통 제 7]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선도산 신모(神母)는 본래 현 중국 땅(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궁전에 계셨던 여인(하백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이다. 일찍이 신선 술법을 깨우쳐 해동(海東:신라)에 들어와 오래 머물며 돌아가지 않았다. 그 성모(聖母)가 시초로 진한(신라)의 선도산에 도착하여 성자(聖子) 혁거세를 낳아 동국의 시조 임금이 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본문에서] 史臣(사신) 김부식은 정화년(政和年)에 사신으로 송(宋)나라에 들어갔는데 대궐의 우신관(佑神館)에 一堂(한당)을 설치하고 여선상(女仙像)을 모셔 놓은 곳을 보았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輔)가 말하기를 이 상은 귀국의 신(神)인데 김부식 공은 알고 있습니까? 이윽고 말하기를 고대 중국제실지녀(中國帝室之女(북부여 황제의 궁전에 계셨던 여인)이 바다 건너 진한(辰韓:신라)에서 아들(혁거세)을 낳아 해동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늘 선도산(仙桃山:지리산)에 계셨는데 그분의 상(像)입니다.

[3]. 혁거세왕과 고주몽의 아버지는 해모수이다
북부여의 천제 해모수(BC 239-195년)는 그의 나이 23세에 천제의 명에 따라 세상에 내려오시니 이때 진한의 단군 고열가 재위 57년 임술(BC 239년) 4월 8일 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와 5룡거(五龍車)를 타고 홀승골성(訖升骨城: 의주(醫州)에 있음)에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북부여라 칭하고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북부여 해모수는 청하(靑河)에서 나와 웅심산(蘭邊(난변:길림성 서란)에서 즐겁게 놀던 하백(河伯)의 장녀 유화(柳花)를 만나 궁전으로 유인하여 밀취하고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을 낳았습니다.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 西述聖母(서술성모)가 혁거세왕을 낳았기 때문에 中華人(중화인)들이 선도산 성모를 찬양했다. 또 성모(聖母)가 동국의 선도산으로 가서 신라시조 혁거세 성인(聖人)을 낳았기 때문에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를 찬양했다. 또한 상서스러운 게룡(鷄龍)이 나타나서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것도 西述聖母(서술성모)님께서 인간 세상에서 몸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삼국사기 고구려의 시조편]에서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아 북 부여를 떠나 동부여(가섭원)를 개국하게 된다. 즉 북부여 해모수 황제 궁실의 여인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이며 또한 유화 부인이다. 따라서 고주몽과 박혁거세왕의 어머니는 같은 사람이며, 형제간이 된다.

[4],선도산성모는 유화(柳花),또한 사소(娑蘇)이다.
[고구려 본기 제 6] 사로(斯盧)의 시조 혁거세왕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의 아들이다. 옛날 북부여 해모수 황제 궁실의 娑蘇(사소)라는 여인이 남편 없이 아이를 잉태 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자 눈수(嫩水:만주 흑룡강성)에서 도망하여 東沃沮(동옥저)에 이르고 또 배를 타고 남행하여 진한의 奈乙村(내을촌)에 당도 했을 때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장 소벌도리(蘇伐都利)최씨)가 그 소문을 듣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는데 나이 13세가 되자 다 숙성하여 聖德(성덕)을 두루 갖추었기에 진한의 6부에서 居世干(거세간,居瑟邯)으로 추대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후략]

[삼국사기] 서기전 69년 3월 초하루에 신라 6부 촌장들이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덕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해야 옳지 않겠는가." 이에 남산에 올라 바라보니 양산(楊山:교룡성) 밑에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번쩍이는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아 비치고 있었다. 흰말 한 마리가 땅에 굻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기에 찾아가 보았더니 자줏빛(혹 푸른 빛) 알 한 개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고 알을 깨고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그 아이를 동천(東泉;용천(龍泉)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췄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그 아이를 혁거세라 이름 하였다.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장 소벌도리(蘇伐都利)최씨)가 그 소문을 듣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는데 나이 13세가 되자 다 숙성하여 聖德(성덕)을 두루 갖추었기에 진한의 6부에서 居世干(거세간:거슬한(居瑟邯)으로 추대하였다.

신라의 금성은 우금성(禹金城)으로 밝혀졌다

마한의 6세 효왕(孝王) 28년(B,C 86년) 그의 부하인 우(禹)장군으로 하여금 전라북도 부안군 개암동 변산(卞山,부산성, 주류성, 금성)에 왕궁을 짓게하고 동쪽은 묘암궁(妙巖宮), 서쪽은 개암궁(開巖宮)이라 하고 우금성(禹金城)이라 칭했다.  

마한 제8세 원왕(20년(BC39년)이 죽고 부장이었던 마연(馬延)이 왕위를 계승하여 30년 동안 백성을 태평하게 잘 다스렸는데 개수험(蓋守驗)이라는 못된 신하가 난을 일으켜 마연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자 백성들이 일어나 개수험의 목을 베고 죽였다. 이 지방 사람들이 마연의 선정을 잊지 못하여 성 이름을 마연성(馬延城)이라 불렀다. 마한 9世 계왕(稽王 B.C 32)이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15년(B.C 17)에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는 우금성(禹金城)을 금성(金城)이라 칭했던 것이다.

◈ 신라 왕도는 변산반도 부안으로 밝혀졌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 변산반도 우금산의 여러 칭호 
 변산(弁山:卞山,邊山),우진산성(禹陣山城),마연성(馬延城),위금성(位金城),우금성(禹金城), 하지산(下枝山), 주사산성(朱砂山城), 능가산(楞伽山),영주산(瀛洲山), 봉래산(蓬萊山), 성황산(聖隍山), 상소산(上蘇山), 이산(伊山 혹은 개비산(皆比山), 독산성(獨山城), 부산성(富山城), 주류성(周留城),등으로 칭했다.

변산반도는 부안군의 5개 면(보안면, 상서면, 진서면, 변산면, 하서면)이며, 서해 바다쪽으로 돌출된 반도이다. 변산(卞山)은 해안의 길이가 98km, 전체면적은 157평방 킬로미터 이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반도공원으로, 1988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변산의 '외변산은 기상봉과 쌍선봉, 신선대, 관음봉 등이 둘러 싸여있고, 내변산에는 봉래구곡, 직소폭포,낙조대,월명암 등의 명승지가 있고, 유서 깊은 내소사와 개암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상기 변산(卞山,邊山)의 여러 명칭과 내소사(來蘇寺), 개암사(開巖寺:주암사,주사암)의 유래(由來)는 신라천년 경도(京都) 판별에 결정적 고증이 된다.

[1] 변산반도(邊山半島)의 유래
변산의 본래 이름은 고조선 3한 중 변한(弁韓:卞韓)의 제41대 기준왕(箕準王)의 영토이기 때문에 변산(卞山)이라 칭했으나 고대사를 말살한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변(卞)자를 고쳐 변산(邊山)이라 했다.당연히 변산반도(卞山半島)로 개명해야 된다.  

[2], 개암사(開巖寺)의 유래(由來)
고조선 삼한말기에 위만에게 패한 준왕은 전라북도 금마(金馬)에 도읍을 정하고 그해 돌아가시었다. 6세 마한의 효왕(孝王) 28년(B,C 86년)에 전라북도 부안군 개암동으로 와서 그의 부하인 우(禹), 진(陣) 두 장군으로 하여금 성을 쌓아 우진산성(禹陣山城)이라 칭했다. 즉 본래 마한의 왕궁이었으나 후세에 동쪽 묘암사(妙岩寺),서쪽은 개암사(開岩寺)가 되었다. ➤ 변산(卞山:우진산)의 개암사(開岩寺)는 사소성모(娑蘇聖母) 위패와 영정을 모신 영묘사(靈廟寺),영산전(靈山殿)이 있다.

▲    전북 부안군 상서면 능가산(부산성) 개암사[開巖寺]   © 박병역 칼럼니스트
 
 [3],내소사(來蘇寺)의 유래

내소사(來蘇寺)는 진서면 석포리 능가산(관음봉, 424m) 가선봉 기슭에 있다. 고대는 소래사(蘇來寺)라 칭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변산을 ‘능가산이라 칭하며, 영주산, 봉래산으로도 불린다’라고 기록 돼 있다. 내소사(來蘇寺)는 633년에 [신라의] 혜구두타(惠丘頭陀)라는 스님이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는데 일제와 식민사학자 이병도에 의해 이름을 내소사(來蘇寺)로 바꾸었던 것이다. 

내소사(來蘇寺)는 고려 성종 17년(1486)에 간행된동국여지승람과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일기(南行日記)와 고려 인종 때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실린 정지상(鄭知常)의 시(詩) ‘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 등의 기록이 있다.  

혹자는 내소사(來蘇寺)의 명칭을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절에 들러 시주했기 때문에 소래사가 되었다” 또한 소정방이 변산에서 김유신과 만났기 때문에 내소사라고 했다. 등으로 문화재위원들의 얼토 당토 않는 엉터리 유래를 적고 있다. 즉 본래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된 역사를 깨닫지 못한 문화재위원들의 역사무지 결과로 전라도에서 출토된 각종 문화재와 사찰의 유래는 엉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    © 박병역 칼럼니스트

➤ 내소사:소래사(蘇來寺) 유래를 찾았다.

내소사의 유래는 즉 정지상(鄭知常)의 시 ‘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내자개소생(來者皆蘇生)’에서 그 유래를 분명히 찾을 수 있다. 또한 지금의 부안읍 부산성(富山城)을 고대는 봉래산(蓬萊山),영주산(瀛洲山) 성황산(聖隍山),상소산(上蘇山), 개비산(皆比山,이산(伊山) 등으로 칭했다.  

내소사라는 이름의 유래는 옛날 북부여 해모수 황제 궁실의 娑蘇(사소)라는 여인이 남편 없이 아이를 잉태 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자 눈수(嫩水:흑룡강성)에서 도피하여 東沃沮(동옥저)에 이르고 또 배를 타고 남행하여 진한의 奈乙村(내을촌)에 당도 했을 때 소벌도리(蘇伐都利)가 그 소문을 듣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다. 한편 자주빛 알에서 태어난 아이를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장 소벌도리(蘇伐都利)가 그 소문을 듣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다.  

  즉 북부여 해모수 황제 궁실에 계셨던 娑蘇(사소) 성모(聖母)가 동국의 선도산으로 내려오시어 신라시조 혁거세 성인(聖人)을 낳은데서 유래(由來)하여 ‘내자개소생(來者皆蘇生)이며 곧 소래사(蘇來寺)라 칭했던 것이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중앙에 석가불좌상과 좌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봉안돼 있다. 그리고 석가불좌상 뒤 벽에 3점의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백의관음보살상’이 있다. 대개 불상은 석가불로 보살상은 관음상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큰 잘못이라 사료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성인(聖人)은 모두 다 불(佛: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소성모(娑蘇聖母)가 내려오신 소래사에 어찌 관세음보상을 모셨겠는가? 따라서 이 벽화 전설에 황금빛 날개를 가진 관음조가 그렸다는 백의관음보살상은 선도산의 사소성모(娑蘇聖母)라 사료된다. 내소사 전설은 청민선사가 대웅보전을 재건코자 목수를 불렀는데 3년동안 말없이 나무만 깍는 목수를 탐탁찮게 여긴 사미승이 나무토막을 하나 숨켰다고 한다. 뒤늦게 청민(淸旻)선사는 간곡히 부탁했으나목수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한 것으로 인식하고 나무토막을 뺀 채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법당 오른쪽 윗부분 목침이 있어야 할 자리는 빈 채로 있다. 이 전설과 함께 사찰 내 단청에 관한 전설도 내려온다.

▲   소래사(蘇來寺) 사소성모상(娑蘇聖母像)    © 박병역 칼럼니스트

내소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것을 조선 인조11년(1633)에 청민(淸旻)선사가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중건하고, 고종 2년(1865)에 관해선사(觀海禪師)가 중수, 만허선사(萬虛禪師)가 보수했다. 그 뒤 1983년 혜산우암선사(慧山愚岩禪師)가 중창하여 현재의 내소사에 딸린 암자에는 청련암(淸蓮庵), 지장암(地藏庵)이 산의 가파른 면에 마치 불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붓다 신문 인용]

경주 부산성(富山城)의 여러 설화
신라 천년 서라벌의 경도(京都) 경주시 건천읍 서남쪽 오봉산(五峯山)허리에 부산성이 있다. 신라 왕궁의 서남쪽 부산성(富山城)은 많은 전설이 전래하고 있습니다.

(1), 부산성은 고조선 삼한말기에 위만에게 패한 준왕은 전라북도 금마(金馬)에 도읍을 정하고 6세 마한의 효왕(孝王) 28년(B,C 86년)에 전라북도 변산반도 개암동으로 와서 우진산성(禹陣山城)을 쌓고부터 개암사(開岩寺)를 창건했다.
(2), 부산성에는 화랑 죽지랑과 득오곡(得烏谷)의 전설이 전해온다.
(3).주사암은 신라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고, 또한 원효대사는 높은 산 험한 바위는 지혜로운 사람이 머물 곳이며, 푸른 솔 깊은 골짜기는 수행하는 사람이 깃들만한 곳이다.라고 원효대사가 개암사에서 저술한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의 한 대목이다. 주사암 영산정에는 석가모니불과 16나한을 모시고 있으며 늙은 중과 신라 궁녀에 얽힌 전설이 있다. 

(4).영묘사 옥문지(玉門池)는 선덕여왕 지기삼사설화가 전해진다.
(5)부산성(富山城) 지맥석(持麥石:반석(盤石)은 김유신 장군의 전설이 있다.
(6) 부산성(주류성) 정상부인 울금바위에는 백제부흥군을 지휘했던 복신굴과 베틀굴 그리고 원효굴의 세 개굴이 있다. 그리고 김유신 공이 17세의 화랑도 시절 의분에 넘쳐 무도한 적국의 화란(禍亂)을 없애고자 원효굴에서 기도 중에 난승(難勝)으로부터 방술을 전수받은 설화 등이 전한다. 상기 [1~6]의 전설에 합당해야만 경상북도 경주가 신라의 천년 왕도가 될 수 있는 요건입니다.

➤ 여근곡(女根谷)과 원효굴은
신라왕도의 진위판별에 결정적 고증이 된다.

선덕여왕 원년(632)에 세운 영묘사(靈廟寺:개암사) 곁의 옥문지(玉門池)에서 한겨울에 수많은 뚜꺼비와 개구리가 떼를 지어 사나흘 동안 울어댔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과 필탄등에게 명하여 정예 병사 2,000명을 이끌고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물어 봐라 그곳에 틀림없이 적병이 있을 테니, 습격하여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각각 1,000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서 물었더니 과연 부산(富山)아래 여근곡에 백제 장군 우소(于召)와 군사 500명이 숨어 있었다. 그들을 포위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또 후원병 1,200여 명이 왔지만 역시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다 죽였다. 이 옥문지(玉門池)는 전북 변산의 부안 개암사(영묘사)로 밝혀졌다.

 

▲ 부안 개암사의 진짜 원효굴과 옥문지(玉門池) 
 



경주시 가짜 여근곡(女根谷)

전시장의 여근곡 사진  [경주 가짜 여근곡이 진짜처럼 보인다] 
▲   경주의 가짜 오봉산, 주사산, 주사암, 여근곡.   © 박병역 칼럼니스트
 
 

원효굴은 부안 개암사(開巖寺)로 밝혀졌다

 

 

경주, 부안의 원효굴은 어느 굴이 진짜인가?
신라 천년 왕도의 부산성(富山城)은 경주와 부안 두 지역에 있다. 부산성(富山城)의 주사암(朱砂庵)은 경주인가? 부안인가? 특히 부산성(富山城) 주사암(朱砂庵)의 원효굴은 경주, 부안, 어느굴이 진짜인가?의 판별에 따라서 신라왕도 경주의 진위(眞僞) 판별에 결정적 고증이 된다. 부산성(富山城)의 유래로서 신라 천년 왕도 경주는 거짓으로 명확히 판명되었으며, 한편 신라천년 왕도는 전라북도 변산반도의 부안으로 명백히 입증했습니다.

필자 박병역은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는 고증적 자료를 제시하여, 신라천년의 왕도는 경주가 아니고, 전라북도 변산반도의 부안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필자의 주장에 공감 할 수 없고, 부정하는 독자가 있다면 신라 천년의 왕도 경주에 대한 고증적 자료로 이의(異意)를 제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필자는 전라도지역 역사탐방과 역사 강연 등의 일정으로 당분간 연재를 마칩니다. 더 명확한 고증적 입증은 필자 truelook@hanmail.net 의 E-mail로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의 책자를 구입하시어 역사적 진실을 확인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정신문화선양회 / 인류시조성전건립회 / 琇巖 朴炳譯(박병역)/올림 


▲    전라북도 부안의 능가산 개암사   © 박병역 칼럼니스트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