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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4]

monocrop 2010. 3. 28. 13:03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4]

경주, 장흥, 어느 천관사가 진짜인가요?

 

 

 

➤ 경주, 장흥, 어느 천관사가 진짜인가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오릉 동쪽에 天官寺(천관사)가 소재하고, 전라남도의 장흥군은 관산읍에 소재한 天官寺(천관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경주시와 장흥군은 서로 천관사의 김유신과 천관녀(天官女) 전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천관사의 위치는 신라 건국지의 판별에 결정적 고증입니다. 현명하신 독자 여러분께서 경주, 장흥의 두 곳 天官寺(천관사) 진위(眞僞) 를 판별해 주시기를 고대합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1년 11월 13일 천관사지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 탑터와 문터, 석등터 각 1개소와 건물터 5개, 담벼락과 축대, 석조유구 2개소, 우물 3개 등 유구와 금동불상 등 천관사와 관련된 중요 유물들이 출토됐다고 밝혔다.

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천관사의 위치와 관련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오릉 동쪽에 있다(在五陵東)’는 기록이 전부였다”며 “이번에 출토된 유물 가운데 ‘天’자가 새겨진 기와는 천관사(天官寺) 위치규명의 결정적 증거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천관사(天官寺)의 앞글자로 약호화된 명문기와는 실제 사찰 건물지붕을 잇는데 사용된 것으로 지금까지 발굴된 사례가 없는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이밖에도 천관사지에서는 금동불상 1구를 포함해 금속제 유물 9점, 기와류 126점, 기마인물형 토우 등 토·자기류 100점 등 총 280점이 출토됐다. 그리고 천관사삼층석탑(보물795호) 석등(전남유형문화재제134호)을 보호하고 있다.  

경주시 관계자는 "경주남산 정비사업은 2052년까지 총사업비 1천219억4천여만원이 투입되며 곳곳에 흩어진 문화유적을 복원, 정비해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느끼는 탐방코스로 개발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참조]


김유신과 천관녀(天官女)의 전설 [삼국사기 권 41 김유신 상]

신라 진평왕(제26대왕(579∼632). 때 소년시절의 김유신은 기녀(妓女). 천관녀(天官女)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이를 알아차린 김유신의 어머니가 유신에게 말하기를 “ 늙은 나는 오직 네가 장성하여 가문을 빛내주기만 바라고 있는데 너는 밤낮으로 천한 어린애들과 어울려 음방(婬房 창녀집)과 주사(酒肆 술파는집)에 출입하고 있느냐?.” 하고 울면서 책망하자, 크게 뉘우친 김유신은 다시는 기방 출입을 하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서약하고 다시는 그 문 앞을 지나지 않았다.

하루는 김유신이 술에 취하여 돌아오는데 말이 옛길을 따라 천관녀(天官女)의 집으로 갔다. 천관은 한편 원망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반가이 맞이하였다. 그러나 천관을 보고 놀라 술이 깬 김유신은 타고 온 말의 목을 베고 안장도 버린 채 돌아가 버렸다. 이 광경을 본 천관은 뜻 밖에 이와 같은 변을 만난지라 놀라 까무러쳤다가 얼마 후에야 정신을 차린 뒤 말없이 탄식하다가 유신을 원망(怨詞)하는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 노래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뒤에 김유신(金庾信)이 그녀의 옛 집터에 절을 짓고 그의 이름을 따서 天官寺(천관사)라고 하였다. 이 절은 지금 경주 오릉(五陵)의 동쪽에 있었다고 한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신라 선덕왕 13년(644) 김유신은 백제의 7성을 정벌하고 이듬해 정월 돌아오는데, 백제 대군이 또 매리포성(賣利浦城)을 공격한다는 급보를 받고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마침 장군의 집 앞을 지나가는데 가족들이 문밖에 나와 있었으나 장군은 집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참 가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병사를 시켜 집의 재매정(財買井)에 가서 물을 떠오라고 했다. 그 물을 마시고 “내 집물맛은 그대로구나” 하며 그대로 말을 몰았다.

이것을 본 부하들이 “장군이 저럴진대 어찌 우리들이 이별을 슬퍼하겠는가?” 하며 사기충천하여 전쟁에서 대승했다고 한다. 조선 고종 9년에(1872년)세웠다는 유허비가 재매정(財買井) 서쪽에 있다. 사적 제246호로 지정됐다.

      [유허비는 경주를 신라왕도로 입증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세웠던 것이다]  

 경주 천관사는 평지에 소재한 우리나라의 유일한 사적지이다

▲    경주의 천관사(天官寺) 사적지 발굴 현장  © 박병역 칼럼니스트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천관산(天官山)
▲    전라남도 장흥군 천관산(天官山)   © 박병역 칼럼니스트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 경계에 위치한 천관산(天官山)은 1998년 10월 13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리산(智異山)·월출산(月出山)·내장산(內藏山)·내변산(內邊山)과 함께 호남지방의 5대 명산 가운데 하나이다. 대덕과 관산의 중앙에 해발 723m의 천관산은 옛날에는 지제산(支提山), 천풍산(天風山)이라 하였다.

원래 천관이란 말은 주옥(珠玉 寶石의 일종)으로 꾸민 면류관(冕旒冠)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면류관은 겉쪽은 검은 색이고 안쪽은 붉은 색이며 넓이는 8치, 길이는 1자 6치이다. 앞쪽은 둥글고 뒤쪽은 네모나게 되어 있다. 평천판(平天板)의 앞뒤에는 5채색으로 면류줄이 각각 9류이고 한 줄의 류에는 홍, 백, 창(蒼,푸른 색), 황, 흑의 옥구슬 9개가 연이어 꿰고 있다.

본래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쓴 관으로 옥비녀에 붉은 색 끈이 있고, 자주 색 끈은 턱밑에서 매고 남는 것은 아래로 드리운다. 평천판의 앞 뒤에 각각 7채색의 옥구슬이 달린 12류가 있으며, 색은 황, 적, 청, 백, 흑, 홍, 녹색이다. 또 지제(支提)란 말은 탑의 일종으로 이 산에 있는 돌들이 마치 지제탑(支提塔)과 같이 생겼기 때문에 이런 이름들이 붙여진 것이다.

불서(佛書)에 '지제산(支提山)은 천관 보살이 사는 산'이란 기록이 있는데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소년 시절에 사랑하는 천관녀(天官女)가 숨어 살았던 산이라고도 합니다. 김유신(金庾信)이 어머니의 충고를 따라 천관녀의 집으로 발길을 돌린 백마의 목을 쳐죽이고 오직 무예만을 익히는 데 전념한 뒤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는데, 이 때 김유신 장군에게 버림받은 천관녀는 암자를 짓고 김유신의 성공만을 빌었습니다. 통일에 공을 세우고 왕도로 돌아가던 김유신 장군은 천관녀의 소식을 듣고 암자를 찾아가서 천관녀에게 왕도로 돌아갈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천관녀(天官女)는 매정한 말로 김유신(金庾信)을 뿌리쳤다.

"소첩과 장군의 인연은 소첩이 기생이었을 때뿐이었습니다. 사실 소첩은 천관 보살이었는데 삼국통일의 큰 업적을 달성시킬 사람을 찾던 중 장군이 이 일을 해낼 사람임을 알고 장군의 소년 시절 때 장군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 기생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장군은 역시 큰 일을 이룬 사람이라 소첩과의 인연을 끊었으므로 소첩 역시 할 일을 모두 마친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혼자 경주로 가십시오."

그러나 김유신(金庾信)은 천관녀(天官女)를 데리고 가고 싶었다. "내가 삼국통일의 대업(大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너의 도움이 되었음을 알게 된 이상 이대로 인연을 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장군의 고집을 물리칠 수 없음을 알게 된 천관녀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홀연히 하늘에서 백마가 내려와 천관녀(天官女)를 태우고 동남쪽으로 사라졌다. 장군은 그녀를 놓칠세라 타고 온 말을 몰아 뒤쫓았으나 결국 천관산에 이르러 그녀를 잃어 버렸다. 이 때문에 천관산(天官山)에는 천관보살(天官菩薩)이 살고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농안리 천관사    © 박병역 칼럼니스트
▲     © 박병역 칼럼니스트

     
  천관산(天冠山)에 아육왕의 탑이 있다

 BC 833년 남천축국의 아육왕(아소카왕)이 천하에 8만4천개 탑을 세웠는데 우리나라는 전남 장흥군에 위치한 천관산과 강원도 금강산에 아직도 남아 있는데 그 탑은 영험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천관산은 정상부근에 솟아 있는 바위 모습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 같다하여 천관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     © 박병역 칼럼니스트

 석가세존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다

영취산(靈鷲山) 1075.6m (장수군 장수읍,  함양군 서상면)
전북 남원시 잔수군 영취산은 영산, 또는 취산이라 부르며 신령(靈), 독수리취(鷲)를 쓰고 있다. 영취산은 신라(사위국)의 왕사성(王舍城:金城)의 북동쪽에 있는 산으로서 석가세존이 이 영취산에서 법화경과 무량수경(無量壽經)을 설법했습니다.

석가세존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 하실 때 하늘에서 4색으로 그린 채화(綵花)를 내리시니, 가섭(迦葉)존자가 이 모습을 보고 빙긋이 웃으며 춤을 추었다고 하여 후세 승려들이 이를 모방하여 승무(僧舞)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     전남 여수시 상암동에 위치한 영취산(靈鷲山) © 박병역 칼럼니스트


➤ 신라는 김제군에 벽골제(碧骨堤)를 쌓았다.

제16대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21년(330년)에 처음으로 전라북도 김제군(金堤郡)의 벽골지에 벽골제(碧骨堤)를 쌓아 농사를 장려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은 삼국시대에는 백제가 전라도를 지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상기와 같이 신라 제16대 홀해 임금은 330년 처음으로 전라북도 김제군에 벽골제(碧骨堤)를 쌓아 농사를 장려했습니다. 그런데 이병도는 이는 필경 백제기에 실을 사실을 김부식이 잘못 이곳에 옮기어 놓은 것 같다. 라고 註釋(주석)했습니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전라도는 백제 영토가 된 기록이 없다

➤ 삼국사기로 살펴본 신라의 모산성(母山城:모악산(母岳山))
(1), 벌휴이사금·188년 2월에 백제가 [신라의 왕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母岳山):모산성(母山城남원시 아영면)을 공격해오므로 파진찬(4등급) 구도(仇道)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막게 하였다. 189년 7월 신라의 구도(仇道)는 구양(狗壤:충북 옥천)에서 싸워 이겨 백제 군사 500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2), 백제 초고왕 23년 2월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했다. (3), 484년 신라 소지왕 6년 7월 고구려가 북방 국경을 침범하자,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모산성 아래에서 격파했다. (4),602년 신라 진평왕 24년 백제가 천령군의 속현인 아막성(阿莫城)을 공격하여 신라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추項)이 전사했다.  

(5),백제 무왕 3년 8월 신라 아막산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여 병사들을 철수했다.

 

(6), 616년 신라 진평왕 38년 10월 백제가 모산성을 침공하였다. 백제 무왕 17년 10월 달솔(達率) 백기(백奇)를 시켜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7). 624년 신라 진평왕 46년 백제 무왕 25년 10월 백제가 신라 영토를 공격하여 앵잠 등 6성과 함성 등 함락되고, 신라 장군 눌최(訥催) 전사하였다.


아영성(阿英城)은 신라시조 혁거세 왕비 이름이다

➤ 모산성(母山城)은 남원시 아영면 성리, 천령군의 속현인 운봉현(雲峯縣)의 옛 이름이다. 운봉현은 본래 신라의 모산현(母山縣)이며 아영성(阿英城:혁거세 왕비 이름), 혹은 아막성(阿莫城)이라 하였는데, 신라 경덕왕이 운봉현으로 고쳤다,

아막성(阿莫城)은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에 있다. 함양군과 접경을 이루고 아영고원의 서쪽 능선과 봉화산(烽火山)에서 남쪽으로 뻗은 660m의 고지에 북쪽을 향하고 있는 성이다. 성의 서편은 장수군 번암면으로 남원에서 장수로 연결하는 요천강(蓼川江) 상류이며 동편은 약 400m 고지를 이루어 천연의 요새지를 이루고 있다.

모악산(母岳山)은 사방 백리가 넘는 평지에 가파르게 치솟은 '평지돌출산'이다 호남정맥(湖南正脈)을 이루는 해발 793m 국사봉을 머리로 이고 있는 형상의 모악산(母岳山)이다. 모악산의 '금산(金山)은 사금(砂金)이 많이 생산되어 금구면(金溝面), 금평(金坪), 김제(金提)로 불리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금산사(金山寺)가 있다.

 신라의 진표율사, 후백제의 견훤, 진묵대사 등이 전설이 있다. 금산사의 웅장한 미륵전은 3층으로 되어있고, 내부에는 층이 없는 한 통이며 동양최대의 실내입불인 미륵불을 봉안하고 있다. 신라 6촌 중의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이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     © 박병역 칼럼니스트
 
전북 김제의 모악산(母岳山)은 해발(793.5m)이며, 전북 김제시와 완주군과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정상에 올라서면 김제 만경평야와 완주군 구이면 구이 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전망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금산사대적광전(金山寺大寂光殿:보물 476)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석가여래와 아미타불, 왼쪽에 노사나불과 약사여래의 5불이 모셔져 있다. 


  이병도의 손자 이건무(문화재청장)도 전라북도 아막성을 신라영토로 인정했다.

아영산성(阿英山城), 모산성(母山城)
삼국시대 축조된 산성[신라 산성].
함양군과 접경을 이루는 아영공원의 서쪽에 있는 해발 919m의 봉화산에서 남쪽으로 다시 뻗어내려 해발 660m 봉우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운봉고원과 황산의 산줄기로 구획되어 있는 아영고원은 아막산, 모산성 등으로 불린 곳으로, 삼국시대에 신라 국경의 요새로서 신라와 가야(백제)를 잇는 팔량치를 지켰다. 602년(진평왕 24)에 백제가 아막성을 침공하자 귀산(貴山)과 추항을 보내어 백제군을 물리쳤으나 두 사람은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북변은 성벽이 완전히 남아 있으며 거의 직선으로 길이가 15m, 동변도 거의 직선으로 길이가 147m, 서변은 길이 126m, 남변은 곡선을 이루는데 길이가 208m에 이른다. 성북쪽에 수구와 북문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서쪽의 중앙에 서문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문터 수구 동편에는 지름 1.5m의 원형 석축의 우물터가 있고, 성안 곳곳에 삼국시대의 와편, 가야(백제)의 도자기편 등이 퇴적되어 있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문화재청장 이건무도
전라북도 아막성을 신라영토로 인정했다.
 [아래 주소 참조]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23,00380000,35&queryText=(`아막성`)<in>(z_title,z_content

▲     © 박병역 칼럼니스트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는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이  명확히 입증됐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초로 신라천년의 왕도는 경주가 아니고, 전라북도 부안으로 명확히 입증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경상북도 경주시의 천관산은 가짜이고 전라남도 장흥군 천관산(天官山)이 진짜로 확인 했을 것입니다.  

필자는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가 말살한 고조선 3한의 후 3한시대 기준왕(箕準王)의 역사를 복원하여 4국(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시대의 기원역사를 정립했습니다. 우리나라 정통사서의 삼국사기를 증서로 삼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제1~4편으로 명확히 입증되었습니다.  

만약에 현세 인터넷이 발달한 대명천지의 정보화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다면 우리역사를 말살, 왜곡, 변조한 일제의 만행은 영원히 감춰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밀은 영원히 감출 수 없고 역사적 진실이 밝혀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천리입니다. 

본 break news의 역사탐방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제1~4편]은 우리역사를 말살, 왜곡한 천인공노 할 일제와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만행이 밝혀졌습니다. 즉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만든 거짓 가짜 국사교육의 왜독에 중독되어 무려 62년 동안 참과 거짓의 역사도 분별하지 못하는 한국인의 고질적 병폐도 깨끗이 치유되는 해독제가 될 것이다.  

대한제국을 영원히 망칠 목적으로 편찬된 망국적 치욕의 현행 국사를 정통 역사로 믿고, 이병도를 추종하는 소위 강단사학자(먹통)들도 눈과 귀가 열리어 드디어 신라의 참 역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본 입증서는 근본적으로 뒤틀린 망국적 치욕의 현행 국사를 개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대한민국 백년대계를 위한 정통역사 정립의 지침서가 되리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정신문화선양회 / 인류시조성전건립회 / 琇巖 朴炳譯(박병역)/올림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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