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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화가들의 눈으로 본 1900년대 조선, 대한민국

monocrop 2009. 12. 17. 01:54

조선 말기, 개항이 되어 외국과 배가 왕래 할 수 있게 되자, 많은 여행가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왔다.

그중에는 화가들도 있었는데, 2명의 화가가 고종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인물의 표정을 만화처럼 그리는 새비지 렌더라는 화가였다.


랜더 다음으로 고종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귀화한 휴버트 보스이다.

 

보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그린 작품은, <서울풍경>, <고종황제 초상>, <순종 초상>, <민상호 초상>인데,

그 중 <순종 초상>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1904년 덕수궁 화재 때 불에 탔기 때문이다.

당시 화재로 <고종황제 초상>도 불에 탔지만, 보스가 초상화를 그릴 때 왕실의 허락을 받아

화가 소장용으로 한 점 더 그렸기 때문에 <고종황제 초상>은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이다.

위의 <민상호 초상>도 민씨 가문 소장작이 아니라 보스의 유족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이기 때문에,

이 작품도 2점을 그렸다고 추정할 수 있다.

 


<문신 민상호' - 1898>Hubert Vos, 캔버스에 유채 1898

 

민상호는 구한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민치덕의 아들이다.

보스가 민상호를 특별히 그리게 된 동기는 민상호가 한국인의 가장 순수한 형이라고 생각하였고,

그의 매력과 높은 지식 수준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연초록의 도포를 입은 근엄하고 세련된 민상호의

모습을 보스는 사실적인 필치로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초상화는 보는 순간 표정이 자연스럽고, 당시 권세가로 갖고 있던 위엄이 잘 나타났다는 느낌이 든다.

머리에 쓴 정자관과 은은한 색의 한복 그리고 가슴에 두른 띠 등 어느 한 부분 소홀하지 않고 정성을 담아 그렸다.

그래서 민상호에게서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엄격함이, 정성을 다한 붓질에서는 치열한 작가정신이 느껴진다.

 

이 초상화에는 한글로 두 사람 이름이 쓰여있는 점이 특이한데, 보스가 직접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스는 1905년 12월 17일 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인터뷰에서, <서태후 초상>에 있는 한문을

자신이 직접 썼다고 밝혔다. 섬세하고 꼼꼼하게 붓질을 하는 초상화가이기 때문에

어려운 한문도 쓸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한글도 직접 썼을 가능성이 많다.

 

휴버트 보스 <자화상> 유채 1901년

<민상호 초상>에 나타난 보스의 표현력이 예사롭지 않아 보여,

그가 미국에서 어떤 위치에 있던 화가인지 자료를 찾아보니, 생각보다 '유명한' 화가였다.

1905년 중국에 가서 서태후의 초상화를 그렸을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상류사회 사람들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가 초상화에 대해 탁월한 기량을 인정받으며 활동했고, 영국 '왕립 초상화가 협회'  창립회원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뉴욕타임스'에 매우 여러번 소개된 역량있는 화가였다.

 

 

위의 기사를 요약하면 '초상화가 보스가, 하와이 왕조의 마지막 왕이자 (유일한 여왕)이었던 릴리오우칼라니가
뉴욕을 방문할 때 수행원으로 따라왔던 하와이 왕조의 '마지막 공주'를 보고 반해서 3일 만에 청혼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보스는 부인과 함께 하와이로 갔다가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한 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엑스포)에 참석한다는 계획을 밝혔다.'라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그 머나먼 뱃길을 부인과 함께 왔던 것일까? 그렇다.
1898년에 서울주재 미국공사관의 1등 서기관으로 부임한 W. F. 샌즈가 훗날 저술한
<조선비망록>(신복룡 번역, 집문당) 115쪽에
"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머물고 있는 네덜란드 예술가와 그의 아내" 라는 부분이 실려 있고,
그 네덜란드 화가가 휴버트 보스라고 134쪽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서 밝힌대로. 그동안 세계에 별로 알려지 않은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생각으로, 결혼 다음 해인 1898년 부인과 함께 하와이를 떠나 우리나라에
들른 것이다. 그가 2년 동안 방문한 나라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중국, 티벳, 자바(인도네시아), 인도 등이다.
그가 1898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남긴 작품으로는 <서울풍경>이 있다.
그리고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1899년에 그렸다.
 
    


보스가 그린 자신의 초상을 보고 고종은 사진과 같은 유화의 독특한 느낌을 만족하였다고 전해진다.
보스가 한국을 방문한 기간은 짧았으나, 당시의 정세를 잘 통찰하였고, 그림 속 고종 황제의 불행한 일생과 한국의 불운, 일본의 횡포 및 한국인의 우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서전 속에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한국 미술의 모든 건축과 유적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미술가들을 포로로서 일본에 끌고가 작품을 만들게 하는 한편 일본인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일본 미술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한국적인데...
제가 그린 민상호의 초상화를 보신 후 황제는 폐하 및 황태자의 실물 크기 전신 초상화를 그리라는 어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개인이 소지하기 위해  황제의 전신상 하나를 더 그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저는 황제로부터의 선물, 그리고 황제와 그 백성들의 장래에 대한 슬픈 예감을 안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서울 풍경 - 1898>


이 작품은 구한말 지금의 정동에있는 미 공사관 쪽에서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그린 것으로 멀리 광화문, 경회루, 북한산 등이 보인다. 때는 초봄으로 그림 왼편에 보이는 기와집 마당에는 복사꽃이 한창 피어 있다.
보스는 1911년 친구에게 보낸 자서전적 서한에서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한국은 가장 흥미 있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언덕과 골짜기, 고요한 강, 꿈 같은 호숫가에 정말로 아름다운 꽃들이

 자라고 있었으나, 그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인종 중의 하나로 늘 유령처럼 흰옷을 입고 마치 꿈 속에서처럼

 조용히 걸어 다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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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수용소 내의 조선인들>


지볼트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독일인 의사로 1823년부터 1829년까지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 연구에 심취했다.

이 과정에서 1823년 3월 조난으로 나가시키에 체류 중이던 조선인 어부와 상인들을 만나 조선에 관한 지식을

수집하였다. 이 삽화는 수용소 내에 모여 있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담았다.

검은 갓과 커다란 겨울용 방한모를 쓴 조선인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바둑 두는 조선인들>


상투 머리에 흰색 한복을 입고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모습에서 한국인의 특징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바둑알이 놓여 있는 바둑판은 일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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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을 총살하는 일본군 - Allan Stewart >

 

러일 전쟁 중 러시아 측에 정보를 제공하였다 하여 일본군이 한국인을 체포하여 총살형을 집행하고 있다.
나무에 묶인 한국인을 향해 장교의 지휘하에 여섯 명의 군인이 총구를 겨누고 있다.

뒤편에 갓쓰고 두루마기 입은 한국인들이 서 있다.

이 충격적인 장면은 일본인 종군 화가가 스케치한 것을 보고 스튜어트가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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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치일 풍경 - Canton Woodville>

 

1910. 8. 29일 한일합방 조약이 공포되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대한 제국은 단순히 조선이라 불리게 되었다. 일본군인이 총검을 꽂은 채 궁성을 지키고 있고,
그 아래에는 한국의 여인들, 긴 담뱃대와 갓 쓴 남자들, 노동자 등 몽타주 수법으로 그렸다.
우드빌의 그림.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10년 9월 17일자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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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나타난 자동차 - 크롬비에>


영국 화보지 [그래픽] 1909년 2월 20일자에 실린 이 그림에는 '코리아의 수도에 처음 출현한 자동차의 시위'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원래 이 그림은 [대한매일신보]에서 일했던 알프레드 맨험이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크롬비에가 익살스럽게 그린 것이다.알프레드 맨험이 잡지에 기고한 사진 설명을 들어보자.

"내 사진은 서울 도심에 처음 등장한 자동차를 찍은 것이다. 이 그림은 서구 문명이 만들어 낸 최신의 성과라

 할 수 있는 자동차가, 서구인들에게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서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조선에 어떤 식으로

 이 자동차문명이 침투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보여 줄 것이다. 이 차는 30마력의 증기차이다. 대로변을 지나다가

 이 차를 처음 본 한국인들은  혼비백산해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심지어 들고 있던 짐도 내팽개친 채 숨어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새로운 괴물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짐을 싣고 가던 소와 말도

 주인들 만큼이나 놀라 주위의 상점이나 가정집으로 뛰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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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침의 나라황제 - 드 라네지에르>


이 초상화는 프랑스 화가 드 라네지에르가 1902년에 그린 것으로 1903년 발간한 [극동의 이미지]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고종의 인상에 대해 '우아하고 선량하며 성격도 쾌활하며 영리하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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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약탈하는 청나라 군인들 - 후리프>


이 그림은 영국 [그래픽]지 1895년 3월 9일자에 실린 것으로 잡지의 종군 기자이자 화가였던 후리프가

청일전쟁 당시 조선에서 목격한 장면을 스케치한 것이다. 그는 이 그림과 함께 기사를 통해 당시의

청나라 군인들이 조선 백성에게 저지른 각종 만행에 대해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힘 없고 불운한 조선인들에 대한 청나라의 태도는 대단히 고압적이었다. 그들은 조선인들을 마치 정복국의

 주민을 대하듯 위협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개전 초기에는 무지비한 **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당시 청군의 병참부는 조직 등 모든 것이 매우 낙후되어 병사들로 하여금 조선 주민들로부터 식량 등

 필요한 물자를 자체 조달토록 하였다. 이를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소유주들은 즉시 총살하는 등

 무지막지하게 다루었다. 그들의 약탈에 반항하는 소 주인을 무참히 총으로 쏘는 장면은 당시의 참혹했던

 현장을 일깨워 준다. 당시 청군들은 그들의 일상 양식인 쌀, 배추 등을 현지에서 조달하고 요리하는데에

 매우 숙달되어 있었다. 청군들은 오합지졸이었고 기강도 해이했으며 전쟁에 대한 관심도 부족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증폭되어 있었으나 그들이 보여준 전투력을 보잘 것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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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과 한국인들>


이 화보는 프랑스의 르 몽드 일뤼스트레(1894)에 실린 것으로 평양 전투 후 의주로를 따라 패주하는 청군을 뒤쫓아

북상하는  일본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상체를 벗은 채 발을 뻗고 있는 소년, 또 엄마의 치마를 붙들고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아기의 모습이 일본군의 구둣발과 대조되어 가슴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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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루스벨트양>

 

이 그림은 프랑스 르 프티 파리지앙 1905년 10월 8일자에 실린 것이다. 미국의 26대 대통령인

디어도어 루스벨트(재임 1901-1909)의 딸인 엘리스 루스벨트는 여행을 좋아해서 세계 각국을 돌아 다녔다.

대통령의 영애는 그 어느 곳에서 보다 한국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관리들은 한국의 오래된 관습을 무시하고

그녀가 고종을 알현할 수 있게 했으며, 황태자와 대신들과 더불어 식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약혼자 및 경호원을 대동하고 왔는데 당시의 고위 관리들은 이 미국인 말괄량이 아가씨를 상대로

한미 공수동맹(共守同盟)을 맺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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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를 알현하는 서양 기자들>

 

영국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04. 8.27일 자에 실린 삽화. 러일 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에 온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 특파원 들이 고종을 알현하고 있다.

단상 왼쪽이 고종이고 오른쪽은 황태자, 단 아래서 특파원을 대표하여 영국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빌리어스 기자가 명함을 건네주고 있다. 명함을 받는 군복 입은 사람은 시종 무관장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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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랑말을 타고 팔도 여행을 하는 서양인들 (1894년 영국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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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키스 (Elizabeth keith: 1887-1956)는 스코틀랜드 아버딘셔어에서 출생했으나

어려서 런던으로 이주하여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했다.

독신이었던 그는 나이 28세가 되는 1915년 '신비한 동양'에 도착하여 생활의 터전을 잡을 수 있었다.



<궁중 내시>



<민씨가 규수 -무채>

 

이 그림은 영국인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가 펴낸 [Old korea](1919)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 그밖에도 많은 1900년대의 그림을 그렸는데 아래에 몇점 소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