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련 글들/한국사관련 글들

덜떨어진 연구나 기사보다 훨씬 객관적인 댓글

monocrop 2009. 12. 11. 16:03

제대로 조사되지도 않고 요건도 못갖춘 연구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오보하는 한국의 언론 실태....

이런 객관적이지 않은 날조에 가까운 행태들이 버젓이 일어나는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한국은 언제부터 거의 모든 뉴스들이 통제받거나 아니면 이런 수준 이하의 기사만이 남아 있는 사회가 된 것인가.

정치꾼들로부터 출발된 잘못된 개념과 가치관들이 그리고 글들의 해악들이 너무 사회에 만연해있다.

정말 더 늦기 전에 이런 독소들을 뿌리뽑고 정화해 나가지 않으면 국체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 보인다.

..............................................................................................................................................Mimesis

덜떨어진 연구나 기사보다 훨씬 객관적인 댓글...

 

 

한국인들의 이동 경로 [13] 고담덕님 |09.12.11 |신고하기
아프리카 -> 동남아시아 -> 북쪽지방 -> 한국 (70%)
아프리카 -> 동남아시아 -> 한국 (30%)

물론 위의 경로 말고도, 소수는 다른 경로로도 한국으로 들어 왔다.

자, 이제 기사 제목을 뭐라고 해야 하나?
1. 한국인의 조상은 아프리카
2. 한국인의 조상은 동남아시아
3. 한국인의 조상은 북쪽지방
4. 한국인의 조상은 북방계가 주되고 , 남방계가 소수.
5. 한국인의 조상은 호모사피엔스로 밝혀져...
6. 한국인의 조상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로 밝혀져...

기사 제목은...위의 1~6번중에서 X꼴리는데로 선택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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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합니다. 님의 댓글이 기사나 위의 연구보다 훨씬 |Mimesis님
객관적이고 진실에 근접한 내용이네요. 삭제하기 |09.12.11 |신고하기
왜 어이없는 동남아 기원이 나왔나? |고담덕님
일단 기사 확인을 했다.

http://news.donga.com/3/all/20091211/24718400/1

~ 동아일보 기사 말미에 보면 확인가능 ~

그동안 동아시아 민족의 남쪽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었다. 인도 북부에 정착한 인류가 바로 동아시아로 왔다는 설과 먼저 동남아로 이동한 뒤 다시 동아시아로 이동했다는 가설이다. 김상수 숭실대 교수는 “이번 연구는 두 번째 가설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며 “그림만 놓고 보면 인류가 남쪽 해안을 따라 돌면서 한반도까지 온 셈”이라고 말했다. 연구팀은 증거로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동아시아 사람들보다 유전적으로 훨씬 다양하다는 점을 제시했다. 그만큼 동아시아 사람들이 최근에 분화됐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북방계 민족의 이동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완의 연구라는 지적도 있다. 컨소시엄에 몽골 등 중앙아시아와 북아시아 연구진이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다른 연구를 보면 현생 인류 일부가 북쪽으로 이동해 동아시아로 온 것도 맞을 것”이라며 “한국인은 남쪽과 북쪽에서 온 인류가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09.12.11 |신고하기
만약 동남아 기원 가설이 맞다면 |고담덕님
1) 고대인들은 왜 따뜻한 남쪽에서 춥고 척박한 북쪽으로 이동해왔을까?

2) 남쪽에 자리잡은 자들에 의하여 쫓겨난 자들이 할수없이 북쪽으로
이동했다면 왜 중국이나 한국이나 남쪽보다 북쪽의 고대 문화 유물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우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차라리 이것보다는,
크게 북방쪽 민족과 남방쪽 민족이 있었는데, 북방 민족이 힘이 강성하여
남방지역으로 진출이 잦아지면서 남방 민족 후손들의 유전자 다양성이
나타나는 게 아닐까?
오히려 지정학적 위치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유전자는 덜 다양해진 게 아닐까?

유럽 초기 인류, 아시아인 특성이 우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01&aid=0001719138

한국 철기문화 새 유입통로 발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1946046

고조선, '역사'의 발자취를 찾았다
일부 고고학적 발굴로 '신화' 통설 반박
청동기 문화 한반도 전래시기도 앞당겨
http://weekly.hankooki.com/lpage/nation/200703/wk2007030614592237070.htm |09.12.11 |신고하기
유전자로 밝혀보는 뿌리 |고담덕님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11/09/200411090500015/200411090500015_1.html

세계몽골반점 동족지도자 국제평화회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0053814

허구의 종족 짱골라들의 허풍과 실체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87337

13억 중국인 가운데 92%를 차지하고 있다는 한족(漢族)이 실제 조사 결과 '유전학적으론 현존하지 않는 제3의 혈통'으로 나타났다.
'한족은 혈통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이라는 통설이 학술연구로 밝혀졌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현재 없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고 중국 언론들이 15일 보도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중국 서북지역의 소수민족 DNA 연구 등을 통해 나온 것이다. 셰 교수는 "DNA 조사 결과 현대 중국인은 다양한 민족의 특질이 고루 합쳐진 것으로 어떤 특정 민족의 특질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다'고 생각돼 왔으나 이는 특정 시기의 한족을 주변의 다른 종족과 구별하기 위해 만든 지역적 구분일 뿐"이라면서 "이젠 한족을 그렇게 지역적으로 따져 정의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춘추전국시대 현재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 세워진 진(秦)은 소수민족인 '서융(西戎:서쪽 오랑캐)'이 주류였다는 것이다.
또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주로 현재의 산시(山西) 남부와 장쑤(江蘇)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서북부 등의 소수 지방을 포함한 허난(河南)성 일대였으나, 이곳에 거주한 사람들을 한족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중국인들은 또 자신들이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자손(炎黃子孫)"이라고 주장하지만 연구 결과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도 중국인들이 오랑캐로 치부해 왔던 '북적(北狄)' 지역이었던 것으로 연구 결과 드러났다.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는 모두 현재의 간쑤성과 산시(陝西)성에 걸쳐 있는 황토 고원지역으로 이 두 곳 모두 한족의 본거지가 아닌 것은 물론 주요 거주지역도 아니라는 얘기다. |09.12.11 |신고하기
셰 교수는 "연구 결과 오히려 중국 북부에서 남부로 |고담덕님
이주한 소수민족 객가족(客家族)이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이들의 고어(古語), 풍속 및 습관에서 나타나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중원인"이라고 강조했다.

http://news.donga.com/fbin/output?n=200707250129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된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이 당시에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었다.

참고로 인구학적으로 범위를 최대로 좁혀서 따진다면 남한은 신라의 후예라기 보다는 부여의 후예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및 발해는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이죠.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국명은 코리아로 불립니다. 이 역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구려에서 유래된 말이죠.
인구 비율로 따져도 신라의 인구보다는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인구가 훨씬 더 우세했습니다.
실제로 삼국시대 신라의 인구는 백제의 인구 절반도 채 안 되었습니다. 다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반도를 차지할 수 있어서 그렇지. 당나라의 개입이 없었다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백제 연맹에게 복속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남북국시대 신라의 인구에서 신라계는 적었습니다. 오히려 신라에 병합된 한반도 이북과 이남에 있던 고구려-백제계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죠.
이것이 나중에 중세고려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17세기 영국에서 만든 지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73&aid=0002009555

17~18세기 조선에서 만든 지도
http://mhj21.com/sub_read.html?uid=11326§ion=section41

http://mhj21.com/sub_read.html?uid=11209§ion=section41

http://blog.daum.net/hearo9mars/7072081 |09.12.11 |신고하기
가라데의 고향 유구琉球 오키나와의 기원과 국적 |고담덕님
한국계 신석기토기 4000여점 일본 오키나와서 무더기 발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2001173

삼별초가 일구어낸 오키나와 유구국
http://blog.daum.net/santaclausly/11793489

짱골라 무술, 세기의 대결 ㅋ ㅋ ㅋ

사건의 배경은 오씨 태극권의 오공의가 스스로의 무술을 소개하면서 복서에게 이길 수 있고 의심스러우면 덤벼도 좋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바람에 백학권사 진극부가 발끈하여 붙게 된 싸움입니다.

이게 바로 짱골라들이 말하는 전설적인 세계최고수들의 대결..

앞으로 진짜 고수는 숨어있다느니, 강호를 떠나 은둔하고 있다느니 하는 말은 안 나오기 바란다...

1954년에 짱골라들 사이에서 세기의 대결이라 불렸던 고수들의 대결 동영상... 평범한 사람들이 쥐나무술의 고수들이 실제 싸우면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 늘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동영상을 보고난 후의 사람들의 반응이 쥐나무술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는 등 황당한 반응 일색이어서 궁금증을 자아낸다.

유명한 백학권사가 다른 문파의 태극권사와 벌인 대결은 한국영화 '품행제로'에서 전설적인 고교싸움꾼 박중필이 영화 후반부에 어떻게 싸우는지 보여주는 수준의 '쌈박질'이기 때문이다. 무술고수인 사람들은 시합 동영상에서 각 무술의 특징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중후한 남성들이 시비붙어 싸우는 개싸움(?) 정도 밖에 안보이기 때문이다.

팔괘장이니 태극권이니 하는 쥐나무술의 신비롭던 것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볼품없는 대결이 짱골라들 사이에서는 전설적인 시합이었던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고수대결을 기록한 이 영상에는 70년대 무술영화에나 나올법한 '휙~ 휙~' 하는 음향효과까지 억지로 넣어 진지한 대결이 더욱 코믹하게 보여지고 있다.

http://video.cyworld.com/203037843

당나라를 정복하라! 고구려의 후예들 발해와 제나라 & 택견, 가라데, 우슈 등 무도·무예·무술의 전파 교류 (제주도, 만주, 오키나와 등 여러 지역의 유물, 유적 등의 설명과 함께)

http://blog.daum.net/hearo9mars/7072074

가라데와 영춘권의 대결 및 그 기원들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잘 안 보이는 그림을 클릭하면 확대해서 볼 수 있더군요.

이 게시물은 약 260개의 사진과 그림이 들어간 대용량이라 불러들이는데 1분 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게시물의 이미지가 다 뜨지 않았을 때는 '새로고침' 하면 됩니다.

http://blog.naver.com/xxxod/70071717538 |09.12.11 |신고하기
동양과 서양 그리고 인류 문명 |고담덕님
표트르 1세 [Pyotr I, 1672.6.9~1725.2.8] 당시 러시아 남자들의 평균키는 155cm였죠.

조선시대 남성은 164㎝ㆍ여성은 150㎝로 조사돼

옛날 한국인의 평균신장은 얼마였을까? 삼국시대 한국인의 평균키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사료 속 고대 한국인의 키는 현재의 기준으로는 매우 작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당시 주변국에 비해 컸다고 한다. 요즘 지상파 3사에서 재조명되고 있는 고구려시대의 기록을 보면 주변국에 비해 비교적 큰 편이었고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도 ‘동쪽에 동이족이 있는데 동이족은 활을 잘 쏜다. 말을 잘 타며, 덩치도 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사람들이 주변국에 비해 덩치가 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평균키를 알기는 어렵다. 서울교대 조용진 교수가 복원한 가야인의 모습은 대체로 키가 크고, 뼈가 가늘며, 쭈그리고 앉아서 일한 흔적이 없는 ‘큰키형’ 민족으로 분석되고 있다. 경남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에서 출토된 성인 유골의 평균신장은 남성 167.4㎝, 여성 150.8㎝로 조사됐다. 신라와 백제도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또한 정확한 평균신장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경북 경주시에 위치한 고려시대 고분군을 발굴한 성림문화재연구원과 동아대 김재현 교수에 따르면 남자는 162.2㎝, 여성은 156.97㎝였다. 남성은 삼국시대(가야)인보다 작고, 여성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시대 남성의 경우 161~166㎝로 전해진다.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외국인의 눈에 비친 19세기 말의 한국’이라는 책에서는 한국인의 평균키를 164㎝라고 하였고, ‘우리 역사 바로 알기-임진왜란’ 편에서는 한국 남성의 평균신장을 161~166㎝로 나타내고 있다. 여성의 평균키는 150㎝ 정도로 고대 한국인의 신장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의 신장 변화와 생활수준의 변동-식민지 시기 키 자료를 중심으로’라는 서울대 석사 논문에 의하면 1900년에 165㎝ 정도이던 평균키는 1925년 167㎝까지 증가했다가 이후 감소추세를 보여 1945, 1950년에는 166㎝ 정도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산업자원부 산하 기술표준원이 ‘신체치수측정조사사업’ 결과로 내놓은 ‘한국인 체형정보’에 따르면 1979년 남성은 167.4㎝, 여성은 155.4㎝였고, 2004년에는 남성이 173.2㎝ , 여성은 160.0㎝로 과거 긴 시간의 성장속도보다 최근 25년 간의 성장폭이 월등히 큰 것으로 나타났다.

심형보 바람성형외과 원장 |09.12.11 |신고하기
고대에 이미 배달겨레가 크게 여러 민족으로 나누어집니다. |고담덕님
이들이 서로 다시 여러 민족으로 갈라지며 합쳐지는 등의 변천을 거듭했죠. 곧 우린 이미 배달겨레의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입니다. 그래서 단일민족이니 뭐니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서양인들이 헛소리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죠. 더욱이 그들의 혼혈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 지배로 통한 것이니... 더군다나 그들의 현사회에서도 오히려 인종차별이나 민족차별이 심하면 심했지 못 하진 않죠. 지들 주제도 모르면서 남에게 뭐라 한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거죠! 그리고 유엔에서 한국의 민족 운운하는 헛소리들은 정확히는 유럽에서의 논란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입니다. 본인은 외국의 사례인 스킨헤드, 시오니즘, 네오나치, KKK단 등은 굳이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표리부동한 그들에 대해서 비판은 하겠습니다.

유럽인들이 왜 다인종 국가를 만드는데 성공했을까..... 그것은 그들의 관용(똘레랑스 ㅗ 먹이셈)따위가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제국주의 시대에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끌고온 것이었으며, 2차대전 이후 경제성장에 있어 3D업종에 종사시킬 사람들을 충당하기 위해 그나마 연관성이 있는 식민지인들을 데려온게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신생아 출생 감소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그것으로 인해 다원사회를 이룩하였으면서, 그들이 본질적으로 관용적인 것처럼 말하는 것에 어이가 없을뿐입니다.

어차피 한국도 20년내 고려인 역이주. 50년내 타국민 이민을 받아들여 인구수 8000만 유지해야만 하는 ?가 옵니다. 통일한국이 되면 더욱 가속화되겠죠. 순리가 그러니까 제발 먼저 설레발 치지 않길 바랄뿐입니다. 그 잘나신 프랑스도 타인종 관리 못해서 폭동이나 일어나게 만드는 주제에, 자신들이나 잘 관리하길 충고할 뿐입니다! 똘레랑스 좋아하고 자빠졌다. {-_-}

유럽의 혁명은 핏빛으로 잔뜩 물들었고, 종교개혁가들은 중세 종교재판관처럼 ‘신앙의 자유’를 억압했으며, 절대왕권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았죠.

청색, 백색, 적색의 프랑스 국기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누군가 이런 퀴즈를 낸다면 우리는 프랑스혁명의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라고 답할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 김응종 충남대 사학과 교수는 이를 근거 약한 서구 예찬의 발로일 뿐이라고 비판하죠. |09.12.11 |신고하기
삼색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프랑스혁명 발발 사흘 뒤인 |고담덕님
1789년 7월 17일입니다. 국민방위대 사령관인 라파예트가 파리를 상징하는 적색과 청색의 2색 휘장에 프랑스 국왕기의 색깔인 백색을 넣어 만든 것이죠. 그것은 국왕과 혁명 파리가 손을 잡았다는 의미였습니다.

또 3대 정신은 프랑스혁명의 표어가 아니었습니다. 1848년 제2공화국 헌법에 규정된 표어였죠. 삼색기와 3대 정신을 연결할 근거는 1958년 제5공화국 헌법 2조에서 삼색기를 국가 상징물로 규정하면서 공화국의 표어로 3대 정신을 함께 규정한 것뿐입니다.

특히 3대 정신 중 박애로 번역되는 ‘fraternit´e(형제애)’는 박애라는 고결한 뜻과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 단어는 ‘형제애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에서 드러나듯 국내외의 동지와 적을 구별하는 폭력적 의미를 띠고 있었죠.

그런 점에서 자유가 자유주의, 평등이 사회주의를 낳았다면 형제애는 민족주의를 낳았다고 김응종 교수는 설명합니다.

이처럼 신화화한 서구 근대역사의 이면을 들춰보면, 그것은 숭고한 대의명분을 내세웠던 서구 혁명의 소름끼치는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이고,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은 종교개혁이 이율배반적으로 얼마나 독선적이었는지를 폭로하는 것이죠.

무혈혁명이라는 찬사를 듣는 영국혁명은 영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꼽히는 1차 세계대전보다도 높은 사망률을 기록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올 만큼 피로 물든 내전이었습니다.

프랑스혁명 기간에는 방데 지역의 내전으로만 20만 명이 학살됐고, 대외 전쟁으로 200만 명의 프랑스인이 사망했죠. 러시아혁명은 희생자가 최소 55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가공할 비극을 낳았습니다.

막스 베버가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한 칼뱅은 ‘나의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너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은 사상의 폭력가였습니다.

칼뱅의 지도 아래 있었던 주네브 시의 인구는 1만6000명에 불과했지만 그의 첫 통치 5년간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리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이 화형당하고, 76명이 추방됐죠. |09.12.11 |신고하기
일부 사람들이 동양은 서양 같은 과학적 논리 등이 |고담덕님
없었다고 하는데 화약, 나침반, 천문, 종이, 한의학 등이 생각없이 만들 수 있다고 봅니까?
과학적 논리에서 사족을 붙이자면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 세계적으로 과학적 우수함을 인정받은 문자입니다.

자유, 평등, 인권 역시 동양에서도 꾸준히 있던 겁니다. 민중봉기와 반란이 왜 일어난다고 보시는 겁니까? 그냥 심심해서? 농사짓다가 지겨워서? 아니면 싸움을 너무 잘하는데 난세가 아니라서? 사실상 민주주의라는 것은 국민이 주인이라고 하죠. 역사책 잠시만 들여다 봐도 이거 알수 있습니다.

흔히 지배층들이 하는 말 있죠. '민심은 천심이다.' 뭐 명분에 불과한 말일지라도 대충의 개념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구권 민주주의의 동양 전파에 선두주자라고 할 수도 있는 영국은 아직까지 '왕'과 '귀족'이 존재하는 입헌군주국입니다.

자유, 평등, 인권 등을 완전하게 이룩하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전제하에 '왕'과'귀족'이 없어야 하죠. 그것이 권리는 쥐뿔만큼 안주는 '명예적 작위와 위치'라도 말이죠.

또 서구권에서 동양 진출에 양대산맥이었던 프랑스는 공화정에서 군주제로 2번이나 갈아탔던 나라입니다. 둘다 나폴레옹 가문이지요.

한편 해괴했던 것은 서양의학도 마찬가지.

동의보감이 그당시 과학수준으로서는 뛰어난 의료서적이죠. 동의보감이 내용에 있어서 비과학적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죠. 문화재 등재 이유는 세계 최초의 공중보건의학서라는 점이죠. 동의보감이 나온 후 조선은 물론 쥐나, 일본, 베트남 등 한의학 전파 지역에서는 의사들의 바이블이었죠. 한국 사람 저술로 유사이래 이렇게 국제적으로 널리 읽혀진 책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요즘처럼 인세를 받기로 했다면 허준은 거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서양은 마녀사냥으로 애꿎은 여자들 잡아다가 불태워 죽이던 중세시대에 서양의학은 무엇했는지 늘 자성해보고.. 그때 중세의학은 동양의학보다 더 심각했죠.. 유럽 왕실에서 이가 아프다고 하면 다 뽑아버리고 귀신들렸다고 하고...
150여년 전까지만 해도 서양의학은 정신병 고친다고 사람 머리에 못을 박다가 죽이는 짓을 의료행위라고 하고 있었던 걸 한번 생각해보면...

/ 현대 정신의학 잔혹사 , 앤드류 스컬 지음. 전대호 옮김 , 모티브북 발행 / |09.12.11 |신고하기
치아를 뽑으면 정신병을 고칠수 있다 |고담덕님
20세기초 현미경의 발전으로 세균이 발견되고, 정신병이 세균때문이라고 여겼다. 미국 뉴저지주 트렙턴 주립병원 병원장인 헨리코튼은 정신병을 치료하고자 환자 1명당 10개의 이빨을 발치하였다. 그리고 난관, 편도 ,정관................

그리고 현재 세계 의학의 추세는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융합을 추구하는 대체의학 흐름으로 가고 있죠. 물론 다국적 제약회사들도 화학적으로만 약을 만들지 않고 여러 동식물 등에 대해 보다 더 천연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등 그 제조연구방식이 다양화되고 있죠.

성경에 나오는 예수가 떡이랑 물고기 늘어나게 하는 것이나 노아의 홍수 사건이나 등등 다 그게 과학적으로 가능하냐? 그래도 양의사 중 개신교 믿는 사람들은 그걸 믿죠... 당시 있던 민간요법을 기록한 걸 가지고 왜들 그렇게 난리지...

왜 한의학을 태클 걸까? 양의사들이? 그것은 바로 밥그릇 싸움. 괜히 저 따위 기사로 본질을 호도하려는 것이지... 그래서 있는 문화재 모두 없애버려야 하나??? 하긴 어떤 이들에게는 판타지 소설 성경(?)도 진실이라고 우기지?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문물을 받기 시작해서 그리스,로마 문명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죠. 하지만 중세시대의 미쳐버린 종교때문에 건축기법 중 시멘트공법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암울한 시대죠.

하지만 아랍 중동의 문명을 다시 받아들이면서 르네상스를 이루어 과거의 학문, 문화 등을 서서히 되살리기 시작하죠.

세계최초의 종합병원이나 도서관, 아라비아 숫자(인도 기원) 등 아랍 중동문명을 비롯한 뛰어난 동양 문명들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었죠. 하물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여러 고대 저서들이 아랍인의 도서관에 보관되지 않았다면 아마 서양의 문명은 벌써 사장되어 한참 이후에나 다시 발전을 이루어 나갔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전에 EBS교육방송에 방영된 BBC역사관련 다큐멘터리 등에서도 나왔던 내용입니다.

아무리 뛰어나도 그 후손이 못 나면 아무 소용없죠. 우리의 전례뿐만 아니라 잉카, 마야, 캄보디아의 크메르, 인도의 여러 문명 그리고 종교때문에 모든 발전이 거의 정체되게 된 근동, 중동의 아랍 문명 등등... |09.12.11 |신고하기
서양 역시 마찬가지죠. 동양의 문명들이 없었으면 다시 |고담덕님
르네상스를 일으키지도 못 했죠.

또 회계제도는 우리나라도 개성상단의 사개송도치부법이라는 훌륭한 복식부기법이 예전부터 사용되어왔고 시스템도 현대 서양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쳐지지 않습니다. 이 우리부기법은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있어 1920년대 오스트리아 경영학회에 보고되어 고려의 회계시스템이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고 주장되었으나 왜국의 학자가 이를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당시 왜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우리 나라의 상황때문에 묻히게 됩니다. 물론 금속활자에 대한 앞선 사용 또한 마찬가지죠.

참고로 서양이 동양을 서서히 따라붙다가 17C초에 이르러, 여러 분야의 발전에서 조금씩 추월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서양이 세계대항해시대를 열게 된 배경 중 자연의 영향도 큽니다. 15C에서 18C까지 유럽은 소빙하기시대였거든요. 그래서 최북단에 있던 영국은 식량문제 등을 비롯한 여러 악조건을 타개하기 위해서 상공업을 장려시키고 과학을 위시한 학문을 공부하고 세계로 뻗어나갈 필요성이 컸죠.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끝내는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그리하여 전세계에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의 영연방이 생기게 된 기저가 되죠.

솔직히 서양인들이 배가 부른 때라 해 봤자 기껏 '그리스, 로마시대'와 '산업혁명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300년 정도'입니다. 이를 제외하면 수천년동안 중동과 극동 등 동양의 지배에 있었던 야만인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역사는 과학입니다.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천문학자, 지리학자, 지질학자, 생물학자, 인류학자, 민속학자, 고고학자, 유전학자, 화학자, 기상학자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다함께 참여하여 밝혀나가죠. 사학자들이 사서를 연구하는 것 이외에도 타관련분야 학자들은 탄소연대측정 혹은 화석이나 동식물 등 유전분석 또는 지구 기후변화와 과거의 별자리 위치 기타등등을 통해 그 유물, 유적들에 대해 인류문명의 역사를 밝혀나가고 있죠.

현재 짱골라의 서북,서남,동북,몽골 공정 등으로 인해 만주의 발해연구는 완전히 막혀 있죠. 그래서 러시아와 협력하여 연해주를 통해 발해의 역사를 발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죠. |09.12.11 |신고하기
역사의 진실을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고담덕님
한국과 쥐나, 일본 3국이 소유한 모든 유물, 유적들을 다 공개해서 세계학자들과 함께 연구하면 쉽게 풀립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 하죠.

쥐나는 죽어라고 우리의 조상들의 근본인 홍산요하문명과 양주장강문명 유적들을 공개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죠. 그래야 상(은)나라와 춘추전국시대 그 위로 더 나아가서는 단국조선국을 비롯한 그 이전 모든 고대 문명들의 역사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서북 위구르 공정, 서남 티벳 공정, 정북 몽골 공정, 동북 한국 공정을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과 근동의 터키, 동유럽의 헝가리 등에 대해서도 조작이 쉬워지겠죠.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죽어라고 유물, 유적 공개 숨기려고 합니다. 왜왕실 도서관에는 훔쳐온 우리의 고대사서들이 수두룩하죠. 몇년전 여러 신문기사에 인용되었습니다.

왜 숨기나? 일본 아스카 시대 유물, 대부분 한국 불교예술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36762

조작된 역사로 억지 부리다 처참하게 깨진 어느 원숭이
http://blog.daum.net/hearo9mars/5893172

이순신은 사탄...
http://blog.daum.net/solpa500/9613946

한국의 국제 교류
http://blog.daum.net/kosskosa1/2

그리고 짱골라들이 모든 역사공정을 완료시킨 후에는 몽골과 베트남, 북한 등 나아가서는 한국도 점령하겠다는 속셈이 있습니다. 그래서 차이나 일부 교과서에는 일본을 제외한 모든 동아시아를 자기들의 잃어버린 영토로 기술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역사공정을 통한 거짓된 명분으로, 내부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여러 민족들의 독립을 저지하여 그 정신과 문화의 맥을 끊어버리고, 외부로는 주변국가들을 모두 잡아먹겠다는 야심을 숨기고 있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뉴스기사들이 있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09.12.11 |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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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은은 문제의 기사.....

북방민족은 조사도 않고 '규명'이란다.

...........................................................................................................................Mimesis

 

아시아인 이동경로 '남에서 북으로' 규명

연합뉴스 | 입력 2009.12.11 04:02 | 수정 2009.12.11 08:43

 

 

한국포함 10개국 조사...사이언스지 발표
< ※편집자주 : 12월 11일 오전 4시 엠바고는 '사이언스지'가 정한 것으로 제작 편의를 위해 미리 기사를 송고합니다. 신문과 방송(조간 가판 및 홈페이지 포함), 인터넷 매체 및 포털사이트는 12월 11일 오전 4시 이전에 이 기사를 사용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엠바고 파기시 전적으로 귀사에 책임이 있습니다. >

(대전=연합뉴스) 조성민 기자 = 아시아인의 이동경로가 남에서 북으로 진행된 것이 유전체 국제연구를 통해 규명됐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은 공동연구협력센터 유향숙 센터장 등 국내 연구진 15명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 대만, 인도, 태국 등 10개국 90여명의 과학자들이 동남아시아 73개 인종에 대한 유전적 변이분석을 통해 아시아인의 이동경로 등을 규명했다고 11일 밝혔다.

이 연구결과는 세계적인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지 11일자 온라인판을 통해 발표됐다.
아시아지역 인간게놈연구회소속(HUGO.Pan-Asian) 회원들은 2004년부터 남부, 동부아시아에 사는 73개 인종의 유전체(게놈) DNA를 분석하고 인종 간에 변이가 일어나는 부위(SNP.단일염기다형성부위)를 비교했으며, 유전적 다양성은 동북아시아인보다 동남아시아인 쪽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동남아시아인의 유전적 특성이 동북아시아인보다 더 오랜 세대에 걸쳐 누적된 것을 나타낸 것으로, 동남아시아인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주로 이동했음을 유전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또 아시아대륙에서 동남아시아 인구의 이동이 남쪽과 북쪽 양쪽에서 이뤄졌을 것이라는 기존의 주류 가설과 다른 것으로, 동북아시아인의 조상 대부분은 동남아시아인이라는 점을 규명한 것이라고 연구진은 밝혔다.

이런 분석결과를 보면 인도인을 제외한 아시아인의 조상은 처음으로 인도에 도착했고 이중 일부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남쪽으로 이동 정착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더 남쪽인 동인도네시아나 태평양 섬까지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몇몇 그룹이 북쪽으로 이주해 먼저 살고 있던 원주민들과 합류해 현재 분류하는 알타이족, 오스트로네시안 등 5종으로 나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열도는 주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정착한 것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이번 연구결과는 아시아인을 유전적, 약물유전체학적 또는 질병 발생경로 등으로 분류하는 데 활용된다.

연구에서 한국 측은 많은 컴퓨터 용량과 정보분석 인력을 제공했으며,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박종화 박사 등 8명, 국립보건연구원에서 김형래씨 등 5명, 숭실대 김상수씨, 을지대 김규찬씨 등이 참여했다.

min365@yna.co.kr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