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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마도가 조선령인 사서근거 -고대사료 (1)

monocrop 2009. 12. 11. 04:24

1. 『주서(周書』와『수서(隨書』

  대판만(大阪灣)에는 담로(擔魯)와 일치하는 담로도(淡魯島)가 있었다. 일본열도 내에 한국어 계통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A.D 18년에 공주(熊津)에 도읍한 비류 백제는 처음부터 백가가 되는 많은 세력이 바다를 건너왔다.(初以百家濟海)."


  『일본국가의 기원』

규슈(九州)에는 7개의 담로(對馬, 壹岐, 伊都奴, 投馬, 邪馬臺)가 있었다(井上光貞). 서기 100년경에 이미 규슈지역의 키 작은 원주왜인(原住倭人: 고고학상의 키작은 남방계 단신인)을 정복하고 비류백제 왕실의 자제(子第)『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가 담로주(擔魯主)로 통치하고 있었다.(『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이 때문에 담로가 많이 있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신대성기(神代成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음신과 양신이 성교하여 부부가 된 이후 산월(産月)에 이르러 이들 담로주(淡路州)를 모태(母胎)로 대일본을 낳았다(陰陽始, 合爲夫婦, 反至産時, 先以淡路洲爲胞… 生日本)."(金聖昊, 恩師 韓國편)  이상의 내용은 백제인이 세운 담로가 일본 혼슈(本州)는 물론 규슈연안과 대마, 일기도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한단고기』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記)에 의하면, "먼 옛날 마한(馬韓) 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대마도·일기도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 지역은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이때 소잔명존은 아들 오십맹신을 데리고 신라국(규슈 내에 있는 拷衾新羅: 신라소국)에 내려서 소시모리라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 땅은 내가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며 진흙으로 배를 만들어 동쪽으로 가 이즈모(出雲)의 파천상류에 있는 조상봉으로 갔다(『일본서기』신대 상8단).

  위의 신라국은『일본서기』중애천황 8년 9월조에 나오는 고금신라 및 출운풍토기의 국인신화(國引神話)의 고금신라와 같은 곳으로, 규슈에는 도래인이 세운 신라소국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소잔명존이 일본의 이즈모로 이주한 것은 옛날 왕검조선 때 대마도·일기도와 규슈 등이 마한의 관경 속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서술한 내용들은 대마도를 중심으로 한 일기도와 규슈지방이 왕검조선 때부터 우리 민족이 이주하여 통치했다는 실증적 자료다. 『일본서기』에 쓰여 있는 신(神)은 그 모두가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지배인들을 칭한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내용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섬야노(陝野奴)를 우두천왕(스사노오)으로 모신 신사(神祠)를 우두사(寺: 소머리데라)라고 부른다.


  2. 예로부터 규슈와 대마도는 곧 삼한(三韓)에서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사는 지역이 아니었으며, 임나(任那)가 또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소위 가라란 그 지방에서 중심되는 마을을 일컫는다(좌호가라는 신라, 인위가라는 고려, 계지가라는 백제이다: 『한단고기』고구려편)(이병선 저 『임나국과대마도』, 문정찬 저『일본상고사』).


  3. 임나는 대마도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명칭이며, 동과 서에 마을들이 있어 치소(治所)가 있고 조공하기도 하며 배반하기도 하였는데, 그 후 대마도섬이 드디어 임나에 지배되었으므로 그때부터 모두 임나를 대마라고 일컬었다(東西各有墟落 或貢或叛 後 對馬二島 遂爲任那所制故 自是任那 乃對馬全稱也: 『한단고기』고구려편)(이병선 저『임나국과 대마도』, 문정찬 저 『일본상고사』등)


  4.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어름에 있었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히고 국미성에 치소가 있었다.(任那者 本在對馬島西北界 北阻海有治曰 國尾城:『한단고기』고구려편)(『일본서기』, 이병선 저『임나대마도』, 문정찬 저『일본상고사』).


  5. 영락 10년에 세 가라(대마도)가 모두 고구려에 구속되었고 이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가 임나에 통합되어 열 나라로 나뉘어 다스리니 이름하여 연정(聯政)이라 하였다.(400∼479년)(永樂十年 三加羅盡歸我 自是 海陸諸海悉統於任那 分治十國 號爲聯政)(『한단고기』고구려편, 〈광개토대왕비문〉, 이병선 저『임나국과 대마도』)


  6. 이들 연정(대마도·일기도·말로국·규슈·세도연안·야마토왜)은 고구려에 직할되어 열제(광개토대왕)의 명령 없이는 제멋대로 행할 수 없었다(400∼479년). 그 후엔 백제가 관할하였다(然 直轄於高句麗 非烈帝所命 不得自專也)(『한단고기』고구려편 열제의 비문내용)


  7. 가락국기편: 가락국 6대 좌지왕 2년(408년) 왕비 용녀(傭女)가 붕당을 일으키어 국력이 쇠잔할 때 고구려 연정(대마왜)이 지배하였다(신라 실성왕7년, 동진 安義熙 3년, 일본 皇反正 3년).(〈광개토대왕비문〉, 인터넷 대마도 사료)


  8.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 실성왕7년조

  왜가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가락국과 신라는 같이 근심하였다. 대마도를 정벌하려 하는데 미사품(未斯品)의 간언으로 중단했다.『삼국사기』의 본조(本條)에도 임나국은 가락의 영토(任那國之所係 赤各羅古城所係)라 했다.  이 때 대마왜는 임나연정의 고구려 지배하에 있었다.


  9. 대마도는 가락구의 영토로서(『삼국사기』『가락국기』『대동세보』), 비단무역의 거점으로 용성국(나가사키)→오키나와→리만 해류를 타고 싱가포르→중국 복강성→갠지스 강→아유타국→아라비아 대상이 비단을 나른 곳이었다.(14년의 실제 탐방으로 엮어낸 이용기 저서『가락국의 영광』).


  10. '아메노 히보코' 설화는 당시의 한국세력이 대마도를 거쳐 일본열도에서 땅을 개척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일본왕정에서 번영하게 된 경위 등을 진실하게 쓰고 있다.(일본의 『고사기(古事記)』).


  11. 『위지동이전(魏璡夷傳)』왜인전의 3세기 대마도 모습의 기록은 대마도가 대마국(對馬國)으로 표기되어 있고,『한단고기』고구려편에는 혼슈·규슈·대마도에는 본래의 왜인이 없다고 기술되어 있으므로 그곳 주민들은 곧 우리 나라 도래인(度來人)을 뜻한다.


  12. 우리 나라『삼국사기』에는 대마도라 기록되어 있으며,『일본서기』에는 대마국·대마도·대마주 등으로 쓰여 있다. 한자의 음을 빌린 대마란 이름이 중국의 『삼국지』이래로 널리 쓰여졌다. 대마란 마한(馬韓)과 마주 대한다 하여 부른 이름이다. 대마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나가도메 히사이의 저서『고대 일본과 대마』에 나와 있다.


  13. 일본의『고사기』에는 '진도(津島)로 나와 있고『일본서기』의 신대(神代)에는 '한향지도(韓鄕之島)'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대마도 이름의 뜻과 관련된 것으로서 '쓰시마(津島)'는 한반도로 가는 배가 머무는 항구와 같은 섬이고, '가라시마(韓鄕之島)'는 바로 한국인의 섬으로서 한국사람이 고대로부터 사는 섬 또는 한반도로부터 사람과 문화가 건너올 때 거쳐온 섬, 교역이 이루어졌던 섬으로도 표현된다.


  14. 한국영토의 남쪽 구야한국(拘邪韓國:加那)에서 바다를 건너면 대마국에 이른다. 그곳의 대관(大官)을 '히고(卑拘)'라 하고 부관을 '히노모리(卑奴母難)'라고 불렀다는 대목의 '대막국도(對馬國島)'가 있는데 이것이 최초의 쓰시마(對馬) 기록이다.

  또 『위지(魏志)』의 편집자는 '津의 島'라는 의미로 이해했을 것이다. 즉 쓰(津)는 배가 닿는 곳이며, 따라서 배가 닿는 섬이란 뜻으로 쓰시마(津島)로 표기해야 옳았고,『고사기(古事記)』에도 쓰시마로 되어 있다.

  또 하나 유력한 설은 한국어의 해설이다. 일본어의 시마(島)는 한국어의 '섬'에서 유래된 말로서 한국말의 두 섬이 두시마, 쓰시마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위의 내용들은 놓고 볼 때 3세기 이전부터 대마도가 바로 구야한국(가야)에 속했다는 것이『삼국사기』실성왕 7년편과『가락국기』6대 좌지왕 2년의 기록 및 『대동세보』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 제3, 실성왕 7년조 "春二月 王聞 倭人於對馬島置營貯以兵革資粮以謀襲我 我欲先其未撥揀精兵聲破 兵儲舒邯未斯品曰, 臣聞兵器戰危事…."

  편년『가락국기』실성왕 7년편 "神王二年 戊申新羅實聖王 七年 西紀四0八年 倭始置營于 馬島 神王戊申 倭始營於對馬島 洛羅二邦爲憂…."

  『대동연보』좌지왕편 "新羅實聖王七年 東晉安帝熙四年 日本皇反正三年 倭始營于 對馬島…."

 

  이러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 볼 때 5세기 이전에 대마도는 오랫동안 바로 가야의 영토이었음이 밝혀졌다. 즉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일본인 스스로 증명하는 대목이다.


  15. 일본사학자 나가도메 히사이의 저서『대마도 역사관광』에 나타난 대마도의 소도(卒土)는 마한의 소도(蘇塗)와 같은 것이며, 다카무스 비노미코도와 데라시스 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 등의 각종 신화가 조선분국의 존재를 증명한다. 다시 말해 대마도신의 고향은 바로 한국이다(나가도메 히사이 저, 『대마도 역사관광』).


  16. 영락 10년(410)에 세가라 (대마도 三韓分國: 左護·仁位·鷄知)는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고 이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가 임나(任那)에 통합되어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니 이름하여 임나연정(任那聯政)이라 하였다.(『태백일사』고구려편)(이병선 저『임나대마도』, 문정찬 저『일본상고사』,『일본서기』5 王代,〈광개토대왕비문〉).


  17. 구야한국(금관가라)에서 1천여 리 떨어지 바닷길을 한 차례 건너서 대마국에 이르니 사방이 400여 리쯤 외었고 그곳에 조선 도래인이 주거하고 있었다(위지 왜인전,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18. 대마도에서 1천여 리 떨어진 바닷길을 한 차례 건너서 일기국(壹岐國)에 이르니 사방이 300리쯤 되었다. 본래 이곳은 사이기국(斯爾岐國)인데 자다(子多)의 여러 섬 사람들이 모두 조공하였다(대마도의 治所를 중심으로 한 조선분국임)(조선분국 주장설은 김형석·조희승 저『일본에서의 조선분국』,『한단고기』대진국편).

 

  19.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한국침략을 위하여 왜를 두둔하고 끌어들이는 입장이다.『한서』,『위서』,『신·구당서』,『진서(普書)』,『송서(宋書)』등이 그것이다.

  중국 사서(史書: 宋書, 梁書, 南史) 등의 5세기에 실린 일본기사 가운데서 왜·신라·임나·가라·진한(秦韓)·모한(慕韓) 등의 사지절도독(使持節都督: 정권을 위임받은 총독)의 칭호를 받았으므로, 역대 일본학자들은 이때 일본정권이 바다 건너 한국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증거로 삼아 이 부분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들은 일본왕실의 일방적인 가필이며, 그 당시에는 일본열도 내에서는 통일왕정은 없었으므로(통일왕정은 7세기 후반임), 도래한 한국소국 중에 대마도를 근거한 임나연정왕의 증거임이 이미 드러났다(〈광개토대왕비문〉: 왕 10년(400~479)후에 대마도에 임나연정이 수립되었고, 5왕(찬·진·제·흥·무)은 곧 대마도의 임정왕을 칭함)(김석형·조희성 저『일본에서의 조선분국』, 이병선 저『임나국과 대마도』).

 

  20. 아라(安羅)는 대마도의 임나(任那)로 편입되고 고구려와 더불어 이전부터 화친을 맺었다. 말로국(末盧國)의 남쪽은 대우국(大隅國)이라 하는데 그곳에 시라군(始羅郡)이 있었으며, 본래 우리 나라 남옥저 사람들이 도래하여 살았던 장소이다(태백일사 대진국편, 김석형·조희성 저『일본에서의 조선분국』,〈광개토대왕비문〉).


  21. 신라가 통일한 후 8세기(779년)에 국교가 단절되자 일본은 군사적 및 무역의 요충지인 대마도를 침거하여 조선약탈의 기지로 삼았으나, 신라는 통일전과 같이 계속하여 왜구를 소탕하였으며 대마도를 관리해 왔다. 특히 9세기 초 이후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신라의 적극적인 정치적 갱입이 있었고, 일부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811년, 812년, 813년, 814년경에 대마도에 관리를 파견하고 회사품을 하달한 내용이 있다(나종우 저,『중세의 대일관계』중 고려 전기내용 참조, 원광대학교출판부, 1996).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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