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련 글들/한국사관련 글들

[스크랩] 대마도가 조선령인 사서근거 -중세사료 (2)

monocrop 2009. 12. 11. 04:25

22. 대마도의 등정방(藤定房)이 1723녀에 편찬한『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3권으로 구성된 산가요략기(山家要略記에는 "대마도는 고려국의 행정치소인 목(牧)이었다. 옛날에 신라사람들이 이곳에 살았고, 중애천황(신공황후 섭정)이 대마도 악포(鰐浦)에서 신라를 정벌함으로써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지적한 신라는 대마도에 있는 좌호가라(佐護加羅) 중심의 신라이며, 중애천황 8년(199년)9월조에는 천황이 신라정토의 신탁을 믿지 않고 억지로 웅습(熊襲)을 토(討)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을 남겼다(이병선 저『임나대마도』,『일본서기』,『한단고기』고구려편).


  23. 고려시대에는 만호(萬戶)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대마도를 관리하였고, 진봉선 무역(進奉船貿易: 왜와 대마도가 진상해오면 회사품으로 답하여 많은 생필품을 보냄)을 하였다. 그리고 우왕3년(1375)에는 박위를 보내어 대마도의 섬주민을 보호하고 왜구를 격퇴했다. 이것은 대마도가 고대로부터 우리 영토임을 재확인한 과정이다(나종우 저『중세의 대일관계』, 원광대학교 출판부, 1996).


  24. 가마쿠라 막부시대 중기(13세기 말0에 만들어진『진대(塵垈)』11권의 사서(辭書)로서 저자 불명의 권2에 의하면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 모두가 바로 신라의 것이다"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옛날부터 대마도에 신라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대마도가 신라와 같은 곳임을(左護加羅: 신라)증명하며, 인종적·문화적으로 동질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전·후술하는 모든 내용들이 대마도는 한반도와 지척간에 있는 부속도서로서 우리의 정치 및 문화권에 상존해있었다는 것은 일본학자들이 증명하는 바이다. 대마도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문화유적과 생활습속들에 대해서『대마도·일기도 종합학술조사 보고서』(서울신문사, 1985) 및 일본인이 쓴『신대마도지』에 잘 정리되어 있다.


  25. 세종 원년(1418년)에 있은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즉 기해동정(己革征)이후 대마도는 계속하여 경상도 동래부의 소속 도서로 편입되어 조선정부의 통치에 임했다.


  26. 속주화(屬州化)를 요청한 도주사신(島主使臣)의 요청 내용인즉 "밖에서 귀국을 호위하며…우리 섬으로 하여금 영토 안에 주군(州郡)의 예에 따라 주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以爲外護貴國…若將我島 依貴國境內州郡之例 定爲州名賜以印信 則當效臣節 惟命是從)".(『세종실록』2년 윤1월10일)


  27. 확고한 국가관을 가졌던 세종과 학자 김중곤(金仲坤)은『노비문기(奴婢文記)』에 두지(豆之: 대마도)인이 있는 데 대하여 "대마도는 곧 조선의 땅이며 그곳에 왜인(조선 도래인)이 살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관계되랴"고 말한 데서 세종 때의 대마도 인식관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23년 11월22일) 세종 때 정승인 황희(黃喜)도 대마도는 예로부터 우리 땅인데 고려 말기에 국가기강이 허물어져 도적의 침입을 막지 못해 왜구가 옹고하게 되었다는 속주의식을 피력했다. 이와 같은 대마도 속주위식은 군신과 학자, 일반국민 모두의 머리와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28. 행장(行壯), 노인(路引), 문인(文引), 도서(圖書), 수직왜인(受職倭人), 통신부(通信符), 상아부(象牙符) 등의 각종 통행증을 발급한 것은 대마도민은 우리의 속민이었다는 것과, 무로마치 막부하의 일본이 스스로 요청하여 통교허가를 받은 것은 일본이 우리 조정에 대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실증적 내용이다. 이들 통행증의 왕래와 검역은 거제도 지세포(知世浦) 만호가 담당하였다.(『세종실록』권4,8,82 등).


  29. 일본 대마도의 수직왜인에게 내린 교지(敎旨: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관리의 임명장)는 군신간을 돈독케 하고, 임금에 대하여 충성을 다한다는 신하의 책무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교지의 내용을 볼 때 일본과 대마도 주민은 조선의 정치체제 안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그들을 보살핀 조선정부의 성의가 내포되어 있다(中村榮孝,「受職倭の告身」,『한일관계사 연구』상권 p.585).


  30. 한편 세조 때에는 대마도주 종성직(宗成職)의 수직을 추천하던 과정에서 대마도주에게 내린 교서에서도 "경의 조부가 대대로 우리의 남쪽 변경을 지켜서 국토를 보호하게 되었는데, 지금 경이 선조의 뜻을 이어서 더욱 공경하고 게으르지 아니하며 거듭 사람을 보내 작명(爵命)을 받기로 청하니, 내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숭정대부 판중추원사 대마주 병마도절제사를 제수한다"고 했다(『세종실록』7년 8월28일).


  31. 그 후 성종과 연산조의 조정에서 대마도주에게 주는 서계(書契)에서도 "대마주는 우리 나라의 속신(屬臣)인데 어찌하여 조선과 대마도를 양국이라 칭하느냐. 너의 도주가 우리 조정에 신하라 칭하였으니 대마도는 조선의 일개 주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란 기사가 많이 본인다(『성종실록』25년 2월7일, 『연산군일기』 8년 정월 19일).


  32. 이황(李滉)은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를 중국 역대왕조의 대오랑캐 정책을 원용하면서 부자관계로 보았다(『갑신포역절왜소(甲辰包勿絶倭疏)』, 『퇴계전서(退溪全書)』권6)

  또 그는 세사미두(歲賜米豆)의 의미에 대하여 "대마도가 충성을 다하여 바다를 든든하게 지키는 수고로운 공적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하사한다"고 하였다.(『에조답대마도주(禮曹答對馬島主)』권8).


  33. 세종 26년(1444) 일기도 초무관 강선권의 보고서에는 "대마도에 대하여 일본국 왕의 명령이 미치지 못하는 섬"이라고 하여 일본의 본토와는 분명히 다른 지역(바로 조선의 섬)으로 파악하였다.(『세종실록』26년 4월30일).


  34.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되었으니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본도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여 그를 통해 제반사를 보고하도록 하고 직접 본조에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이요, 겸하여 요청한 인장과 하사하는 물품을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쳐 보낸다(對馬島隸於 慶尙道 凡有啓稟之事 必須呈報本島觀察使 傳報施行母得直呈本曹兼請請印篆竝賜物 就付回价)(『세종실록』2년 윤 1월23일, 『신대마도지』의 응구(應寇) 부분 참조).


  35. 김성일이 서장관 허성(許筬)에게 보낸 답서의 내용에서 "대마도가 우리나라 조정의 은혜를 입고 우리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 말하면 군신지간이요, 땅으로 말하면 우리의 속국이다"라고 말했다(『답허서장서(答許書壯書)』,『해사록(海 錄』권3).


  36. 성종 18년에 대마도주의 서계(書契)내용을 보면 "영원토록 귀국(조선)의 신하로서 충절을 다할 것이다."(『성종실록』18년 2월 7일)로 되어있다.


  37.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에게 보낸 경상감사의 답서내용인즉 "우리 나라와 일본은 형제와 같이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신의와 화목을 닦아 200여 년동안 조금의 틈도 없었다. 대마도는 우리의 속주로서 조선의 신하로 섬겼으므로 나라에서 심히 후하게 대접하였다. 세견선의 곡식으로 먹이고 수레의 포목으로 입혔으니, 섬의 모든 백성이 조상 대대로 그 덕을 입고 양육받지 않음이 없었다. 그로써 생활하였으니 모두가 상국인 우리 나라의 은혜이다."(『조선실록』2년 8월7일)


  38. 일본 사학자인 중촌영효(中村榮孝)는 그의 논문에서 조선과 대마도의 속지관계(개연성)을 인정하면서, 일본측으로서는 대륙을 잇는 생명선과 같은 섬기기에 그것을 아전인수격으로 우긴 것에 지나지 않으며, 지정학적 여건을 볼 때 조선의 영토이었다고 실토하였다.


  39. 송희경은 대마도 정벌 이후 이론에 회례사(回禮使)로 다녀오면서 대마도 만호 좌우문 태량을 만나 '조선과 대마도는 한 집안'이라고 말하고 같은 왕의 신하라고 하여 그들의 칭송을 받았다(『노송당 일본행록』2월21일).

  이같은 주장은 당시 경상도 속주화 조치가 내려진 상황에서 대마도의 조선 속국관을 명백히 표현한 것이다.


  40. 신숙주는『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서 일본(본토)와 완전히 구별하여 대마도를 일본의 행정구역인 8도 66주와는 구별하여 조선영토로 기술하고 있다.


  41.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작성한〈팔도총도(八道總圖)〉라는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계속

출처 : 잃어버린 역사,보이는 흔적
글쓴이 : 운영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