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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임나흥망사 개요(3)-七支刀의 제작지 谷那곡나

monocrop 2007. 10. 24. 21:11

임나흥망사 개요(3)-七支刀의 제작지 谷那곡나

   글 정광산인 글돋선생

 

 

 <칠지도 제작지 谷那,구마모토현 곡나의 철산지인 호곡狐谷(호곡).苔谷태곡이다>

 

 <일본큐슈 玉名(다마나/백제 22담로국의 하나에 해당하는 분국)시 근처에 있는 에다후나야마 고분(전방후원분/전북 입점리 고분에서 똑 같은 유물인 금동관,금동신발이 나왔다. 이곳에 大刀가 발견된다. 이 대도는 곡나사철로 만들어졌다. 근처 狐谷호곡 사철지,강에서 추출한 사철로 대도 모조품을 만든 장인이 필자의 지인 마쓰나가(松永源六郞)이다. 전방후원분의 원류가 한반도임을 나타내는 나주 전방후원분이 있다. 이곳이 바로 큐슈의 구다라(백제)이다.  사진: 다음블로거 홍로 촬영>

 

칠지도의 제작지는 한반도가 아닌 현재 구마모토현 소재지의 [곡나 철산지(소대산의 제철유적군지인 大藤1號谷대등1호곡.大藤2號谷대등2호곡.狐谷(호곡).苔谷태곡]였던 것으로 밝혀졌고, 그 재료 역시 한반도에서는 보기 드문 砂鐵사철로 제작되었다는 것도 <일본서기>가 잘 말해 주고 있다.

 

이 백제 칠지도의 제작지였던 큐슈 유명해 동안의 [구다라]를 중심으로 하여, 차후 백제와 왜(기나이조)사이에 전개된 외교 및 정치관계의 특징은, 이때부터 바야흐로 야마토 왕권의 기틀을 형성하는데 있어 선진 백제는 일종의 수혈자적 입장에서 온갖 우수한 문물 및 선진문화의 전수자 역할을 도맡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주로 <응신기>에 집중되어 있는 한반도 계통 이주민, 그 중에서도 특히 백제계 도래인의 시조전승 설화가 그것이다.

 

이처럼 백제.왜 관계에서 당연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3~4세기 백제가 기나이의 왜(야마토) 조정에 대해 지엽적인 문화전파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가령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를 교체하고, 그를 대신해서 漢高安茂한고안무를 다시 왜 조정에 근무케 하는 등, 교대제에 의해 상당히 조직적인 교화 및 통치술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그러나 또 한편 이 곡나 철산지에 대해 야마토 조정은 백제로부터 일방적인 선진문화의 수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이를 독점하고 싶은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응신기>는 전하고 있다.

 

 응신 8년 (277년) 3월 조에 인용된 <백제기>에 [우리의(백제의) 탐미다례 및 峴南현남. 지침,谷那곡나, 東韓之地동안지지를 (왜에게) 빼앗겼다]고 한 것으로 보아도,철산지의 중요성에 대하여 왜의 야마토 조정은 일찍부터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여, 본국 백제로부터 일본열도에 미치는 힘의 약화를 틈타서 有明海유명해(큐슈중부해안) 연안의 이 [구다라]의 철산지 및 기다 東韓동한의 땅을 탈취하고자 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입점리 고분 박물관,위 뒷편 산에서 발견된 왕급 무덤에서 나온 금동모,금동관이 에다후나야마고분에서 나온 금동모,금동관과 쌍둥이 처럼 닮아있다. 에다후나야마고분릉은 제왕급의 큐슈分國(구다라)릉이다.>

 

 칠지도의 명문 내용과 관련하여 볼 때, 한반도의 백제로부터 [왜왕]에 봉해진 왜의 야마토 왕은 그 백제가 分國분국으로 설치한 큐슈의 [구다라]를 통하여 야마토 조정을 견제할 목적으로 내정간섭을 해오거나 영토할양을 요구해 오는 데 대하여 굴욕적인 외교관계에 놓여 있었던 듯하다.

 

 말하자면 한반도의 백제-큐슈의 구다라(백제)-기나이 왜(야마토)로 이어지는 3자의 역학관계에서 한반도로부터 야마토 왕권에의 견제가 느슨해질 때마다 야마토 조정에서는 종종 큐슈에 자신의 힘의 손길을 뻗침으로써 세력 판도를 바꾸어 놓으려 획책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펼쳐 왔다. 이것이 소위 [胎中태중]에 있는 응신천황에게 해외의 금.은의 나라(기나이 쪽에서 바라본 세도나이카이의 바깥, 즉 큐슈인 고마(고려).구다라(백제).시라기(신라)의 3한(미쯔노-가라) 등을 주었다고 <일본서기>의 곳곳에서 적고 있는 이유이다.

 

 그 미쯔노-가라가 점거한 땅을 두고 때로는 [海表之蕃해표지번]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큐슈 섬에 대해서<일본서기>의 내용상 일관되게 전개되는 야마토 조정의 정책은 그 큐슈의 탈환, 혹은 자기의 세력하에 묶어 두려는 기득권의 주장과 그곳에의 세력 확장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소위 임나일본부를  여기에 설치하는 것도 다 이 같은 정책의 일환이었다.

 

 요컨대 신공 시대에 백제에 빼앗긴 큐슈 땅에 대한 기득권 내지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결코 신공의 소생이 아닌 응신을 마치 신공의 아들인 것처럼 이야기를 지어내, 그가 어미 뱃속(태중)에 있을 때부터 그 땅을 물려받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그만큼 야마토 조정으로서는 그 큐슈 땅이 절대로 포기될 수 없는 영토임을 강조하기 위한 설화 꾸미기 수법이었던 것이다.

 

고분.jpg

 

*후나야마 고분. 전남대 박물관 답사팀이 고분을 바라보고 있다. 이 고분 정상부위에 석실을 갖추었다.

 촬영=권경안 <2006년 1월 20일>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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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광산인 글돋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