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광개토태왕비와 임나의 실체

[스크랩] 호태왕비석에 나온 391년조 기록 대상지는 대마도와 일본구주이다

monocrop 2007. 10. 24. 20:44
 

호태왕비석에 나온 391년조 기록

 

  대상지는 대마도와 일본구주이다   

 

 

광개토대왕비 탁본 앞에서 글돋선생(중앙박물관)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광개토왕비 서체가 같은 청동그릇 호태왕사후3년후에 제작415년/중앙박물관에서 글돋 김문배 촬영>

 

 

비문을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에 맞추어서 남한 경영지배설(3세기동안)에 이용하며,이젠 한강 북쪽영역까지 (고구려영역)까지 중국의 영토라하니 우리 5000년역사는 어디에서 찾아야할까? 정말 통탄을 금치 못하는 일이다.

 

호태왕비를 일본학자들이 크게 부각시키는 까닭은 그 비문에 나오는 391년조의 내용을 부각시켜 일본서기에 왜의 신공황후가 3세기에 [고금신라=다쿠시라기]를 정벌한 내용의 증거로서 곧 한반도의 남부지역(일본은 임나 라 칭함=사실은 일본구주)정벌설을 뒤받침하기위해서이다.

곧 임나일본부의 증거자료로 이용하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만 있는 신공황후(왜여왕=히미코=신라인 세오녀/주장하는 설)가 [고금신라]를 친 연대가 249년경이다.

그러나 비문엔 "원래 고구려는 신라와 백잔을 屬民(속민/결코한반도의 신라는 고구려의 속민이 된 적이 없었다:한반도 신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삼아 옛날로 부터 줄곧 조공을 받아왔었다,

 

391년조에는 "왜가 바다로 건너와 신라 백잔,임나가라를 파하여(쳐서)臣民(신하의 백성)으로 삼았다. ...이에 신라 매금(한반도신라에선 이사금,마립간등 명칭사용)이 고구려왕에게 응원군을 부탁하여 호태왕은 친히수군5만(수군에 주목=왜를 치기위해서 선박이용/한반도 신라와 백제라면 얼마던지 육지로 공격가능 일본을치기위해 水軍(선박)을이용한 것)을 이끌고 신라(구주신라)에 들어가 왜를 무찌르고 安羅/안라)병을 지키게 하였다."

안라를 한반도 아라가야(함안)이라고 하지만 일본서기 상에 안라가 많이 나온다. 구주의 안라이다. 한반도 함안(아라)가 멸망한 후(김해 532년 멸/대가야 고령 562년 멸망)까지도 일본서기 속엔 안라가 조공을 바치고 있는 기사가 보인다. 효덕천황 642년경 임나를 파하는 기사까지 안라란 지명이 나오고 있다. 곧 "아라"가 "안라"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1.신공황후가 249년경 친 "楮衾(다쿠)신라"는 한반도 신라가 아니고 구주에 있던 신라이다. 이 "다쿠"지명은 현재 구주 사가현 多久(다쿠)市이다.
일본은 비문 391년에 마추어 249년경을 120년(2주갑)을 내려서 일본서기를 해석하였다.(2주갑 조작설/120년을 합해서 369년) 이때 백제고이왕16년때의 일을 근초고왕(369년)때 일인 것 처럼 일본서기 조작도 서슴치 않았다.

한국학계도 이를 수용하고 있는 모순을 안고 있다. 신공52년(서기252년)에 만들어 진 칠지도 가 2주갑 끌어내린(1주갑은 60년,2주갑은 120년) 372년으로 둔갑하여 고이왕때 일이 근초고왕때 일로 우리학계도 모든 교과서 기록에,  일본측 학설을 따르고 있는 형편이다.


2.일본서기 역사는 백제기를 비롯한3서를 참고 하였지만 일본의 역사를 적은 것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신라(시라기),백제(구다라)고마(고구려)가 수없이 나오지만 그 내용과 삼국사기의 년대와 비교하면 전혀 다른 내용과 년대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 태반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서기속의 백제.신라,임나,고구려는 일본 구주의 분국들이었다.

임나란 지명은 우리 삼국사기에는 1번만 나온다.

원래 대마도를 지칭하였지만, 광개토왕이 일본 구주를 정벌하고 난 후 임나를 대마도에서 구주에 10국을 만들어 관리하였다.(한단고기에 상세히 나옴)

 

3.비문에 나온 내용중 "백잔와 신라는 예부터 신하의 위치에서 조공을 받쳐온 나라"란 대목은 한반도 신라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구주에 있던 백잔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 쿠마모토(구주)지역에 백제역(구다라역)백제학교,등 백잔의 명칭이 남아있다. 구주 玉名(다마나/백제 담로(제후지역명/백제가 양자강지역을 비롯하여23개?지역에 담로국(분국)을 설치통치함 ))에 있는 후나야마고분에서 출토된 대도,금동신발은 전북익점리 고분과 무령왕고분군과 동일한 신발이 발견된 점으로 바-이 지역이 백잔지역임을 알 수 있다.

4.이 비문을 통해서 일본은 한반도 정복과 지배설을 정당화하는 증거로 제출하고 있다.(임나일본부의 증거용)

5.과연 고고학적인 접근으로 보아 4세기에 왜가 한반도 신라와 백제,임나가라를 정복하였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다.(한반도 경영)-한.중.일의 학자들도 이 점에는 부정하지 않지만 비문의 해석으로 보면 틀림없다.

5.이 왜의 정복과 광개토왕의 백제.신라,가야의 정벌을 인정한다면 벌써 전 사국을 통일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결과이다. 하지만 그 시기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일치하지않는 역사 기술에 난감하고 있다. 삼국통일이 광개토왕에 이뤘졌다는 비문이다.

결코 그 기사가 아니다. 그래서 한국학자들은 왜라는 비문을 조작하였다고 주장(이진희 재일 사학자/주장)그러나 왜란 글자는 비문에 몇몇이 나오며 조작할 경우 말살시킬 수 있지만 석질에 조작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중국학자들은 조작설을 인정하지않았다.

6.우리는 이 싯점에서 비문과 삼국사기의 불일치에 대한 오해를 풀기위해서 일대 의식전환을 하여야한다. 결론은 이 기사의 내용은 한반도 지명의 백제,신라,임나가야(임나는 원래 대마도,나중에 구주에10국) 아니라 일본 구주의 시라기,구다라(백잔),임나(미마나)가야.임을 알아야한다.

7.신공황후(구주왜여왕) 아들로 나와있는 응신천황(왕)이 구주왜에서 기나이왜로 도망가서 세운나라가 (야마토왜)된다. 응신세력들은 빼앗긴 구주왜에 대한 끝임없는탈환을 획책하는 것이 임나가야회복인 동시에 391년조 비문 사건도 그 하나이다.

-야마토왜(응신세력들)가 일본내해(세도내해)로 건너와 구주에 있는 구주왜 옛땅에 있는 백잔,신라,임나가라를 친 사건임을 알아야한다.(임나신론/고려원1995년판)-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의 사건은 구주쟁탈사이며 결코 한반도의 역사기술이 아닌 백제가 멸망한 후에 일본(670년)에 관한 기술임을 알아야한다.

일본서기는 일본의 역사서이다. 오직 한반도와 관련되 내용을 참고하여 백제본기,백제기 백제신찬을 참고하여 일본에 관한 부분만 적을 것이다.(한반도 역사를 적은 것이 아님)아직도 일본,한국강단사학자는 그 진실에 눈 어두워있다.(일본서기속의 시라기(신라)구마(고구려)백제(구다라)임나(미마나)등을 한반도에 적용하니 삼국사기와 맞을리 가 있나,맞지않은 부분은 일본서기 오류라고 치부하고 ... )

 

1999년EBS역사특집에서는 마한지방(해남을비롯한광주지역)에 한반도왜 세력이 있었다고 3회에 걸쳐 방영한 적이있었다.이 주장은 일본학자주장설을 무분별히 받아드린 한국고대사 학자들의 식민사관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하는 꼴인 셈이다.

한일고대사를 주도하는 학자들 가운데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많으며 현재 대학 중진 교수들이 태반인 점은 아직도 이런문제를 극복하기엔 자기자신의 부정을 바라는 편이 나을 것이다.

8.이 사실이 정립되지않고는 비문과 사기에 나타난 기사들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코 일본이 끊임없이 임나일본부설을 들먹이고 있는 것은 한반도 정벌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임나=한반도 가야동맹체 가 아니며 임나는 원래 대마도인데 광개토왕때 일본구주 정벌로 10국을 구주에 설치하여 광개토왕이 관리하였다고 한단고기에 분명히 적혀있다. (환단고기) 환단고기의 기사와 비문의 기록이 일치하는 점은 놀라운 기록이다. 환단고기의 정확성은 미미 천문학자인 서울대교수 박창범씨가 증명한 적이 있다.

9.경주에서 발견된 호우총(1946년) 유물에서 청동병 아래단에 호태왕이란 16자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광개토왕비 각자와 동일한 점에서 광개토왕이 신라 정벌의 증거로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지만 이 유물의 연대가 광개토왕이 죽은지 3년에 만들어진 것(415년)으로 신라정벌의 유물로는 얘기가 성립되기 힘들고 오히려 내물왕(392년)에 실성왕자를 고구려 인질로 보낸 적이 삼국사기에 나오며 실성왕자가 고구려에서 돌아와 왕이되어 받은 유물이 아닌가 생각되며 호우총의 주인이 실성왕릉이 아닐까 하는 주장하는 학자가 많음. 결코 신라정벌의 증거물이 될 수 없음이 호태왕 죽은후3년만에 만들어진 청동기임에 주목하기 바란다.(글돋선생/김문배)

 

출처 : 문화예술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