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광개토태왕비와 임나의 실체

[스크랩] 任那임나흥망사 개요(1)

monocrop 2007. 10. 24. 20:45

임나흥망사 개요(1)

글 정광산인 글돋선생.

 

제1절 개요

 임나의 기원을 정확히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체로 서력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연원을 찾아야 할 만큼 상당히 오래된 내력을 지녔다고 생각된다.

 

그 임나에 대한 최초의 기사가 수록된 <일본서기><숭신기>65년 7월조에 [임나국...임나자거축자국,이천리....재계림지서남]이라 하여,쯔시마(대마도)의 이칭으로 국한되어 사용하던 때는 <일본서기> 기년으로 서력 기원전이었다.

 

 그러던 것이 4세기 말~5세기 초에 와서부터는 [큐슈(일본구주)]라는 지명이 발생하기 이전의 쯔쿠시(筑紫) 내 여러 소국들의 연방체가 결성되어 있었던 그 큐슈의 이칭으로 통용되기도 하였다. 거기 산재한 소국들의 연방체를 포괄하여 호칭할 때도 사용하던 통상적인 용어였던 것으로 <일본서기>의 검토와 분석 결과를 토대로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가령 [임나가라]라고 하면 큐슈 소국들의 연방체에 소속된 [가라]라는 뜻이고, 이는 주로 부젠(豊前).붕고(豊後)에 걸친 큐슈 동북방에 위치하였던  [가라]를 지칭한 이름이 되는 셈이다.

 

더 쉽게 말하면, 임나는 큐슈의 이칭이요, 가라는 도요쿠니(豊國)를 가라쿠니라고도 했던 데서 유래한 풍국豊國의 이칭이다. 그러므로 임나가라는 다름아닌 큐슈의 가라국을 말하는 것이 된다. 물론 이[가라]라는 명칭도 시대에 따라서 그 가리키는 지역 내지 영역에 변동이 있었다.

 

예를 들면 신공49년조의 백제.왜 연합군에 의해 평정된 7국명 가운데 [가라]도 있었고 [남가라]도 있었듯이, 단순히 읍락명으로 사용된 경우가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흠명기]에서 [在任那之下南](南韓),백제郡令城主]의 下南=南韓을,[아루시다-가라] 혹은 [아리히시노-가라]로 훈하는 경우도 바로 이와 같은 읍락명으로 사용된 예에 속한다.

 

아무튼 이 [가라]라는 말은, [韓]을 그렇게도 표음했던 것이므로, 결국은 같은 의미였다. [가라인(가라진]은 곧 [韓人(가라진)]의 뜻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읍락명의 경우에도 그것은 한인들의 공동체적 촌락을 의미했던 것이다. <일본서기>는 이들 한인들(한반도 계통 이주민들의 제집단)이 아득한 옛날부터 일본열도로 도래하여 소위 미쯔노-가라(3韓)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들 제 집단은 족장층이 이끌고 있던 공동체(國)로 발전하여, 각기 통합된 독립적 집단으로 존속하고 있었다. 그후의 이른바 [신공의 3韓정벌]은 당시 큐슈에서 이들 [미쯔노-가라]를 <위지>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왜 여왕 히미꼬와 동일시되는 [신공]의 통치체제 아래로 복속시키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백제가 본격적으로 큐슈에 진출한 시기>

 

이러한 큐슈에 백제가 본격적인 진출을 시도한 것은 고이왕 때였다. 물론 고이왕 이전,그러니까 초고왕 재위시절에 이미 해상을 통한 큐슈에의 진출이 이루어지고, 소위 미쯔노-가라의 하나인 [구다라]를 모태로 한 有明海(유명해) 東岸동안에 백제의 큐슈 상륙의 토대를 닦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韓地한지 백제가 일본 진출을 위해 설치한 전진기지와 같은 성격이었다고 파악된다. 아무튼 이를 발판으로 하여 고이왕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함으로써 이 무렵부터 일본열도는 점차 백제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다. 그것이 <신공기>에 나오는 백제.왜 연합군에 의한 소위 [신라7국평정]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백제의 세력이 그 무렵 어떤 형태로든 일본열도에 진출하기 시작했던 사실을 전하고 있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열거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즉 갑자년(244년 고이왕11년)에 백제에서 3인의 사자가 탁순국(지금의 多久타쿠)에 와서, [일본국(여기서는 기나이 왕조)에 통교하고자 해도 그 길을 알 수 없는데 혹시 [일본]에서 사신이 오면 알려 달라고 한 일로 보아, 같은 시기에 백제가 왜 여왕이 통치하는 큐슈 왕국과는 성격이 다른 일본, 즉 기나이의 야마토 조정에도 사신을 보내 관계를 맺고자 한 첫 출발이었다는 시각에도 설명이 가능해진다.(임나흥망사 개요(1) 끝. 임나흥망사 (2)는 계속적될 것입니다.(정광산인 글돋선생) 이 학설은 <임나신론/고려원 1995년780페이지분량>을 집필한 <학설>金仁培.金文培 兄弟의 학설이며 필자는 그 중에 한명임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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