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광개토태왕비와 임나의 실체

[스크랩] 임나흥망사4-광개토왕 비문 최대 쟁점과 야마토정권의 큐슈 쟁탈사

monocrop 2007. 10. 24. 21:19

任那興亡史4-

광개토왕 비문 최대 쟁점 점검과

야마토정권의 큐슈 쟁탈사(임나흥망사)

 

 

 

 

庭光散人 글돋선생

 

 

 <사진:광개토왕 탁본 아래 정광산인 글돋선생,국립중앙박물관에서>

 

 

 야마토 조정의 그와 같은 전략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이 저 유명한 [광개토왕 비문]의 이른바 신묘년(391년) 기사로서, 고대사의 최대 쟁점의 하나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

.......이육년병신왕궁율수군토벌잔국......]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해서는, 그동안 제기돼 온 온갖 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일 고대 관계사의 최대 쟁점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러데 이 광개토왕 비문의 의문점을 풀어 줄 것으로 보이는 가장 오래된 탁본이 지난(1994년) 2월 15일 중국북경에서 발견되었다. 이번 탁본은 지금까지 최고의 것으로 간주되어 온 1887년 탁본보다 11년이나 앞선 1876년에 만들어졌다는 것과, 북경에 거주하는 한 탁본 수집가가 이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1876년 탁본에는 특히 능 비문에서 빠진 글자들이 선명히 나와 있어, 그 동안 미해결로 남아 있던 한국 및 동아시아 고대사의 많은 비밀은 물론, 해석상 논쟁거리였던 부분들도 확연히 풀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접한 내용에 의하면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있는 최근의 보도에서 필자가, 위에 인용한 신묘년 기사에서 이번 탁본이 보여 주고 있는 문자 중에 다르게 확인된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누락되어 있던 [][]의 2자가 [隨破수파]일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는(취재기자의)보고였다.

 

그렇다면 이른바 신묘년 기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음이 꽤 분명해진 셈이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와 백잔을 파하고,이어서 신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요컨대 여기서 [왜]는 기나이 야마토 조정이었던 것이며, [바다를 건넜다]는 것은 큐슈를 치기 위해 세도나이카이를 건넜다는 것이 뜻이다.

 이때 왜가 破(깨트린)백잔은 韓地(한지) 백제의 분국인 큐슈의 有明海유명해 東岸동안에 위치한 [구다라]였던 것이고, 이어서 깨트린 신라라는 국명 역시 큐슈의 [시라기]였던 것임을 지금까지 이 연구 과정에서 보아 온 것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처럼 야마토 왕정의 큐슈에 대한 기득권의 확보와 연고권의 주장은 마침내 신묘년 기사와 같은 큐슈 정벌의 행동으로 구체화되었다고 보이는데, 이후로 한반도의 백제는 왕자를 왜(야마토) 조정에 볼모로 보내거나 양국 조정 간에 통혼을 시키기도 하여 비로소 대등한 화친관계를 맺어 우호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큐슈의 백제 분국인 [구다라(百殘백잔)]는 본국과의 거리상 또는 한반도 자체의 政情上(정치적상황) 오히려 왜 조정에 더욱 밀착하는 복속관계로 변질되어 갔음을 볼 수 있다.

 

그러던 것이 4세기 말~5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에 걸친 고구려의 영토 확장 및 남진 정책으로 인한 한반도 자체의 변동은 일본열도에까지 변동을 초래케된다.

 

  이를테면 위에 인용한 광개토왕 비문의 영락6년(396년)조에 [王躬率水軍,討伐殘國(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토벌 잔국)....] 운운에서 보듯,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직접 백제의 잔당국인 일본열도 내의 [구다라] 즉 百殘백잔을 침공해 들어옴으로써 이 커다란 동북아의 역사적 전환기 이후로 일본열도에서는 큐슈에서부터 고구려 계통의 횡혈식 석실고분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점차 기나이의 야마토 지방으로 보급되어 가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소위[고분시대] 제3기는 5세기 중엽을 중심으로 하는데, 이 시기에 기나이 지방에서는 인공적인 造山조산에 의한 전방후원분의 최성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큐슈 일부에서는 이미 횡혈식 석실이라는 새로운 묘실의 형식을 채용해서 후기로의 이행이 시작된 시기였다.

 

 고구려의 일본열도 침공은, 그 동안 백제와 왜(기나이조)의 연합에의해 다스려지고 있던 기존의 세력 판도를 깨뜨리고, 큐슈에 고구려 주도하의 임나연방을 결성케 함으로써 차후 백제. 왜 연합에 대한 영구적인 견제정책을 도모하였고, 이 같은 세력균형상의 역학관계는 차대 장수왕 시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강성했던 고구려가 점차적으로 한반도 내에서도 신라.백제의 [共守동맹(433~553년)]에 의해 그 세력 확장의 기회가 번번이 저지당하는 상황에 부딪치면서 일본열도에까지 미치는 힘의 영향력마저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열도는 다시금. 백제.왜 사이에 우호적인 결속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기나이 야마토 왕정에서는 이러한 기회를 틈타 [구다라]로 하여금 [임나 재건과 부흥]을 획책하는 한편, 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관리들을 파견하고, 또한 따로 임나국사를 임명하여 부임케 하므로써 큐슈에 대한 적극성을 보인다.

 

기록상으로는 웅략7년(463년)조에 다사-오미(田狹臣)를 임나國司국사로 임명하였다는 기사가 처음이고, [일본부]라른 문자가<일본서기>에 처음 등장하는 것도 웅략 8년(464년) 2월조 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일본]이라는 국호도 없었고, 임나통치의 政廳(정청)을 특별히 두었다는 기록상의 근거도 없으므로 이것이 후대에 <일본서기> 편찬자에 의한 개필이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이 무렵 임나파견의 관 또는 군이 큐슈에 머물렀던 사실의 반영일 것으로 본다.

 

 [구다라]의 주도하에 임나 부흥회의가 개최되고 나중에는 야마토 왕정에서도 이에 적극 개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큐슈의 一小國(일소국)이었던 [시라기] 세력이 발흥하여 과거 임나연방의 일원들인 이웃나라들을 차례로 침입, 병탄하는 동안 마침내 흠명 23년(562년)에  [시라기]에 의해 임나의 관가는 타멸되기에 이른다(一書 에는 21년(560년)에 임나가 망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당연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야마토 왕권과 쯔쿠시의 정치관계를 파악함에 있어, 반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족장 아래에서의 공동체적 제집단(國)들이 6세기까지도 여전히 야마토에 완전 정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國국들은 일본열도 내에 한반도 계통 이주민들의 진출에 의해 형성된 크고 작은 分國분국들로서 쯔쿠시뿐만 아니라 큐슈의 곳곳는 물론이요, 기나이(畿內).이즈모(出雲).키비(吉備)등지를 포함하여 수없이 존재하였다. 이들이 주로 한반도 땅에서 건너온 민족들이므로 이치상으로 보자면<일본서기> 편수 당시를 기점으로 해서 韓地 3국(고구려.백제.신라) 이전의 이들 선착 도래인들은 마땅히 [삼한]이라 통칭하는 게 옳을 것이지만, [한국계]임을 구분할 필요가 있거나 명시할 때는 그 이후의 韓地3國 계통의 이주민들까지 통틀어 [삼한]이라 한 흔적은 흔하다. 이에 야마토 왕권은 쯔쿠시 연해 각국의 제집단에 대해 끊임없이 기득권을 주장하는 전략으로 이들 족장과의 제휴와 병행하여 그곳에 특정한 기지나 관가의 설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임나일본부]였다.

 

동일한 시각에서 야마토 왕권의 이러한 전략정책을 이해하게 되면, 이른바 [임나흥망사]라는 것은 야마토에 의한 통일국가의 성립을 위해 줄기찬 노력을 기울이는 야마토 왕권과 각지의 족장 간에 펼쳐지는 정치적 관계의 일대 드라마일 것이다.

 

그것은 관점에 따라 [큐슈흥망사]라 부를 수도 있지만, 야마토 조정에서 보면 [큐슈 쟁탈사]였던 것이고 <일본서기>의 편찬 의도나 서술상의 흐름도 그러한 관점에서 전개해 나갔던 것으로 볼 만한 현저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야마토 조정을 중심으로 하는 관점에서 <일본서기>를 보더라도 야마토 왕권은 빨라야 7세기 중반 무렵인 효덕대화2년 (646년)9월조에 임나의 調(조)를 공식적으로 파함으로서,큐슈 전체를 장악하고 각지의 제집단을 완전 복속시키는 중앙집권의 통치체제를 이룩하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통일적인 국가조직의 시초 내지 그 발단은 5세기 말의 웅략조부터 國制국제의 기본이 된 部民制부민제에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론이며, 그것에 의해서 족장층은 [臣-連-伴造-國造]로서 왕권에 예속되었고 그들을 통하여 국토 및 인민을 지배하는 체제가 성립되었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그러한 경우에도 [지방족장(國造)] 아래에는 아직 部民化부민화가 안 된 私屬民사속민이 대다수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현재의 지배적인 학설이므로, 일본 사학계에서마저 야마토에 의한 통일국가의 성립을 6세기 이후로 내려잡는 데는 이의가 없는 것이다.

 

아무튼 효덕 대화2년(646년)에 공식적으로 임나의 조공을 그만두게 하자, 임나라는 명칭은 차후<일본서기>에서는 영영 사라지고 두번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도 여전히 구다라(백제),시라기(신라). 고마(고려)가 進調진조하였다는 기사는 계속된다는 데에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한반도에서 신라가 3국을 통합한 뒤에도 여전히 동일 명칭의 백제(구다라). 고려(고마).신라(시라기)가 계속 조공해 온 기록과 그 횟수이다. 심지어 어떤 때는 두 나라 혹은 세 나라가 함께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신라(시라기)가 29회로 가장 많고, 고려(고마)가 다음으로 14회, 백제(구다라)가 9회로 나타난다. 물론 이런 기사들로 보아서, 이들 3국이 멸망한 韓地한지의 그것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큐슈에 있었던 소국들의 명칭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셈이지만, 어째서 효덕은 즉위한 뒤로 임나의 調조만 폐지시켰던 것일까? 여기에 <일본서기>의 또 다른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임나흥망사 끝/정광산인 글돋선생)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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