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수심자님의 백제일본사

[스크랩] 임나일본부는 규슈의 백제 구다라였다(2)

monocrop 2007. 10. 7. 19:40
 

무녕대왕이 서거하자 계체천황은 반기를 들어서

먼저 가야의 거제도를 치고 다시 구주를 쳤다.

계체 천황의 백제 구주 공격에 실패하니

백제는 거제도를 내놓으라고 했고,

백제군은 거제도를 직접 공격을 하다가 공략에 실패하자

일본 대화로 구주의 군대를 보내 점령한다.

구주백제왕이던 무녕대왕의 동생 사아왕이 대화의 안한천황이 되고, 그 동생 사비왕이 구주백제왕으로 임명되어온다.

안한천황이 535년에 서거하니 사비왕이 대화로 가서 선화천황이 되고

무녕대왕의 아들인 사귀왕이 구주로 가서 축자 광정성에서 구주백제왕이 된다.

 

527년 계체천황 21년에 백제 무녕대왕이 서거한 것을 이용하여 계체천황은 대화大和의 군력을 모아서 백제에 맞서기 시작했다.


계체천황은 먼저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에게 6만의 군대를 주어 남가라南加羅(=김해金海)와 녹기탄彔己吞(거제도巨濟島)를 일본 임나에 합병할 생각을 하였다.

근강모야신은 거제도로 건너갔다.


그러나 뒤에서 구주 북부 축자국筑紫國(후쿠오카福岡)의 반정磐井이 돕지 않고 중간에서 훼방을 하였다.

화국火國(나가사키長埼縣), 풍국豊國(오오이타현大分縣)이 축자와 연합하였으니 구주 북부는 계체천황과 다 반대편에 선 것이다.

위의 세 나라는 백제가 지배하는 구주 중남부 안라安羅의 이웃으로서, 백제의 눈치를 본 것이다.


계체천황은 축자의 반정磐井을 치도록 물부추록화대련物部麁鹿火大連에게 부월斧鉞을 잡아주며 명령하였다. 축자국을 이기면 축자이서筑紫以西, 즉 구주를 그에게 다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즉 축자의 백제까지 없애주기를 바란 것이다.

축자의 반정磐井(475~528)은 528년에 가까스로 토벌당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물부추록화대련物部麁鹿火大連이 축자를 지배한 기록이 없으니 반정은 죽었어도 그 땅이 왜국 땅이 되지는 않았고 다음 기록으로 보면 백제 땅이 되었다.

오히려 529년 구주백제의 안한천황은 계체천황에게 근강모야신이 이미 건너가 차지하고 있는 가라加羅의 다사진多沙鎭을 요구하였다.

이는 거제도巨濟島 남단 구조라 남쪽의 다대포多大浦로 고려된다. 그 이전까지 백제는 남해도南海島의 미조면彌助面(=美佐岐)을 주요 교통로로 사용하였다.

계체천황은 굴복하여서 다사진多沙鎭을 구주백제에 내준다고 약속하였다. 구주에서 대화조정이 백제에게 패전했던 것이다.


이때 안한천황은 구주의 축자에서 물부추록화대련을 물리치고, 구주에 광국廣國을 만들었다. 광국廣國은 축자국筑紫國(=복강현福岡縣)과 풍국豊國(=대분현大分縣), 화국火國(=장기현長崎縣)을 합친 것이다.

백제 구주 광국의 수도는 지금 복강현福岡縣의 춘일시春日市 춘일신사春日神社 위치다. 훗날, 흠명천황의 광정궁廣庭宮과 황극천황의 미경궁味經宮이 있었던 곳으로 고려된다. 천지천황天智天皇은 장진궁長津宮으로 고쳤다.

안한천황은 이 광국廣國으로부터 다시 대외조정으로 진격하였다.


그동안 신라에게 압박을 받아오던 금관가야는 거제도의 근강모야신에 의지하였고 다사진을 백제에 준다는 것에 반발하였다.

근강모야신은 거제도 구사모라久斯牟羅(=구조라)에 성을 쌓고 2년 동안 머무르면서 백제에 다사진을 넘기지 않았다.

대신 신라는 대마도 임나를 공격하였다.

근강모야신 웅천熊川(=마산馬山)에 건너가서 신라를 탓하였다.

그러자 신라 진흥왕은 장군 이사부와 군사 3000을 웅천에 보냈고 놀란 모야신은 급히 거제도로 후퇴하였다.

금관가야는 2년 동안 거제도를 점거 당하고 도움되는 것이 없으니, 근강모야신에게 실망하여서 대화 조정에 근강모야신의 소환을 요구하였고, 여의치 않으니 백제와 신라의 군사를 요청하였다.

백제군이 근강모야신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근강모야신이 거제도의 성을 잘 지켜서 버티어냈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본기]에 의하면 531년 3월 백제군이 안라로 나아가 걸둔성에 주둔하였다.

取百濟本記為文.太歲辛亥三月, 進至于安羅, 營乞屯城.

乞屯脚下宅로 읽으라고 하였다. 각하타脚下宅는 다리하라, 혹은 아시카라로 읽어지는데 다라국의 아스카라朝倉이 된다. 조창군에는 귤광정궁橘廣庭宮이 있었다. 즉, 구려, 고구려의 광정궁인 귤광정궁이 있었던 것이다.

안라는 구주안라, 즉 구주백제의 중심이며 윤공천황의 성장 중심이었다.

이제 백제군은 거제도 공격을 멈추고 대화조정을 치기 위해 바다를 건너 구마모도로 상륙하여 귤광정궁에 있었던 것이다.

함안의 아나가야에는 신라의 소경이 설치되어 있었고, 위 기록은 한반도 안라가 아니니, 걸둔성이 조창군朝倉郡이기 때문이다.


백제 군대가 건너왔다는 소문만으로, 이때 531년 2월 계체천황은 자신의 태자와 황자 모두가 한꺼번에 살해당했다.

이는 [일본서기]에 숨어있는 아래의 한 줄의 기록이다.

“또 듣기에 일본 천황과 태자, 황자 등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훗날 깊이 따져 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

又聞, 日本天皇及太子、皇子,俱崩薨. 後勘校子 知之也”


이는 구주백제의 안한천황이 531년 새로 구주에 온 백제군을 이끌고 대화 조정을 공격하려고 하니, 대화조정이 먼저 선수를 쳐서 계체천황을 죽이고 환영한 것이고 안한천황의 군대는 저항없이 대화조정에 입성하였다.

이후에 대반금촌대련大伴金寸大連이 살아남는다. 천황 일가를 살해한 것은 대화의 성안에서 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된다.

근강모야신은 구주백제 안한천황의 공격을 받는 계체천황을 구출하러 거제도에서 철수하였는데, 도중에 임나에서 죽었다.


개로대왕의 서장자인 계체천황繼體天皇(450~531)은 백제에 대항하여 옹립되고,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근강모야신을 출병시켜서 도전하였으나 끝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계체천황의 능은 오사카에 있고 226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계체천황의 뒤를 이어서 즉위한 왜왕은 안한천황安閑天皇(466~532)이니 백제 무녕대왕의 동생인 사아왕斯我王이다.

그의 시호는 광국압건금천황廣國押建金日命이다.

그의 시호에 들어간 건금建金은 금을 건설했다는 것인데, 바로 지금의 구주 구마모도성熊本城을 되찾은 것이다. 이곳은 고구려 윤공천황 이래로 안라일본부가 있던 곳이다.

당시 백제 수도 금강의 웅진성熊津城에 금강이 흐르는데 금강이 본래 곰강이 변한 말이다. 즉 금은 곰의 차자이다.

사아왕은 구주 중심부의 안라국을 되찾아서 곰한성熊本城을 세우고 백제 분국으로 만든 것이다. 웅본의 배경이 바로 금봉산金峰山이다.

안한천황安閑天皇이라는 시호도 안라왕, 아나왕이라는 뜻이다. 마침내 일본 천황까지 되었다.

그러나 안한천황은 자식이 없었고, 이미 노쇠하였다.


사아왕 안한천황이 대화의 천황이 되니, 구주백제의 왕으로는 백제로부터 선화천황宣化天皇(467~539)이 갔다. 그도 역시 무녕대왕의 동생이 된다.

그의 시호는 무소광국압순천황武小廣國押盾天皇, 혹은 건소광국압순천황建小廣國押盾天皇이라 했는데 순은 다데라고 읽으니 다라국의 왕이었던 것이다.

소광국小廣國은 귤광정궁橘廣庭宮으로 고려된다. 따라서 531년에 백제군을 끌고서 구주로 온 장수가 선화천황이다.

즉 대화조정에는 안한천황이 서고, 구주 다라국 귤광정궁에 있던 선화천황은 구주백제왕으로 있었다.

5세기부터 백제 지도는 구주백제 영토를 포함하여 다시 그려져야만 한다.

[신찬성씨록]에서 고시촌주는 백제국 호왕의 후예라고 하였다.

古市村主 村主 出自百濟國虎王也

고시촌에 안한천황 고분이 있었다고 전하여 왔으니 안한천황이 백제 호왕虎王이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선화천황宣化天皇(467~539)은 역시 인현천황의 딸을 정비로 내세웠다.

일본의 각 항구에 창고를 지어서 곡식을 저장하였다.


532년에 신라가 임나의 금관가야를 멸망시켰으므로, 임나를 재건하기 위한 시도로서 축자에 거점을 마련했다. 바로 춘일시春日市다.

무녕대왕의 아들 사귀왕斯貴王이 535년 선화천황이 대화의 천황으로 떠나간 뒤에 구주백제왕이 되었다.

그는 후쿠오카福岡縣의 춘일시春日市의 춘기광정궁春岐廣庭宮에서 구주를 다스리다가 선화천황의 서거 후에 대화의 흠명천황欽明天皇으로 즉위했다.

그가 후쿠오카 춘기광정궁에 있었던 사실 때문에 그의 시호가 아마노쿠니오시하루키비리이하天國排-春岐廣庭命이 되었다. 춘기광정국은 나중에 춘일신사春日神社가 된다.


무녕대왕 때에 구주가 중남부가 백제로 병합되고, 성명대왕 때에 안한천황으로 인하여 구주 전체가 백제 땅이 되고, 일본도 백제계로 다시 통일된 것이다.
나라현 회외사
檜隈寺에 선화천황의 궁터와 사당이 있다.

선화천황의 후예인 화수왕火穗王은 시히라군志比陀郡의 선조였다.

선화천황의 이름이 우리말로 사비왕斯比王이었다는 근거가 된다.


사아왕斯我王은 자손이 없어서 이름을 남기기 위해 교또 동북방의 사가현滋賀縣을 사아현斯我縣으로 불렀는지 사가현滋賀縣의 옛이름 중에 사아현斯我縣이 들어있다.

출처 : 일본사 X-file /일본천황은 백제왕자였다
글쓴이 : 수심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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