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수심자님의 백제일본사

[스크랩] 백제 모도대왕이 동성대왕이고 인현천황이다.

monocrop 2007. 10. 7. 19:37
 

484년 청녕천황이 죽은 뒤에

487년 일본의 현종천황이 가야와 고구려와 내통하고 대마도를 통한 중국 진출 군사들의 보급을 방해하였다.

488년 백제 모도대왕은 고구려와 내통한 대마도를 토벌하고 일본으로 가서 현종천황을 죽이고, 스스로 일본의 인현천황이 되었는데 백제에서는 동성대왕이라고 하였다.

이때 백제에는 모도대왕의 손자인 모대대왕이 즉위하였다.

한편 465년부터 시작된 중국 산동반도 경략은 송나라가 망하여 남제국이 서는 혼란기에 더욱 활성화되고,

489년 모대대왕은 수십만의 북위 군대의 두 차레 대공략을 막아내서 산동반도를 지켜냈다는 국서를 제나라에 보낸다.

 

개로대왕비 반풍황녀는 해외 원정중인 왜무왕, 무녕대왕을 대리하여 일본의 조정을 맡았고, 평군시비平群志毗에게 정사를 위탁하였다.

이때 평군시비의 부친인 평군진조숙녜平群眞鳥宿禰는 백제에서 모도대왕을 수행하였고 평군시비平群志毗는 무녕대왕이 사랑하던 오도히메인 난파소야왕難波小野王을 자기 집에 데리고 있었다.


한편 각자궁에 기탁해 있던 이치베오시와市邊忍鹵王의 작은 아들이자, 백제 모도대왕의 동생인 홍계弘計가 무녕대왕이 사랑하는 오도히메를 가로채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군시비를 습격하여 죽이고, 오도히메小野王를 차지하였다.

이는 왜왕위의 찬탈이나 같다.


반풍천황(~483)이 483년 11월에 죽고, 홍계가 484년에 현종천황顯宗天皇(451~488)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무녕대왕의 비였던 오도히메, 난파소야왕을 황후로 세웠다.

현종천황은 난파소야왕에게서 추촌麁寸, 즉 무열천황을 낳았고, 무녕대왕과 난파소야왕이 낳은 어린 곡녀哭女를 범하여 포전녀飽田女를 낳았다.

훗날 추촌은 포전녀를 범하고 고구려로 갔다. 난파소야왕이 고구려계 윤공천황의 증손녀였기 때문이다. 


현종천황은 즉위 3년 486년에, 가야신인 고황산령高皇山靈에게 제사드렸는데, 그가 왜왕으로 즉위하는 데에는 왜국에 뿌리박았던 가야인들이 협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고구려계 윤공천황의 증손녀인 황후 난파왕이 모종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487년에 현종천황은 고구려와 내통하였다.

임나의 기대반숙녜紀大磐宿禰는 451년 개로대왕의 구주 정벌 때에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엇지만, 구주 임나에서 제멋대로 하였고, 그가 임나 구주에서 스스로 신성神聖이라 칭하고 독립을 꿈꾸면서 고구려와 통했다.

또 임나 대마도의 좌로佐魯 등을 이용해서 백제 장수 적막이해適莫爾解를 고구려 땅에 유인하여 이림爾林에서 죽였다. 이림爾林은 대마도 북섬의 서북부 인전만仁田灣 인전천仁田川 부근으로 추정된다.

좌로佐魯는 대마도 북도의 좌호천佐護川에 있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대반숙녜紀大磐宿禰는 구주 동쪽 좌백항佐伯港에 대산성帶山城을 쌓고 길을 막았다.

그래서 식량을 운반하는 항구가 끊겨 원정나간 군사들을 기아에 빠지게 하였다. 이 시기에 백제 군사는 중국 산동반도를 공략중이었다.

백제대왕인 모도대왕이 대노하여 고이해古爾解와 막고해莫古解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기대반숙녜는 임나에서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백제국은 대마도 임나의 좌로佐魯 등 300명을 죽였다.


488년 모도대왕은 백제왕위를 손자인 모대왕牟大王에게 물려주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현종천황顯宗天皇을 죽였다.

그래서 현종천황 고분은 고작 21m x 21m의 네모난 고분이고, 그 안에 석실이 있다. 이는 평야총혈산고분平野塚穴山古墳이라고 한다.

당시 죄악으로 인하여 크게 묘를 만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인현천황은 일본에 건너가 있으면서 실제적인 백제대왕이었기에 백제에서 동성대왕東城大王이라 칭한 것으로 고려된다. 백제의 동성東城은 일본인 것이다.


인현천황이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니 현종천황의 황후인 난파소야왕도 궁에서 축출되었다.

[일본서기/인현천황기]에 무녕대왕의 신하인 평군시비와 현종천황의 난파왕 다툼으로 인하여 기구하게 살다가 한탄에 빠진 여자의 노래 가사로 난파소야왕의 운명이 기록되었다.


제목이 어머니모세於慕尼慕是 아레니모세阿例尼慕是라는 한탄의 노래다.

그 뜻은 어머니의 남편이 내 남편인데 떠났다는 슬픈 노래였다.

그 사연은 한백수랑한韓白水郞暵(=무녕대왕)이라는 남자가 난파 즉어녀鯽魚女(=난파소야왕)와 살다가 곡녀哭女를 낳고 떠났고,

산저山杵(현종천왕)라는 남자가 즉어녀(난파소야왕)와 살며 추촌麁寸을 낳았다.

이후에 산저는 곡녀哭女(무녕대왕의 딸)도 통하여 포전녀飽田女를 낳았다.

이후 산저의 아들 추촌麁寸(무열천황)은 포전녀와 살았다.

그후 추촌은 고구려로 가는 사자 편에 고구려로 떠나버렸다. 난파왕이 고구려계 윤공천황의 증손녀이고, 추촌은 그 아들이기 때문에 고구려로 간 것이다.


488년 현종천황이 고구려와 내통하여서 형인 인현천황에게 제거당하자, 현종의 황비인 난파소야왕(461~498)은 자살을 했다고 했는데, 그때 죽지 않았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고, 무녕대왕의 딸인 곡녀 입장에서 산저(현종천황)가 어머니에게도 남편, 나에게도 남편이고, 포전녀의 입장에서 아버지 족보로는 형인데 어머니 족보로는 삼촌이고 함께 살았으니 남편인데 버리고 떠났다고 한탄한 것이다.


498년까지 인현천황은 일본에서 고구려계를 제거하고 옛 충신인 좌백부佐伯部를 찾아서 구주 오오이타현大分縣 좌백항佐伯港에 보내어 구주도 안정되었다. 


모도대왕牟都大王은 483년에 한산성을 순무했는데, 대동강 평양에 있던 한산성이다. 479년에 [일본서기]의 고구려 공략 기록에 따른 성과로 보인다.

게다가 황하 하구 유역과 산동반도, 양자강 북쪽 회대 지방에 상당한 연합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로대왕이 빼앗겨 고구려가 차지했던 평양성, 즉 한산성에 대한 무력 탈환이 충분히 가능하였다.

중국 동부 지역을 다스리려면 무엇보다도 강력한 해군력이 필요한데 동성대왕은 그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다.


488년 모도대왕을 세습했던 손자 모대대왕은 거듭되는 폭정暴政으로 인하여 501년에 신하에게 시해를 당하였다.

함경북도 청진에 있던 무녕대왕이 들어와 역신을 죽이고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였다.

출처 : 일본사 X-file /일본천황은 백제왕자였다
글쓴이 : 수심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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