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수심자님의 백제일본사

[스크랩] 임나일본부는 규슈에 있던 구주 백제 구다라였다.

monocrop 2007. 10. 7. 19:39
 

498년 백제 동성대왕이었던 일본의 인현천황이 암살당하고

현종천황의 아들인 무열천황이 즉위한다.

501년 백제에서는 동성대왕의 손자인 모대대왕이 시해를 당하니 함흥으로부터 무녕대왕이 돌아와 백제대왕이 된다.

무녕대왕은 506년에 동생인 사아왕을 구주의 구다라로 보내어

구주에 백제 직할지를 만들었다.

506년 이후로 백제는 망국 때까지, 구주 구다라를 소유하였고, 구주가 곧 백제였으므로, 이후로 오늘까지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불러오게 되었다.


무녕대왕武寧大王(461~523)이 478년 왜무왕倭武王으로 즉위했으나 고구려 정벌을 위해 함경북도 청진에 나가서 지켰다. 이때 왜국에서는 조정을 맡났던 모후 반풍황녀가 서거하니, 현종천황이 484년에 왜왕위를 빼앗았다.


무녕대왕의 479년 고구려 공격과 함경북도 청진 지배는 현재 지명과 [삼국사기지리지]로 알 수 있다. 485년 모도대왕 때에 백제는 함흥에 우두성牛頭城을 쌓은 기록이 있다.


함경북도 도청소재지인 경성鏡城 도호부에는 길주吉州, 명천군明川郡 부녕군 富寧郡 등이 속해 있었다.

경성鏡城의 옛이름은 목랑고성木郞古城, 또는 우롱미于籠耳라고 했는데, 왜무왕倭武王이었던 무녕대왕과 관련되어서 원래는 무왕고성武王古城, 왜룡미倭龍彌였을 것이다.

경성 남쪽 45리에 제왕산諸王山이 있었는데 제왕산濟王山이 옳은 것이다.

청진 북쪽 부령군富寧郡은 무녕군武寧郡이 어원으로 무녕대왕武寧大王과 관련된다. 그 증거로 [삼국사기/지리지]에서는 이 곳이 무녕대왕의 본 이름이 들어간 고-사마현古-斯麻縣이다.

부녕군 무릉산은 무녕산이 어원이다.

자금 수성천輸城川이 무녕산에서 흘러내리는데 본래 용성천龍城川이었다.

즉 무녕대왕이 479년 고구려를 공략하러 들어와 있던 곳이다. 용성천의 하구인 청진시淸津市에 청녕대왕과 무녕대왕의 궁성이 있었을 것이다.

명천군 성명봉聖明峰은 무녕대왕의 아들 성명왕聖明王을 의미한다. 성명봉에서 내려오는 명간천明澗川은 본래 명왕천明王川이었을 것이다.

성명왕이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고려된다.

길주의 고선화진古宣化津은 선화천황宣化天皇이 있던 곳으로 고려된다.

길주 서쪽 안반덕산安班德山(1830m)이 안한천황安閑天皇의 이름일 수도 있다. 길주에는 다신고성, 태신고성 등 오래된 고성이 많이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서 고구려, 백제의 우수주牛首州 지리 이름을 보면 우수주가 초고왕이 처음 개척한 함경남도 함흥이다.


 [주] [삼국사기지리지]에서 지리4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의 우수주牛首州가 함경남도 함흥咸興이다.

우수주牛首州는 다른말로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했다는데 함흥 성천강城川江의 이름에 흑말천이 있다. 우수주 벌력천현伐力川縣은 함흥의 성천강城川江 유역이다. 횡천현橫川縣은 함흥 동쪽 호련천瑚漣川부근으로 고려되고 자현磁縣은 함흥 서북쪽 자고성慈古城에 해당한다.

우수주 호원군乎原郡은 北原이라고도 했는데, 함흥 북쪽 홍원군洪原郡이다.

나토군奈土郡은 대제大提라고도 했는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이다. 서호西湖 광호廣湖, 동호東湖 등 큰 호수가 많다. 적산현赤山縣은 주이천朱伊川이 흐르는 지금의 함주군청咸州郡廳 자리다. 사열이현沙熱伊縣은 사수산泗水山을 지나 흐르는 금진강金津江으로 추정되니 함흥 남쪽 정평군 定平郡 위치다. 광산이 많고 고대로부터 쇠를 다스리던 곳이다. 초고대왕의 딸이 살던 수시리 고성이 있다.

근평군斤平郡은 심천현深川縣만 있었는데, 함흥 북쪽 신흥군新興郡으로 고려된다.

양구군陽口郡은 북청군이다. 양구근 저족현猪足縣은 오사회烏斯廻라고 했는데, 이는 일본말로 풀어서 한자로 옮기면 압하천鴨坡河이 된다. 북청군의 북쪽 물 이름이며 그곳의 성대리星垈里 고성은 고대의 철산지다.

왕기현王岐縣은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이원군利原郡으로 고려되고, 삼현현三峴縣은 삼봉三峰 남쪽 숙신고도肅愼古都로 추정된다.

성천군狌川郡은 창덕성倉德城이 있던 단천군端川郡으로 고려된다.

대양관군大楊管郡은 마근압馬斤押이라고도 했다. 매곡현買谷縣과 고사마현古斯麻縣이 있었는데, 고사마현은 무녕대왕 이름이고, 청진 북쪽 수성천輸城川의 근원이 되는 부녕군富寧郡이 본래 무녕군에서 비롯되므로 고사마현이 된다.

매곡현은 청진시淸津市가 되는데 고말산高抹山이 있다.

급벌산군及伐山郡은 이벌지현 伊伐支縣과 수성천현藪狌川縣이 있었는데, 함경북도 도청이 있는 경성鏡城시 북쪽 수성천輸城川을 의미하므로 지금의 경성鏡城이다.

이벌지현은 경성시가 되고, 수성천현藪狌川縣은 청진시 수성천 남쪽이 되고, 문현현文峴縣은 주을朱乙이 된다.

모성현母城郡은 경성 남쪽 어랑천漁郞川, 어랑군漁郞郡이다.

객련군客連郡은 학성鶴城, 길주吉州 명천明川이다.

천성군淺城郡 비열홀比烈忽은 영흥永興이다. 박평博平이라고도 했으니 그 뜻이 천성과 같고, 영흥을 지나는 용흥강龍興江이 고대 비류수 沸流水였으니 당연히 비열홀 이름이 유래되는 것이다. 살한현薩寒縣은 전탄강箭灘江이 된다.

이제까지 비열홀은 안변군安邊郡이라고 알려졌는데 잘못이다. 안변은 천성군의 남쪽 천정군의 남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의 국경군인 안변군이 발해의 공격으로 후퇴한 것으로 고려할 수 있다.

천정군泉井郡은 원산시元山市에 있던 덕원군德源郡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지리지] 지리 2의 해설은 당시 신라 지명만 맞고, 그 내력이 되는 고구려 이름은 거의 틀렸다. 김부식은 통일신라 때에 고구려 유민들이 옮겨온 고구려 지명을 본래 고구려의 지명으로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모도대왕이 웅진의 백제왕이 되고, 청녕천황과 왜무왕인 무녕천황이 고구려 청진에 공략중인 때에,

모도대왕의 동생인 현종천황은 왜왕위를 찬탈하더니 고구려와 내통하여, 그 처벌로서 488년에 형왕인 모도대왕 인현천황이 일본에 복귀하여 제거당했는데, 이때 왜국 신하들의 반목이 있었다.


484년 평군진조平群眞鳥가 모도대왕 인현천황을 수행하여 백제에 있는 동안에, 난파소야왕을 보호하던 평군진조의 아들 평군시비平郡志毘가 난파소야왕을 뺏으려는 현종천황과 대반금촌련大伴金寸連에 의해 살해당했었다.

그후 인현천황이 돌아와 현종천황과 난파소야왕을 제거하고 평군진조를 재상으로 하니, 그 아들을 죽인 대반금촌련大伴金寸連은 숨어지내야 했다.

현종천황의 아들 추촌麁寸은 고구려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 대반금촌련이 평군진조를 죽였다. 그리고 10살의 어린 추촌麁寸을 천황으로 세우니 무열천황武烈天皇(489~506)이다.


이때 인현천황은 연금되었거나 중병에 들었다. 무열 3년 500년 11월에 백제의 의다랑意多郞이 죽어서 고전高田에 묘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의다랑은 바로 인현천황의 이름인 의기명意祁命과 관련되며 그의 자가 도랑島郞이었다. 즉 의다랑意多郞은 모도대왕이었던 인현천황이다. 그의 손자는 의다意多의 반대말인 말다末多이다.

모도대왕의 손자인 백제 모대대왕은 이듬해 501년 12월에 죽었다.

무열천황은 오토하스세와카사자키천황小泊瀨稚鷦鷯天皇이라고도 하였는데 하스세泊瀨가 윤공, 웅략의 전유물로서 그 역시 고구려 피가 섞인 것을 나타낸다.

그의 다른 이름인 추촌麁寸은 “우에끼”로 읽어서, 상성上城을 의미하고 이는 웅략천황이 은퇴하여 죽은 미에현三重縣의 성 이름이다. 또, 무열천황이 수파읍水派邑에 쌓은 상성上城도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미에현에 쌓은 것으로 고려된다.

[고사기]에서는 현종천황 즉위전에 현종천황이 죽이는 평군지비平群志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무열천황 즉위 전에 나온다. 이는 현종천황과 무열천황이 난파즉어녀설화(=난파소야왕)에 나오는 못된 부자父子라는 증거다.


무녕대왕은 고구려 피가 섞인 무열천황의 폐위를 요구하고 마나麻那 왕자를 일본에 보냈는데 그는 모대대왕牟大大王(재위 488~501)의 동생으로 고려된다. [삼국사기]에서 모대를 마모摩牟라고도 기록했다.

그러나 대반금촌련大伴金寸連은 마나를 몇년 동안 억류하였다.


504년 무녕대왕은 동생인 사아왕斯阿王(466~535)과 백제 군대를 함께 보내어 일본 구주九州 정벌을 시작하였다. 사아왕이 바로 안한천황安閑天皇이 되었다. 그는 군대로서 구주 임나에 상륙하였던 것이다.

사아왕은 법사군法師君을 낳았고 그가 훗날 왜군倭君의 선조가 되었다고 하는데, 왜군은 곧 왜왕倭王을 왜곡한 것이다.


대반금촌대련大伴金寸大連은 백제 침공을 당하여 일단 고구려 피가 섞인 무열천황을 죽였다.

그리고 계체천황繼體天皇을 대타로 끌어들였다. 계체천황은 개로대왕이 국진성國津城으로부터 후쿠이현福井縣 동북의 모인국毛人國 55국을 정벌할 때에 진부인을 취해 낳았던 아들이라서 무녕대왕에게는 서형庶兄이었다.

대반금촌대련은 백제 모도대왕이었던 인현천황의 딸인 수백향황녀手白香皇女(488~526)를 짝지어서 계체천황의 황후로 세웠다. 그리고 각지방에서 여덟명의 비를 들여서 팔도八島 결혼 동맹으로 백제에 맞섰다.

백제 무녕대왕은 피붙이인 계체천황을 향한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일찍이 고구려 윤공천황이 점령했다가 그 세력이 많이 남아있는 구주 임나를 평정하기 시작하였다.


509년 백제 사아왕은 일본 구주 진출의 첫 사업으로 구주 임나의 현읍縣邑에 있는 백제인 후손을 찾아서 호적 정리를 하였다. 구주의 백성이 백제의 백성으로 소속을 바꾸는 것이다.

512년 백제는 구주 임나의 상치리上哆唎, 하치리下哆唎, 사타娑陀, 모루牟婁 4현을 차지하였다.

상치리上哆唎는 파자破字하면 상구다리上口多唎니 구마모도熊本市 동북방 구류미시久留米市 일대다.

하치리는 역시 하구다리로서 옛 안라국이 있던 곳으로서 구마모도다.

하치리가 구마모도인 것은 [일본서기/웅략천황기]에서 구마나리熊川를 임나국 하치호리현下哆呼唎縣의 별읍別邑이라고 한데서 알 수 있다. 이 구마나리熊川는 구마모도熊本이며 동시에 하치호리현下哆呼唎縣, 즉 하구다라였다.


본래 다라국 중심인 구류미시久留米市가 고구려 고우라산高良山 고모라高牟禮가 되었는데 다시 고구려 이름을 빼고 옛이름 다라국으로 돌아와서 구다라가 된 것이다. 그런데 구다라를 감추기 위해서 구다口多를 합자하여 치로 위장한 것이다. 지금도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구주의 백제 땅이름 구다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타娑陀는 가고시마鹿兒島 남단의 사다佐多곶과 관련하여 가고시마로 추정된다.

모루현은 제현諸縣郡의 위치다. 지금의 미야자와현宮岐縣이다. 제를 모로로 읽는데 우리말 모두의 고어다.

즉 백제 무녕대왕 때에 동생인 사아왕자는 규수 중부와 남부를 점령한 것이다.

이때 백제의 구다리국수哆唎國守로 임명된 수적신압산穗積臣押山은 계체천황이 있는 대화에 사자로 가서 백제랑 싸워 지킬 수 없으니 그냥 주어서 백제와 구주를 합병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고, 대화의 대반대련금촌은 구주에 사신을 보내려했지만 죽을까봐 아무도 가지 못했다.

513년 백제는 대마도 남도의 반파국伴跛國이 점령한 대마도 북도인 기문己汶을 내놓으라고 대화 조정에 요구하였다. 반파국은 옛 불합국不合國, 즉 불이합도不二合島인 대마도다. 하나지만 둘로 갈려져 합치지 못한 섬이 대마도인데 그 남쪽을 당시 반파국이라 한 것이다.


계체천황은 백제 구주왕인 사아왕斯我王에게 인현천황의 딸 춘일황녀를 보내서 달랬다. 사아왕은 시를 지어서 일본 팔도八島를 얻지못하고 여자를 받았다고 한탄하였다.

513년 12월 계체천황은 사아왕斯我王을 황태자로 삼았는데 다음대 천황으로 선언한 것이다. 당시 계체천황은 사아왕을 마로고麻呂古라고 불렀는데, 마로麻呂는 환이니, 안한천황의 “한”을 의미한 것이고, 마로고麻呂古는 큰 왕이라는 뜻이다. 안한천황을 한왕漢王이라고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514년 계체천황은 백제장수 저미문귀姐彌文貴와 사라斯羅의 문득지, 안라安羅의 신기계, 반파의 기전계 등의 성주를 대화 조정에 불러서 북대마도의 기문己汶과 체사滯沙를 백제에 내주도록 하였다.

사라斯羅는 지금의 사와라인 구주 후쿠오카시福岡市 사와라구早良區 김무성金武城이다. 안라安羅는 이미 백제 사아왕이 점령한 구마모도다.


기문己汶은 임나의 동북에 있고 삼기문三己汶이 있다고 숭신천황 때에 대마도주인 임나도주가 말했다.

[신찬성씨록]任那國奏曰。臣國 東北 有 三己汶地。上己汶。中己汶。下己汶。地方三百里。土地人民亦富饒

지방 300리 크기의 기문은 대마도 북도를 말한다. 좌호천, 인전천, 인위천이 흐르는 3마을이 3기문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체사성은 대마도 남도의 성이다.


기문 섬을 백제가 가지니, 반파국은 다시 기문을 돌려달라고 대화 조정에 요구한다. 그러다가 반파국伴跛國은 대마도 남도에서 대사성帶沙城(=滯沙) 등을 정비하고, 신라를 약탈한다.

이 신라는 구주 서북의 신라인 신량新良 사와라 땅에 해당한다.

이때 본토 신라는 512년에 울릉도를 점령하고 514년에 아나가야阿那伽倻에 소경小京을 설치하는 등 국경을 확대 중이라서, 대마도 반쪽 반파국에 공격당할 수준이 아니다. 


515년 구주백제의 사아왕이 보낸 장수 물부련物部連이 사쓰도沙都島를 쳤는데 사쓰천佐須川이 중심에 흐르는 대마도 남도 반파국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파국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문모라汶慕羅로 물러나왔다. 문모라는 미마나, 즉 예전의 대마도 임나다. 지금 미진美津의 계지천 부근이다.

구주백제왕은 물부련을 기문(대마도 북도)에서 위로하고 귀국시켰다.


이후 523년에 무녕대왕이 서거하였고 성명대왕聖明大王(~554)이 섰다.


503년 무녕대왕 즉위 3년에 산동반도 백제땅을 잃었다.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 고구려 문자명왕 12년, 503년에 백제의 진평군晋平郡을 없앴다고 하였다. 문자명왕은 백제의 식민지를 거의 다 빼앗아서 제齊,, 오, 월이 이제 고구려에 속했다고 하였다. 이때가 고구려의 최전성기다.


무녕대왕은 고구려에 보복하여 506년에 대동강 건너 평양성을 공략하였으니, 당시 평양성을 쌓던 고구려인들이 도주하였다.

이는 평양성벽 각서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는 평양성을 고구려인들도 한성漢城이라 하였고 이때 한성이 (백제에) 떨어졌다고 기록했다.

그후 무녕대왕은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중국에 전하였다.

520년 구주를 거의 병합한 백제 무녕대왕은 고구려를 여러번 무찔러서 비로소 양나라와  길을 통했으므로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고, 양나라 무제는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에 봉하였다.

[梁書] 普通二年,王余隆始復遣使奉表,稱 累破句驪,今始與通好,而百濟更為強國 其年,高祖詔曰...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百濟王


무녕대왕릉은 현재 공주에서 발굴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에도 있을 것이다. 흠명천황이 바로 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직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대형 전방후원고분들이 일본에 많이 남아있다.


[주] 489년 고구려는 다시 신라를 침범하여 과현戈峴을 지나 호산성狐山城을 함락시켰다. 호산성은 호명산과 같은 곳, 제천으로 추정하나 과현을 알 수 없다.

  평안도, 황해도가 백제의 땅이지만, 고구려는 태백산맥을 이용하여 영서嶺西 지방을 장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동천왕이 신라를 쳤던 것도 태백산맥 동쪽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492년 동성대왕東城大王은 백제 북부에 사현성沙峴城과 이산성耳山城을 쌓았다. 당시 이산성은 청천강변인 오늘날의 영변군寧邊郡 이산耳山으로 추정된다. 사현성은 그 북쪽 운산군雲山郡의 사천沙川과 관련되는 것이다. 사천은 현재의 운산읍을 지나는데 직동토성直洞土城이 있다.


494년 고구려군에게 신라가 살수薩水에서 패퇴하여 견아성犬牙城에서 고전하니 동성왕東城王은 백제군을 보내 고구려군을 쫓았다. 신라의 살수薩水는 강원도 영흥군의 전탄강이다.

살수에서 패하고 쫓겨간 신라군이 보전한 견아성犬牙城은 영흥군 진성봉에 있던 진술성鎭戌城이다. 술戌은 견犬을 바꾼 것이다. 북쪽에 이어지는 천앙봉天仰峰, 또 북쪽의 왕장리旺場里도 개짖는 모습을 의미한다.


495년에 고구려군이 백제 치양雉壤에 쳐들어왔을 때에는, 백제가 신라군의 도움으로 고구려군을 물리쳤는데 수곡성은 빼앗겼다.

치양稚壤은 영흥군永興郡 서쪽 70리에 있었다는 평주진平州鎭으로서 현재 요덕군耀德郡 선흥면宣興面의 고성古城이 된다. 

고구려는 백제가 신라의 견아성을 구원하자 백제의 치양성을 쳤는데, 서로 가까운 곳이다. 이때 백제를 구원한 신라장수의 이름은 덕지德智인데 그의 이름을 붙인 덕지강德池江이 고원군高原郡을 가로지른다. 즉 덕지강과 금야강 하구까지가 5세기말의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고구려가 다시 차지한 수곡성水谷城은 고구려 장곡현이 되었던 정평군定平郡 금진강 서남쪽 세류고성細柳古城이다. 이곳에 고구려는 석성을 쌓았다.


따라서 동해안에서는 금진강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국경이 형성되었다. 금진강은 고구려, 덕지강은 신라, 백제는 요덕군까지이다.

그리고 무녕대왕은 청녕천황 이래로 청진, 함흥에 있었다.

고구려의 공격로는 집안에서 함흥으로 이루는 산악 루트가 된다.


동성왕東城王 말기에 압록강 북쪽까지 백제의 진출이 이루어졌다. 즉 한반도의 서해안은 압록강까지 백제에게 수복되었다.

496년 고구려는 다시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이하泥河에서 패퇴하였다. 여기서 이하는 오대산의 동쪽 물로 고려한다. 그러나 497년에 고구려는 다시 우산성을 빼앗았다. 신라 우산성이나 백제 우곡성은 모두 함흥으로 추정된다.

을 따라서 훨씬 남쪽으로 진출했던 것으로 고려된다.


502년 백제 무녕대왕武寧大王은 고구려를 침범하였다. 503년에도 백제 무녕대왕武寧大王은 금진강 서남의 수곡성水谷城을 다시 회복하려고 군사를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506년 고구려는 백제를 치려다가 실패하였고, 507년에 고구려 문자명왕은 다시 한성漢城을 치려고 횡악橫岳에 주둔하였는데 백제 무녕대왕은 횡악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여기서 백제의 한성은 평산 한성이고, 횡악橫岳은 신평군 달보산성으로 추정된다.


이때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이 기록된 것이 <평양성벽 각서>이다. 평양성벽 각서는 일부 남아 있고 일부는 기록만 전하고 있다.

평양성벽 각서중 4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병술년 12월 중에 한성漢城이 함락되어

후부지명 소형관직 문달이름은 여기서 공사를 중단하고

서북쪽으로 물을 건너갔다.

丙戌十二月中 漢城下  後部 小兄 文達 節  自此 西北行 涉之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구려 남평양성이 고구려 한성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평양성벽 각서는 제1석부터 5석까지 있는데 제 4석은 내성의 대동강 강가 성벽 장경문長慶門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성벽은 대동강을 따라서 동북과 서남 방향으로 이어졌고 서북쪽으로는 성벽을 쌓지 않았다.


한성은 바로 비문이 발견된 오늘날의 평양성에 대한 당시의 고구려 이름이고 백제 한산성이기도 한 것이다.

다른 네 개의 각서와 마찬가지로, 공사의 시작이나 끝은 정확한 날자가 기록되어야 하지만, 병술년 12월에 한성이 함락되어 공사를 중단하고 황급히 서북으로 도망가다 보니, 그 뒷날에 공사가 중단된 날을 알 수도 없고 기록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비석이 발견된 곳에서 서북으로는 성벽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서북으로 도망간 것이다. 즉 이 기록은 공사를 시작하거나 마친 기사가 아니라 일단 내성을 쌓다가 중단하였던 사실에 대한 뒷날의 기록이다.


백제가 평양의 한산성을 되찾은 것은 5회로 추정된다.

1. 아신대왕阿莘王이 광개토왕에게 빼앗기고, 일본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회복하였으나 광개토왕이 다시 뺏았다.

2. 비유왕毗有王이 말년, 454년 이전에 수복하였으나 475년에 개로대왕이 장수왕에게 다시 빼앗겼다.

3. 동성왕이 484년에 왜국의 지원으로 되찾았으나 502,3년경에 잃었다.

4. 무녕대왕武寧大王이 회복하여 동이강국東夷强國이 되었으나 529년, 성명대왕聖明大王 7년에 빼앗겼다.

5. [일본서기]에서 성명대왕聖明大王이 550년경에 평양平壤=南平壤과 한성漢城=平山 漢城을 되찾았으나 한성은 신라에게 내주었다고 하였다. 평양은 고구려에게 내주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거칠부전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 <평양성벽각서>를 만족시킬 수 있는 병술년은 506년이다.

즉 506년에 무녕대왕은 평양 한산성을 수복하였고 다음해 문자명왕의 반격이 있었으나 무녕대왕이 이를 물리친 다음에는 무녕대왕이 압록강 이북까지 다시 백제 영토로 확보하였다.

512년 고구려군은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을 쳐서 약탈하였는데, 무녕대왕武寧大王은 고구려군을 위천葦川에서 무찔렀다.

위천葦川은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남쪽 가물천可勿川(=동로강東路江)으로 추정한다. 가불성이 변하여 가물성, 가물천이 된 것으로 추정한다.

원산성圓山城은 선천군 대원산大圓山의 고성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본래 아단성이 있던 곳인데 개로대왕이 끌려가 죽은 곳이라 원산성이 더 커진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무녕대왕武寧大王은 고구려를 여러번 물리쳐서 다시 백제가 동이강국東夷强國이 되었다고 대내외적으로 호언하였고 중국에서는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영동대장군嶺東大將軍 등으로 승진시켜 책봉하였다.


무녕대왕이 고구려에 여러번 이겨냈으므로 백제 국경은 압록강 북쪽까지 확장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무녕대왕武寧大王 다음 대인 성명대왕聖明大王 때의 기사에서 밝혀진다.

523년 성명대왕聖明大王 원년에 고구려 군사가 다시 패수 청천강에 쳐내려왔으나 백제 장군 지충志忠이 나가서 막아 싸웠다. 패수는 물론 청천강인데 백제가 장악한 평양한산성을 치기 위해 고구려군이 청천강 상류에서 공격해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즉 성명대왕의 부왕인 무녕대왕武寧大王이 이미 최소한 청천강 하류까지 수복을 해놓은 것이었다.

529년에 다시 고구려의 안장왕安臧王이 백제의 혈성穴城을 함락시키고 내려왔다. 안장왕은 백제 장군 연모燕謨가 보기병 3만으로 지키던 오곡五谷(황해도 서흥군 瑞興郡)을 마저 함락시켰다.

그런데 이 혈성穴城은 [삼국사기지리지]에 실린 당나라 장군 이세적李世勣이 당나라 고종에게 올린 표문表文에서 압록강 이북의 성으로 명시되어 있다. 혈성은 요동반도 수암성岫巖城으로 추정된다. 무녕대왕武寧大王은 압록강 북쪽 성까지도 일부 수복한 것이다.

오곡五谷은 [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황해도 서흥군이다.

서흥군이 함락되면 백제의 황해도 땅은 멸악산맥 서쪽이 모두 고구려에게 넘어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칠 때에 신라군이 거쳐간 곳도 오곡군이다.

여기서 백제의 혈성穴城을 훗날 혈구穴口라고 부르던 강화도로 생각하면 고구려군이 강화도에서 황해도 오곡군으로 북진하여 쳐들어온 것으로 되기 때문에 어불성설이다. 북한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해석하여 한강 남쪽의 백제군을 일부러 황해도 중심까지 유인하여 격멸했다고 해석한다. 아무튼 이것도 백제군의 수비가 아니라 공격으로 해석되는 것인데 [삼국사기]는 오로지 백제가 수비를 한 것이고 고구려가 공격해 내려온 것이다. 따라서 혈성은 요동반도 수암岫巖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백제 성명대왕聖明大王 때에 고구려는, 한번은 패수 청천강에 내려와서 싸우고, 또 한번은 압록강 이북에서 혈성을 부수고 내려온 황해도 중간에서 전투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 제대로 해석하면 성명대왕聖明大王 이전에, 백제 무녕대왕武寧大王은 과연 백제가 다시 강국이라 불릴 수 있도록 한반도 서쪽 평야의 대부분을 수복하여 차지하고 다시 중국과 교류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도 압록강 이북의 혈성穴城; 今 岫巖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무녕대왕의 죽음과 때맞추어 기회를 잡고 고구려는 다시 남진했던 것이다.

출처 : 일본사 X-file /일본천황은 백제왕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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