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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단고기 위서론 비판(2) - 안창범

monocrop 2007. 3. 5. 04:01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 (2)


安    昶    範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한국철학)

 

 

 

4. 6000년 전후의 청동기기 있다.


1) 문제점 : 실증사학계는 국가의 성립을 청동기 사용 이후로 본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청동기 사용은 B.C. 10세기 이상을 올라가지 않는다고 가르쳐왔고 그렇게 배워왔다. 이에 따라 우리 나라의 실증사학계는 한국과 배달국 그리고 단군조선의 실재를 부정한다.


2) 청동기 출토 : 그러나 최근 평양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역에서 고조선 이전 시기에 해당하는 청동기들과 금동제품들이 많이 나왔다. 예컨대, 기원전 2500년경에 해당하는 상원군 룡곡리 5호 고인돌 무덤에서는 비파형 창끝이, 4호 고인돌 무덤에서는 청동기단추가 나왔으며, 강동군 순창리 글바위 5호 무덤에서는 금동귀걸이가 발굴되었다. 고조선의 비파형 단검과 좁은 놋단검의 시원 연대를 밝히는데 중점을 두고,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평양 덕천시 남양유적의 집자리들에서 나온 질그릇을 시료로 하여 핵분열 흔적법(FT, Fission Track)으로 측정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5800년 전후라는 절대 연대치가 나왔다. 이들 연대 값은 단군조선 이전 시기에도 평양을 중심으로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당시 주민들이 청동기를 만들어 썼다는 것을 실증한다. 따라서 청동기 사용을 근거로 보더라도 우리 민족의 태고사와 신선도는 부정될 수 없고, 그러한 기록을 실었다는 이유로 한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모순인 것이다. 그러나 남한의 실증사학자들은 북한의 주장에 대해 부정적이다.


3) 해설 : 첫째의 이유는 북한의 주장을 수용할 경우, 우리 민족의 청동기사용이 선진국가인 서구(서구는 B.C. 3000년경) 보다 500년 내지 1500년이 빠르므로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청동기 사용은 우리 민족만이 빠른 것이 아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의 청동기 사용은 B.C. 4000-3500년경이고, 이집트 지방에서는 B.C. 4000년경이며, 만주 요령에서 발굴된 청동기는 B.C. 3500년경이다. 더욱이 우리 민족은 지금부터 5898년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고도한 종교를 탄생시켰고,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깨닫고, 평양은 고조선의 중심지이며 마한의 고도였다는 사실을 안다면, 평양에서 출토된 청동기 절대 연대가 서구보다 훨씬 앞설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발굴보고를 무조건 부정함은 북한에 대한 거부반응에서 비롯된 것이며, 민족적 열등의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4) 핵분열 흔적 절대연대 측정원리 : 둘째의 이유는 북한 당국이 적용한 유적유물 절대연대 측정방법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 하는 의심이다. 북한당국이 적용한 절대연대 측정방법인 핵분렬흔적(FT, Fission Track) 연대측정원리는 시료 속에 포함된 우라늄의 핵분열 붕괴량과 현재량을 검출하여 측정함으로써 유물의 연대를 알아내는 것이다. 우선 이 방법의 측정범위는 넓어 수 백년에서 수 십 억년까지다. 측정한 연대 값의 믿음성이 높으며 오차가 비교적 적다고 한다. 그래서 FT법은 지질 및 고고학 분야에서 널리 적용되어 제4기 지질학적 연대는 물론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유물유적들의 연대측정에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방법을 썼다고 해서 북한의 경우에만 문제 삼는다면,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쪽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5. 삼국유사의 고조선기는 태고사의 은유적 표현이다.


한단고기에는 우리 민족의 태고사가 모두 역사로 기술되고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신화같이 기술되고 있다. 그에 대한 해설이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옛날 한인의 서자 한웅이 천하에 뜻을 두고 태백산정에 내려와 홍익인간 재세이화하여 신시를 베풀고, 후에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왕검을 낳고, 단군왕검이 조선국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이에 반해 한단고기에는 우리 민족의 태초 국가로서 7세 한인이 3301년 간 무위이화하던 중앙 아시아 천산 중심의 한국이 있었고, 한국의 말 서자부에 있던 한웅이 태백산정에 이르러 홍익인간 재세이화 함으로써 신시를 베풀었고, 그 후 188세 거불단 한웅이 웅족의 여인과 혼인하여 단군왕검을 낳고, 단군왕검이 조선국을 세웠으며, 조선국은 47세를 전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이 실려있다.


곧 한단고기의 내용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면, 삼국유사의 기록은 신화 같기도 하다. 이래서 한단고기의 기록은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이기 위한 위작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우선 한단고기의 기록과 삼국유사의 기록을 비교하면, 한단고기에는 천산, 한인, 서자부, 웅족(웅족), 호족(호가)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천, 한인, 서자, 웅호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면 위와 같은 표현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한인의 한(桓)을 파자하면, 한은 木과 二와 日의 회의문자이다. 목은 동방을 의미하고, 이는 하늘과 땅, 일은 태양 일광 광명을 의미한다. 곧, 한인은 "동방의 밝은 어진이"라는 뜻으로서 인간 가운데 가장 현명하고 어진 성인을 지칭한다. 이에 반해 한인을 해석하면 "한은 만유의 한인"이라는 뜻으로 한인은 하늘님이며 제석을 의미한다. 천산은 중앙 아시아에 있는 산명이며, 천은 천상을 의미한다. 서자부는 한국의 한 부서명칭인데 서자는 첩의 자식을 지칭한다. 웅족과 호족은 인간이며, 웅호는 동물이다. 우리 민족의 상고사가 신화로 오해받게 되는 동기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원상 회복하면, 삼국유사의 하늘(천)은 천산, 한인은 한인, 서자는 서자부, 웅호는 웅족과 호족의 약칭 내지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인용한 서명을 밝히지 않고 막연히 기록한 옛 기록(고기)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사실을 은닉했을까? 삼국유사의 편자 승 일연(A.D.1206-1289)의 생존시대는 절대적 군사력을 가진 몽고가 고려정권을 지배하던 시대이다. 그러한 시대에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여리에 이르는 한국과 배달국 그리고 단군조선이 우리 민족의 고대국가였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몽고 만주 중국의 영토가 모두 우리 영토였다고 하는 주장과 같다. 그것은 몽고에 대한 정면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죽음을 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정사는 어떠한 형태로든 남겨야 한다. 그래서 한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 그리고 단군조선(檀君朝鮮) 곧 한인 한웅 단군을 祖 父 孫으로 압축 은닉해서 표현한 것이 삼국유사의 고조선기라 할 수 있다. 곧 삼국유사 고조선기의 기록을 사실대로 해석하면, 그것은 신화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한단고기의 기록이 민족의 긍지를 높이기 위한 위작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6. 문자가 있었다는 전거와 실증이 있다.


1) 문제점 : 한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한웅천황) 신시에 녹서, 자부에 우서, 치우에 화서, 복희의 용서, 단군에 신전(가림토, 가림다)이 있었고, 한자 역시 신시의 유법이라 하고, 이러한 자서들은 백산 흑수 청구 등 구려의 지역에 널리 쓰였다고 하였다. 특히 가림토에 대한 기록을 보면, 제작 동기와 그 자형까지 밝혀주고 있다.


경자 2년(B.C.2181) 시속(시속)이 같지 아니하고 방언이 달랐다. 상형표의의 진서(한자)가 있었으나 십가의 고을에서도 말이 통하지 못하는 일이 많고, 백리의 국가에서는 글자를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을 내려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니 이를 가림토라 하며, 그 글은


"ㆍ ㅣ ㅡ ㅏ ㅓ ㅜ ㅗ ㅑ ㅕ ㅛ ㅠ X ∋

ㅇ ㄱ ∪ ㅁ ㄴ △ ㅈ ㅊ ∧ ∧ ㆆ ∧ M

 ㅁ ∪

ㅣ⊃ ㄹ ㅐ ㅒ ㅡ ㅡ ㆍ ∧ ㄱ ㅜ ㅠ ㆍ

 △ ㄱ ㅈ ∧ ㆍ ㅡ ㅡ ㅍ"

 이다.

이상과 같이 태고시대부터 우리 민족사회에는 녹서, 우서, 화서, 용서, 신전(가림토), 한자가 있었다. 특히 가림토의 제작동기를 보면, 한자가 있었으나 이해하기 어려웠으므로 만들었다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용서는 이를 범어로 번역하면 Devanagari로서 범자를 의미하는데, 범자는 누구나 거의 인도족의 인도문자로 알고 있으며, 한자는 중국에서 전래된 지나문자로 알고 있다. 그리고 한글은 근세조선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래서 한단고기를 더욱 위서라 부정하게 된다.


2) 전거와 실증 : 종교가 있으면 반드시 경전이 있게 마련이며, 경전이 있으면, 반드시 문자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 나라에서 지금부터 약 6000년 전, 한웅천황이 설파한 종교가 있었다. 그러면 한웅천황 이전 또는 그 시대부터 문자가 있어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전거를 제시한다.


첫째, 고대 한글 곧 가림토에 대한 전거이다.

세종어제훈민정음서문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자를 신제하였다고 하였다. 신제란 구제의 반대말로서 구제에 근거하여 새로 제작하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세종 23년 갑자에 반포한훈민정음에 대하여, 세종실록 103권"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전조선 시대에 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하였으며, 또 계해 25년 12월 조에도 "10월 초 친히 말글 28자를 만드시니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하였다"고 하였다.


한글창제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신숙주의 후손인 18세기의 신경준이 쓴 『훈민정음운해』에도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나라에는 옛날부터 민간에서 쓰는 글자가 있었는데 그 수가 다 갖추어지지 못하고 그 모양이 일정한 규범이 없어 한 나라의 말을 적어내기에는 모자라나 일부 제한된 범위에서 쉽게 쓸 수 있게 되어있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의 문헌이 아닌 일본의 옛 문헌인 행지의『훈석언문해』에도 훈민정음에 대하여 "옛날체와 지금체의 두 가지가 있었는데 옛날체는 세 나라(삼한 곧 고조선) 시대 초에 만들어 전하는 것이고, 지금체는 이조 세종 때에 옛날 글자를 고쳐 만든 것이다. 지금 그 나라에는 옛날 글자는 없어지고 다만 지금 것만 쓰이는데 옛 글자는 지금 일본에서 전해 온 '비인서'<한국인의 글자라는 뜻으로서 일본에서는 신대문자라 이르고 있다>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전거 외에도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의 훈민정음서문, 최만리의 상소, 신채호의 국문의 기원 등에서 단군조선 시대에 옛 한글이 있었고, 현재 우리사회에서 쓰고 있는 한글은 세종대왕의 창제가 아니라 단군조선 시대의 옛 한글을 잘 다듬어 정리한 문자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1994년 12월 "고한글 비석 일서 발견"이라는 제하의 신대문자 기사가 문화일보에 실렸다. 신대문자는 일본의 신기 3종인 거울 뒷면에도 돌아가면서 새겨져 있고, 수 많은 신사의 위패 안에 지금도 신성하게 보전되어있다. 일본 대마도 아즈하라(엄원)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가림토의 모어로 보이는 최고형의 문자가 최근 만주와 경상남도 산청군 단속사터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기록과 실재적 증거에 의하면, 현재의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 시대의 가림토문자를 다시 잘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흔히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근세조선 시대는 절대군주 시대이다. 그러므로 창제란 표현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공을 신하들이 절대군주인 세종대왕에게 돌리기 위한 충성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곧 창제란 표현은 진실이 아닌 아부에서 비롯된 표현인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한자는 원래 우리 민족에 의해서 창제되기 시작했다.

한자는 자형 자음 자의의 3요소로 구성돼있다. 자음을 표기하는 발음부호인 반절음이라 한다. 반절음은 한자의 자음을 한자로 표기한 일자일음의 발음부호로써 한자를 창제한 민족의 발음을 기준으로 이뤄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반절음과 일치되거나 가깝게 발음하는 민족이 한자의 창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 민족은 북경을 '북경', 상해를 '상해'라 발음한다. 그러나 지나족은 북경을 '베이징', 상해를 '샹하이‘라 발음하여 일자이음인 경우가 있다. 반절음 역시 거의 우리 민족의 발음과 같고, 지나족의 발음과는 틀린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임승국은 한자 53,525자의 발음부호인 반절음이 모두 우리 말 기준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동이계가 황하문명의 주인공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고 하였다.


한자는 상형문자로서 한자를 만든 민족의 민속을 나타내기 마련인데, 한자의 상형이 우리 민족의 민속을 나타내고 있다. 예컨대, 우리 민족의 신화인 태양과 금까마귀를 상징한 날일(日)자, 집 속에 돼지를 기르는 민속을 반영한 집가(家)자 등이다. 진태하 교수는 이상과 같은 근거를 제시하면서 한자(漢字)라는 명칭은 옳지 않으며, 고대 한민족의 글이라는 "옛한글 혹은 동방문자(東方文字)"라고 불러야 옳다고 하였다. 한자의 창제설에 창힐설이 주류를 이루고, 기원설에 갑골문자 기원설이 있다. 그런데 창힐이 동이족이고, 갑골문도 동방기원설이 주류를 이룬다. 어느 측면에서 보든 한자는 우리 민족에서 처음 창제되기 시작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셋째, 복희의 용서는Devanagari(데워나가리) 곧 범자를 의미한다.

용서는 용 무늬 모양의 문자를 이르는데, 대승경의 산스크리트 문자 곧 Devanagari가 용 무늬이고 발음체계가 우리말과 같으며, Devanagari라는 뜻이 용서라는 뜻이다. 그리고 범어의 어의 어법이 우리말과 같다.


1) 어의가 우리말과 동일하다. 예컨대, 붇다(Buddha) 곧 불타는 세상을 "밝게 하는 사람, 밝은 사람"의 뜻으로서 우리 말의 "붉다 또는 밝다"와 같다. 니르반나(nirvana) 곧 열반(열반)은 안락(안락), 견성성불(견성성불), 곧 '깨치다. 깨치었느냐'를 의미하는데, 우리 말의 "닐봤나? 널봤나? 너를 보았느냐"의 뜻과 같다. 석가세존의 열반지인 구시나라(구시나라)는 구시국(구시국)을 의미한다. 이를 보면, `나라(나라)`는 곧 국가를 의미한다. 우리말에서도 국가를 `나라`라고 한다. 보살은 "보다와 살리다"이다. `차마(차마)`는 `참다(인)`의 뜻인데 우리 말의 `참다`와 같다.


2) 어법이 우리 말과 동일하다. 범서(범어)는 문장구조에 있어서 감탄문을 제외하면, 어떤 경우에도 주어가 선두에 오고 동사가 끝에 오며, 수식어는 피수식어를 선행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우리 말의 어순과 일치한다. 범서는 명사·대명사·형용사의 성 수 격이 그 어미 변화로 주어·목적이 등을 나타내며, 또한 인칭 수 시상 법 태를 주로 동사의 어미변화로 나타낸다. 우리의 언어도 범어와 같이 명사 대명사 형용사의 어미변화 즉 조사의 변화에 의해 주어 목적어 등을 나타내며(예컨대, 명사 또는 대명사에 "는 은 가 이"를 붙이면 주어가 되고 "을 를"을 붙이면 목적어가 된다), 또한 동사의 어미변화로 인칭 수 시상 법 태를 나타낸다(예컨대, 하라 하였다 하겠다 하자).


넷째, 현재에도 녹도문이 있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양하리 금산 암벽에 사슴뿔 모양의 옛 문자(녹서)가 새겨져 있다. 지금도 그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영변지를 보면 천부경 81자를 한자로 기록하고 그 뒤에 흔히 신지문자라는 사슴뿔 모양의 문자가 소개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환단고기에 문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사실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모순인 것이다.


7. 오행사상은 중국사상이 아니라 원래 신선도의 사상이다.


환단고기에 오행, 오행육정, 오행치수법 등 목화토금수의 오행사상이 자주 거론되는데, 오행사상은 중국사상이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천일 지일 인일의『一』의 순환론의 입장에서 천지인을 파악하면, 천일은 태양계, 지일은 지구계, 인일은 인체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번 회전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가 생기고, 사계를 성격과 기능에 따라 간략히 표현하면, 봄은 木, 여름은 火, 가을은 金, 겨울은 水에 해당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는 지구가 돌아가서 생김으로 지구인 토가 중앙에 위치하여 목 화 토 금 수의 오행이 된다. 또한 오행의 성격과 기능을 인체의 성격과 기능에 비유하자면, 오행은 오장과 오지의 성격과 기능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태백진교(신선도)는 천부에 근원하여 지전에 합하고 인사에서 끝난다고 한 것이며, 오행사상은 중국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연구해 보면, 중국의 유교와 도교 역시 태백진교(신선도)의 한 지류임을 알게 될 것이다.



8. 민본주의적인 표현은 삼신일체의 정치적 표현이다.


1) 문제점 : 한단고기 한국본기를 보면 상하에 차등이 없으며(상하무등), 남녀의 권한이 평등하고(남녀평권), 정사는 월권하는 일이 없다는 등 민본주의적인 표현들이 있다. 그래서 한단고기의 내용이 위작이 아니냐 하는데 대한 해설과 실증이다.


2) 해설 : 신선도의 발생원리는 천일 지일 인일의 일체이다. 여기에서 『일』의 쓰임을 인간이라는 위치에서 천지인일체를 파악하면, 천지인일체는 상중하일체 인권존중 인간평등 남녀평등 신분평등 만민일체 생명평등 등 민본주의 사상이 되고, 천일의 작용인 조화, 지일의 작용인 교화, 인일의 작용인 치화를 정치적 법률적인 용어로 바꾸면, 조화는 입법, 교화는 사법, 치화는 행정의 의미로 풀이된다.


곧 삼신일체는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 합의제가 된다. 단기고사를 보면, 전조선 제13세 단제 흘달 16년조와 후조선 제7세 단제 등을 2년조에 국가권력을 입법 사법 행정으로 3분하여 실시하였다 하고 『한단고기』 단군세기 제13세 흘달 16년(B.C.1767)에 주와 현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였으며,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이 없고, 정치는 법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고 한 것은 모두 삼신일체 사상의 정치적 표현인 것이다.


3) 실증 : 김상일 엮음,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을 보면, 한국 12연방의 하나인 수밀이국(Sumer국)에 B.C.3000년 경 의회제도와 법원이 있었고, 아시아에서 왔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한단고기에 민본주의적인 표현들이 있다고 하여 한단고기를 위서라 불신함은 제 민족의 사상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9. 영고탑은 지명이 아니라 영안의 옛 탑이다.


1) 문제점 : 한단고기에 영고탑이란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영고탑은 중국 청나라의 조상 여섯 형제가 이곳 언덕에 자리 잡고 산 데서 생긴 지명이라 주장하면서 청나라 이전의 단군조선 시대에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이에 따라 한단고기를 청나라 건국 이후의 위작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 근거를 보면, 『만주원류고』를 들고 있다. 거기에 대한 해설이다.


2) 해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만주어로 여섯은 영고라 하고, 자리는 특으로서 영고특에서 영고태로, 영고태에서 영고탑으로 와전된 것이며, 구설로서 지명이 아니라 했다. 곧, 영고탑이 지명이라는 만주원류고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희승 『국어대사전』에 영고탑을 영안이라 하고, 영안을 역사적 고성이라 하였다.


『성호사설』에도 영고탑은 오랄(오랄), 애호(애호)를 합하여 동삼성의 하나라 하고, 성이 높고 호(해자. 도랑 못)가 깊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영고탑은 해자로 둘러싸인 성벽 안에 있고, 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그 성벽 안에는 옛날 절이 있었다고 추정되며, 절이 없어진 후에는 그곳에 한 때 왕궁이 있었거나, 아니면 막대한 세력을 가진 어느 추장의 저택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단고기에도 영고탑은 단군조선 시대부터 존재하여 거기에서 회의를 하고, 한인 한웅 치우 단군왕검을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때로는 탑을 수축했다는 기록도 있고, 그밖에 영고탑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운교의 원로이시며, 제 18대 총무원장을 역임했던 불호자 문태규 선생이 저술한, 『궁을도덕』을 보면, 수운교의 신앙대상이며, 우주를 상징한 천단의 유래를 밝히는 대목에서 "일찍이 한웅천황 시대에는 상제님의 위인 천단(신단)에 모셨고, 단군시대에는 만주 영고탑에 모셔 경천하였으며, 근세 고종황제께서는 서울의 원구단에 모셨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영고탑은 신단을 모시는 건물 모양의 탑인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판단하면, 영고탑은 글자의 뜻 그대로 영안의 옛 탑으로서 단군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건물 모양의 탑이었던 것이다. 청나라 때에 생긴 지명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영고탑이 없어지고 오래되면서 지명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광화문은 조선조 태조 때에 지은 경복궁의 남문이며, 종각은 서울시 종로 1가에 있는 종을 달아매는 누각인데, 오늘날 광화문과 종각은 한편 지명이 되고 있다. 그와 같이 현재는 영고탑이 지명이 되고 있으나, 원래 지명이 아니라 영안의 옛 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고탑을 이유로 한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연구 부족에서 비롯된 오해라 할 수 있다.



10. 국호와 도읍지와 건국년대가 일치한다.


『한단고기』 단군세기에 무진 원년에 단군왕검이 구한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고, 구규를 부활하여 아사달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에도 위서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는데 요와 같은 때였다"고 하였다. 또 『제왕운기』는 단군왕검의 조선건국을 무진이라 밝히고 있다. 즉 국호 조선과 도읍지인 아사달과 건국년대에 대한 기록이 한단고기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동일하다. 이것 또한 한단고기가 위서가 아님을 입증한다.



11. 태백일사의 기록은 포박자 기록과 일치한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이르기를 "삼황내문을 자부선생이 황제 헌원에게 주어서 마음을 밝히고 의로 돌아가게 하였다. 선생은 항상 삼청궁에 계시니 그 궁은 청구국 대풍산의 양지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청구국(배달국의 이칭) 자부선생이 도교의 기본경전인 삼황내문을 중국의 황제 헌원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 4세기 경 지나의 갈홍 『포박자』 내편에 "옛적에 황제가 있었는데 동으로 청구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다가 자부선생을 뵈옵고, 삼황내문을 받아 갔다"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지나인이 기록한 포박자의 기록과 우리 민족의 기록인 태백일사의 기록이 서로 일치되고 있다. 그러므로 한단고기의 기록은 조작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12. 천문현상이 일치한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표준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는 『한단고기』『단기고사』에 나타난 당시의 천문현상을 천문과학적인 방법으로 검증한 결과 "2백 50년에 한번 관측되는 오성결집이나 일식 조수간만의 차이 등 기록이 96% 내지 99.3%로 정확하다며, 단군조선이 한낱 신화가 아니라 실재하였이 증명된다“고 결론을 지었다. 이에 대해 정신문화연구원의 박성수 교수"기존 학계의 그릇된 통념을 깨는 획기적인 연구이다. 이들 사서를 연구하여 보지도 않고 백안시하여 온 학계의 풍토는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3. 기타 기록이 일치한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에 기록된 "건흥오년세재병진"이라는 명문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책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조대기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부는 광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의 묘지에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라 명기하고 있다. 따라서 이상 한단고기의 기록은 사실과 일치하고, 오히려 기존 사서보다 더욱 자세하다. 그러므로 한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연구부족에서 비롯된 오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단고기에 평양의 명승지인 모란봉이 나오고, 고구려의 교육기관인 경당(경당)과 관직명인 욕살(욕살)이 나온다. 이로 인해 한단고기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으나, 모란봉은 산명으로서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것이며, 경당은 교육기관이며, 욕살은 관직명인데, 소도제천의식과 함께 있었던 고대의 제도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고려가 고구려의 이름을 계승하고, 근세조선이 고조선의 이름을 이어받은 격이다. 따라서 모란봉과 경당과 욕살 역시 사실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14. 한단고기가 지금 출현한 이유와 그 밖의 문제


『한단고기』는 지금이야 갑자기 세상에 나왔으니 어느 국수주의자의 위작이 아니냐 하고 의심할 수 있다. 한단고기에 인용된 사서에 의하면 몽고와 만주대륙과 지나대륙 일대가 거의 태고시대 우리 민족의 강토였다. 그러므로 이들 사서를 인정하면 우리 나라와 몽고 및 지나 사이에 국경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단고기는 숨어있지 않을 수 없었고, 지금에야 세상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한단고기는 자체 내에도 불일치되는 내용이 있고, 다른 고서와도 상치되는 내용이 일부 있다. 그래서 한단고기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하여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연구해 보지도 않고 부정함은 책임회피인 것이다.

출처 : 동이민족 역사사료
글쓴이 : 稽古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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