桓檀古記 僞書論 批判 (3)
安 昶 範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한국철학)
Ⅲ. 위서론자들의 오류
1. 한단고기 오역
1) 한단고기의 유래 : 위서론자들이 『한단고기』를 위서로 오인하게 된 과오를 지적하기 전에 범례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단고기의 유래를 요약 소개한다.
삼성기전 상편은 신라의 고승 안함노가 찬한 것으로 계연수 선생댁에 소장됐던 것이며, 삼성기전 하편은 원동중이 찬한 것으로 백진사 관묵에게서 얻었다 하고, 단군세기는 고려의 문인 이암이 편찬한 것으로 이 책 역시 백진사 관묵에게 얻었다고 했다. 북부여기 상하는 고려 말기의 학자 범장이 찬한 것으로 삭주 이동 이진사 형식의 집에서 얻었다고 했다.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 이맥이 엮은 것으로 해학 이기 선생이 소장했다. 개천 5808년(서기 1911),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쳐 계연수 선생이 정성을 다하여 선지(줄친 종이)에 글을 잘 쓰고, 홍범도와 오동진의 출금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고 나무판자에 새기게 되었다. 그 뒤 1920년 계연수 선생이 운명할 때, 제자 이유립에게 다음의 경신년(1980)이 되거든 『한단고기』를 세상에 내놓으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발문을 보면, 개천 5846년(서기 1949) 오형기씨가 이유립씨로부터 위촉을 받고 한단고기를 정서하였다. 그 뒤 개천 5876년(서기 1979) 수 십 부가 영인된 후, 녹도승라는 일본인이 한단고기를 번역하고 영인본과 함께 출간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한단고기의 내력이 일목요연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사학자들과 일부 사계학자들이 시비를 제기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직접 소개한다.
2)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의 주장 : 정신문화연구원의 정영훈은 제기하기를 "적어도 이 책(한단고기)이 계연수의 『범례』와 오형기의 『발문』에서 말하는 1911년 편집과 1949년 필사 사실부터 확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만 확인되더라도 『한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는 대단할 것이며, 이유립 선생이 창작한 '위서'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1911년의 편집과 1949년의 필사설을 확증할만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환단고기는 이유립 선생이 창작한 위서가 아니냐 하고 의심된다는 것이다. 역설할 경우, 물증이 있으면 위서가 아니라 진서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희대의 조인성은 "만약 이유립이 인쇄본을 갖고 있었다면 굳이 그것을 정서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한단고기』공개자로 알려진 이유립도 인쇄본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과연〈범례〉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한단고기』는 인쇄되었던 것일까.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곧 정서를 했다는 것으로 볼 때, 인쇄본이 없는 것이 확실하고, 인쇄본이 없으므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위조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3) 문제되는 내용과 위서론자들의 과오 : 그러면 위서론자들이 어디에서 과오를 범하고 있는가? 문제되는 내용은 『한단고기』 범례 말미에 기록된 다음의 문장이다.
"桓檀古記悉經 海鶴李先生之監修 而且余精勤繕寫 又因洪範圖吳東振 兩友之出金付諸剞劂"이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국역하면, "한단고기는 모두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쳤으며, 또한 내(계연수)가 줄친 종이에 또박 또박 베끼고(선사), 홍범도와 오동진 두 벗의 출금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에 부탁하여 나무판자에 조각칼과 조각끌로 (글자를) 새겼다(기궐)"는 뜻이다.
그러나 한단고기 위서론자들은 위의 문장을 오역하고, 그것이 한단고기 위서론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오역부분을 지적하면, 한단고기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계연수 선생이 '선사(선사)'했다는 단어를 "고쳐쓰다. 옮겨쓰다. 정서하다. 필사하다"로 오역하고, 여러 사람에게 부탁해서 '기궐(기궐)'했다는 단어를 "인쇄 또는 편집"으로 오역하고 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자. 계연수 선생이 만약 『한단고기』를 인쇄했다면,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 부탁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또한 인쇄했다면, 후에 정서할 필요가 있겠는가?
자전에 의하면, 선사(선사)의 선자는 "(실로)깁다. 꿰매다"의 뜻이며, 사자는 "베끼다. 그리다. 본뜨다"의 뜻으로서 「선사」는 "줄을 상하좌우로 곧게 쳐진 바둑판 같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듯이 글자 하나 하나를 또박또박 베끼다"는 뜻이다. 곧 선사를 "잘 그리다. 잘 베끼다. 정서하다"는 뜻의 선사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기궐(기궐)의 기는 끝이 굽은 '조각칼', 궐은 끝이 굽은 '조각끌'을 의미하는 글자로서 「기궐」은 "조각칼과 조각끌로 나무판자에 글자를 또박또박 새기다"는 뜻이다. 또한 인쇄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기궐이라 표현하는 경우도 있으나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고 굴속에서 작업했던 것으로 보아서 인쇄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한단고기』는 처음에는 인쇄되었던 것이 아니라, 판각되었던 것이며, 종이에 찍은 간단한 인쇄본이 아니라, 나무판자에 각자한 방대한 양의 판각본 또는 목판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단고기』 판각본은 누구에게나 쉬이 보일 수 없는 것이며, 지금도 어디에 한단고기 원본인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와 목판책이 비장되어 있을 수 있으나, 단군상도 이를 철거하라고 파괴하는 이 때에 남북이 통일되고 민족적 자주의식이 강해질 때까지는 세상에 나올 수 없다고 본다.
4) 환단고기 목판책 작성의 이유 : 그러면 어째서 『한단고기』를 종이에 인쇄하지 않고, 나무판자에 각자했을까? 그때는 1911년 한일합방 직후다. 일경과 일군이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을 마구 체포 구금할 때다. 한단고기를 선사한 계연수와 출금한 홍범도와 오동진은 애국자이며 독립운동사로서 시중 출입이 불가능한 체포구금 대상 인물이다. 신변이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한단고기를 필사하려면 종이를 구입해야 하고, 종이를 구입하려면 신변이 노출되기 쉽다. 그래서 필사하지 않고, 사람 출입이 없는 묘향산 단굴암 곧 단군굴 속에 숨어서 나무판자에 한단고기를 새겼던 것이다. 참으로 비통하고 충성 어린 작업이었던 것이다.
2. 실증사학의 모순
『한단고기』부정은 한문오역 외에 실증사학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증사학에 대해 그 모순을 몇 가지 비판한다.
1) 실증사학을 맹신 할 경우, 적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 실증사학은 고고학에 기반을 둔다. 고고학은 20세기 초에 이르러 학문으로 성립됨으로써 극히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사이에 지구 전체를 조사하거나 파 볼 수도 없는 것이다. 파본다 하더라도 고대로 올라갈수록 실물이 멸실되어 확인할 수 없는 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실증사학만을 신봉할 경우, 적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으며, 현대사 내지 근세사만을 인정하고, 고대사를 무조건 부정할 우려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실증사학은 영국 불란서 독일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수단으로 이용하던 학문이다. 다시 말하면, 짧은 역사를 가진 서양사회가 오랜 역사를 가진 동양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학문이다. 이상과 같이 좋지 못한 역사와 모순을 지니고 있는 학문이 실증사학이다. 그러므로 실증사학을 우리사회에 무조건 적용함은 크나큰 모순이라 할 수 있다.
2) 실증사학의 배경인 서양문화의 원형(patten)에 있어서 동양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 서양문화는 헬레니즘(그리스 중심) 문화와 헤브라이즘(유태교와 기독교 중심) 문화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두 문화의 공통점은 유목문화이며, 자연정복문화이다. 동양문화에도 불교 유교 도교에 따라 다소 다르나 공통점은 농경문화이며 자연조화문화이다. 이와 같이 서양문화와 동양문화는 그 발생배경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또한, 서양문화는 그 발생배경을 연구해 보면, 인간의 사회적 경험과 배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그러나 『주역』 풍지관에 "하늘의 신비한 이치를 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돌아감이 어김없는지라, 이에 성인이 신비한 이치(천도)로서 종교를 창설하니 천하가 잘 따르더라"고 한 바와 같이 동양문화는 천도를 발생학적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또한 서양문화의 우주관은 창조론으로서 자연질서를 인간 위에 천신이 있고, 인간 밑에 동식물이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서양문화는 천지인의 관계를 수직적 위계관계로 본다. 이에 반해, 동양문화의 우주관은 순환론으로서 천지인의 관계를 수평적 일체관계로 본다. 이와 같이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는 발생학적 배경과 발생원리 그리고 우주관 등 문화의 원형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문화의 원형이 다른 서구학설을 동양문화에 무조건 적용시키는 것 자체가 둘째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3) 실증사학은 후진사회를 배경으로 성립된 학설이다 : 불서에 의하면 천지의 중앙에서 역대 부처님이 모두 탄생하였다. 이를 풀어 말하면, 지구의 중앙에서 역대 성인이 모두 탄생하였고, 문화가 먼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대각자인 부처님의 말씀으로써 함부로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세계지리학회의 보고에 의하면, 지구의 중앙 곧 5대양 6대주의 중앙은 우리 나라의 백두산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세계문화의 최초 발상지는 우리 나라의 백두산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곧 우리 나라가 서양보다 먼저 개화되었다는 것이다. 고대에 있어서 서구사회는 우리 나라보다 후진사회였다는 것이다. 서구사회가 유년기였다면, 우리사회는 청년기였다는 것이다. 현대 종교를 예로 들면, 서구종교인 기독교의 출현은 지금부터 2천년 전후인데, 동양종교인 불교와 유교의 출현은 2천 5백년 이전이다. 이를 보아도, 실증사학은 분명히 후진사회를 기준으로 성립된 학설이다. 따라서 그러한 학설을 선진사회였던 동양사회에 무조건 적용시키는 것 자체가 셋째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Ⅳ. 맺는말
이상과 같이 『한단고기』의 내용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사실과 일치되었다. 그리고 『한단고기』를 위서로 곡해하게 된 결정적 원인도 한문오역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한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 진서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 모든 학자들은 한단고기를 마음껏 거리낌 없이 자유로이 인용해도 하등의 모순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원래 고집이 세고 자기의 학설을 쉬이 바꾸려 않는다. 마찬가지로 한단고기 위서론자들도 자기의 학설을 바꾸어 본 연구를 쉬이 받아들이려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외람되나마 한단고기 위서론자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뜻에서 그들이 과오를 범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과 사회적인 배경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한다. 일대 반성이 있기를 촉구한다.
첫째, 자아반성과 사실검증의 결여에 문제가 있다 : 실증사학자들은 모든 일에 실증과 검증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한단고기를 비판하기 앞서 자신의 학문적인 소양과 능력 그리고 역사적 안목에 대해서 먼저 스스로 검증하고 반성했어야 한다. 그리고 만년 이내의 동양사와 민족사를 충분히 연구한 연후에 한단고기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과 대조하고 확인한 다음, 한단고기의 내용에 모순이 있으면, 그것을 비판했어야 했다.
그것이 한국사 연구의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단고기』영구보존을 위한 "선사와 기궐"을 오역하고 있으니 연구의 넓이와 깊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한단고기의 내용은 7000만 민족의 명예와 직결되는 문제로서 그 비판은 신중에 신중을 다했어야 했다. 깊은 반성과 자아비판이 있기를 바란다.
둘째, 학문의 동기와 목적의 모호성에 문제가 있다 : 어렸을 때의 공부는 일반적으로 취미나 적성에 따른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는 투철한 사명감에서 수행되어야 하고, 학문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나 개인보다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애국자인 독립운동가들의 글에 대해 위서니 조작이니 거리낌 없이 혹평하고, 일제시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하고 상해임시정부를 주도한 대종교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와 참전계경을 위서 또한 위작이라 비난하는 것을 보면, 실증사학자들이 학문을 하게 된 동기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극히 애매 모호하고 건전하다고 할 수 없다. 여기에서 『한단고기』를 위서로 곡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부정을 위한 부정에 문제가 있다 : 서구학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아무리 태고시대의 국가라 하더라도 한국과 배달국 그리고 단군조선에 대한 유적과 유물이 출토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를 확인해 보지도 않고 부정하고 있다. 확인했다면, 부정하는 이유, 곧 그 유적유물에 대한 측정도구, 측정방법, 측정과정 등 어디에 모순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함도 없이 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서론자들의 한단고기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넷째, 서구학설을 맹신하는 사학계의 풍토에 문제가 있다 : 서구학설은 서구인에 의해 성립된 서구제일주의 학설로서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실증사학계는 서구학설을 진리같이 맹신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단고기』를 위서로 곡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 사근취원하는 교육풍토에 문제가 있다 : 먼 것보다도 가까운 것부터 먼저 공부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교육풍토는 가까운 것인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보다도 먼 것인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에 시간을 더 할애한다. 그것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 무식하게 되고, 그 무식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왜곡하고,『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곱째, 우리 나라는 태고시대에 이미 동방예의지국이었고 군자지국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 동방예의지국이니 군자지국이니 하는 말은 태고시대의 우리 사회에 이미 높은 수준의 사상과 문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허무한 조작같이 무시하고 있다. 그것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에 대해 소홀하게 되고, 그러한 소홀함이 무식을 낳고, 무식이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덟째, 자연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무시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 자연에 춘하추동이 있고, 인생에 생로병사가 있어 자연과 인생이 무상하듯, 문화도 거기에 생성소멸이 있어 시간적 공간적으로 돌고 돈다. 오늘날 지구상의 어느 곳에 고도의 문명사회가 있는가 하면, 다른 곳에는 고도한 문명사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법칙 몰이해가『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의 지적을 간단히 요약하면, 실증사학자들에게 민족적 주체의식 내지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정신교육의 기초를 연구하는 국사학자들에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실로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심각한 반성과 자기비판이 있기를 촉구한다. 아울러 자신의 안목과 사고방식이 과연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가를 자연인의 입장에서 되돌아보기를 촉구한다. 파란안경이든 검은안경이든 색안경을 벗고 사물을 볼 것을 촉구한다. 곧 과거의 학설과 종교적 신념과 나는 이렇게 배웠다. 또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민족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신장이 1m 75cm면 정상적인 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을 만났을 때, 1m 50cm밖에 안 되는 사람은 부러워할 것이며, 키가 2m 되는 사람은 무시할 수 잇을 것이다. 한가지 더 예를 들면, 서기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우리 나라의 사학자들 거의가 『삼국유사』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학자들이 『삼국유사』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본다. 그와 같이 『한단고기』를 보는 시각이나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보는 안목도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느냐, 부정적인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단고기 위서론자들도 생각과 태도를 바꿔 한단고기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고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
그래도 한단고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영원히 신화 속에 묻혀 두자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격으로서 다음과 같은 비민족적 비애국적 주장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첫째, 그것은 되살아나는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꺽는 주장이다.
둘째, 그것은 9000년 내지 6000년의 민족사를 단축시키는 주장이다.
셋째, 그것은 진실한 민족사관 정립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넷째, 그것은 민족적 자주의식 확립을 저해하는 주장이다.
다섯째, 그것은 민족총화를 저해하는 주장이다.
여섯째, 그것은 선지자들의 교시인 원시반본을 거부하는 주장이다.
일곱째, 그것은 신진 사학자들의 태고사 연구열의를 꺽는 주장이다.
『한단고기』를 위서로 간주하여 수용하지 않을 경우, 분명히 이상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단고기』 위서론자들은 그러한 민족적 피해를 무엇으로 보상하고 어떻게 책임지겠는가? 특히 단군이라는 이름까지 붙인 단군학회가 『한단고기』를 위서로 간주하여 그러한 글을 학회지 『단군학연구』(제2호)에 싣고, 한인 한웅 단군에 대한 역사를 신화로 취급하고 있으니 극히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군학회의 결성 취지가 어디에 잇는 것인지 깊은 반성이 있기를 촉구한다.
[출전 : 우리역사의 비밀 www.coo2.net]
시대소리 //news.sidaesor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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