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아래 “한단고기 위서론 비판”은 인터넷상에서 유통되는 글을 강조 편집하여 올린 것입니다. 그런데 <「한단고기 위서론 비판」(1)(2)(3),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2006>의 논문자료와 대조하여 본 결과 상당 부분에서 첨삭이 이루어졌습니다. 즉 아래 글은 원전에 상세설명까지 덧붙인 형태이고 일부는 대체된 것으로, 원작자가 일반 대중화용으로 논문을 개작하여 보급한 것인지, 아니면 인용한 이 분야 연구자가 원전에 살을 붙여 개작한 것인지 아직 확인이 안 된 상태입니다. 또 아니면 아래의 단기계산 글을 볼 때는 원저자가 2001년에 작성한 판본 같기도 합니다. 아래 글이 원작자의 의도가 아니라면, 학문 왜곡에 해당할 것입니다. 조만간에 2006년본 원전을 추가로 올려(문서화 작업 중) 독자가 판단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桓의 음역을 “환”이 아닌 “한”으로 읽는 학자들의 고증에 의견을 같이하여 편집자가 정리함>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 (1)
安 昶 範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한국철학)
차 례
Ⅰ. 문제의 제기
Ⅱ. 한단고기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Ⅲ. 위서론자들의 오류
Ⅳ. 맺는말
Ⅰ. 문제의 제기
『한단고기』는 환웅 개천 5808년(서기 1911년) 광무 15년 5월 광개절에 계연수 선생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한단고기』라 했다고 그 범례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자 암흑세계가 지나가고 광명이 비추이듯, 우리 민족의 태고사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실로 한단고기에 의하면 우리 민족의 태고사는 너무나 찬란하고, 우리 민족은 뛰어난 문화와 사상을 지닌 민족이었다. 중국과 인도의 문화만을 받아들였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를 중국과 인도로 수출하였던 문화민족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국가를 창설하고, 종교를 탄생시켰던 문화민족이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이웃 민족들로부터 동경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시기질투의 원인이 되었다. 우리 민족의 국서고가 소실되고 태고사가 신화로 몰리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승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는 우리 민족의 태고사는 신화같이 서술되고 있는데, 『한단고기』에는 너무나 찬란했던 것으로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곧, 『한단고기』에는 지금부터 약 9200년 전,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여리에 달하는 12연방의 환국이 있었다는 기록과 이를 이화한 7세 한인이 등장하고,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의 경전과 삼륜, 오계, 팔조, 구서 등의 계율과 덕목이 나오며, 한웅천황이 개천하여 삼신으로 종교를 창설했다는 이야기, 태고시대에 문자가 있었다는 기록, 중국의 유교사상으로 알고 있는 오행사상, 18세 한웅과 배달국에 대한 기록, 단군왕검과 47세 단군에 대한 역사, 그밖에 상하무등, 남녀평권, 분권관경제니 하는 민본주의적인 표현, 청나라 때 생긴 지명이라는 영고탑 등 도저히 현대적인 상식과 짧은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범례와 발문을 보면, 한단고기 원문인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 네 책의 찬자와 편자 그리고 소장자를 소상히 밝히고, 또한 서기 1911년 민족적 치욕인 한일합방 직후, 사람 출입이 없는 묘향산 단군굴 암자에 숨어서 한단고기를 계연수 선생은 줄친 종이에 잘 쓰고, 홍범도씨와 오동진씨가 돈을 내놓음으로써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여 나무판자에 새기고, 1949년 이유립 선생의 위촉을 받아 오형기씨가 정서한 사실까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곧 한단고기는 원래 인쇄본이 아니라 목판본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학자들은 그때의 상황을 정상적인 상황으로 생각하여 한단고기 범례의 선사를 정서로, 기궐을 인쇄로 오역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단기고사 한단고기 규원사화 등 이른바 재야사서가 위서라는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한단고기를 위서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바로 풀릴 경우, 한단고기와 단기고사 그리고 규원사화 등 사서가 위서라는 함정에서 해방되고, 아울러 우리 민족은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창조한 세계적 문화민족이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위에 제시한 문제들에 대해 해설과 전거와 고고학적 실증을 제시함으로써 한단고기의 기록이 어느 누구의 조작이거나 위작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밝히고, 한단고기 위서론이 실증사학자들의 한문오역에 있음을 밝혀 한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 진서임을 입증코자 한다. 그러나 본 연구 역시 완전한 것이 아니며, 앞으로 더욱 보완되어야 할 것임을 밝혀둔다.
Ⅱ. 한단고기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1. 한국은 실재했었다.
1) 문제점 : 한단고기에 의하면 지금부터 9천 2백여년 전, 중앙 아시아의 천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5만리, 동서로 2만여리에 달하는 12연방의 거대한 한국(桓國)이 있었고, 이를 3301년 간 무위이화한 7세 한인(桓因)이 있었다. 그래서 한단고기는 믿을 수 없다는데 대한 해설과 전거와 고고학적 근거이다.
2) 해설 : 한국은 한인에 의해 무위이화하는 신교국가로서 신정일치의 국가였다. 신정일치란 신교(신선도의 고전적 표현)의 원리가 정치의 원리이며, 신교의 영역이 정치영역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한국의 영토가 남북으로 5만리, 동서로 2만여리라 함은 신교의 보급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며, 군사적 정치적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시아 일대와 유럽에까지 샤머니즘 현상이 있고, 지석묘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19세기 말엽부터 1930년대에 걸쳐 중앙아시아 타림분지 주변의 유적조사 발굴이 성행하였는데, 그 결과 종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언어와 문자로 된 전적류가 많이 발견되었다. 이 전적류를 불교 측에서는 불교의 전적이라 하지만, 종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언어와 문자로 되었으므로 불교의 전적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곧, 신교의 전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전적류의 발견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국이 실재했었고, 한국은 태고시대 종교사회였음을 실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이 12국으로 되었다 함은 신교의 보급영역을 신선도의 12지지에 의한 분류의 표현으로서 지금과 같이 주권, 국민, 영토가 독립된 국가가 아닌 것이다.
신선도(신교)와 불교를 연구해 보면, 이들 종교는 근본적으로 같은 중교였고, 신선도를 천산과 불교의 수미산은 같은 산인데, 천산은 중앙 아시아에 현재도 존재한다. 칠세 한인은 불교의 전칠불에 해당한다. 이상과 같이 볼 때, 신선도를 모르는 사람은 한단고기를 조작할 수도 없는 것이며, 한단고기를 조작할 정도라면, 신선사상의 대단한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서 그러한 사람은 부귀영화와 명예를 초월한다. 따라서 조작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3) 전거 : 그러면 한국 12국에 대한 전거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 12연방 가운데 수밀이국(Sumer)과 우루국(Ur)이 서양사에 나오고, 일부의 이름이 중국의 사서인 「진서」<비리국등십국전>에 나온다.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하며 영지의 호수는 이만이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하는데 영지의 호수는 이만이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 하는데 영지의 호수 오만여이다.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 가야 한다. 이를 헤아리니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 한다".
숙신은 삼국시대 이전까지 백두산 북쪽에 웅거하던 나라로서 한편 고조선의 별칭이라 일컫기도 하며, 우리 민족이 세운 고대국가를 지칭한다. 진서는 당 태종이 방현령, 이연수를 비롯한 20여명의 학자들에게 명하여 편찬한 동진과 서진의 사서로서 25사의 목록에도 올라 있는 중국정사이다. 이러한 책에 한단고기에서 말하는 12제국의 이름이 실려 있고, 강역까지 5만여리라는 일치된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실존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2연방의 한국이 있었다는 한단고기의 기록은 누구의 위작이나 조작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제1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4) 고고학적 근거 : 실재적 증거의 문제이다. 최근의 소련의 고고학자 비탈리라리 체프가 『시베리아 구석기문화』에서 1975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시베리아 중부 노보시비로크산(Novosibirok산) 및 아바칸산맥(abakan산맥)의 계곡에서 3만 5천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하였다. 말라이아뉘아 구석기 유물로 알려진 이 자료는 우리의 것과 매우 유사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유물들 가운데는 탁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도 있어서 종래의 서양학자들이 설정하여 놓은 원시의 개념을 뒤엎고 있다. 특이한 것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아바칸 산맥은 중앙 아시아의 바이칼 호수와 매우 가까운 곳으로 한인왕조가 7세 3301년 간 통치할 때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한인의 한국시대가 비록 태고시대라 하더라도 원시시대라 할 수 없고, 한국의 존재를 함부로 부정할 수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곧 한국의 실재에 대한 한단고기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이 제2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사실이 실려 있다는 이유로 한단고기를 위서라 부정함은 이론을 무시한 부정을 위한 부정이라 할 수 있다.
2. 한웅천황의 개천설교 역사적 사실이다.
1) 문제점 :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을 보면, 지금부터 약 6000년 전, 배달국의 초대 한웅천황이 개천하여 삼신으로 종교를 창설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지금부터 6000년 전은 흔히 원시시대라 한다. 계연수 선생이 목판에 글자를 새겨 한단고기를 보관할 때는 한일합방 직후로서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때였다. 그러므로 한웅천황이 종교를 창설하였다 함은 민족의 긍지를 높이고 자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조작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본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비교적 자세히 논증한다.
2) 한웅천황은 부처님으로서 실존인물이었다 : 한웅의 한(한자음으로는 환)을 파자하면, 환은 木 二 日의 회의문자이다. 목은 동방, 이는 하늘과 땅, 일은 태양, 일광, 광명, 빛을 의미한다. 웅은 "어른, 우두머리, 수컷, 아범(아버지·남편의 비칭)"의 뜻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하면, 한웅은 밝으신 어른, 밝아범, 박가범(박가범)을 의미한다. 불교사전에 박가범은 바가바(파가파)로서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이라 하였다.
이는 한웅천황이 부처이며 아미타불임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절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석가불을 부르지 않고, 남무아미타불을 불렀던 것이며, 지금도 석가불보다 남무아미타불을 많이 호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미타불은 남쪽에 없다"는 뜻의 남무아미타불이라 호칭하는 것도 이유 있는 것이며, 그 속에 어떤 암시가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아미타불의 의상은 전신을 가리고 있는데, 그것은 인도풍이 아니라 한국풍이다. 천황은 천도를 대각한 거발한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웅천황이 신화적인 가상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실존 인물이란 것이다. 그 증거가 있다.
첫째, <신시역대기>에 의하면, 한웅천황은 배달국의 초대천황으로서 94년 간 황위에 있었고, 120세까지 살았다. 이는 역사적 실재 인간으로 생존했던 기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한웅천황은 역사적 실재 인물인 것이다. 다만 생년월일시와 졸년월일시만이 안 밝혀지고 있을 뿐이다.
둘째, 종교창설은 역사적 실재 인물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한웅천황이 종교를 창설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셋째, 종교를 창설함으로써 환웅천황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아울러 국가적으로는 국토를 수호하는 호국신 내지 산신이 되기 마련인데, 그것이 오늘날 일본에 건너가서 산악신앙의 대상이 되고, 그 유상이 북구주 복강현 전천군 첨전정 영언산 신궁에 안치돼있다. 이에 대해서는 박성수 교수 지음 『단군문화기행』을 참고해주기 바란다.
3) 한웅천황의 개천설교에 대한 기념행사가 오늘날 개천절 행사이다 : 우선 개천의 의미이다. 개자는 "열리다. 지혜의 문이 확 열리다. 크게 깨치다. 크게 통하다. 꽃이 피다"의 뜻이며, 천자는 하늘 땅 사람의 회의문자로서 天一 地一 人一 삼신일체의 천도를 의미한다. 곧 개천이란 "천일 지일 인일 삼신일체의 천도를 크게 깨치다"는 뜻이다.
설교의 의미이다. 설은 "짓다. 만들다. 세우다. 설치하다. (은혜룰) 베풀다"의 뜻이다. 교는 "가르치다. 본보이다. 교육의 지침. 종교"의 뜻이다. 곧 설교는 "종교를 창설하다. 종교를 세우다"의 뜻이다. 설교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정리하면, 개천설교란 한웅천황께서 천일 지일 인일 삼신일체를 크게 깨치어 종교를 세웠다는 뜻이다. 단군세기에 단군왕검이 개천 1565년 10월 3일에 조선국을 세웠다 하였고, 금년이 단기 4334년이므로 한웅천황이 개천설교한 때는 지금부터 (1565+4334-1=)5898년 전, 음력 10월 3일인 것이다. 곧 오늘날의 개천절 행사는 한웅천황의 개천설교를 기념하는 행사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단고기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한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 진서인 것이다.
4) 삼신은 종교창설 근본원리이다 : 한웅천황께서 삼신으로 종교를 세웠다고 한다. 삼신이란 천일 지일 인일을 의미한다. 『일』은 천지인을 어떠한 위치에서 파악하느냐 하는 천지인의 쓰임(작용) 이다. 이에 따라 일을 기의 위치에 두고 천지인을 파악하면, 天一 地一 人一(천일 지일 인일)은 天氣 地氣 人氣(천기 지기 인기)를 의미한다. 천기(공기와 햇볕) 지기(물과 곡식) 인기(부모조상의 유전)는 인체계에서 기 심 신 내지 명 성 정과 불가분적인 관계를 지닌다.
氣 心 身 내지 命 性 情을 닦고 수련하는 것이 도 불 유의 삼교이다.
그래서 丹書口訣에 "천 지 인을 삼재라 하고, 도 불 유를 삼교라 하니, 삼재에서 삼교가 성립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천일은 태양계, 지일은 지구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주역 풍지관에 "하늘의 신비한 이치를 보니 사시의 운행이 어김없는지라, 이에 성인이 신비한 이치로서 종교를 세우니 천하가 잘 따르더라"하였고
동문선에도 "신비한 이치로서 종교를 세우니 태평이 가득하다"하여 주역과 동문선이 태고시대에 우리 사회에 성인이 있었고, 그 성인이 4계가 돌아가는 천도에 의해서 종교를 세웠다고 밝히고 있다.
곧 도 불 유 삼교는 자연적인 천도를 배경으로 성립됨으로서 거기에 수용이니 조작이니 재구성이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한단고기에 종교를 고의적으로 조작해 기록했다면, 그 종교를 삼신사상이나 4계가 돌아가는 원리에 의해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종교를 삼신사상과 4계가 돌아가는 원리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고, 한단고기를 위서라함은 동양철학의 원리인 천도를 모르는 사람들의 주장이라 할 수 있다.
5) 한웅천황의 종교창설에 대한 전거와 실증이 있다.
첫째로 한웅천황이 종교를 창설했다는 전거가 있다. <천도교창건사>를 보면, 천도교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이 "우리 도는 대운은 天皇氏의 근본원리를 회복시킨 무극지운이며, 천황씨는 선천개벽의 시조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의암 손병희도 "우리 대선생(최제우 선생)께서 비로소 무극대도와 천덕의 근본원리와 접령항화의 이치를 밝혔다고 하나, 개벽초의 천황씨로부터 처음 비롯된 운이라 하니 의심하지 말라"하였다.
즉, 최제우와 최시형 그리고 손병희 선생은 선천시대에 개벽의 시조인 천황이 있었고, 그 천황에 의해 성립된 고유종교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곧 東學은 한웅천황의 실존과 종교창설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환단고기의 기록이 조작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 불 유 삼교일체 사상이 원래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이라는 전거가 있다. <최치원난랑비서>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는 태고시대부터 도 불 유 삼교일체의 현묘지도인 신선도가 있었다. 최치원난랑비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최치원난랑비서 왈 국유현묘지도 왈 풍류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포함삼교 접화군생, 차여입칙효어가 출칙충어국 노사구지지야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 제악막작 제선봉행 축건태자지화야
다음은 위의 원문에 대한 필자의 국역이다.
최치원난랑비서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이는 종교를 일으킨 원천으로써 신선도의 사서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도 불 유) 3교의 사상을 이미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가까이 하면 저절로 감화한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온 즉 효도하고 나아간 즉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사구(공자의 벼슬)의 교지와 같고,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함은 주나라 주사(노자의 벼슬)의 종지와 같으며,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축건태자(정반왕의 태자)의 교화와 같다.
곧, 우리 나라의 정사인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조의 최치원난랑비서가 우리 나라에 원래 도 불 유 삼교일체의 성립종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따라서 한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 진서인 것이다.
6) 고유종교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실증이 있다.
1) 1983-85년에 걸쳐 중국 요령성 능원현 우하량 유적지를 발굴조사 하였는데, 구릉상에서 제사유적과 신전, 소조신상과 청동기 등이 발견되었다. 이를 방사선 측정한 결과 기원전 3500년으로 나왔다. 중국 요령성은 옛날 청구라 불리웠던 곳이며, 청구는 배달국이 있던 곳이다. 따라서 요령성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은 배달국의 존재와 고유종교의 실체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1970년 압록강 중상류 길림성 집안시 장천지구 제1호 고분 전실에서 고대의 예불도가 발견되었는데, 불상의 모습과 의복이 인도풍이 아니라 한국풍이다. 이것 역시 우리 나라에 고유종교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실증인 것이다.
3) 그밖에 종교적 실재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를 들면, 단군릉에서 발견된 금관조각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의 금관, 사찰 내의 탑과 범종, 대웅전과 하옥형의 사찰건물, 칠성각과 산신각, 그밖에도 사찰 내에 있는 불교관련 모든 사물이 신선도의 실재를 증명한다.
이상 같이 한웅천황이 천도를 깨치어 종교를 창설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론적이든 실증적이든 거의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한단고기에 천부에 근원하여 지전에 합되고 인사에서 끝을 맺는 태백진교가 있었으며, 한웅천황이 개천하여 삼신으로 종교를 창설하였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하여, 한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연구부족에서 비롯된 과오이며 오류라 할 수 있다.
3. 천부경과 삼신사상은 불가분적인 관계이다.
1) 문제점 : 종교가 있었으면, 당연히 경전과 계율과 의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한단고기에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등의 경전과 오훈 오사 오계 삼륜 팔조 구서 등의 계율과 경천계인 소도계천의식이 나온다. 그러나 서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경전과 계율이 어느 국수주의자의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에 대한 전거와 근거이다.
2) 전거 :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에 대하여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세상에 전하기로는 목은 이색과 휴애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볼 수 없다. 지금 시속에는 한 자의 글이라도 주희에 맞지 않으면 뭇 사람들의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모여들고 유학자들의 칼날이 바야흐로 사나우니 천경과 신고의 가르침을 전하려한들 어찌 용이할 수 있겠는가?"라고 적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오은 중의 한 사람인 농은 조원길 선생의 유집(농은집)에서 발견된 천부경 원문을 현재 출판 중인 졸저 『한웅천황과 한국고유사상의 탄생』서두에 실었다.
3) 논리적 근거 :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은 불교의 삼장과 같이 경 논 율의 관계로서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세 경전 가운데 어느 하나가 부정되면 세 경전이 모두 부정되고, 어느 하나가 인정되면 세 경전이 모두 인정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천부경의 초두를 보면 "一始無始一 析三極無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이라하여 천부경의 기본사상은 천일 지일 인일의 삼신일체이다. 우리의 민족에도 삼신상제니 삼신제석이니 하는 삼신신앙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 봉선서에서도 천일 지일 인일(태일)의 삼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와 같이 천부경과 삼신사상이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고, 삼신사상은 천도로서 우리의 민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따라서 천부경을 위서라 함은 있을 수 없는 문제이며, 삼일신고와 참전계경은 물론 그 밖의 각종 계율과 종교의식이 실려 있다 하여 한단고기를 위서라 부정함은 연구부족에서 비롯된 과오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과 상해임시정부를 주도한 대종교가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기본경전으로 하고, 삼륜 오계 팔조 구서 등을 기본계율로 한다. 이를 알면서도 이들 경전과 계율을 부정함은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학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 개인의 명예만을 위한 것인지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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