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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량과 함께 진시왕 암살을 도모한 창해역사 `여홍성`의 시

monocrop 2007. 3. 4. 18:05
가을 8 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였는데 요하(遼河)의 남쪽에 이르자 순수관경(巡狩管境)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과 호를 새겨 이를 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금석문의 최초이다. 뒤에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은 이곳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마을과 들은 변한(弁韓)이라 하였는데
홀로 빼어난 돌 하나 있네
대(臺)는 거칠고 철죽(躑躅)은 붉게 피었는데
글자는 파뭍히고 이끼만 푸르고나
천지가 처음 열릴 때 생겨서
나라가 흥하고 망할 때 세우기를 다 하였네.
문헌으로 고증할 수 없으나
이 어찌 단군(檀君)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秋八月帝巡國中至遼河之左立巡狩管境碑刻歷代帝王名號而傳之是金石之最也後滄海力士黎洪星過此題一詩曰 村郊稱弁韓別有殊常石臺荒躑躅紅字沒苺苔碧生於剖判初立了興亡夕文獻俱無徵此非檀氏跡 檀君世紀)



▲ 12 世 檀君 阿漢의 巡狩管境碑의 위치도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는 12 世 檀君 아한(阿漢) 때 세운 것이다. 遼水는 中土와의 경계선 근처에 있었다. 遼水 아래 雲障이 있었다. 위로부터 燕나라, 遼水, 雲障 순으로 위치했다.

黎洪星은 시를 읊을 당시, 中土에 있었다. 유방(劉邦)을 도와서 漢나라를 세웠거나 세우기 직전일 것이다. 番韓(番朝鮮)은 中土 밖이다. 그래서 ‘마을 밖 弁韓이라 이르는 곳에’ 즉 中土 밖에 서 있는 巡狩管境碑를 보고 시를 읊은 것이다. 또한 黎洪星의 시를 통하여 朝鮮時代에 글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黎洪星은 우리 역사서에만 나온다. 다만 史記에는 滄海力士라고 하여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黎洪星과 함께 秦始王의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던 張良은 韓나라 사람이였다)

“高句麗의 도읍 平壤城은 본래 漢나라 樂浪郡 王險城이다(高麗治平壤城本王險城 史記)". 이곳에서의 治는 다스렸다는 뜻이 아니라 도읍을 말한다. 朝鮮의 계승국 高句麗가, 모든 한민족을 대표 한다면서 遣韓使(遣漢使), 한맹(寒盟)이라 한 高句麗가 고작 제후국의 왕성에 도읍을 정하겠는가. 高句麗가 도읍으로 정한 平壤城은 眞(辰)朝鮮의 王儉城이다. 三朝鮮이 도읍을 똑같이 王儉城이라 불렀다는 사실에 착안해 중국은 番朝鮮의 王儉城을 眞朝鮮의 王儉城에다 포갰던 것이다.

유철(劉徹 漢武王) 은 中土 서부에서 漢나라를 침범하는 匈奴의 상국 北夫餘에게 탄원하려고 했지만, 右渠가 막아 뜻을 이루지 못하자, 보복으로 右渠가 차지한 番朝鮮을 침입했고 패퇴했다. 고두막한(高豆莫汗 : 北夫餘 5 世 檀君)은 右渠 땅을 4분해 그 중 하나를 樂浪에 주었다. 樂浪이자, 番朝鮮의 王儉城은 岷江 이서에 있었던 것이다. 漢나라가 설치했다고 날조한 漢四郡의 위치도 山東省과 渤海灣이 아니라, 岷江 이서에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高句麗에서 갈라져 나온 百濟가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나라를 (遼西에 있는) 帶方에서 시작했다(有仇台者 始國於帶方)”는 周書나, “그 나라는 帶方의 옛 땅에서 처음 일어났다(始立其國于帶方故地)”는 隋書도 사실이 아니다. 三韓의 도읍을 다같이 王儉城이라 부르는 것을 기화로 番韓을 辰韓에다 포개버렸기 때문에 百濟가 帶方에서 시작했다고 날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明은 우리나라 역사를 다 훔친 상황에서 舊唐書에다 高句麗가 箕子神을 섬겼다고 슬쩍 끼워 넣었다(其俗多淫祀事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 高句麗는 番朝鮮(후의 箕子朝鮮, 衛滿朝鮮)이 아니라, 朝鮮, 大夫餘, 北夫餘를 계승한 天子의 나라다. 그런데 高句麗가 朝鮮의 제후국 番朝鮮의 가공 지배자를 神으로 모실 수가 있는가. 그것도 티벳고원 북부의 피지배종족을. 더구나 高句麗 시대에는 우리나라 역대 역사서가 다 존재했기 때문에 箕子朝鮮이 날조임은 단번에 알 수 있다.

神人王儉도 北東의 제후들을 모아 神市氏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南西의 제후를 모아 蚩尤氏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南東의 제후를 모아 高矢氏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했지, 자신이 신하를 위해 제사 지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神人王儉도 북쪽으로 순행 하면서 太白山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남쪽으로 순행하면서 갑비고차(甲比古次)에 이르러 두악(頭岳 : 摩利山의 별칭)의 꼭대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箕子朝鮮은 없었다. 箕子가 요동에 살았다? 티벳고원 북부의 기(箕)라는 땅에서 살았기 때문에 箕子라고 불렀다(대청일통지 : 大淸一統志). 箕는 그 당시 開封에서 서쪽으로 90 리에 있었다. 箕子의 무덤도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梁나라 몽현(蒙縣) 박벌성(薄伐城)에 성탕(成湯 : 殷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의 무덤 서쪽에 만들었다(杜預曰梁國蒙縣北有薄伐城城內有城湯塚其西有箕子塚 水經注)

箕準이 箕子의 40 대 후손?(三國志) 箕子의 姓氏는 成이다. 殷나라를 세운 成湯의 후예다. 사람들이 땅 이름을 따서 箕子라고 부른다고 냉큼 箕氏로 바꿨단 말인가. 箕子의 후손이 아니다. ‘수유(須臾)의 사람 기후(箕詡)(須臾人箕詡)’라고 했다. 箕子의 후손이면 ‘箕子의 후손 箕詡’라고 했다. 箕氏라고 해봐야 箕詡에서 箕準까지 6 대에 불과하다. 解慕漱가 北夫餘를 세우고 자신에게 동조한 수유후(須臾侯) 기비(箕丕)를 番朝鮮王으로 봉했으니, 箕丕조차 箕詡의 직계가 아니다.

노관(盧綰)이 다시금 岷江(西鴨綠江)에서 沱江(浿水)까지 차지했다가 8 년 뒤 丙午 45 년(B.C. 195) 韓信등을 兎死狗烹시키고 있던 劉邦을 피해 匈奴로 도망치고, 盧綰의 부하 衛滿이 番朝鮮으로 가서 왕을 내몰자, 戊申 2 년(B.C. 193), 平壤에 성책(城柵)을 설치하고 도적 떼와 衛滿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듬해 檀帝의 동생 고진(高辰)으로 하여금 海城을 수비케 하고, 癸丑 42 년(B.C. 128) 고해사(高奚斯) 檀帝가 직접 衛滿(기원전 128 년은 衛滿朝鮮을 右渠가 지배하고 있었다)의 도둑 떼를 남려성(南閭城)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 北夫餘紀 上).

辛酉 원년(B.C. 120)에 장수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치게 하였으나 이롭지 못하여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 하는데, 공이 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高句麗侯)로 삼았다 (辛酉元年遣將討右渠不利擢高辰守西鴨綠增强兵力多設城柵能備右渠有功陛爲高句麗侯 北夫餘紀 上)

西鴨綠江의 수비가 右渠를 대비하는 것이다. 衛滿朝鮮이 西鴨綠江(岷江) 너머에 있었던 것이다.

기유(己酉) 3 년(B.C. 192) 海城을 수비한 高辰이 辛酉 원년(B.C. 120)에도 西鴨綠江을 수비할 수는 없다. 기원전 192 년에 수비 책임을 맡은 高辰은 63 년 뒤라면 벌써 죽었거나 백세에 가까운 나이다. 젊은 사람들을 놔두고 노인에게 수비를 맡기고 제후로 삼는 것은 이상하기 짝이 없다. 北夫餘記의 저 기사는 필사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거나 해모수(解慕漱 : 해머슴)의 아들과 다른 인물이다.

解慕漱가 北夫餘의 檀君이 될 때 그의 나이 23 살로서 생일은 4월 8일이었다. 한국 불교는 이날을 따서 석가탄일로 정했다고 한다. 석가탄일을 4월 8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는 나라는 불교국가들 중에서도 한국 불교만이 유일하다. 한국에 불교가 들어올 때 불교의 이질적인 모습들을 한국민들의 배척과 저항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서와 절묘한 접목을 이루어냈는데, 우선 석가탄일을 天王郞 解慕漱의 탄일 4월 8일로 맞추어 정한 것이 그 하나요, 또 부처님을 모실 본전(本殿)을 한국민 정기의 총본산인 한웅전(桓雄殿)에 모신 것이 그 둘이다.

불가에서 쓰고 있는 대웅전(大雄殿)의 "대(大)"자는 " 한웅(桓雄)"의 " [桓]"자를 크고, 높고, 넓다는 우리말의 뜻만을 취하여 큰 대(大)자로 바꾼 것이다. 韓民族 뿌리思想의 보고인 高麗時代의 팔관잡기(八觀雜記)에 佛像을 大雄殿에 모신 것이 비록 古俗을 따른 것이지만 본래 僧家의 말이 아니다(高麗八觀雜記......佛像始入也建寺稱大雄殿此僧徒之襲古仍稱而本非僧家言也 神市本紀) 라고 기록되어있다. 한웅(桓雄)을 大雄天이라 한다(桓雄稱大雄天 三神五帝本紀).

대개 한 종교가 이민족에게 전파를 시도할 때에는 원주민들의 정서와 접목시켜 거부감을 없애려하는 것이다. 이 점은 불교 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기독교들도 그들의 신칭(神稱)인 GOD 대신에 우리민족 고유의 神稱인 "하나님"을 택하여 쓰는 것과 같다. 기독교의 神稱인 GOD(神)이나 JEHOVAH(여호와)는 우리의 神稱인 하나님(또는 하느님)과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番朝鮮王 箕準이 衛滿에게 上下 雲障을 봉토로 준 해는 모수리(慕漱離)가 北夫餘 2 世 檀君으로 즉위한 기원전 195 년이다. 衛滿이 番朝鮮을 차지하자, 戊申 2년(B.C. 193), 平壤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 떼와 衛滿의 무리에 대비했다. 이듬해 檀帝의 동생 高辰으로 하여금 海城을 수비케 했지만, 西鴨綠江을 수비케 했다는 말은 없다. 癸丑 42 년(B.C. 128) 檀帝가 직접 衛滿(右渠)의 도둑 떼를 南閭城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을 뿐이다.

解慕漱의 아들이자 高辰의 형 慕漱離는 기원전 194 년에 즉위했다. 기원전 120 년은 4 세 檀君 고우루(高于婁) 때로 解慕漱의 증손이다. 고추모(高鄒牟)의 부친 고불리지(高弗離支)는 高辰의 손자다. 기원전 120 년까지 高辰이 살았다고 보기도 사실상 어렵다. 高辰은 衛滿을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고, “右渠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는” 인물은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同名異人?).

신유(辛酉) 원년(B.C. 120)에 이르러 槀離國의 영토가 浿水(沱江)에서 西鴨綠江(岷江)까지 확장된 것이다. 馬韓이 있었을 때는 嘉陵江(九黎河)에서 沱江까지가 槀離國(가우리)의 땅이었다. 그래서 西安平을 옛 槀離國의 땅이라 한 것이다.

“己亥 38 년(B.C. 202), 燕나라의 盧綰이 다시금 遼東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浿水로써 경계를 삼았다(己亥三十八年燕盧綰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가 중국 역사책에 실리면 “漢나라가 일어나자 朝鮮 땅은 너무 멀어서 지킬 수 없다 하여 遼東에 요새를 쌓아 浿水까지를 경계로 삼았다(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史記).”로 바뀐다. 실제로는 莫朝鮮의 여러 성을 수리해 8 년간 岷江 유역에서 沱江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멀기는 커녕 지척지간이다. 漢나라가 “朝鮮 땅이 너무 멀어서 지킬 수 없었다”면서 朝鮮 땅에 漢四郡을 설치했다는 것은 모순 아닌가. 이것만 봐도 漢四郡이 종이 위의 창작품임을 알 수 있다.

상선약수 지음
출처 : 넘버원 대한민국
글쓴이 : 용화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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