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2 왜곡된 역사·향후전략

[스크랩]한국사 미스테리 반박에 대한 재반박

monocrop 2007. 3. 3. 02:40
Re: 한국사 미스테리 가 궁금해요.
작성자: qooqook (레벨1)
등록일:07.01.05


반박문에 반박문 발췌한 겁니다.

 

박제란님의 또 다른 글 (1개) ..more
   (펌)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의 반박문을 반박한다 [명상방 ] huntkim [수정] [수정] (답변: 5개)  2006.08.02
 

(펌)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의 반박문을 반박한다 [명상방 ]  huntkim


요새 네이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 대한 사

람들의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이더군요. 그 글을 전부 부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물론 이 글이 논란이

많은 부분이 있지만, 그 글에는 어느 정도 사실을 함축하는 글이 있습니다. 멍청한 사대주의자들마

냥 무조건 부정하기보다는 일단 그 기록의 진위여부를 따져야하지 않을까요?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 반박문 중 사실 확인이 가능한 글들을 추려 반박해 보이겠습니다.

=>는 미스테리 반박문을 쓴 반박자의 글이고

==>는 반박문을 반박하는 제 견해입니다.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 이는 기상대 자료만 꼼꼼하게 따져봐도 당장 거짓임을 알수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15~20년정도를 주기로 이런 현상이 한반도내(더더군다나 남한만 따져도!!!)에서도 일어납니다. 몇년전 경상도쪽에서는 갑작스런 집중호우로 물난리가 나서 사람과 가축이 떠내려가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같은날 충청도와 전라도쪽은 가뭄으로 논이 갈라지는 장면등이 뉴스에서 엄청나게 나왔습니다.




==> 이 글을 쓴 사람은 과거의 홍수 기록과 현재의 홍수 기록을 혼동하는 것 같군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시대는 대기오염, 환경오염의 영향으로 같은 위도 상이라도 경상도에 홍수가 전라도에 가뭄이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지요. 위의 기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건 위도와 경도가 다른 드넓은 중국 대륙입니다. 글쓴이가 과연 옛날 기상학 기록을 보고 반박을 했는지 의문이 드는군요.



7.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 왕의 명령으로 씌여진 '만주원류고' 라는 역사서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 근거없는 이야기. 애신각라가 신라를 사랑하라는 말이라는 해석과 더불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일뿐이다.



==>

"신라의 땅은 동남쪽으로 오늘날 조선의 경상도 강원도의 2개의 도를 아우르고 서북족으로는 길림 오랍에 이르고 또한 서쪽으로 개원 철령에 가깝다"

"개원(開元) (당나라 현종 713 ~ 741)이후 발해가 성할 때 압록강으로 경계하였다.

"구주(九州)의 설치는 동쪽으로 길림에 이르고 서쪽으로 광녕에 이른다"



그렇다면 만주원류고에 있는 위 기록은 구라란 말인가? 글쓴이의 무지를 알수 있게 한다. 과연 반박문을 쓴 이가 제대로 된 사서는 읽었는지 궁금하다.



10. 현재 내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성터가 발굴되었다.

=> 그래서? 남한에 아파트가 서 있으니 미국 땅이라고 주장하면 고개를 끄덕일 것인가? 서울에 관제묘가 있으니 중국땅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경상남도에 왜식 성이 세워져 있으니 일본 땅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더구나 저 이야기는 내몽골자치구와 요녕성의 경계 부근에서 발견된 성에 대한 이야기다. 지도에서 내몽골 자치구가 얼마나 넓은 땅인지, 또 요녕성과의 경계라면 어딘지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저 <내몽골>이라는 말 때문에 지금 몽골의 어디쯤인줄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큰 오산. 저런 말이 나온 근거는 이 기사다. <주간조선>고구려 정복로 1만3000리를 가다 <원문클릭>



==>이건 사실이다. 2~3년전 국내학자들이 몽골로 고구려 성터를 확인하기 위해 내몽골 지역으로 가서 고구려전통의 성곽 축성기법과 일부 고구려 유물을 확인하였다. 다만 단지 땅위로 들어난 것만 확인했을뿐 구체적인 유물발굴등은 하지 못한 상태이다. 몽골과 더 긴밀하게 협조한다면 자세한 유물조사가 가능하겠지만 실상 정부나 학계에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어하는 눈치다. 이 고구려 성터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 고구려의 영토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의 영토보다 배 가까이는 커지게 된다. 더군다나 만주뿐이 아닌 몽골지역의 초원도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어 당시 실크로드의 하나인 '초원의 길'이 고구려의 영향력아래 있었는지를 밝힌수도 있는 유물들임에도 강단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깨질까봐 나서지 않고 있고 정부는 일부러 나설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그이후 연구는 답보상태로 알고 있다.(당시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이를 방영한적도 있다.)




11.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은 생긴것부터 풍속이나 문화까지 한국인과 소름끼치도록 닮아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고구려칸이라고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

=> 닮은 부분도 있고, 닮지 않은 부분도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볼 뿐. 고구려칸이라니? 이런 헛소리는 처음 본다.



==> 정재승 선생의 글은 못 보았나? 제대로 보지도 않고 이런 헛소리를 하니 참 한심하다. 바이칼 호수 주변부족에 전승되는 신화와 우리의 신화가 일치되는 부분이 있고, 그들의 풍습이 우리와 같다. 게다가 우리의 전래동화인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발원지가 바로 이 곳이다. 이는 적어도 우리와 이들간의 풍속, 문화가 옛날에는 공유했음을 뜻한다. 고구려칸에 대해서는 본인 역시 의문점이 있지만 한번쯤 연구해봐야하지 않을까? 무턱대고 비난하는 건 옳지 못하다.



12. 치우천황에 대해 중국에서는 고리국 황제이며 묘족의 선조이고 동이민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단고기등의 사서를 보면 치우천황은 분명히 한민족의 선조이다. 묘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바이칼 호수 주변엔 고리족이 지금도 살고있었으며 고구려 고려 등이 모두 고리 족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치우를 부정한다.

=>치우를 중국에서 고리국 황제라고 이야기한다는 말은 처음 본다. 황제라는 개념 자체가 진시황때 만들어진 것인데 무슨 헛소리인가? 치우는 우리 민족과 아무 관련도 없다. 헛물 켜지 말기를. 저런 주장은 오히려 중국인들이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 지껄이는 헛소리인데, 우리가 거기에 장단맞춰주는 셈이다. 제발 정신차리기 바란다.




==> 중국 사서 사기는 읽어보았는지 의문이다. 사기를 보면 치우를 구려의 군주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구려가 바로 고리국을 뜻한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중국의 서욱생 교수는 치우가 동이족의 제왕이었음을 증명했다. 그런데 우리민족은 동이족 계열이었다. 그러니 결국 치우가 우리의 조상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치우가 중화족보다는 우리민족과 연관이 높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16.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의해 삼국사기의 천체관측기록이 한반도가 아닌 현 중국대륙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증명되었다.

=> 이것에 대해서는 여길 보라.박창범-나대일의 삼국시대일식 연구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 참고로 이것도 같이 보면 좋겠다. 고대 천문학 기록 연구에 대한 반론



=> 박창범 교수의 연구결과를 무시하는가? 그리고 고대 천문학 기록 연구에 대한 반론이라는 논문은 나와 동명이인인 전남대의 수준떨어지는 대학생이 어줍잖은 지식으로 나불댄 글이다.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대해 강단의 평가는 들었는지 궁금하다. 강단 중 일부 학자들은 박교수의 연구 결과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고대 천체기록은 매우 과학적이고 사실적이다. 그리고 박창범 교수의 연구결과 오차는 0.007%로 이는 박창범 교수의 연구결과가 사실임을 증명한다. 이를 부정하는 그대는 과연 진정 학문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다.



17.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이 아닌 일만년이라고 주장하는 고문헌이다. 현재 학계에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박창범 교수에 의해 한단고기의 천체관측기록이 정확하다고 밝혀졌다.

=>위의 것과 동일하다.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문항 수만 불려놓는 것도 파렴치한 짓이다.



==> 한단고기가 현재 위서 시비에 휘말리고, 게다가 증산도측에서 종교 교리 전파하는데 사용한다고 증산도 측에서 나온 종교경전이라 곡해를 한다. 물론 한단고기가 위서 시비에 휘말리고 있지만 그걸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한단고기 영인본이 발견되었는데 영인본이 있다는 것은 한단고기가 무조건적인 거짓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서문을 보면 한단고기는 단 하나의 책이 아닌 옛 여럿 기록들을 하나로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가지 꼬투리를 잡고 위서다, 진서다라고 하기보다는 일단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검토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2. 현재의 요동 요서 개념과 과거의 요동 요서 개념은 완전히 틀린다. 요동이 고구려 영토라 함은 현재의 요동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 중국 대륙 내륙의 요동을 이야기한다.

=>중국 대륙내의 요동이란 수나라때 설치된 요산현을 가리킨다. 지도에서 <요>자만 나오면 요동이라 우기고 있다.


==> 현재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요동 요서 개념은 거란족 요나라 때 확립된 것이다. 현재의 요동과 요서와 고대의 요동과 요서가 같을 수 없다. 수경주를 비롯한 고대 중국 사서에는 요하가 지금의 랴오허 강이 아닌 베이징의 난하였다는 기록이 무수히 존재한다.



24.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과 산동성 즉묵시의 향토사학자들이나 향토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이 곳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 고구려를 칠 때 군인들이 징병된 곳이 저곳들이다. 그곳에서 싸웠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왜곡을 하다니 한숨만 나온다.



==> 과연 위 글을 쓴 자가 산동성의 향토지는 읽어봤을까? 지난 역사스페셜에서도 위 전설과 관련해서 중국 향토사학자가 자기네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연개소문 전설을 이야기해주었는데 그럼 이 지방에 내려오는 연개소문 전설은 무엇이란 말인가? 향토사학자가 없는 말을 지어냈다는 건가?



25.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근처에는 성터가 있는데 이 곳 주민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 우리 서울을 한자로 한성漢城이라 불렀다. 서울이 중국 땅이었나 보다.



==> 아주 웃기는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고려성터는 존재한다. 그것도 고구려 양식이다. 이는 고구려가 적어도 이 지역에 영향을 미쳤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상당기간 동안 고구려가 이 지역을 지배했음을 뜻한다.



26. 현 중국 대륙의 베이징 근처에는 고려영진이라는 지명이있다.

=>25번과 동일한 이야기다.

==> 신채호 선생은 중국 베이징 일대를 답사해서 고려영진을 발견했고, 고려성터가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 성 역시 고구려 양식 계통이다. 그리고 문헌상으로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했음을 증거한다. 위 반박문을 쓴 이는 중국인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철저히 우리 역사를 깔아뭉개고 있다. 고구려가 북경지역까지 진출했음은 삼국사기, 진서 등의 문헌이 증거한다.



35. 한국 국사에서는 고조선이 망한 후 漢나라에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는 한사군을 설치하려다가 고구려 동명왕에게 참패해서 漢군의 수장들이 모두 육시(몸을 6등분하는 참형) 당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 중국 기록이 대체 어디 있을까? 이런 식의 주장은 정말 무책임한 것이다. 중국의 문헌? 이름조차 대지 않고는 있다고 우기는 것 뿐이다. 한마디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저런 문헌을 가져올 수 있는가?


==> 중국 사서인 사기를 보면 한무제가 조선을 쳐서 사군을 설치했다 기록했다. 그런데 그 사군이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이 아니라 날양, 추저, 홰청, 평주 4군이라 한다. 그리고 이 4군의 제후로 봉해진 자는 위만 조선 유민이다. 조한전쟁에 참가한 한나라 장수들은 대개 사형 같은 극형에 처했다. 그리고 낙랑, 진번, 임둔, 현도 소위 한 사군은 후한 대 이후의 역사서에 등장한다. 당대 기록인 사기의 기록이 정확할까? 후대 기록이 정확할까? 당연히 당대 기록이 정확하다. 결국 한사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한사군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가?



39.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 를 보면 금 태조는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렇다. 왕의 출신에 따라 나라의 역사가 바뀐다는 한심한 생각에 기인한 이야기다. 영국 왕실은 독일에서 왔다. 그러면 영국은 독일땅인가? 노르만인 윌리엄이 영국왕이 되면 영국 역사는 노르만의 역사로 변하나?




==> 그럼 위 반박자의 논리대로라면 발해는 우리 역사가 아니네... 이 땅의 사학자, 엣 실학자들이 구라를 까고 있겠네... 국사 교과서에는 발해의 지배계층이 고구려인,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고구려 유장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위 반박자의 논리라면 발해는 우리 역사가 아니겠군....



40. 청나라 황실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는 금 태조가 나라 이름을 신라의 왕의 성씨에서 따왔다고 기록되어있다.

=> 이런 원문을 보여주시죠...

  그런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원문 제시라도 하면서 이런 주장을 해줬으면 좋겠다.




==>원문 보여드리죠 ㅎ "(아골타가 세운 나라를)"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



44. 1976년 평남 대안시 덕흥리의무학산 밑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보고하는 13명의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그 뒤에 관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연군태수(하북성 보정부 서쪽의 완현부근), 광령태수(하북성 탁현의 군치), 상곡태수(보정부, 하문부 및 순천부 서남경계), 어양태수(하북성 밀운형 동쪽), 범양태수(북경의 서쪽), 대군태수(산서성 대동현 동쪽), 북평태수(북경지방), 낙랑태수(북경 동쪽의 하북성), 창려태수(산해관 남쪽), 요동태수(하북성 영정하 동쪽), 요서태수(하북성 영정하 서쪽), 현도태수(하북성 북경 서남쪽), 대방태수(창려,금주일대)이다. 유주는 북경일대를 말한다.

=> 그렇다. 유주자사가 관직이었으니 태수들을 거느린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자들은 이런 것을 증거로 고구려가 유주를 다스렸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려면 자사라는 관직이 고구려의 관직이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조차 머리 속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고구려에는 자사라는 관직이 없었다.


==> 진이 거쳐간 벼슬을 아는가? 그 벼슬 중에 국조대형이라는 벼슬이 있다. 국조대형이 어느 나라 벼슬인 줄 아는가? 바로 고구려의 벼슬이다. 간혹 위의 반박자와 같은 인간들은 진이 유주자사를 지냈는데 고구려가 자사라는 관직이 없었으므로 진은 망명객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오늘날 베이징인 연군 지방을 습격했다는 기록과, 이 곳에 발굴되는 고려성터, 고려 관련 지명은 어찌 설명할 것인가? 고구려가 유주 까지 지배했음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고구려가 유주를 차지못했다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



45. 중국의 역사서인 남제서에는 북위가 백제를 치려고 수십만의 기병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북위에서 백제를 치려면 바다를 건너야한다. 기병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

=>대개 이 대목은 요서백제설과 연관짓거나, 고구려의 오기라고 본다. 기록이 북쪽에 정통하지 못한 남중국에서 나왔다는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 남중국계 사서에 백제의 대륙지배가 들어있으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그대는 아는가? 북중국 계열 사서에 백제의 대륙지배를 암시하는 구절이 있음을 간과하는 것 같다.



북조 사서인『북제서』에는 서기 571년 북제의 군주가 백제의 위덕왕을 ‘사지절(使持節)/도독(都督)/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로 삼았다는 구절이 있는데, 사지절은 황제가 신임한다는 표시인 부절(符節)을 지녔다는 뜻이며, 도독은 군사의 최고 책임자이고 자사는 행정의 최고 책임자이므로 이 구절은 북제가 백제의 동청주 지배를 인정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동청주(東靑州)는 지금의 산동반도 동남부에 있는 땅으로서 오늘날의 청도(靑島) 시인데, 백제가 해로의 요충지인 이곳을 손에 넣고 있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최치원전」에 나오는 “고구려와 백제가 강한 병사 백만을 이끌고 유(幽)/연(燕)/제(齊)/노(魯)/오(吳)/월(越)로 쳐들어가 중국의 근심이 되었다”는 구절과 맞아떨어져(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는 산동반도를 차지하고 있었음) 북조 사서도 백제의 담로를 다루었다는 증거 중 하나가 됨을 덧붙인다



참고로 구당서에는 백제의 영토에 대해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양쯔강 지방)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백제가 황해를 건너 대륙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을 뜻하는 자료라 볼 수 있지 않을까?



60. 한국의 국사의 기초와 체계는 모두 일제시대때 일본에 의해 세워졌다. 현재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 역시 일제시대에 일본에 의해 씌여진 '조선사' 라는 책과 내용이 거의 똑같다.

=>조선사는 역사책이라고 보기보다는 사료집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대체 읽어봤으면 저런 무식한 주장은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자들의 특징은 읽어보지 않고 비난하는 데 있다.



==> 반박자는 우리나라 국사학계의 흐름을 알고 하는 말인가? 조선사 날조의 원흉 이마니시 류의 수제자가 바로 진단학회의 이병도이다. 해방 후 한국 국사학계를 이끈 이가 바로 이병도이다. 그의 학풍은 이기백, 신석호, 이기동, 송호정으로 이어졌다는 걸 모르는가? 그리고 그대는 아는가? 1987년 이병도가 죽기 전에 한국사가 일본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발언한 사실을... 그런데 그의 제자들은 이병도가 노망들었다고 평한다.



그대와 같은 얼빠진 사대주의자가 더 이상 이 땅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역사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진게 많다. 사서의 부족, 우리민족의 활동무대가 오늘날의 중국이라는 점 등으로 우리의 역사 복원이 요원하다. 그럼에도 그대는 왜 우리의 역사를 깎아내리는가?



우리 역사가 일제에 의해 많이 왜곡되고, 일제에 의해 많은 사서를 잃었다.

우리의 역사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밝히지 않으면 그 누가 밝힌 것인가?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 이 글이 전부가 사실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전부가 거짓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필자는 위 60가지 중 사실로 입증될만한 명제를 추려 뽑은 것이다. 우리의 역사 찾기는 아직도 요원한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식민사관, 반도사관이라는 허울에서 벗어나 진정한 우리의 역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http://eroom.korea.com/eroom/default.aspx?bid=hun_81597&pid=210894

<!--- 날짜 수정 시작 ----->
[최종등록 : 2006. 8. 2 am 9:42]

출처 : Tong - greatcorea님의 역사왜곡통

내용출처 : 본인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