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2 왜곡된 역사·향후전략

[스크랩] 한사군의 낙랑이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여덟가지 근거

monocrop 2007. 5. 14. 00:54
한사군의 낙랑이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여덟가지 근거

한사군의 낙랑이 난하지역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근거를 황하에서 한라까지 책에서 8가지로 근거를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을 출판사의 허락하에 발췌하여 정리한다
글내용은 그대로이나 중간에 참고자료 등을 두었음을 밝힙니다.
이 내용은 가급적 많인 곳에 올려주어서 한사군의 핵심 낙랑군에 대해 많은 분들이
진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한사군의 낙랑이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여덟가지 근거


1. 낙랑이 대동강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계의 통설

낙랑군에 대한 한계의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집약해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낙랑군이 한반도의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단의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이러한 주장은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이바나의 관점을 계승한 것으로 이병도 등으로 대표된다.

다른 하나는 낙랑군이 중국 진황도시 갈석산 부근 난하지역에 있었다고 보는 것으로 이러한 주장은 북한의 리지린과 남한의 윤내현으로 대표된다.


대동강 난하 위치도 

그런데 오늘날 대동강 유역설을 주장한 이병도의 학설이 학계의 통설이 되어 있으며 윤내현 등이 주장한 난하 유역설은 정통학설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2. 낙랑이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여덟가지 근거
 

한사군은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것이 현재 한국 사학계에서 통설로 적용되고 있지만 낙랑과 관련한 사료를 세밀히 검토해보면 낙랑은 평양의 대동강 유역이 아닌 대륙 동북의 난하 유역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 사료적 근거를 하나하나 제시해본다
 

1.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수성현은 본래 낙랑군 25현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수서 지리지에는 수성현이 상곡군의 소속현으로 되어있다.


 

한나라의 낙랑군이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 그 소속현 중의 하나인 수성현이 수나라 시대에 갑자기 오늘날의 하북성 북경 부근에 있던 상곡군에 소속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 아닌 난하 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2. [사기 고제본기] 색은에 [태강지리지
太康地理志]를 인용하여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이 있는데 이곳은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다. ” 라고 하였다.


 

갈석산은 하북성 창려현 부근에 발해를 마주하여 우뚝 솟아 있다. 중국 공산당 간부의 여름 휴양지로 유명한 북대하가 이부근에 있다. 그런데 갈석산이 바로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있다는 사실은 낙랑군이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조선일보 이덕일 칼럼 낙랑군 갈석산 참고
 

3. [광여]에 영평부 연혁을 기술하면서 “옛 우북평 북연이 낙랑이다” 라고 하였다. 북평군은 어양군과 함께 오늘날의 하북성 난하 부근에 있었다. 낙랑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낙랑군이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또하나의 근거가 된다.
 

4. [노룡새략] 13권 황렬전에는 “ 아마 연산과 낙랑에서는 사람마다 감동하고 흥분할 것이니 무슨 호로를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라고 하여 연산과 낙랑을 동시에 거명하고 있다.
 

연산 산맥은 난하를 건너 갈석산 쪽으로 뻗어나간 산맥이며 이 산맥은 대체로 만리장성 줄기와 일치된다. 여기서 연산과 함께 거명된 낙랑이 결코 연산과 동떨어진 대동강 유역으 낙랑이 될 수는 없다.

노룡현은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부근이다. 곽조경의 약도를 보면 노룡새는 난주와 열하의 중간지대인 난하 하류에 있다. 노룡새략에 낙랑이 연산과 함께 등장한다는 것은 낙랑이 난하유역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5. 노룡새략 [복영전]에는 “ 노룡사람 복영이 침입한 외적과 싸우다 붙잡히자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했는데 뒤에 그의 충혼을 기려 낙랑공을 추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낙랑공이란 칭호를 복영에게 내린 것은 그가 출생했거나 희생된 지역과 연관이 있다고 보인다.

하북성 노룡 사람 복영에게 평안남도 대동강변의 낙랑공을 추서했을리른 만무하다. 복영에게 낙랑공을 추서한 것은 낙랑이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6. 수서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그 군대를 각각 좌우 12군으로 나누어 출동시키면서 압록수 서쪽에서 모이도록 명령을 하달한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낙랑군은 좌 12군의 행군지에 포함되어있었다. 이때 낙랑군이 만일 평양의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 중국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압록강을 향해 출동하는 수나라 군대의 경유지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수나라 군대가 행군하는 경유지에 낙랑이 포함되어있었다는 것은 낙랑이 평양의 대동강 유역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참고자료 : 이덕일 고조선 대륙의 지배자였다 고조선 침공로에서도 한사군이 나온다


7.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펴낸 중국역사지도집 제 4책 북조 동위조에 의하면 백록산과 백랑수 위쪽 즉 대릉하 중류, 오늘의 조양시 부근 지역에 영주 소속의 낙량군樂良郡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낙량군樂良郡은 낙랑군의 잘못된 표기이거나 낙랑군을 은폐하기 위한 의도적인 실수였다고 보여진다.


한사군의 낙랑군은 후한 말 요동에 독립세력을 구축한 요동태수 공손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 손자 연에 이르러 연왕을 자칭했는데 위 경초 2년 (서기 238)위에서 사마의를 보내 양평에서 연을 치게 하는 한편 몰래 군사를 바다쪽으로 보내 낙랑과 대방 두 군을 평정 장악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위와 남북조시대 북조의 동위는 시간적으로 수백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동위가 요하와 난하 사이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것은 원래 이곳이 한사군 시대와 그 이루 위진 시대에 낙랑군이 있던 지역이기 때문에 옛 이름을 빌어 다시 설치했을 가능성이 짙다.
 


<중국역사지도집의 남북조시대 동위 지도 >
 

8. 중국역사지도집 제 4책 북조 위조에는 난하 부근에 평주 소속으로 조선현이 있다



이때 조선현은 백록산과 백랑수가 있는 즉 대릉하 유역 아래에 위치해있다. 이곳은 원래 낙랑군의 조선현이 있던 자리여서 그 흔적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요나라와 금나라 시대에도 오늘날의 내몽고 적봉시 부근에 각각 삼한현을 설치한 사례가 있다. 이 지역이 만약 우리민족과 전혀 무관하다면 남북조 시대 북조의 위가 왜 여기에 조선현을 설치하고 요나라와 금나라 시대에 어째서 이곳에 삼한현을 설치했겠는가. 이것을 우연의 소치로 돌리기보다는 이곳이 원래 역사적으로 고조선 낙랑군의 터전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둘 수 있다.



위에 인용한 사료를 토대로 검토해보면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갈석산 일대 난하 유역 부근의 낙랑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며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글 출처 : 황하에서 한라까지 (심백강 저 , 참좋은세상 출판 39p~ 49P )

 주의 : 글을 다른 곳에 올릴 시에는 정확한 출처가 있는 글이므로 있는 그대로 올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고자료 : 한사군 한반도에 없었다   

 


낙랑은 대릉하 유역 낙수와 낭수에서 유래했다
( 낙랑은 요락수와 백랑수에서 유래했다고 황하에서 한라까지의 저자 심백강교수는 확신하고 있다. 이는 지명의 유래를 통해서 확실히 낙랑이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알 수 있는 획기적인 발견이다

 

글 출처 : 황하에서 한라까지 (심백강 저, 참좋은세상 출판)

출처 : 아이저아라
글쓴이 : 아이저아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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