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지나문화

[스크랩] "중국문명의 기원"을 논함 -장광직- (번역문)

monocrop 2007. 2. 3. 18:54

論“中國文明的起源”*

 

장광직(張光直)

 

 

*이 글은 장광직 선생의 부인 이훼(李卉)여사가 장광식의 유물중에서 발견한 것인데 1990년 무렵에 쓴 것으로 보인다. 진성찬(陳星燦) 선생이 정리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중국문명의 기원”(혹은 이와 유사한 표제)는 중국 고고학 및 고대사학계에서 뜨거운 토론주제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풍조를 열어젖힌 것은 앞서 1985년 북경에서 출판된 하내(夏鼐)의 중국어판 <중국문명의 기원>이었다. 이어서 이듬해 요녕 우하량 여신묘(女神廟)”유적 발견에 대한《광명일보》의 보도에서는 이와 같은 발견이 장차 중국문명의 기원시대를 올리게 될 것이라고 평했다. 이로부터 5년 가까이 중국고고학계 및 고대사학계에서는 문명이란 무엇이며 중국 최초의 문명 발상지는 어디인가 또 중국문명은 일원인가 다원인가 등등의 케케묵은 문제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었다. “중국문명기원이란 주제 아래 토론에 끼어든 학자는 대단히 많은데, 1987년엔 안지민(安志敏), 진성찬(陳星燦) 그리고 추형(鄒衡)을 들 수 있고 1988년엔 채봉서(蔡鳳書), 이선등(李先登) 그리고 정광(鄭光)을 꼽을 수 있다. 1989년에도 이런 주제상의 토론이 계속해서 이어질듯한데 《고고》제1(1989)에 실린 동은정(童恩正)안지민 선생과의 토의란 글에 대한 안지민의 답글도 벌써 최근에 간행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이 케케묵은 문제가 비록 최근의 뜨거운 토론이 있긴 해도 중국문명의 기원은 결코 새로운 주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서방사상이 중국에 전해지기 전에는 중국문명의 기원은 천지개벽과 삼황오제가 걸치는 체계로 충분히 설명되었고, 일개의 학술상 논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방학자는 매우 일찍부터 중국문명의 기원을 가치있는 토론주제로 파악했다. 근대 서방학자로서 가장 먼저 이 문제를 토론했던 이는 영국 런던대학의 Terrien de Lacouperrie이다. 그는 1885년 한 편의 글에서 중국민족의 시조인 황제(黃帝)는 바빌론으로부터 이주해 왔다고 주장했었다. 중국민족이 서쪽 타문명에서 왔다는 이런 류의 설은 Lacouperrie 이후에도 속속 주장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1920년대에 안데르손(Johann Gunnar Andersson)은 하남과 감숙에서 선사시기의 채도를 발견한 이후, 안데르손은 중국 선사때의 채도와 중앙아시아 및 동유럽 선사때의 채도 사이에 유사함이 있음을 지적했고 이리하여 중국문명 서래설(西來說)은 고고학적 자료로부터 더욱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중국 고고학자에게 산동 용산 성자애(城子崖)와 하남 안양 은허의 고고학적 발굴로부터 중국 본토문화의 선사시대 유물이 생겨났다. 이때도 만약 재차 중국 선사시대는 다 한편의 공백이라고 설명한다면 연이어서 사람과 문화도 다 서방에서 들여온 셈이 되어 몹시 성립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30년대부터 40년대의 외국학자는 다채롭게 주장을 절충했는데, 즉 중국본토에서 사람이 장기간 거주했으되 선사시대에 서방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고서 문화의 진전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설법은 2개의 예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일본의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의 것인데, 1930년에 출판한 명저 <동아문명의 여명>에서 안데르손의 채도를 근거로 한 서래설을 소개한 뒤에 다음과 같이 고찰했다.:

 

그런 채색도기 혹은 이 무렵의 중국문화가 어떻게 발생했는가? 말을 바꾸면 이런 종의 도기 혹은 문화는 서방으로부터 이런 종의 도기와 문화적 인종이 다 구비된 채로 왔단 말인가 아니면 단지 그 문화기술만이 서방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가. 이것은 당연히 발생하는 문제다. 이 문제에 관해 발견자인 안데르손이 일찍이 말한 바를 간추리면, 서방 각지에서 채색도기를 생산했으며 같은 문화를 가진 원중국인(Proto-Chinese)은 마땅히 신석기시대에 투루크스탄 방면으로부터 중국 서강(西疆)으로 이동해 왔을 것인데, 사람은 감숙까지 들어왔다가 마침내는 하남 및 기타 곳곳까지 깊숙이 들어가서 그와 같은 도기를 남겼다고 한다. 같은 스웨덴인 언어학자 칼그렌(Bernhard Karlgren)이 말하기를 중국인은 이런 종류의 채색도기문화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진작 중토(中土)에 거주하면서 격() 형식의 (하상주) 3대 도기를 제조했는데, 채도문화와 이것의 민족은 후에 서방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사람이다. … … 내가 안데르손과 칼그렌의 두 설을 비교해 볼 때 칼그렌설이 더 낮다는 느낌이 든다. 내 생각으로는 중국인은 적어도 신석기시대에 존재하며 진작부터 중토(中土)에서 살았고 그 말기 무렵에 비로소 채색도기 문화가 있었는데 신인종을 동반한 채 침입해 들어온 것이다.”

 

하마다는 더 나아가 은허시대 중국에서 극히 발달한 청동문화도 서방으로부터 수입된 것으로 믿었다. “구리 혹은 청동의 사용은 … … 적어도 구대륙에 존재했는데 서아시아의 한 중심에서 발생하여 각지로 전파된 것이다. … … 구리와 청동에 관한 지식은 서방으로부터 중국으로 전래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대단히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중국문명사상 당시 고고학의 두드러진 두 가지 요소는 채도와 청동인데 다 서방에서 전래된 것이고, 이로써 우리는 중국문명의 기원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견해를 가진 외국학자로는 미국의 비숍(Carl Whiting Bishop)을 들 수 있다. 그는 1939에 발표된Beginnings of Civilization in Eastern Asia》란 글에서 중국신석기시대의 채도 및 흑도문화 그리고 문명시대의 은주에 대해 서술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문명의 각 특징을 검토한 뒤에 그것들은 다 외부에서 온 것임을 발견한다 채도, 청동기, 보리, 전차(戰車), 문자, , , , , 물소, 좁쌀, , 수수 등등이 다 근동으로부터 왔을 뿐은 아니며 인도로부터도 왔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문명은 근동에서 가장 먼저 출현했는데 이곳에선 약간의 동물이 길들여 졌으며 약간의 농작물이 재배되었다. 아울러 이곳에선 각종의 기본적인 발명이 창조되었고, 도시생활이 생겨났다. 이러한 성취는 매우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수천년은 되야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동아시아에서 발견한 당시의 정황이나 형태는 본래 순수한 형질의 것과는 같지않아야 할 것이다. 상술한 문화의 특징 중에는 많은 것이 이렇게 나타났지만, 현시점에서 그것들은 다 (연대상) 뒤늦게 출현한 것이 많고 게다가 비교적 진보된 발전단계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어떤 증거로도 이것들이 독립 발생한 것임을 설명할 수 없거니와 약간의 예 중에서 우리는 그것들의 기원이 서방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아낼 수 있다. … … 이 때문에 뒤늦게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문명의 그 기원과 기본 유형은 반드시 고대 근동으로부터의 문화전파에 따른 자극을 원인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50년대 이전까지 중국문명기원에 대한 토론은 대체로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중국문명은 어떤 요소를 내포했으며 또 어떤 요소가 자생한 것인지 아니면 외부에서 온 것인지 등 중국문명기원에 대한 이런 물음에 대한 답안은 안팎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단언한다. 중국문명의 주요요소는 깡그리 외래종이라는 어떤 이(예컨대 비숍)의 설에 반발한 학자는 중국문명의 약간의 성분이 실제론 본토[本地]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논쟁했다. 이제(李濟)는 중국상고사에 대한 한편의 글에서 토론했는데, 비숍의 설법을 비평하고 중국고대문명 중에서 적어도 3건 즉 골복(骨卜), 잠사(蠶絲) 그리고 은대(殷代)의 장식예술은 너무나도 확실하게 토착이라고 지적했다. “ 3건은 외국인이 동방문화를 토론할 적에 얼마든지 제시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먼 동쪽에서 독립 발전했음을 동서에서 인정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었다. 이와 같은 토착과 외래성분 사이의 밀고 밀리는 싸움은 줄곧 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토착성분 주장이 우세를 점했고, 때문에 중국문명은 기본적으로 토착자생으로 여겨졌는데 심지어는 동방문명의 요람이라고까지 하며 하병체(何炳棣) <The Cradle of the East>란 책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50년대 이후에는 전국에서 고고작업이 두드러지게 진전됨에 따라 선사 및 역사시대 조기의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하여 중국문화기원이란 논제도 점차 복잡해져 갔다. 과거 자료가 드물었을 무렵에 우리는 전중국을 한 단위로 놓고 토론할 수 있었고, 서로 다른 시기의 문화를 순차적으로 배열해서 중국문화발전의 과정을 내보일 수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출토물이 많이 증가하고, 게다가 탄소-14 연대측정법을 이용하여 전국 각지 문화의 발전역사를 초보적으로 이해한 뒤부터 우리는 중국고대고고문화가 한가지 체계에 그치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70년대 초기 이래 중국고고학은 이른바 구계유형(區系類型)이란 개념을 찾기 시작했다. 《文物》1981년 제5기에서 소병기(蘇秉琦)와 은위장(殷瑋璋)은 전국 고고학문화를 구()() 유형으로 상세히 세분할 것을 건의했고, 아울러 중국고대문화는 적어도 서로 다른 6개의 구역으로 나눠 토론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 (1) (陝豫晉) 접경 지구, (2) 산동 및 인근 성() 일부 지구, (3) 호북과 인근 지구, (4) 장강 하류지구, (5) 파양호주강 삼각주을 주축으로 한 남방지구, (6) 장성지대를 중심으로 한 북방지구. 중국문명기원이란 과제에서 이와 같은 구()() 유형의 세분이 기본적으로 중요성을 띄는 이유는 6개 지구는 모두 일찍부터 민족문화의 대용광로 역할을 했기 때문인데, 바꿔 말하면 수많은 지점에서 고고문화의 면모를 반영하는 우리나라 민족문화의 다양상과 문화연원의 연속성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 바꿔 말하면 중국문명의 기원은 다원적이지 일원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문명기원의 다원성은 본래 참신한 유형의 설법은 아니다. 민족사학자 임혜상(林惠祥) 30년대에 중화민족의 기원을 토론할 때 이미 중국문화는 아마 상고시대 화하계 문화가 기본 요소일 것이다. 이런 종의 문화는 기타 문화와 접촉하고 이를 흡수하면서 이루어져 갔고, 흡수한 이후에는 한바탕 뒤엉키고 혼합되면서 융합되었다.고 지적했었다. 이는 화하계가 기타 문화를 흡수했다고 여긴 것인데, 임혜상은 여묘(黎苗)문화, 동이(東夷)문화, 형만(荊蠻)문화, 백월(百越)문화, 산융(山狄)문화, 저강(氐羌)문화 등을 열거했었다.

 

은허문화를 발굴하고 연구한 이제(李濟)는 일찍이 은허문화의 내원(來源)은 복잡하다.”고 지적했었다. , (1) 일부 문화는 현저하게 서방의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문자나 일부 농업 및 도업(陶業)처럼 지방색을 농후하게 띠기도 한다. (2) 골복(骨卜), 구복(龜卜), 잠사업 및 일부 도업(陶業)과 조각 기술처럼 일부는 완전히 중국 내지 적어도 동아시아에서 창시되고 발전했다. (3) 물소, 벼 및 일부 예술 같은 일부는 남아시아로부터 왔다. “은상(殷商)문화는 그러나 이와 같은 성분의 조화를 통해 일어나서 강력한 표현을 더했다.” 이런 관점은 이제(李濟) 선생의 <중국문명의 개시>(1957)이란 책에서 다시 한번 강조되어 상대(商代)의 문화는 굉장히 복잡한 현상인데 이것은 다문화(多文化) 원류의 융합을 대표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다원적 설법은 요즘 중국 선사문화에 대한 구계유형(區系類型) 분석 결과에 의해 고고재료상 지지를 얻고 있지만 새로운 재료는 또한 새로운 논제를 일으킨다고 혹은 오랜 논제를 복잡하게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든 안지민, 추형, 채봉서(蔡鳳書), 이선등(李先登) 등의 최근 견해를 근거로 중국문명의 기원을 설명하려면 반드시 문명조건에 부합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고고문화(말하자면 이리두 혹은 하상주 3대의 중원문화)를 찾아내야 하고, 때문에 이 중국문화기원 문제란 자리매김하는 학자의 관점 그리고 신석기시대 구계유형 분석이라는 두 가지 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문명기원이란 과제는 중국문명사 및 중국고고학 연구의 기본문제지만, 이 문제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중국 고고재료의 증가와 연구가 따라주어야만 진전될 수 있다. 현재 고고재료는 이미 어느 정도까지 축적되어 이 문제의 앞뒤를 들춰 분석하는 것은 상당히 번잡하다. 아랫글에서는 이런 앞뒤는 초보적으로 다루겠으되, 이 문제를 토론시 지적을 고려했으면 할 일부 중요요소를 시험하겠다.

 

 

1. “문명의 정의는 사료 내부에서 식별해야 한다.

 

중국문명의 기원을 강론할 때 먼저 해야 할 작업은 문명이란 무엇이고 중국문명이란 무엇인가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이리하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이 기원문제를 언급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의 일부는 문명이란 두 글자의 정의에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이는 홍산(紅山)문화의 옥기(玉器), 여신묘(女神廟)를 들어 중국문명은 5천년 이전의 요하(遼河) 유역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또 어떤이는 홍산문화는 미처 문명단계로 발전하지도 못했거니와 문명의 조건도 갖추지 못했으므로 중국 문명의 기원은 홍산문화까지 미치지는 않는다고 했다.

 

문명에게 정의를 내려주는 데는 적어도 손쓸 방식이 두 가지 있다. 첫째 것은 미리 문명을 결정하고 이 개념하에 어떤 구체적인 성분을 포함시킨 다음, 다시 중국문화 발전사 중에 그런 성분요소를 찾아 어떤 단락 중에 나타낸다. 만약 찾아냈다면 문명이 언제 중국에 있었는지, 어느 단계에서 출현했는지를 알기 쉽다. 이런 것은 문명의 기원문제는 해결할 순 없지만 적어도 언제 어디서 출발했는지에 대한 연구토론에 이바지할 수 있다. 말하자면 미리 개념이 포괄하고 있는 성분을 결정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이것은 사회과학통론 저작 중에서 채택된다. 중국에선 일반적으로 이른바 클래식 저작물 즉 진리라고 공인된 저작물로부터 채택하는데 모건(Lewis H. Morgan) <Ancient Society>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인류사회진화사를 크게 3단계로 나누었는데 바로 야만(Savagery 혹은 몽매로 번역됨), 반개화半開化(Barbarism, 혹은 야만으로 번역됨) 그리고 문명(Civilization)이다. 이 각각의 단계에는 매우 정확하고 상세한 정의가 있다. 모건은 문명에 대한 정의를, 이 한 시대는 전술했듯이 성음자모(聲音字母)의 사용 및 문자기록의 제작이 시작된다.고 했다. 모건 이후로부터 문명의 정의에 확충과 정규화를 꾀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최근 중국문명기원을 토론하는 학자도 이런 종류의 정의 방식을 채택해서 문명의 내용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그런 후에 고고자료를 찾아 나선다. 가령 추형(鄒衡)문명을 분석하여 표지(標志)로서 문자, 주조와 사용한 청동기, 도시[城市]의 형성과 발전을 꼽았다. 용산문화로부터 이리두문화까지 이미 질적 변화가 발생했었다. 예를 들어 이리두문화 중에 조성된 궁전군(宮殿群) 건축의 출현과 도성의 형성, 청동기 중의 예악병기(禮樂兵器) 발생, 문자의 발명 등등이 있다. 이것들은 또한 다 상주(商周)문명이 공유한 것이다. 용산문화 중에는 이런 구성요소가 없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아직 중국고대문명의 문턱을 뛰어넘지 않았음을 설명한다. 이리두문화에는 그런 구성요소가 있어 이미 같은 상주문명과 직접 연결되어있다. 이렇게 우리들은 고고재료중에서 중국문명의 발원지를 찾아냈는데 다름아닌 이리두문화 즉 하()문명이다.” 이선등(李先登)의 견해도 이와 동일한데 그도 중국고대사회가 문명시대로 진입하는 주요 표지는 문자, 청동예기, 그리고 도시[城市]”라고 여겼다.

 

문명에 정의를 내리는 다른 한가지 방식은 개별적인 구역의 구체적 사료와 구체적 사실의 분기(分期)를 출발로 한다. 상술한 미리 문명의 내용을 열거해 내는 방식에서는 한가지 가정을 해야 하는데, 각각의 구역사(區域史) 이면에 만약 문명이 있어 이런 단계가 출현했다면 일정한 성분이 출현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실제론 상술한대로는 성립할 수 없는데, 중국문명의 3가지 필요성분이라고 말한 문자, 청동기, 그리고 도시[城市]는 모두 문명의 무슨 성분이 된단 말인가? 중국에 있는 두 강의 유역에 있지만 중앙아메리카의 고대문명에는 청동기가 없고 남아메리카의 고대문명에는 문자가 없다. 이렇다고 해서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고대문화사에선 다 문명이란 단계는 없었단 말인가? 이런 관점에서는 인류사회문명의 변천사에 있어 지역[地區](특히 선행연구가 된 지역)가 더 중요시 되고 그 성분은 응당 문명 정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 만약 중남미의 문화사로써 문명을 나누는 기준으로 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중국과 두 강 하류지역의 발전은 그 기준을 다하지 못할 것이니 거꾸로 중국과 두 하류지역의 문화사엔 문명이란 단계가 없다고 표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우리가 각 지역 나름대로의 문화사회발전사를 개별적으로 대하는 것이 괜찮다고 믿는데, 그 발전과정이 어떤 절차를 거쳤는지 또 각 과정 중에 몇 번의 비약성 혹은 질적 변화성의 변화가 있었는지를 검토하고, 그런 뒤에 이 각 역사 자신 내부에 나타난 변화에 근거하여 그것을 약간의 단계 혹은 시기로 나눈다. 여기서 이면의 발전 정도가 비교적 높은 한 단계 혹은 시기가 아마 우리의 관념 중에 있는 소위 문명이라고 말하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다만 이것은 여러 지구의 발전을 비교하여 시기를 나눈 이후에야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전세계 지역의 문화사회사를 분석한 뒤에 그것들의 발달 정도가 최고에 달한 한 단계를 비교 종합한다. 그것들 사이에 만약 많은 기본적인 유사성이 있다면 아마 우리는 한가지 진정한 보편성과 세계성을 지닌 문명의 정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문명기원문제는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퍽 객관적인 두 번째 방식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 , 앞으로는 먼저 중국 고대문화사회를 한차례 분석해서 어떤 단계로 나눠야 할지를 보고, 다시 어떤 한 단계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문명의 출현이 있는지를 본다. 이 방법으로 얻는 결과는 첫 번째 방법으로 얻는 결과와 서로 같을 수도 있겠지만 이 방법으로 얻는 문명단계는 객관적으로 생겨난 것이지 선인(先人) 위주의 선입견을 대표하지 않는다.

 

현재, 고대사까지 이르는 중국선사시대 역사 구간에서 연속성을 띠는 고고학적 사료는 황하 중하류의 하남, 산서, 섬서 일대만이 비교적 완전한데, 우리는 이 지역의 문화사회 변천사의 발전과정에 대한 분석을 한가지 예로 드는 것이 괜찮지 싶다. 이 지역[地區]의 물질문화(주로 도기)의 변화를 따라 보면 아래와 같이 문화서열을 배열할 수 있다.

 

1. 배리강(裴李崗) 및 노관대(老官台) 유적 등, 보다 조기의 신석기시대 문화( 7000-5000 B.C.)

2. 앙소(仰韶)문화 (5000-3000 B.C.)

3. 용산(龍山)문화 ( 3000-2200 B.C.)

4. 이리두(二里頭)문화 ( 2200-1500 B.C.)

5. 상 이리강(二里岡)과 은허(殷墟)기 문화 ( 1500-1100 B.C.)

 

상 이후인 서주동주 이래의 역사시대 문화는 일단 제쳐두고 다루지 않지만, 상기 5종의 선사 역사시대 초기의 고고문화 이래 문화사회 변천사상 대표적으로 돋보이는 그것들은 어떻게 발전했을까? 위에서 말했듯이 고고학상 문화의 서열은 나타난 물질문화의 변천을 근거로 배열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문화의 변화가 총체적이라고 믿는데, 다시 말하면 물질문화상의 변화는 정치, 경제, 사회 따위의 영역 변화와 서로 연관이 있을 필요는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더욱 한층 이런 정치, 경제, 사회상의 변화를 고고학적 재료 속에서 들춰내야 한다. 이렇게 들춰내는 작업을 하며 보다 풍부한 고고자료와 더불어 이것을 목적으로 철저한 분석연구를 해야 한다. 중원의 고고학일지라도 이미 비교적 역사가 있으며 서열 중에는 여전히 많은 미싱 링크(missing link) 있다. 우리는 또한 (1) 생산공구 (2) 수공업 분업 (3) 금속기술 (4) 재산분배 (5) 건축규모 (6) 방어성격의 성곽  (7) 전쟁 제도 성질의 폭력 (8) 제사의례 성질의 미술품 (9) 문자, 9항의 현상을 기준으로 삼아서 중원 고고문화 서열의 출현 정황을 한번 보도록 한다 ( 1).

 

 

1

항목

비교적 이른 신석기문화

앙소문화

용산문화

이리두문화

은상문화

생산공구

나무조개류

同左

同左

同左

同左

수공업 분업

도제 가락바퀴 사용

공방유적

세분업 공방유적

금속기술

흔적

도가니, 몇몇 금속기

청동덩이

고도의 청동주조기술

매장의 재화분배

陶寺묘지, 묘장의 대 분리

차이 심화

두드러진 계급사회

건축규모

가옥

가옥

가옥

궁전

궁전

방어성 성곽

토성

?

토성

전쟁폭력

빈번

빈번

빈번

의례성 미술

있음

청동예기

청동예기

문자

甲文?

陶文

陶文骨文?

陶文

복사금문서책(?)

 

 

위의 표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며 많은 곳에서 고고학적 작업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 중 이리두문화의 발견은 비교적 늦었기 때문에 작업 또한 비교적 적어서 토담의 흔적은 두드러지지 않았고 문자도 발견되지 못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 5단계의 고고학적 문화는 사회변천사로 볼 때 3개의 단계로 나눌 수 있음이 매우 분명하며 2차 질적변화의 문턱을 대표한다. ,

 

1.       배리강 및 노관대문화로부터 앙소문화까지의 단계: 일반적으로 볼 때 자급자족의 농촌생산단계이고, 수공업은 전업화하지 못했으며, 금속공업은 없거나 소규모였고, 두드러진 전쟁이나 일상적인 폭력사용의 증거는 없으며, 재산분배에 있어 현저한 분화 혹은 계급분화가 없고, 진정한 문자는 없었다.

2.       용산문화로 대표되는 단계: 취락형태의 연구를 목표로 한 대규모 고고조사는 아직 중원에서 폭넓게 진행되지 못한 탓에 우리는 용산시대 취락과 취락 사이의 종속연합관계에 대한 이해가 아직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중원사회는 용산시대가 되자 중요한 내부변화가 명백하게 발생했다. 토성[夯土城牆]의 건조와 전쟁 그리고 사람 희생[人牲]에 대한 유적의 발견은 다 창[幹戈]을 쓰는 갑병(甲兵)이 있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가리킨다. 도사(陶寺)의 묘지는 날카롭게 분화된 계급을 표현한 것이며 아울러 계급과 예악(禮樂)이 밀접한 관계에 속함을 표현한 것이다. 수공업의 분화에 의한 전업(專業) 중에는 뼈점[骨卜]에 종사하는 활동과 도기(陶器) 제조활동은 있었으나 지금까지 궁전건축, 청동예기 그리고 문자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나는 청동예기와 문자의 싹이 모두 용산시대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지만 지금의 자료상으로 볼 때 용산과 다음 단계인 이리두문화 사이에 놓인 길은 너무도 깊고 넓은 도랑과 같다.

3.       이리두문화에서 은상문화까지의 단계: 여기에는 궁전건축, 대규모전쟁, 순장[殉人], 사람희생[人牲]과 청동예기 주조가 있는 단계이다. 이리두문화 중에서도 아직 문자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 궁전건축과 청동예기는 그것이 은상과는 가깝고 용산과는 먼 것을 나타냈다.

 

우리들은 앞으로 이 3개의 사회변천사적 단계를 무엇이라고 이름해야 할까? , , 병도 좋고 부락(tribe), 추방(酋邦, chiefdom), 국가(state)도 좋을 것이다. 만약 문명이란 한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응당 두 번째 단계부터 써야만 할까 아니면 세 번째 단계부터 써야만 할까? 만약 계급사회가 문명사회라고 말한다면 용산시대는 적어도 초급 문명사회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이리두 및 은상사회는 고급 문명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분명하게 이것은 용어상의 문제다. 실질적으로 말할 때 중국문명기원의 절차상의 이야기로서 이 3개의 단계는 모두 적다고는 할 수 없다. 두 번째 단계를 문명으로 하든지 아니면 세 번째 단계를 문명으로 하던지 간에 이것은 다 중원지역의 역사현상이다. 중국의 기타 지역의 선사시대 역사 및 역사시대의 초기문화 또한 마찬가지로 분석분단(分段)할 필요가 있으며, 각 지역에는 나름대로 자기 문명단계의 존재가 가능하다. 각 지역의 문명단계는 똑같을까 다를까? 이들을 비교한 뒤에 중간인지 상등인지 구분하여 호칭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이들을 아울러서 귀납시켜 하나의 중국 문명기원단계로 이룰 수 있겠는가? 이것들은 다 분석연구 뒤에야 비로소 회답할 수 있는 문제다.

 

 

2. 이른바 계통론으로 보는 중국문명

 

일원과 다원적 기원

 

중국문명기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할 때 먼저 문명이란 무엇인지를 결정하고 다음으로 무엇이 중국문명인지를 결정한다. 최근 이 문제에 관한 토론에서 이것은 다소 논쟁의 초점이 되었지만 이 초점은 결코 두드러지게 노출되지는 않았었다. 논쟁하던 한 쪽에선 이른바 별들의 전쟁[滿天星]” 견해를 채택하고 중국문명의 기원은 다원적이라고 주장했고, 때문에 상술한 신석기시대의 6개 구역문화는 다 중국문명의 선조라고 여겼다. 논쟁하던 다른 한 쪽에선 문자, 청동기 그리고 도시[城市]를 문명의 표지로 정의하며 중국 경내에서 가장 빨리 이러한 표지에 도달한 것이 중원의 이리두문화라고 지적했고, 따라서 중국문명의 기원도 중원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쌍방은 다 고고문화에 근거를 둔 논쟁을 벌였지만 의견이 갈라진 것은 이들이 붓질한 중국문명은 사실상 한가지 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전자는 넓은 의미로 정의해서 썼는데 중화민족의 문명에 상당하며 시대상 연속성을 띠었다. 후자는 좁은 의미로 정의해 써서 최초의 문명에 상당하는 중국문명을 가리켰는데 다시 말하면 화하문명이 가장 이른 중국문명을 대표한다고 여겼다.

 

중국문명의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고고재료 속에서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어떤 시대에 시작되었는지 식별할 수 있을까? 이것은 중국고고학상 관건이 되는 문제지만 대단히 곤란한 문제기도 하다. 곤란한 것은 중국이란 명사의 정의도 또한 문명과 마찬가지로 2개의 서로 다른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먼저 그것에 어떤 어느 내용을 결정하고 재차 고고자료 속에서 식별해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고자료 속에서 문화분류의 추세를 보고 나서 나눠진 여러 문화 속에서 중국문명의 원형[祖型]을 찾는 것이다. 나는 최근의 중국문명기원에 대한 논쟁 중 중국문명의 정의에 대한 문제에 있어 어느 방법에서 출발할지 논하지 않고 있다고 느꼈는데 토론이 다 불충분해서 말하기가 꺼려진다.

 

5•60년대의 중국 고고학 작업은 중원지역에 집중되었고, 70년대 이후가 되자 지방 고고학 작업, 특히 장강유역과 내몽고 그리고 요녕에서 비교적 큰 진전이 있었으며 더군다나 대량의 탄소-14 연대측정이 더해 우리는 중원 이외의 조기(早期)문화에 대한 인식을 대단히 크게 증진시킬 수 있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중국의 신석시시대 문화를 보고 분석을 더하여 적어도 두 가지의 초보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첫 번째는 중국 경내에 여러 개의 신석기시대 문화가 있는데 각각 독자적으로 발생하고 발전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들 문화가 발전하면서 지리공간의 확장과 함께 이들간에 접촉이 발생하면서 양방향 교류관계가 생겼다고 결론지었다. 이 두 번째 현상은 중국 범위 내에 포함된 많은 지역문화가 서로간에 하나의 큰 문화체계를 구성하며, 각개의 개별적인 문화를 다 고립적으로 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중원문화는 비록 현재 연대상에 있어 우선지위에 있을지라도 그 발전은 고립 된 채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반드시 더 큰 문화계통의 일부로서 분석과 토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관도(金觀濤)와 유청봉()은 토론하면서 더욱 참신한 사회과학 이론체계를 모색하여 중국역사를 연구할 때 쓰자고 하면서 계통론을 건의했다. ,

 

계통론(系統論, Systematics)과 공제론(控制論, Cybernetics)은 통신, 자동화 그리고 컴퓨터가 특색인 20세기 과학기술혁명의 산물인데, 이것들은 사물을 상호 고립적인 결과와 원인 따위의 계열로 파악하지 않고 기계적인 모델로써 분할 처리할 수 있어서, 마구 뒤엉켜 복잡한 사물에 대한 연구를 위한 몇몇 구체적 논리와 방법을 제공한다. 전체에 대한 연구가 강조될 때 계통론과 공제론이 또한 특별히 지적된다. 국부시점을 서로 더해서 합친 것은 전체 특징과 똑같지 않으나 반드시 그것들이 시종일관 전체 계통(system)의 상호 의존적인 조성성분으로서 더해지는 연구가 필요하다.” 금관도와 유청봉은 이러한 이론모델을 중국사회연구에 사용할 것을 지적하며 “1개의 계통, 특히 사회상과 이런 복잡한 대계통(大系統)의 전체특징을 이해하고, 반드시 이 계통의 구조와 작용 메커니즘을 분석해야 하며, 아울러 대계통을 어떤 서브-계통으로 조성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이런 서브-계통 사이에 또한 어떻게 상호작용-상호조절 하는지도 분석해야 한다.”고 했다. 한 사회에 대한 연구는 이와 같고, 한 큰 문화체계에 대한 연구 또한 이와 같다. 구체적인 지역을 들어 말한다면 중국 신석기시대 조기의 각 지구문화가 나름대로 독립적으로 발전할 때는 각각의 문화는 한 개의 독립적인 계통이었다. 이들이 서로 접촉하여 교류 및 상호영향이 있을 때가 되자 이들 지구문화는 많은 서브-계통을 형성하게 되었으나 이들이 공동으로 조성한 큰 문화체계는 곧 드넓은 한가지 주계통(主系統)을 형성하였다.

 

중국 선사문화의 계통론은 사회과학이론을 응용한 것은 아니지만 착실한 고고재료의 근거로 세워진 문화역사다. 조기 농업문화의 기초상 기원전 5천년 전 무렵까지의 중국경내에서 구역성(區域性) 농업문화를 식별할 수 있는 것은 황하 중류의 앙소문화, 산동반도의 대문구(大汶口)문화, 그리고 요하유역의 신락(新樂)문화에서이고, 또한 남방에선 장강 유역의 대계(大溪)문화, 장강 하류의 마가빈(馬家浜)문화 및 하모도(河姆渡)문화, 그리고 동남해안(東南海岸)의 대분갱(大坌坑)문화에서다. 이것은 기존의 고고재료에 근거하여 식별해 낼 수 있는 문화인데 이 리스트는 분명히 장차 팽창할 수 있으며 특히 화남지방 부분이 그러하다. 이들 문화는 서로 떨어져있지만 닮은 곳이 있으며, 아주 분명히 그것들은 각자 내원(來源)이 있고 나름대로 특색을 가진 구역성 문화다. 이로부터 1000년 이후, 기원전 4000년 무렵이 되자 이들 문화의 발전은 한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는데 즉 그들 사이가 사슬처럼 연결되는 관계가 발생했다.: 

 

"기원전 4천년 무렵에 화북과 화남의 각각 특색있는 문화가 일종의 상호 연쇄적인 절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증거가 확고하다. 이 절차는 화북에선 1천년 동안, 화남에선 이후 15백 년 동안 계속 심화되었다. 각 지역문화는 외부로 뻗어나가 서로 접촉하여 문화상 상호교류를 했는데, 오랫동안 중요한 교류관계를 점차 증가시켰음을 구체적으로 보이는 증거다. 이런 상호작용의 절차는 의심할 여지없이 수 천년 전에 시작되었을 것인데, 다만 기원전 4천년 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고학적 기록 중의 표현이 분명하고 강렬했을 뿐이다. 이런 표현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하겠다, 화북 제문화 간의 상호작용 표현과 화북화남문화간의 표현.

 

화북 안에서는 상호관계가 앙소(仰韶), 대문구(大汶口), 홍산(紅山) 그리고 토주산土珠山(장산열도長山列島)의 각 유형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기원전 4천년 전이 되자 황하 하류의 충적평원은 이미 대체로 형성되어 있었지만 이러한 공간적 틈의 필연적인 변화로 인해 결국 앙소와 대문구 사이엔 육상교역의 상실이 촉진되었다. 대문구 도기의 모든 모든 기물 구룹[器組]  하남의 몇몇 유적에서 발견되어 가장 서쪽으로는 언사(偃師)까지 이르고 있는데, 대문구의 전형적인 기형(예컨대 背壺, 袋形足 , 鏤孔足 豆 그리고 高足杯)이 예서(豫西)지역의 유형인 앙소의 기물 그룹에서도 보인다. 앙소의 채도(彩陶)가 대문구 도기에 대해 끼친 영향은 대단히 두드러진다. 앙소와 대문구는 석기, 골기 그리고 도기유형의 품목을 대단히 오래 공유했는데 양자 사이의 상호작용 및 상호영향은 부인을 허용치 않는다.

 

요하 중상류와 대릉하 계곡의 홍산(紅山)과 요동반도 남단의 토주산(土珠山)은 의심할 것 없이 동일한 운행궤도 내에 속하고, 모두 세석기(細石器)와 빗살무늬 평저형[篦印紋平底]도기의 북방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토주산과 대문구는 산도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의 열도를 경유해서 서로 상접해 있는데, 산동 봉래(蓬萊) 이북에 있는 장도현(長島縣) 북장(北莊)유적의 고고학적 유물이 나타낸 것과 같다 — 여기서 빗살무늬 도기와 대문구 유형이 동반 출현했다. 홍산과 앙소는 하북 북부 및 북경지역에서 이들 간의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다. 홍산문화에서 최초로 발견된 중국 고고학적 조기단계에선 흑채(黑彩)가 된 홍도(紅陶)가 있었기 때문에 고고학자는 이 곳을 앙소문화의 북방 분파[分支]라고 성급하게 결론 내렸었다. 현재 우리는 이 문화 자체에 대한 이해가 비교적 깊은데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홍산문화는 요하 계곡을 본체로 발전했고 또 신락(新樂)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해 나왔을 것이되 그 발전과정 중에 앙소문화를 포함한 외부의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홍정완식(紅頂碗式) 도발()은 앙소문화의 후강(後崗)유형 도발과 서로 닮았고, 채도 중에서 평행선문(平行線紋)평행사선(平行斜線) 조성 삼각형문(三角形紋)도 같은 종류의 후강유형 채도와 서로 닮았다. 凸자형 장식이 있는 원복관(圓腹罐)도 반파(半坡)유적의 凸자형 장식 첨저관(尖底罐)과 유사하다."

 

화북의 대문구문화와 장강유역 및 동해안문화 사이의 연쇄관계의 연쇄적인 증거는 소위용산형성기의 형성이다. 용산형성기는 기원전 4천년 중엽에 화북과 장강유역에서 출현했고, 연후에 동해안을 쭉 따라가서 기원전 3천년 중엽에는 대만과 주강(珠江) 삼각주까지 이르렀다. 용산형성기란 개념은 1959년에 처음 나타났고 약간의 구역문화 서열의 공간성을 관통하는 통합의 도구로 삼고자 제안된 것인데, 중국 동해연안 전체에 일단의 연속적인 시기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석기와 도기의 특징 및 유형이 서로 닮아있는 점을 설명하는 데 쓰였다. ‘용산형성기의 신속하면서도 광범위한 확장을 해석하기 위한 것인데, 이 개념이 제안된 당시엔 그것이 한 핵심구역(즉 화북의 중원지구, ()()() 세 강의 합류지역)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방출되는 문화의 확장발전을 합리적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이 해석의 밑그림은, 중원의 신석기시대 문화발전엔 한 줄로 이어지는 완전한 계열이 있지만 당시 동부 및 동남해안엔 그와 같은 완전한 발전계열이 없었고 때문에 동부 및 동남해안 지구의 중원과 유사한 문화는 틀림없이 시기가 앞서는 중원의 문화가 퍼지면서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밑그림은 오늘날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여러 구역에서 이미 완전하거나 완전에 가까운 발전계열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용산형성기의 대확장이란 개념은 다시는 용산형성기의 이론 바탕으로써 해석할 수 없다. 다만 서양속담에서 말하길우리는 절대로 갓난아기를 갓난아기 씻은 물과 함께 쏟을 수 없다고 했었고, 때문에 갓난아기(, 용산형성기)는 정말로 존재한다."

 

선사시대의 상호왕래 노선을 따라 몇몇 구역문화 사이를 이동해 보고 싶다면 우리는 대문구로부터 출발해도 좋을 것이다. 해안가 평원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우리는 마가병문화의 영역으로 달려들어갈 수 있을 것인데 여기로부터 우리는 두 갈래의 길을 달릴 수 있다. 한 길은 남쪽을 향해 항주만(杭州灣)을 통과해서 하모도의 영역에 이르거나 더 남쪽의 동남해안에 이른다. 이곳에서 조금 뒤에 우리는 복건성의 담석산(曇石山)까지 계두(溪頭)문화 및 대만의 봉비두(鳳鼻頭)문화를 접촉할 수 있다. 나머지 다른 길은 마가병으로부터 서쪽으로 돌아서 장강을 따라 상류쪽으로 달려 간다. 이 길에서 우리는 먼저 안휘성 설가강(薛家崗)문화에 맞닥트리고, 이후에 강서성 마령(馬嶺)문화(산배(山背)문화라고도 칭함)에 맞부딪친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다시 상류쪽으로 달려가면 호북성의 대계(大溪) 및 굴가령(屈家嶺)문화에 이르고, 혹 공강(贛江)을 따라 남방으로 돌아가면 월북 및 석협문화로 달려 들어간다. 이들 이미 알려진 각 구역의 문화와 유적은 다 완전히 동시기의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을 대표하는 문화전통은 다 서로 평행선을 달렸으며 단지 대개가 아직 고고학적으로 노출되지 않았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연대학상으로 볼 때 북방(B.C. 4000)이 약간 빠르고 남방(B.C. 3000 조기)은 약간 늦지만 이는 단지 자료의 불완전에서 비롯된 환상일 가능성이 있으며 게다가 적어도 구역의 사이엔 모두 중첩현상이 있다."

 

동해안과 장강유역을 따라 이 각개의 고고문화지구를 관통하는 가상의 여행 중에 우리는 우리가 만난 선사시대 주민의 물질문화가 서로 닮은 점이 허다함을 볼 수 있다. 마제(磨制) 돌도끼, 돌자귀, 돌칼 그리고 수많은 뼈각질조개질의 기물이 이들 구역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물론 일반적인 형식상 그것들은 모두 같은 문화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사람들의 주의를 끈 유사점(고고학상 공동수준의 기준)은 도기의 형식과 장식 측면에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사람들을 납득시킨 것은 내가 소위 용산형성기의 진단특징(診斷特徵)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즉, 누공(鏤孔)의 높낮이가 일정치 않은 원족(圈足) ()와 삼족(三足) 정형팽형기(鼎形烹飪器). 2종의 기형(器形)은 용산형성기 유적에서 출현하거니와 수량도 엄청나게 많다. 이밖에 또한 약간의 기타 유사점이 있는데 일부는 비교적 보편성이 있고 일부는 몹시 특수한 것이다. 산배(山背)문화 등을 논의한 한편의 글에서 팽적범(彭適凡)은 증거를 들어 설명하길 이것은 공강(贛江)유역의 전략적 위치를 차지한 강서(江西)문화로서 동변(장강 하류), 서변(장강 중류), 그리고 남변(광동) 문화의 접촉교류관계의 중추였다고 했다. 그는 분포의 확장에 맞춰 이들 지구의 약간의 도기 및 석기 유형에 대한 비교표를 그려 설명했었다. 비록 그가 비교에 사용한 문화는 모두 BC 3000의 것이지만 그 표에서 나타난 도기의 수준은 보다 기나긴 역사가 있는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화남이든 화북이든 우리들은 모두 한가지 가설을 제안할 수 있는데, 즉 기원전 4천년 무렵에 시작된 토착기원과 자기특색을 가진 몇 개의 구역성 문화의 상호연쇄는 하나의 큰 문화 상호작용권(sphere of interaction)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  이 기원전 4천년 전에 형성이 시작되었고, 범위가 북쪽의 요하 유역으로부터 남쪽의 대만과 주강 삼각주까지 이르며, 동쪽의 해안으로부터 서쪽의 감숙, 청해, 사천까지의 상호작용권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칭? 우리는 한 완전한 중립적 명사를 골라서 x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또한 중국상호작용권 혹은 중국이전상호작용권 이라고 칭해도 무방할 것인데, 이 선사시대 테두리는 하나하나가 역사시대 중국의 지리적 핵심으로 형성되었고, 아울러 이 테두리 내에 있는 구역문화는 다 진(秦漢)제국에 의해 통일된 중국역사문명의 형성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

 

위에서 인용한 마지막 단락은 이미 발표되어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이 있었지만 지면절약을 위해 장황한 고고자료(토론에 관련된 기초자료)는 생략하여 인용하지 않았다. 이 단락이 토론한 바를 보면 그 선사시대 중국상호작용권은 역사시대 중국지리구역의 기초이며, 작용권 중에 있는 구역문화는 모두 역사시대 중국문명의 원류이다. 이렇게 중국문명의 기원을 논함으로써 중국문명의 정의를 내릴 때는 중국 대계통의 총체적 범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중원문화는 단지 이 대계통 중의 한가지 서브-계통일 따름인데 이것엔 이것 자신의 역사가 있고, 또한 이것은 대계통 중의 일부 역사를 이루었는데 즉 기타 문화에 대한 영향과 기타 문화로부터 받은 영향의 역사인 것이다. 중국문명의 일원과 다원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런 각도에서 보는 것이 좋다고 건의한다.

 

3. 중국문명형성의 동력(動力) 문제

 

이밖에 중국문명의 기원의 토론에 있어 한가지 큰 문제는 이것이 어떻게 형성했는가? 이다. “문명이전부터 문명단계까지는 한 발전과정이 있어야 할 것인데 현재 문제가 되는 점은 이런 발전의 동력이다. 과거에 중국문명 외래설을 주장할 때는 이 문제를 무척 쉽게 대답할 수 있었지만, 현재까지 이런 류의 주장을 하는 사람은 이미 없거니와 문제의 해결도 복잡해 졌다.

 

앞 글에서 문명의 정의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는 역사발전의 과정 중에 중요성분의 출현을 표지로써 발전단계를 식별했는데, 이런 중요요소에는 문자, 청동기, 그리고 도시[城市]가 포함되며 심지어는 계급사회와 국가의 정부형식도 포함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열거한 이들 성분 혹은 그 개별적인 발전역사는 결코 문명탄생의 동력에 관한 설명과 같지는 않다. 문명이란 한 사회가 이런 성분을 갖추고 있을 때의 물질상 혹은 정신상의 어떤 질량적 표현이고, 그 관건은 재물[財富]의 축적, 집중 그리고 과시에 달려있다. 문명의 동력이란 한 사회가 축적, 집중 그리고 과시한 그 재산의 방식과 특징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의 각종 성분(예를 들어 문자, 청동기, 도시 따위)이 재산의 축적, 집중 그리고 과시에서 맡은 역할 및 일어난 작용을 말한다.

 

중국고대사회 중의 재물은 어떤 항목을 포함하고 있을까? 중국고대의 재물에 관해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반적인 문자자료는 <좌전> 정공(定公) 4년조의 기술인데, 여기에는 주공(周公)이 자제를 분봉(公分)하여 봉읍(封邑)으로 떠나 보낼 때 어떤 내용의 재물이 있었는지 나타나있다.

 

“昔武王克商, 成王定之, 選建明德, 以蕃 故周公相王室, 以尹天下, 於周爲睦 

“分魯公以大路、大旂, 夏后氏之璜, 封:之之繁弱, 殷民六族:條氏、徐氏、蕭氏、索氏、長勺氏、尾勺氏, 使帥其宗氏, 輯其分族, 將其醜類, 以法則周公 用卽命於周 是使之職事於魯, 以昭周公之明德 分之二匕田陪敦、祝、宗、蔔、史, 備物、典策, 官司、彝器 固商奄之民, 命以伯禽而封於少皞之虛 

“分康叔以大路、少帛、綺筏、旃旌、大呂 殷民七族:陶氏、施氏、繁氏、錡氏、樊氏、饑氏、終葵氏 封畛土略, 自武父以南以圃器之北竟, 取於有閻之土以共王職;取於相土之東都以會王之東蒐 聃季授土, 陶叔授民, 命以康誥而封於殷虛, 以商政, 疆以周索 

“分唐叔以大路、密須之鼓, 闕革、沽洗、懷姓九宗, 職官五正 命以唐誥而封於夏虛, 以夏政, 疆以戎索

 

이 단락의 문자자료에서 열거된 여러 항목은 다 주초(周初)에 개국(開國)시 반드시 구비한 본전인데, (1) 토지(“土田陪敦”, 즉 《시경·노()·송()·비궁(閟宮)》중의 土田附庸[역주: 토지에 딸린 토착농민]), (2) 토지의 개간경작 및 수공업에 종사하는 노동력(“殷民六族”, “殷民七族”, “懷姓九宗”), (3) 각종 예술품혹은 상징품 혹은 예기를 포함하고 있다. 토지는 재산으로서 토지에 의한 주요 산물은 농산품과 짐승의 고기였다. 복사(卜辭)중에는 해를 받기[受年]” 위해 점을 친 수백편에 달하는 많은[多達數百片]” 예가 있다. 복사 중에는 또 왕의 전렵(田獵, 사냥)에 관한 복사가 누차 보인다. 즉 왕이 신하를 데리고 밖에 나가 사슴 따위의 야수를 사냥하는 것인데, 가장 많게는 한 번에 348마리나 잡은 적도 있다. 전렵에 의한 수확 또한 은() 왕실의 한 중요한 경제수입을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위에서 인용한 <좌전>의 한 단락에서는 열거되어 있지 않지만, (殷周)의 금석문 중에는 왕 혹은 기타 귀족이 신하에게 조개를 하사했음을 흔히 볼 수 있다. 은허의 부호묘(婦好墓)에 매장된 재보 중에는 각종 금, 옥 이외에도 또한 7천 매에 가까운 바다 조개가 있었다. 상술한 바를 종합하여 고대 재물의 주요 항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토지

2. 음식물(농작물, 짐승의 고기)

3. 노동력(농업과 수공업)

4. 조개

5. 상징물 및 제례에 관련된 예술품.

 

이들 재물은 어떻게 축적되고 집중된 것일까? 이 문제의 상세한 답변엔 중국고대사회 중의 경제행위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있어야 하며, 이들 현상을 초래한 요인에 대한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 재물의 증가란 생산력의 증가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고, 생산력의 증가는 두 가지 요인에 바탕을 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즉 생산기술의 진보(혹은 노동력의 증가)와 노동효율의 증진이다. 앙소문화부터 용산문화까지 그리고 (하상주) 3대문명까지 지금까지 기술한 대로 한걸음 한걸음 질적 약진을 했었다. 이 한걸음씩의 약진은 고고학적 기록상 생산기술을 수반한 진보일까? 아니면 노동력의 증가와 노동효율의 증진이 수반되었을까? 아니면 두 가지가 다 수반되었을까?

 

앞의 문화의 아홉 가지 진전 요인(factor) 역사표(1)를 보면, 종전의 단계로부터 다음의 단계로의 약진은 생산공구 생산기술의 질적 진보를 반드시 수반하지는 않는다. 고고학적 유물 중의 호미, , , 곡괭이 등등과 같은 생산공구는 다 돌 또는 뼈로 제작한 것이다. 물론 형식상 또는 원료상에 있어서 앙소부터 용산을 거쳐 3대까지 다 기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고고학상 동주(東周) 이전까지는 또한 대규모 수리 건설 혹은 농업의 관개가 행해졌다는 증거가 없다.

 

앙소로부터 용산, 3대까지 한단계 한단계 땅의 약진은 고고학상 표현되어 계급분화, 전쟁, 방어공사, 궁전건축, 인생(人牲) 및 순장 등 정치권력의 집중으로 표현되었다. 바꿔 말하면, 중국고고학에 있어서 표현되는 문명의 동력은 정치와 재물의 결합이다.

출처 : 한얼통합을 위한 민족연대
글쓴이 : 단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