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일본에서 날아든 부음 하나는 한·일 고대사 연구의 폭풍과도 같은 한 페이지를 들추어보게
했다. '기마민족설 주창, 에가미 나미오씨, 96세 일기 마감'.
에가미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8년 기마민족설을 제기해 일본사회와
한국에 놀라움과 충격을 준 인물이다. 이 학설은 4세기 무렵 퉁구스 계통의 북방 기마민족 일파가 한반도로 남하해 현해탄을 건너 북 규슈에 한·왜
연합왕국을 만들었다는 것이 요지다. 에가미의 주장대로라면 한반도 남부 역시 기마민족의 말발굽 아래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
#천황중심 해석 뒤흔들어
일본 헌법 제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다’로 명시돼 있다. 천황은 일본에서
현인신(現人神)으로 통하며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다.
기마민족설은 이전까지 신화에 근거한 천황 중심의 역사해석을 뒤흔든 것이었다.
만세일계(萬世一系), 즉 하나의 혈통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천황가를 이뤘다는 황국사관의 근본을 흔들었으니 반향과 논란은 클 수밖에
없었다.
기마민족설은 끝내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시야에 넣은 패러다임의 확장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에가미는 지난 90년초 김해 대성동 고분발굴 현장을 방문, 자신의 마지막 미싱 링크(Missing Link=계열상
빠진 부분)가 메워졌다고 주장했다. 즉, 몽고지방에서 만주·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까지 뻗어나간 기마문화의 연결고리가 김해의 발굴유물로 충족됐다는
것이다.
국내 학계는 기마민족설을 상상력을 발휘해 만든 허구적 산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홍익대 김태식(역사교육)
교수는 “기마민족설이 임나일본부설의 연장선상에 있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지만 요즘에도 살펴볼만한 대목은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신판 기마민족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부여족 남하설’이란 자못 흥미로운 가설을 낳았다. 부산대
신경철(고고학과) 교수가 제기한 이 가설은 3세기말께 북방의 부여족이 동해안 해로를 타고 남하, 김해지역을 점령하고 금관가야를 세웠다는 것이
요지.
신 교수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 중 3세기말~5세기초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릉 정상부의 목곽묘
부장품에 주목한다. 이곳에서 나온 도질토기와 철제 갑주류, 오르도스형 동복(銅 ·이동식 청동솥), 몽고발형주 등의 유물과 선행묘 파괴, 순장풍습
등이 이전과는 구분되는 북방민족의 이동 흔적이라는 것.
신 교수는 ‘통전’ 부여전에 나오는 서기 285년에 모영선비의 공격을 받아
파국에 빠진 부여족의 일파가 장백산맥을 넘어 북옥저가 있던 지금의 두만강 하류지역까지 이동해 왔는데, 그들이 해로를 이용해 김해로 왔다고
말한다.
신 교수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부여족 남하설은 에가미의 기마민족설과 닮은 데가 있다. 북방의 기마민족이 남하해 정복을 통해
왕국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거의 같다. 이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는 이를 신판 기마민족설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에 대해 신 교수는
“기마민족설은 증명되지 않는 미싱 링크가 여전히 많아 인정하기 어렵다”면서 “기마민족설과 결과적으로는 비슷하게 보일지 몰라도 논증과정은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부여족 남하설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락국 건국연대(서기 42년)와 맞지 않고 금관가야의 성립시기를 3세기
무렵으로 내려잡아야 하는 문제가 있다.
#가설의 힘
기마민족설은 국내 학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부여족 남하설이 그렇고
소장 역사학자 이도학씨의 백제 형성론, 최병현씨의 신라고분을 통해 본 기원설 등은 음양으로 기마민족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 가설은 적잖은 비판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기존 통설을 과감하게 허물고 역사해석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함께 얻고 있다.
경북대 주보돈 박물관장은 “이들 학설이 기마민족설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지만 북방민족 남하라는
기마민족설의 논의 구조와 아이디어를 부분적으로 가져왔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 학설을 20세기초에 풍미했던 문화전파론의
영향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기마민족설과 부여족 남하설 등은 ‘가설(假說)의 힘’을 실감케하는 사례로 꼽힌다. 가설은 일련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어떤 학설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명제인데, 공론과정을 통해 지지가 따르고 설득력을 얻으면 통설이 된다.
가야사는
가설의 연속이며, 많은 가설을 필요로한다. 학계의 활발한 연구 및 발굴성과에도 불구하고 가야사는 아직 개념, 존재시기, 영역, 종족,
국가발전단계, 가야 각국간의 관계 등 기본적인 문제들조차 해결되지 않고 있다. 기존 통설의 벽을 과감히 깨고 신선한 상상력의 날개를 단 가설이
활발하게 개진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11>'日최초 왕국의 첫 여왕 가야 묘견공주'說
논란
한·일 두나라의 고대 사학계를 들여다 보면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일본측 역사학자 십중팔구는
그들이 고대한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지지 또는 동조하는데 반해, 한국에서는 백제 또는 가야가 고대일본을 식민지배 혹은 분국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기록이나 사료로 보면 일본측이 고대한국을 지배했다는 증거보다 우리가 그들을 분국으로 삼았다는
증거가 휠씬 많다.
재미있는 것은, 국내에서 ‘역사학’이라는 범위를 벗어나면 ‘고대일본은 한반도의 분국’ 식의 주장이 거침없이
쏟아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재야 사학자 및 향토사가들의 주장이나 견해가 학계에 수용되거나 인용되는 사례는 별로 없다.
김해
수로왕릉 숭선전(崇善殿)에서 나온 ‘김씨왕세계’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선견(先見)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신녀(神女)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떠나자, 거등왕(居登王·가락국 2대왕)이 강가 돌섬의 바위에 올라가 왕자를 그리워하는 그림을 새겼다. 전하기를 이곳이
초선대(招仙臺)이다…’.
초선대는 김해시 안동 신어천과 국도 14호선이 만나는 곳의 야트막한 바위산을 말한다. 이곳 서쪽의 거대한
자연바위에는 너비 3㎝ 정도의 굵은 선으로 마애석불(경남도 유형문화재 제78호)이 음각돼 있다.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석불을
가야불교와 연결시키는 연구자도 있다.
여기에 언급된 ‘신녀’는 누구일까. 재야 사학계에서는 그가 곧 수로왕의 딸
묘견공주(妙見公主)이며,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로 알려진 ‘야마이국’의 첫 여왕 ‘히미코(卑彌呼)’라는 놀라운 주장을 편다.
‘잊혀진
왕국 가야’를 쓴 언론인 이점호씨와 김해의 향토사 연구자 허명철씨, 아동문학가 고 이종기씨 등은 줄곧 이같은 주장을 해 왔다. 이 가운데
이종기씨는 ‘춤추는 신녀’라는 책을 통해 치밀한 고증과 폭넓은 상상력으로 히미코가 수로왕의 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냉담하다. 가야사 연구자인 모 교수는 “허왕후의 실체조차 애매한 상태에서 그의 딸이 왜국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픽션으로 보이며 학계에선 거론조차 안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단적인 예지만 초선대 설화는 학계와 재야의 관계와 거리를
실감하게 한다.
#가야의 원류
야의 원류를 캐려면 우선 ‘예맥(濊貊)’이란 말을 이해해야 한다. 중국의
사서 ‘삼국지’ ‘사기’ 등에 나오는 예맥족은, 한국에서 청동기 문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이다. 물론 논란이 있다. 예와 맥은 같다는 견해, 예족과
맥족은 다르다는 견해, 둘은 비슷하나 엄밀하게는 구분된다는 주장도 있다. 예맥이 어떤 계통의 종족인가에 대해서도 견해가 다양하다. 퉁구스계라고도
하고 알타이계, 고아시아계, 몽고계라고도 하고, 적당한 잡종이라고도 한다.
한민족을 말하는 ‘한(韓)’의 기원에 대한 논란도
만만찮다. 고조선의 준왕이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한(韓)을 칭했다는 견해(이병도), 한강 이남의 예맥족을 북쪽 퉁구스 계열과 구별하기 위해
한족(韓族)이라 이름했다는 견해 등이 맞서 있다.
#한민족이 찾던 엘도라도
야 이전에 변한이 있고, 그 전에 초기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신석기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한다. 하지만 ‘타임터널’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선(先) 가야인의 실체를 더듬는
작업은 매우 어렵다. 역사는 길고 기록은 적기 때문이다.
학계의 연구성과들을 종합하면 대체로 이렇다. 한반도 초기국가 형성기의
이주민 집단은 크게 고조선 계통과 부여·고구려 계통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기원전 4세기말~기원전 3세기초 고조선이 중국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서쪽지역을 상실했을 때 1차 이주가 일어났다. 이후 위만이 고조선의 왕위를 장악하자 준왕 일파의 남하가 있었고 위만조선 멸망후 한 군현이
설치되면서 또 한차례 이주가 진행됐다. 고조선의 정세 변화와 맞물려 부여·고구려 계통의 이주민도 나타났다.
이들 정치집단이 언제,
왜, 어디로 남하해 가야 땅으로 들어왔는지는 아직 누구도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임효택 동의대 박물관장은 “가야땅에는 일찍이
지석묘(고인돌)를 만들며 살았던 토착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108년께 서북한 지역 위만조선이 망하고 정치 군사적으로 세력을 갖춘
유이민들이 남하, 현지 세력과 결합해 스피디한 문명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고고학적으로 지석묘가 토광 목관묘로 바뀌는 과정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며 “이런 변화는 당시 동북아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고 지적했다.
울산대 백승옥 연구교수는 “변한인의 모태인
한(韓)의 근원에 대해선 아직 학계에서 정리된 게 없다”면서 “분명한 것은, 가야지역 토착 청동기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북방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는 “김해지역에 사람이 살았던 최초의 흔적은 기원전 25세기께로 고조선 건국과
비슷하다”면서 김해시 장유면 수가리 패총을 증거로 들고 있다.
학자들은 “남해안과 영남 일원은 고대에도 자연·지리적으로 천혜의
삶터였을 것”이라면서 “북방 유이민들이 이런 곳을 마다할리 없고 토착민과의 경쟁, 이합집산의 과정을 거쳐 가야문화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풍성한 고고학적 자취
야지역에 토착세력이 있었다는 불멸의 증거는 지석묘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인
지석묘는 경남 김해와 함안, 창녕, 고령 등 가야지역 곳곳에 널려 있어 삼한시대(고고학계선 원삼국 시대라 부름) 변진 소국의 사회상을 읽는
단서가 되고 있다.
가야지역의 지석묘는 남방식인데, 창녕군 장마면 유리, 일명 ‘덤바우’로 불리는 지석묘와 함안 도항리 도동 제3호
지석묘는 위치 및 형태가 독특하다.
창녕의 유리 지석묘는 5개의 고임돌을 받친 무게 36곘에 이르는 거석으로, 구릉지의 높은 곳에
만들어져 막강한 정치권력의 존재를 상정케 한다.
함안지역에는 전국 2만여기의 지석묘 중 180여개가 산재해 있다. 이 중 도동
제3호 지석묘는 여성의 성기와 다산을 상징하는 성혈과 태양신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동심원 등이 그려져 있다. 암각화가 새겨진 지석묘는 국내에서
이것이 유일하다.
가야인의 원류는 삼한시대의 유적 유물을 통해서도 부분적인 갈피를 잡을 수 있다. 대표적 유적지로는 경남 사천의
늑도, 창원의 다호리, 울산 하대, 김해시 양동이다.
창원 다호리 유적은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울산 하대와
김해 양동 유적은 삼한사회가 고대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을 각각 보여준다.
가야 묘제의 전시장이라 불리는 김해 양동유적은 잃어버린
가야와 가야인 연구의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이곳의 연대는 기원전 2세기~서기 5세기로 추정됐는데, 청동기-초기 철기-철기시대로 이어지는
시기별 유물들은 국제성을 띤 세련된 가야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있다.
미니 /2천년전의 국제무역항 늑도
경남 사천의 늑도는 삼천포와 남해군 창선도 사이 작은
섬으로, 삼한시대 중기(초기 철기시대)의 집자리, 패총, 분묘 유적이 밀집해 있는 고고학적 보고다.
섬의 규모는 46㏊ 정도로 작아
웬만한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도 않지만, 1985~1986년, 1998~2001년 발굴조사 결과, 2천년전의 국제무역항이란 놀라운 사실이
확인됐다.
늑도에서는 150여기의 집자리와 많은 인골이 나왔다. 이곳의 인골은 복장(復葬)과 개를 함께 묻는 등의 특이한 장법을
보여 주목됐다.
이곳 패총에서는 또 엄청난 양의 토기조각과 함께 중국의 반량전(사진)까지 나왔다. 네모난 구멍 양쪽에 ‘반(半)’
‘량(兩)’이란 글씨가 새겨진 반량전은 중국 한무제 5년(BC 175년)에 제작된 화폐로, 국내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늑도에서는 낙랑토기(BC 1세기∼AD 1세기) 파편과 일본 야요이계 토기(BC 2세기∼AD 1세기)까지 출토됐다. 이같은
유물은 중국 전한(前漢) 시기에 이미 중국~남해안(늑도)~일본 규슈를 잇는 해상교역루트가 형성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곳을 발굴한
부산대 박물관 이재현 조교는 “늑도는 섬 전체가 고고학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면서 “늑도인들의 문화 및 사회구조, 국제교역, 인근 소가야와의
관계 등은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늑도 유적 B지구를 조사한 부산대 박물관측은 현재 약 30곘(빵박스로 3천개)의 유물을 수습해
정리중이다.
늑도 유적의 성격에 대해 공동 발굴자인 동아대 박물관측은 ‘삼국사기’ 등에 등장하는 포상팔국 중 하나인
‘사물국(史勿國)’의 중심지일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사천시는 지난 85년 1월 경남도 기념물 75호로 지정된 늑도 패총을 국가지정
사적지로 승격해줄 것과 현지에 유물전시관(예산 1백억원)을 건립해줄 것을 정부에 건의해 놓고 있다.
학자들은 “삼천포~늑도~창선간
교량(3차선)이 내년 4월 개통되면 늑도 유적이 훼손될 수 있어 그 전에 체계적인 보존방안이 수립돼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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