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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제사 5 ] 백제의 해외분국 변동상황

monocrop 2007. 2. 3. 08:50
 

6. 百濟의 海外分國 變動狀況


1). A.D 396년부터 송 건국 시 까지 백제분국 상황


A.D 396년에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구태백제의 수도 등지가 점령되고 온조백제가 항복한 후 A.D 400년에 대마도왜와 일본열도왜 마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자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의 백제장군들이 광개토왕에게 복속함으로써 백제는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상실하였다.

그후 A.D 416년에 동진의 안제는 백제왕 여영을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에 책봉하였다.


「전지왕 12년(A.D 416년) 동진의 안제가 사신을 보내어 왕을 책봉하여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 삼았다.

十二年 東晉安帝遣使冊命王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三國史記 百濟本紀

[註 삼국사기 저자는 양서 문구를 보고 구태백제왕 여영과 온조백제 전지왕이 같은 인물이라고 전지왕 본기에 적었다.]

 

동진은 A.D 386년에 백제왕 여휘를 "使持節都督鎭東將軍百濟王"에 책봉한 후 한동안 백제왕을 책봉하지 않다가 A.D 416년에 여영을 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동진이 한동안 백제왕을 책봉하지 않은 것은 백제가 A.D 400년에 광개토왕에게 중국동해안지방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위 책봉이 가지는 의미는 당시 동진과 백제가 우호관계에 있다는 것과 백제가 동진의 동쪽 즉 강좌 방면 중국동해안지방을 영유하고 있다는 것을 동진 황제가 확인한 것이다. 이를 보면 구태백제는 A.D 400년에 강좌 방면 중국동해안분국의 백제장군들이 광개토왕에게 복속함으로써 상실한 강좌 방면 중국동해안지방을 광개토왕이 죽은 후 전의 강좌 방면 중국동해안분국의 백제장군들을 다시 백제에 복속시킴으로써 수복하였다. 그러나 전의 요서분국은 아직 수복하지 못하였다.


A.D 416년경 중국동해안 방면 백제분국


2). 송나라 때 백제분국 상황


송은 백제계로 추정되는 장군 출신인 유유가 동진을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이기 때문인지 개국하고부터 백제와 우호관계가 계속되었다.

[註 북위서 열전 제85 도이 유유전에는 유유를 도이로 적었는데, 이 도이는 백제계를 의미한다.]

송서 백제전에 의하면 송 고조는 의희 12년(A.D 420년)에 구태백제왕 여영을 "진동대장군"에 책봉하였다. 이 봉책명은 여영이 A.D 416년에 동진으로부터 책봉받은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보다 1품이 높은 2품이다.

위 책봉이 가지는 의미는 당시 송과 백제가 우호관계에 있다는 것과 백제가 강좌 방면 중국동해안지방을 영유하고 있다는 것을 송 황제가 확인한 것이다.


「의희 12년 고조는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 여영을 진동대장군에 책봉하였다.

義熙十二年 以百濟王餘映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高祖踐阼進號進東大將軍」


송서 백제전에 의하면 경평 2년(A.D 424년)에 구태백제왕 여영이 송 황제에게 사자를 보내었고, 다음해 원가 2년(A.D 425년)에 송 문제 의융도 백제왕 여영에게 답례 사자를 보내었다.


「소제 경평 2년에 여영이 장사 장위를 보내어 조공하고 공물을 바쳤다.

少帝景平二年 映遣長使張威詣闕貢獻」

 

「원가 2년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내리기를 "황제는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에게 알린다. (백제왕)은 누대로 충순하고 바다를 건너 정성을 바치고.후략"

元嘉二年 太祖詔之曰 皇帝問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累葉忠順 越海效誠.後略」


A.D 458년에 백제 개로왕은 송나라에 이미 파견한 여기, 여곤 등 11명의 백제장군들을 재임명하고 이를 송에 통보하여 백제왕이 임명한 직위 그대로 송에서 다시 임명하게 하였다. 이때 재임명된 백제장군들의 직위 중에 정로장군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송과 백제 연합군의 주 임무는 북위 정벌을 담당하는 것이었고, 백제 장군들을 송 장군으로 다시 임명한 것은 연합군에 편성된 백제장군들이 송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백제의 직위대로 송 장군으로 겸직 임명한 것이다.


「대명 2년(A.D 458년) 백제 개로왕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기를, "신의 나라는 대대로 한쪽을 얻는 은혜를 받아왔습니다. 문무가 함께 뛰어나, 대대로 알현하고 관작을 제수받았습니다.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 등 11명은 충성스럽고, 근면하여 마땅히 관작을 받을만 하니, 엎드려 원하건데 청을 받아들여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이에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를 관군장군에, 정로장군 좌현왕 여곤, 정로장군 여훈을 정로장군에, 보국장군 여도, 여예를 보국장군에, 룡양장군 목금, 여작을 룡양장군에, 녕삭장군 여류, 미귀를 녕삭장군에, 건무장군 우서, 여루를 건무장군에 각 삼았다.

二年 慶遣使上表曰 "臣國累葉 偏受殊恩 文武良輔 世蒙朝爵 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等十一人 忠勤宜在顯進 伏願垂愍 並聽賜除"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為冠軍將軍 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 行征虜將軍餘暈 並為征虜將軍 以行輔國將軍餘都.餘乂 並為輔國將軍 以行龍驤將軍沐衿 餘爵並為龍驤將軍 以行寧朔將軍餘流 麋貴並為寧朔將軍 以行建武將軍于西.餘婁 並為建武將軍」宋書 百濟傳

[註 위 문구 중에 "仍"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이미 이전에 발령받아 재직 중인데 백제국이 지방장관을 3년마다 한번씩 교대해야 하는 규정에 따라 이때 다시 재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위 표문은 백제왕이 임명한 직위대로 송 황제도 임명하라는 백제왕의 통보서 성격을 띈 표문이다. 송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송나라의 관작을 백제왕이 마음대로 미리 수여하고 송 황제보고 그대로 관작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하는 경우가 되는데, 그런데도 송 황제는 백제왕이 요청한 그대로 관작을 제수하였다. 이때 겸직 재임명된 백제장군들은 여씨 성을 가진 백제의 왕족이거나 우씨, 목씨 등 성을 가진 백제의 지배층이다. 그리고 이들의 직위는 제일 우두머리인 관군장군을 비롯하여 북위 정벌을 담당하는 정로장군 및 보국장군, 용양장군, 영삭장군, 건무장군 등이다.

그후 송.백제 연합군은 북위와 고구려를 공격하여 A.D 463년에 난하 서쪽 요서지방을 점령하였고, A.D 465년경에 백제는 그 곳에 조선태수, 광양태수 등을 두었다. 그러나 송.백제 연합군이 점령한 지역에 백제가 군현을 설치한 것 때문에 송과 백제는 불화에 빠졌고, 이는 그뒤 A.D 471년경에 고구려가 백제와 송과의 불화를 이용하여 송과 손을 잡고 백제의 요서분국을 포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모대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건위장군 광양태수(註 계 방면) 겸 장사 고달과 건위장군 조선태수(註 난하서쪽 방면) 겸 사마 양무와 선위장군 겸 참군신 회매를 보내니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태시(註 A.D465-471년) 중에도 송조에 사자로 갔습니다.후략.

牟大又表曰 臣所遣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長史臣高達 行建威將軍 朝鮮太守 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 兼參軍臣會邁等三人 志行清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比使宋朝.後略」 南齊書 百濟傳


A.D 465년경 요서와 중국동해안방면 백제분국


百濟가 난하 서쪽 요서지방에 요서분국을 설치하므로서 백제와 송이 불화에 빠지자 고구려는 A.D 471년경에 남으로 송, 서로 북위, 북으로 유유와 손을 잡고 백제의 요서분국을 동서남북으로 포위하여 고립시켰다.

[註 백제는 송의 배신에 보복하여 그 해(A.D 471년) 송이 468년에 복건성 복주 방면에 설치한 진평군을 폐지시켜버렸다.]


3). 남제 때 백제분국 상황


남제는 백제계로 추정되는 소도성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 소도성은 북위 정벌에 공훈을 세운 장군이다. 남제 역시 개국 후부터 백제와 우호관계가 계속되었다.

[註 북위서 열전 제86 도이 소도성전에는 소도성이 도이로 적혀 있다.]



백제는 A.D 479년에 동성왕이 즉위한 후 국력을 다시 회복하여 A.D 487년에 대마도를 평정하고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평정하여 인현천황을 세운 후, 같은 해 백제군의 주력과 왜 군사를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으로 보내었다. 백제군이 증강되자 A.D 488년부터 489년 사이에 남제.백제 연합군과 북위.고구려 연합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東城王 十年(A.D 488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三國史紀 百濟本紀

「永明六年(A.D 488년)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資治通鑑

「太和十二年(A.D 488년) 夏 四月 高麗吐谷渾國並遣使朝貢 蕭賾將陳顯達等寇邊」北魏書

「太和十三年(A.D 489년) 春 正月 戊辰 蕭賾遣衆寇邊」北魏書


이 전쟁에서 남제.백제 연합군은 북위.고구려 연합군을 패배시키고, 백제는 강소성과 산동성 방면 중국동해안지방을 점령하여 중국동해안분국을 확장하였다.

이 전쟁 후 A.D 490년에 백제장군들이 대방태수, 청하태수, 광릉태수에 임명되었는데, 건위장군 광양태수(註 계 방면) 겸 장사 고달이 대방태수를 겸하게 하였고, 건위장군 조선태수(註 난하서쪽 방면) 겸 사마 양무는 광릉태수를 겸하게 하였고, 선위장군 겸 참군신 회매는 청하태수를 겸하게 하였다.

 

A.D 490년에 北魏.고구려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의 반격에 부딪쳐 다시 패배하였고, 이 전쟁 후 A.D 495년에 모대는 공훈장령들에 대한 관작 수여를 요청하는 표문을 올려 남제로부터 장군, 태수 등 작위를 각 받았다.


「건무 2년(A.D 495년)에 모대가 사람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기를..중략..지난 경오(A.D 490년)에 험윤(북위.고구려 연합군 지칭)이 뉘우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숙이 쳐들어 왔으므로,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번개같이 들이치니 흉리(북위, 고구려 연합군 지칭)가 크게 당황하여 마치 바다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처럼 크게 무너지며 달아나는지라 뒤쫓아 가며 베니 쓰러진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하여 예기가 꺾이고 흉한 행동을 거두게 되어 이제 영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습니다..중략..지금 임시로 사법명을 정로장군 매라왕에 찬수류를 안국장군 벽중왕에, 해례곤을 무위장군 불중후에, 목간나는 전에도 군공이 있고 또 배를 공략한 공이 있는지라 광위장군 면중후에 각 임명하였으니 제수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또 표문에는 "용양장군 낙랑태수를 장사 모유가 겸하게 하고, 건무장군 성양태수를 사마 왕무가 겸하게 하고, 진무장군에 조선태수 장새를, 양무장군에 진명을..중략..각 임명하였으니 성조(남제)에서도 임명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대로 임명하고 군호도 내렸다.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臣自昔受封 世被朝榮 忝荷節鉞 克攘列辟 往姐瑾等並蒙光除 臣庶鹹泰 去庚午年 獫狁弗悛 舉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殭屍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兇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褒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 邁羅王 贊首流為行安國將軍 辟中王 解禮昆為行武威將軍 弗中侯 木幹那前有軍功 又拔台舫 為行廣威將軍 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兼參軍 行振武將軍 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並賜軍號」 南齊書 百濟傳

[註 그 전까지 양무가 조선태수를 겸하고 있었는데, 이때 장새를 조선태수에 임명하였다.]


A.D 490년경 요서와 중국동해안방면 백제분국


4). 양나라 때 백제분국 상황


양나라 역시 백제계 출신으로 추정되는 소연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註 북위서 열전 제八86 도이 소연전에는 소연이 도이로 적혀 있다.]

 

양서에는 양나라가 백제장군들을 양나라 장군으로 임명한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고,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성왕이 죽은 후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 출신 고위관리들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송서나 남제서를 보면 백제분국 장군들에 대한 관작 수여는 백제왕이 中國 황제에게 공적을 기록한 표문을 올려 재가를 받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양서에 양나라 황제가 백제분국의 장군들에게 관작을 내린 사실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백제가 양나라 초기에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을 모두 상실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 출신 백제장령들이 동성왕의 죽음과 함께 백제본국의 요직에서 모두 사라진 것은 동성왕과 함께 이들도 함께 몰락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백제가 A.D 502-503년에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고구려에 빼앗겼다고 적혀 있다.


「전략. 앞서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 노, 오, 월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년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부진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로 돌아왔다.

先是 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 設官署 索籍民戶 分封王爵 屯戌險塞 軍征賦調 悉準內地 明治年間 百濟軍政衰頹不振 權益執行盡歸聖朝」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문자호태열제는 명치라고 개원하였다. 11년(A.D 502년)에 제, 노, 오, 월의 땅이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文咨好太列帝 改元明治 十一年 齊魯吳越之地 屬我至 是國疆漸大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전략. 백제가 영유하던 곳을 요서.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는데, 그 속현으로 산음, 산월, 좌월이 있었다. 문자제 명치 11년(A.D 502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 군현을 고쳐 송강(상해 서남), 회계(강소성 소주), 오월, 좌월, 산월, 천주(복건성 복주)라 했다. 12년(A.D 503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 진평 등지를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百濟所領曰遼西晋平 江南有越州其屬縣 一曰山陰 二曰山越 三曰左越 四曰左越 至文咨明治十一年十一月 攻取越州 改暑郡縣 曰松江會稽吳越左越山越泉州 十二年 移新羅民於泉州 以實之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遼西晋平等 百濟郡廢」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양나라 때 백제가 고구려에게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빼앗긴 것은 무령왕이 정변을 일으켜 동성왕과 동성왕계인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 출신 고위관리들을 모두 제거하자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의 백제장군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백제에서 이탈하여 고구려에 복속했기 때문이다.


A.D 502-503년경 요서와 중국동해안방면


5). 북제, 수, 당 때 백제분국 상황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기 17년조와 18년조에 의하면 백제는 A.D 570 - 571년경에 북제(A.D 550 - 577년)로부터 대방과 동청주 지방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위덕왕 17년(A.D 570년) 고제 후주가 왕을 봉하여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을 삼았다.

十七年 高齊後主拜王爲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

 

「위덕왕 18년(A.D 571년) 고제 후주가 또 왕을 "사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로 삼았다.

十八年 高齊後主又以王爲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위에 나온 대방은 계 동쪽 방면이고, 동청주는 산동반도 방면이다.


A.D 570-571년경 요서와 중국동해안방면 백제분국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기 28년조에 의하면 백제는 A.D 581년에 수나라로부터 대방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이때 백제가 수나라로부터 영유를 인정받은 곳은 대방뿐이므로, 백제는 A.D 581년 이전에 동청주 지방을 상실하였다.


「위덕왕 28년(A.D 581년) 왕이 사신을 수에 보내어 조공하니 수 고조가 조서로 왕을 "상개부의 동삼사 대방군공"으로 封하였다.

王遣使入隋朝貢 隋高祖詔拜王爲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

 

「위덕왕 45년(A.D 598년) 가을 9월 왕은 수에서 요동의 역을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장사 왕변나를 수에 보내어 표를 올려 군도(註 군대의 길을 인도하는 역할)가 되기를 청하니.후략

秋九月 王聞隋遼東之役遣 使長史王辯那入隋奉表請爲軍道.後略」


A.D 598년에 백제가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군도가 되겠다고 표를 올린 것을 보면, 백제는 A.D 598년경에도 대방(계 동쪽)을 영유하고 있었다.


A.D 581년경 요서방면 백제분국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기 25년조에 의하면 백제는 당나라로부터도 대방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무왕 25년(A.D 624년) 봄 정월 대신을 당에 보내어 조공하니 당 고조는 그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사신을 보내어 왕을 책봉하여 "대방군공 백제왕"을 삼았다.

春正月遣大臣入唐朝貢 唐高祖嘉其誠款遣使就冊王爲帶方郡王百濟王」

 

「동쪽에 나라를 가지고 있는 마한의 추장 ‘제시영발’은 하늘의 뜻을 거슬리고 옛 고죽국 땅을 도둑질하여 신에게 죄를 지어 오다가 신이 노하여 위기에 처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와 항복하였다.

馬韓尊長鯷是英髮分義景於扶桑數種天厭竊封疆於孤竹自貽神怒臨危轉禍率衆來降」 冊府元龜

[註 백제를 무시하기 위하여 백제라 적지 않고 마한이라 적었다. 그리고 ‘鯷’는 백제인을 무시하여 메기로, ‘英髮’은 백제장군을 무시하여 털이 난 짐승으로 각 표현하였고, 扶桑은 해 돋는 곳 즉 동쪽에 위치한 백제를 가리킨다.]


당나라는 백제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하여 당시 고구려와 적대관계에 있던 백제의 대방 영유를 인정해주었다. 소위 이이제이 수법을 사용하였다.

통전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한 후 그 곳에 남은 무리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성 부근에 남은 무리들은 후에 점점 수가 약해지자 흩어져서 돌궐이나 말갈에 투항하였고, 그 군장인 부여숭은 옛 나라로 돌아갈 수 없었다.

城傍餘衆 後漸寡弱散 投突厥及靺鞨 其主夫餘崇竟不敢還舊國」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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