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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제사 6 ] 백제분국과 북혼.고구려간의 전쟁상황

monocrop 2007. 2. 3. 08:49
 

7. 百濟分國과 北魏.高句麗間의 戰爭狀況


고구려는 A.D 416년경에 광개토왕 때 백제로부터 빼앗은 중국동해안지방을 도로 백제에 빼앗긴 후 A.D 425년에 북위에 사신을 보내고 그 때부터 북위와 동맹세력이 되었다.

 

A.D 458년에 백제 개로왕은 송 나라에 이미 파견한 여기, 여곤 등 11명의 백제장군들을 재임명하고 이를 송에 통보하여 백제왕이 임명한 직위 그대로 송에서 다시 임명하게 하였다. 이때 임명된 백제장군들의 직위 중에 정로장군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송과 백제 연합군의 주 임무는 북위 정벌을 담당하는 것이고, 백제 장군들을 송 장군으로 다시 임명한 것은 연합군에 편성된 백제장군들이 송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백제의 직위대로 송 장군으로 겸직 임명한 것이다. 이때 재임명된 백제장군들의 직위는 관군장군, 정로장군, 보국장군, 용양장군, 영삭장군, 건무장군 등이다.


「대명 2년(A.D 458년) 백제 개로왕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기를, "신의 나라는 대대로 한쪽을 얻는 은혜를 받아왔습니다. 문무가 함께 뛰어나, 대대로 알현하고 관작을 제수받았습니다.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 등 11명은 충성스럽고, 근면하여 마땅히 관작을 받을만 하니, 엎드려 원하건데 청을 받아들여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이에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를 관군장군에, 정로장군 좌현왕 여곤, 정로장군 여훈을 정로장군에, 보국장군 여도, 여예를 보국장군에, 용양장군 목금, 여작을 용양장군에, 녕삭장군 여류, 미귀를 녕삭장군에, 건무장군 우서, 여루를 건무장군에 각 삼았다.

二年 慶遣使上表曰 "臣國累葉 偏受殊恩 文武良輔 世蒙朝爵 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等十一人 忠勤宜在顯進 伏願垂愍 並聽賜除"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為冠軍將軍 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 行征虜將軍餘暈 並為征虜將軍 以行輔國將軍餘都.餘乂 並為輔國將軍 以行龍驤將軍沐衿 餘爵並為龍驤將軍 以行寧朔將軍餘流 麋貴並為寧朔將軍 以行建武將軍于西.餘婁 並為建武將軍」宋書 百濟傳


그후 송.백제 연합군은 북위와 고구려를 공격하여 A.D 463년에 난하 서쪽 요서지방을 수복하였다. 이로서 백제는 A.D 416년경에 강좌 방면 중국동해안지방을 수복한데 이어 A.D 463년에 난하 서쪽 요서지방까지 수복하였다.

그 2년 후인 A.D 465년에 백제는 송.백제 연합군이 점령한 난하 서쪽 요서지방에 요서분국을 두고 고달을 광양태수에, 양무를 조선태수에 각 임명하였다.


「모대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건위장군 광양태수(註 계 방면) 겸 장사 고달과 건위장군 조선태수(註 난하서쪽 방면) 겸 사마 양무와 선위장군 겸 참군신 회매를 보내니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태시(註 A.D465-471년) 중에도 송조에 사자로 갔습니다.

牟大又表曰 臣所遣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長史臣高達 行建威將軍 朝鮮太守 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 兼參軍臣會邁等三人 志行清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比使宋朝.」 南齊書 百濟傳

[註 위 "比使宋朝" 문구는 태시 중에 단순히 송에 외교 사신으로 갔다는 뜻이 아니고, 백제왕이 임명한 장군, 태수 등 직위를 가지고 송에 파견되었다는 뜻이다.]


.D 465년경 요서와 중국동해안방면 백제분국


A.D 471년경에 고구려는 백제와 송이 불화관계에 있는 것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송, 북쪽으로 유유, 서쪽으로 북위와 손을 잡고 백제의 요서분국을 동서남북으로 포위하여 고립시켰다.

백제의 요서분국이 포위되자 백제 개로왕은 여태까지 적대관계에 있던 북위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치려고 사신을 북위에 보내어 조회하고 표문을 올렸으나 북위가 불응하여 실패하였다.



「개로왕 18년(A.D 472년) 왕은 사신을 북위에 보내어 조회하고 표를 올렸다. "신은 나라가 동쪽 끝에 서 있고, 길은 승낙이와 이리(고구려 지칭)에 막혀 비록 대대로 신령의 교화는 받았으나, 번방의 예를 닦을 길이 없었으매, 운궐을 쳐다 볼수록 쏠리는 정이 그지없사옵니다. 황제 폐하께옵서는 천명에 화합하시니 우러러 사모하는 심정 누를 길이 없사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 여례와 룡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 등을 보내어 배를 띄우고 아득한 바닷길을 더듬으며 목숨을 자연의 운에 맡기고 만분지 일 정성이라도 드리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과 땅 신이 감응하고 황제의 신령이 크게 살펴서 (사자가) 황제의 궁궐에 능히 도달하여 신의 뜻을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아침에 소식을 듣고 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표에서 또 말하기를 "신의 나라는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선세 때는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釗[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나라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으므로 신의 할아버지 須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보아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로 잠시 싸운 끝에 釗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풍씨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사람들이 도망해 오자 추악한 무리들(고구려 지칭)이 점차 성해져서 드디어 臣의 나라가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으며, 원한을 맺고 병화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臣의 나라는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긍휼이 멀리 미친다면 속히 한 장수를 臣의 나라에 보내어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치의 땅도 한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또 말하기를 "지금 연은 죄가 있어 나라를 스스로 으깨어, 대신과 귀족들을 죽이고 살해하기를 마다하지 않아,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요 손을 쓸 때입니다. 또 풍족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듯 황제 폐하께 솔리는 정을 가지고 있으며, 낙랑의 제군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을 품었으매 황위가 한번 거동하면 성토만 있을 뿐이요 싸움은 없을 것이며 臣도 비록 불민하오나 갖은 힘을 다하여 부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람을 받아 향응할 생각입니다. 고구려의 불의와 반역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번국으로 받드는 체 하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마음을 품어, 혹은 남으로 유씨(유송)와 통하고 혹은 유유와 약속하여 함께 입술과 이 마냥으로 되어 왕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성인이었지만 단수를 쳐서 벌주었으며, 맹상군은 어진 사람이라 일컬어지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못들은 체하지 않았습니다.시내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일 치지 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 이후에 신의 나라 서쪽 경계 소석산 북국 해중에서 10여명의 시체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기와 안륵을 주워 살펴본 결과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들은즉 바로 왕사가 신의 나라로 찾아오는데 도둑이 길을 가로막고. 큰 뱀(고구려 지칭)이 길을 막아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깊은 분노를 느낍니다."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豺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罔極 凉風微應 伏惟皇帝陛下 和天休 不勝係仰之情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 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運 遣進萬一之誠 冀神祇垂感 皇靈洪覆 克達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 又云 臣與高句麗 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輕廢인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須 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凌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 力竭 轉自孱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鄙女 執 後宮 幷遣子弟 牧 外廐 尺壤匹夫 不敢自有 又云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亡之期 假手之秋也 且馮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天威一擧 有征無戰 臣雖不敏 志效畢力 當率所統 承風響應 且高句麗不義 逆詐非一 外慕 藩卑之辭 內懷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유유 共相脣齒 謀凌王略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嘗稱仁 不捨塗 流之水 宜早壅塞 今若不取 將貽後悔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幷得衣器鞍勒 視之非高句麗之物 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 雖未委當 深懷憤.後略」三國史記 百濟本紀 蓋鹵王紀


백제는 요서분국이 고구려 등에게 포위됨으로써 국력이 약해졌다. 고구려는 그 기회를 틈타서 A.D 475년에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였다.

 

그후 A.D 477년에 백제는 고구려 등의 포위를 뚫고 백제본국으로 온 요서분국 군사의 도움으로 국력을 회복하여 A.D 487년에 대마도를 평정하고,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다시 평정하여 인현천황을 세우고 일본열도를 다시 백제의 후국으로 만들었다.

인현천황을 세운 백제는 그 해 백제군의 주력과 왜 군사를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으로 이동시켰다. 왜 군사와 백제군의 주력이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으로 이동하자 이에 당황한 고구려는 일년에 한번씩 보내던 북위 사신을 이 해부터 일년에 3번씩 보내며 동맹관계를 강화하였다.

[註 : A.D 488년부터 495년까지 고구려가 북위에 사신을 보낸 회수. A.D 488년 3회. A.D 489년 3회. A.D 490년 2회. A.D 491년 2회. A.D 492년 3회. A.D 494년 2회. A.D 495년 2회.]

같은 해 북위는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 패하였다.


「永明六年(A.D 488년)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資治通鑑


북위의 공격을 물리친 남제.백제 연합군은 다음해인 A.D 489년에도 북위의 변지를 공격하였다.


「太和十三年(A.D 489년) 春 正月 戊辰 蕭賾遣衆軍寇邊」北魏書


이 전쟁 후 A.D 490년에 백제왕 모대는 남제에 표문을 올려 백제왕이 임시로 임명한 광양태수 겸 장사 고달과 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양무와 선위장군 겸 참군 회매 등 삼인을 남제에서도 선례대로 관작을 내려달라고 요청하고 또 A.D 488-489년 전쟁의 공훈장령들에게도 관작을 내려달라고 요청하여 광양태수 겸 장사 고달에게 룡양장군 대방태수(계 동쪽 방면) 관작을, 조선태수 겸 사마 양무에게 건위장군 광릉태수(양자강하류 북쪽 강소성 방면) 관작을, 선위장군 겸 참군 회매에게 광무장군 청하태수(산동성 북부) 관작을 남제로부터 각 제수받았다.이로 보아 백제는 488-489년 전쟁에서 북위를 물리치고 북위로부터 광릉(양자강하류 북부), 청하(산동성 북부 방면) 등 중국동해안지방을 빼앗은 것으로 보인다.


「모대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임시로 임명한 건위장군 광양태수(註 계 방면) 겸 장사 고달과 건위장군 조선태수(註 난하 서쪽 방면) 겸 사마 양무와 선위장군 겸 참군신 회매를 보내니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태시(註 A.D465-471년) 중에도 송조에 사자로 갔습니다. 이제 신의 사신으로 험한 바다를 무릅써고, 지극한 마음으로 찾아가니, 관작을 내리심이 마땅하니, 삼가 선례대로 관작을 내려주십시오..중략...고달은 일찍부터 본받을 만 함이 뚜렸하고 공무에도 부지런하여 임시로 룡양장군 대방태수로 삼았고, 양무는 뜻과 행실이 맑고 공무에 그침이 없어 임시로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삼았고, 회매는 뜻이 굳고 부지런하며 본받을만하여 임시로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삼았습니다. 조서를 내려 그대로 받아들이고 군호도 내렸다.후략

牟大又表曰 臣所遣 行建威將軍 廣陽太守 兼長史臣 高達 行建威將軍 朝鮮太守 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 兼參軍臣會邁 等三人 志行清亮 忠款夙著 往泰始中 比使宋朝 今任臣使 冒涉波險 尋其至效 宜在進爵 謹依先例 各假行職 且玄澤靈休 萬裡所企 況親趾天庭 乃不蒙賴 伏願天監特愍除正 達邊效夙著 勤勞公務 今假行龍驤將軍帶方太守 茂志行淸壹 公務不廢, 今假行建威將軍 廣陵太守 邁執志周密 屢致勤效 今假行廣武將軍 淸河太守 詔可 竝賜軍號, 除太守..후략」 南齊書 百濟傳


A.D 490년에 북위.고구려 연합군이 백제의 영지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 무참히 패배하였다.


「건무 2년(A.D 495년)에 모대가 사람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기를..중략..지난 경오(A.D 490년)에 험윤(북위.고구려 연합군 지칭)이 뉘우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숙이 쳐들어 왔으므로,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번개같이 들이치니 흉리(북위와 고구려 연합군을 비하한 말)가 크게 당황하여 마치 바다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처럼 크게 무너지며 달아나는지라 뒤쫓아 가며 베니 쓰러진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하여 (흉리의) 예기가 꺾이고 흉한 행동을 거두게 되어 이제 영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습니다..중략..지금 임시로 사법명을 정로장군 매라왕에 찬수류를 안국장군 벽중왕에, 해례곤을 무위장군 불중후에, 목간나는 전에도 군공이 있고 또 배를 공략한 공이 있는지라 광위장군 면중후에 각 임명하였으니 제수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또 표문에는 "룡양장군 낙랑태수를 장사 모유가 겸하게 하고, 건무장군 성양태수를 사마 왕무가 겸하게 하고, 진무장군에 조선태수 장새를, 양무장군에 진명을..중략..각 임명하였으니 성조(남제)에서도 임명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대로 임명하고 군호도 내렸다.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臣自昔受封 世被朝榮 忝荷節鉞 克攘列辟 往姐瑾等並蒙光除 臣庶鹹泰 去庚午年 獫狁弗悛 舉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殭屍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兇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褒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 邁羅王 贊首流為行安國將軍 辟中王 解禮昆為行武威將軍 弗中侯 木幹那前有軍功 又拔台舫 為行廣威將軍 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兼參軍 行振武將軍 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並賜軍號」 南齊書 百濟傳


남제서에는 북위.고구려 연합군이 험윤 또는 흉리로 비하되어 적혀 있다.

일부 사학자들은 북위서에 백제와 북위가 싸운 내용이 없으므로, A.D 490년에 백제가 북위와 싸웠다는 남제서 문구는 믿을 수 없고, 또 백제가 싸운 상대방도 북위가 아니고 고구려이며, 싸운 장소도 한반도이지 요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와 북위가 A.D 488년에 싸웠다고 적혀 있는 것은 자치통감 내용을 취하였기 때문이고 실제로는 A.D 49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싸웠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북위와 고구려간의 외교관계, A.D 488년에 백제가 일본열도왜를 평정하여 인현조를 세운 후 백제본국과 일본열도왜의 주력을 요서분국으로 보낸 사실, 북위가 백제에 패한 사실을 수치스럽다고 북위서에 제대로 적지 않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A.D 490년경 요서와 중국동해안방면 백제분국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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