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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야사]가야가 살아온다<30> <31>제5부 동북아속의 가야 ⑥鮮卑문화의 영향

monocrop 2007. 2. 3. 08:55

 

 

<30> 제5부 동북아속의 가야 ⑥鮮卑문화의 영향

준수하게 생긴 말이 쟁기를 끌고 있다. 매를 맞으면서도 고분고분하다. 야성을 잃어버린 듯한 새까만 눈빛-.

“옛날 같으면 이 만주벌을 거침없이 뛰어다녔을테죠. 신세가 바뀌어 이제는 일을 해야 먹고 살아요.”

동행중인 중국 조선족 운전수 이정화(47)씨의 말이다. 그는 “중국 동북에서는 아직도 말이 일꾼이다. 여기선 한국돈으로 몇 십만원이면 말을 산다”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오전, 취재진은 지린성(吉林省)과 랴오닝성(遼寧省)의 남쪽 경계지점인 신빈(新賓)에서 ‘일하는 말’을 가까이서 살필 수 있었다.

쟁기를 끄는 말은 모두 2두1조였다. 제각기 입가리개를 하고 고삐와 굴레, 가슴걸이 같은 ‘말갖춤’을 했다. 견인저항이 버거운지, 말들은 이랑 끝에서 반전(反轉)을 할때 ‘히힝-’하며 콧김을 뿜었다.

이 말들의 고향은 필시 북방 초원지대일 것이다. 북방의 이민족사를 들춰보면 말의 거친 숨소리가 배어난다. 흉노(匈奴), 오환(烏桓), 선비(鮮卑) 등 기마유목민족들이 초원에 새긴 역동적인 역사 탓이다. 이들 종족은 말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부여와 고구려도 연원을 따지면 기마민족의 후예다. 이뿐인가, 신라와 가야는 어떻고.

#랴오허에 흐르는 한국사

이튿날, 취재진은 랴오닝성의 선양(沈陽)에서 역사도시인 차오양(朝陽)으로 차를 몰았다. 차오양은 북방과 중원을 잇는 랴오시(遼西) 지방의 요충지다.

랴오허(遼河) 중류의 장황지대교를 지날 무렵, 창춘(長春)의 동북아역사문화연구소 이종수 소장은 고조선에 대해 잠시 설명했다. “논란이 있지만 다릉허(大凌河)와 랴오허 일대는 동이권, 고조선의 세력권입니다. 이를 말해주는 유물도 꽤 있습니다.”

랴오허는 북방의 한민족사를 더듬을 때 반드시 만나는 강이다. 비파형 동검을 만들었던 고조선의 근거지이며, 고구려가 후연 등과 쟁패하던 곳이 이 강의 중·하류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중국 동북평원은 남과 서로 병풍같은 장대한 산맥들을 거느리고 있다. 서쪽의 다싱안링(大興安嶺) 산맥과 남쪽의 창바이(長白)산맥이다. 두 병풍 산맥이 남쪽과 서쪽을 향해 달리다 한군데로 수렴되는 끝자락에서 다싱안링의 시랴오허(西遼河), 창바이의 둥랴오허(東遼河)가 각각 발원한다. 이 물줄기들은 남쪽으로 수천리를 흘러 하나의 랴오허가 되어 발해만으로 들어간다.

인구 29만명의 차오양은 선비족이 세운 후연(後燕)의 수도다. 현지의 연도(燕都·연의 수도)라는 말이 암시하듯 시내에는 연나라의 자취가 많다. 도심에 우뚝 서있는 높이 42m의 북탑은 3연(燕)시대(349~436년)에 세워진 것이다.

차오양시 주변에서는 근래 유적 발굴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이 중 상당수 무덤이 선비(鮮卑) 계열이다. 시내 동쪽을 흐르는 다링허 유역의 벌판에는 4세기 중반 선비족의 족적을 간직한 무덤 수백기가 흩어져 있다.

선비가 누구던가. 단순히 ‘북방 오랑캐’로 알았다면 오산이다. 3~4세기 격동의 동북아에서 이들 만큼 역동적인 삶을 산 종족은 찾기 어렵다. 3세기말 모용선비(慕容鮮卑)는 차오양에 도읍을 정하고 전연·후연·북연 즉 3연을 세웠고, 탁발선비(拓跋鮮卑)는 혼란한 5호16국시대(304~439년)를 평정, 북위(北魏)를 열었다.

주목되는 것은, 바로 이 시기의 선비족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들. 선비 무덤에 부장된 마구류 및 장신구 등은 고구려, 신라, 가야에서 출토되는 것의 기원을 따져보게 한다.

선비무덤을 집중 연구해온 충남대 박양진(고고학) 교수는 “선비족 묘제는 토광묘→석곽묘→석실묘 식의 변화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백제 가야 등지의 수혈식→횡혈식 묘제 변천과 유사성을 갖는다”면서 “특히 4세기 중엽부터 선비 무덤에 부장되는 각종 마구류(馬具類)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야문화에 투영된 鮮卑色

변화의 핵심은 역시 말과 마구다. 지난 1988년 차오양시 인근 십이대자(十二臺子)에서 발굴된 선비족의 철제 말투구는 고대 동북아의 비밀 하나를 푸는 실마리가 됐다. 전연시대(349~370년) 선비족이 만든 것으로 밝혀진 이 말투구는 중국에서 처음 확인된 것으로, 시기적으로 가야보다 다소 빠르다고 한다.

비슷한 형태의 철제 말투구가 가야(부산 복천고분, 합천 옥전고분)와 일본 열도에서 시차를 두고 발견된 것은 어떤 의미일까. 랴오닝성(요녕성)박물관 마청(馬靑·34) 연구원은 “형태적 유사성으로 보아 문화전파의 관점을 중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학자 에가미 나미오(작고)의 ‘기마민족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선비문화가 어떤 경로로 한반도에 유입됐는지는 국내에서도 논란거리다. 일반적으로는 고구려→신라→가야로 전해졌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동국대 강현숙(고고미술사학) 교수는 “서기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이 선비문화 전파의 계기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의 마구는 백제를 거쳐 유입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4세기 중엽 이후 가야와 신라 고분에서 나온 마구와 무구, 금속제 장신구에 ‘선비 색채’가 가미돼 있고, 그것이 가야사회의 성장배경이 됐다는 것은 자연스런 추론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곧 가야문화의 원류일까.

중국 고고학을 전공한 복기대 단국대박물관 연구원은 “가야문화는 넓게보면 고조선의 영향이 드리워져 있고, 좁게는 4세기대 선비와의 교류·전파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가야사회 자체의 자생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취재진은 차오양을 빠져나와 다시 랴오허를 건넜다. 랴오허에 깃든 고대사의 비밀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변의 평원에는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30> 제5부 동북아속의 가야 '가야 고상가옥 中 농촌에 있네'

 

중국 지린성 퉁화 인근 농촌의 옥수수보관 창고

 

 

 

 

 

 

“어, 가야시대 고상가옥과 비슷하네!”

중국 지린성(吉林省) 퉁화(通化) 인근의 농촌에서 취재진은 원두막처럼 생긴 창고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네 기둥의 중간쯤에 곳간같은 공간을 꾸미고 뗏목을 엮듯 나무로 벽체를 만든 독특한 형태였다. 단순히 보면 한국식 뒤주에 높다란 기둥을 세운 구조다. 중국에서는 이를 ‘창즈(倉子)’라고 부르고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70대 초반의 할머니는 “조상들이 사용해온 창고다. 주로 옥수수를 넣어둔다. 통풍이 잘 되기 때문에 옥수수 보관에 좋다”고 말했다.

중국 동북지방의 농촌에는 이같은 창고가 집집마다 하나씩 설치돼 있어 농가의 필수 시설이 되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이 창고는 외견상 가야시대 때 이용했다는 고상가옥과 비슷하다. 김해 봉황대 유적지와 김해 장유 신도시의 ‘아랫덕정 유적지’에 복원돼 있는 ‘고상가옥’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중국의 이런 창고는 문헌기록에 나오는 고구려의 ‘부경(뷻京)’을 연상시킨다. 중국인이 기록한 3세기대의 사료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인의 생활풍습을 묘사하면서 ‘無大倉庫, 家家自有小倉(무대창고 가가자유소창)’이라 소개하고 이를 ‘부경’이라 부른다고 했다. 즉,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다는 말이다.

학자들 중에는 이를 근거로 고구려 때의 농경풍습이 중국 동북지방에 전래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고구려식 창고인 부경은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식 창고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도다이지(東大寺) 뒤편에 있는 곳간과 그곳의 정창원(正倉院)은 형태상으로 고구려 부경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31> 제6부 깨어나는 가야 ①국내외 연구자들

‘國出鐵…’. 3세기대의 사실을 기록한 중국사서인 ‘삼국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라(가야)에서 철이 생산된다’는 이 말은, 김해지역에서 쏟아진 철기류와 함께 ‘철의 왕국’ 복원의 결정적 단서가 됐다.

한자의 숲속에 숨어 있던 ‘國出鐵…’기사를 처음 찾아낸 이는 이병도 박사로 알려져 있다. 문헌자료의 실증을 통해 역사연구의 기초를 닦은 이 박사는 또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국역하면서 ‘가야’의 존재를 소개했다.

비슷한 시기에 언론인이자 사학자였던 천관우 선생은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 활용의 길을 텄고, 부산출신 김정학 선생은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문헌자료를 보완·검증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광복후 1세대 연구자로 분류되는 이들은 ‘가야’라는 미답의 경지로 들어가는 길을 열었다. 그후 가야사 연구는 ‘젊은 피’를 만나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최근 20년간 한국고대사의 성과를 되돌아보면 가야사 연구가 단연 선두에 놓인다.

#눈부신 연구성과

김해시가 운영하는 가야사 홈페이지(www.gayasa.net/gaya/) ‘역사자료실’을 노크하면 가야사 논저 목록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일별해 보니 연구 단행본이 43건, 논문이 977건(문헌사학 544, 고고인류학 433건), 발굴보고서가 286건이다.

이는 엄청난 숫자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관련된 발굴보고서가 각각 100건 정도라고 하니 가야사 연구가 어느 정도 활발했는지 짐작된다.

홍익대 역사교육과에서 운영하는 ‘한국역사 서지검색’ 사이트에는 고대 국가들, 즉 삼국과 가야의 연구성과물을 비교해 놓고 있어 흥미롭다. 1870~2000년 전반까지 나온 논저 수는 신라 2천3백19건, 백제 1천3백6건, 고구려 806건이고, 가야가 504건이다. 삼국과 달리 가야사 논저의 대부분이 1980년대 이후에 나온 것을 감안하면 적은 숫자가 아니다.


연구자 수에 있어서도 가야는 삼국에 뒤지지 않는다. 가야사 및 고대한일관계사로 국내외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만 약 20명. 고구려나 발해 연구자가 각각 6~8명에 머물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가야 연구의 폭이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타급 연구자들

가야사 연구자 중에는 시쳇말로 ‘골수’가 적지 않다. 본지 가야사 취재팀이 학계의 추천과 개별 연구자의 저서, 논문, 발굴조사 및 대외활동 등을 토대로 분석해 보니 ‘스타급 연구자’가 10여명에 달했다.

먼저 문헌사학 쪽에는 김태식(47·홍익대) 이영식(48·인제대) 백승충(45·부산대) 교수, 백승옥(41·함안군 학예연구사)씨 등이, 고고학 쪽에는 신경철(52·부산대) 조영제(50·경상대) 박천수(42·경북대) 교수 등이 꼽혔다.

김태식 교수는 전·후기 가야연맹체설의 이론적 실체적 토대를 마련한 연구자다. 1993년 ‘가야연맹사’(일조각)에 이어 지난해 펴낸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전3권(푸른역사)은 국내외 가야사 연구의 결정판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장인 이영식 교수 역시 연구활동이 활발하다. 1993년 일본에서 ‘加耶諸國と任那日本府(가야제국과 임나일본부)’를 펴내 큰 반향을 불러모았고 가락국 성립, 전쟁, 가야불교, 정신세계 분야의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했다.

백승충 교수는 가야의 지역연맹사 연구에, 백승옥씨는 가야 각국의 성장과 발전연구에 각각 의미있는 성과를 쌓고 있다.

이밖에도 문헌사학 쪽에는 권주현(계명대 강사)씨가 생활사 분야에 독보적인 연구성과를 낸 바 있고, 주보돈(경북대) 이근우(부경대) 윤석효(한성대) 노중국(계명대) 교수 등의 연구가 눈에 띈다.

신경철 교수는 ‘가야 고고학’의 바탕을 마련했다 할 정도로 많은 발굴조사를 하고 그에 따른 연구성과를 냈다. 김해 대성동, 부산 복천동고분 등을 발굴했으며 금관가야 성립과 관련해 부여족 남하설을 제기,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조영제 교수는 합천 옥전고분의 발굴(1985~1991) 주역으로 ‘다라국’ 존재를 부각시켰고, 박천수 교수는 대가야의 토기편년과 영역을 정리했다.

고고학 쪽에는 이밖에 임효택(동의대) 심봉근(동아대) 김세기(경산대) 김두철(부산대) 교수, 송계현(복천박물관장) 홍보식(부산시립박물관)씨 등의 조사연구 활동이 주목되고 있다.

#외국 연구자 및 향토사학자

일본에도 ‘가야통’이 10명 정도 있다.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학자는 다나카 도시야키(田中俊明·51) 교수. 사가현립대에 재직중인 그는 5~6세기 대가야 중심의 연맹체를 상정, 외국인으로선 드물게 전론(全論)을 편다.

규슈대의 니시타니 다다니(西谷 正·66) 교수는 고대한일관계사를 주로 다루는데, 발표한 논문만 500여편에 이른다. 그가 펴낸 ‘동아시아 지석묘 종합연구’는 한국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일본국제문화재연구소 나가시마(永島 暉臣愼·62) 소장도 고대한일관계사 연구분야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그는 고구려 벽화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다.후쿠오카대의 다케스에 주니치(武末純一·53), 도쿄 국학원대학의 스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60), 오카야마 리카대의 가메다 슈우이치(龜田修一·50) 교수 등도 가야에 깊은 관심을 갖는 학자들. 주로 가야와 왜, 철과 도래인

서양의 가야사 연구자로는 폴란드 바르샤바대의 요안나 루알레즈(여·30)씨와 영국 더람대학의 지나 리 반스(여·55) 교수가 꼽힌다. 요안나씨는 지난 2000년 인제대에서 수학한 뒤 자국에서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야 각 지역의 향토사 연구도 활발한 편이다. 김해의 허명철(58·금강병원장)씨, 창녕의 김세호(86)씨, 경북 고령의 김도윤(80)씨 등은 전문 연구자 못지 않은 활동을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허명철씨는 ‘허왕후 초행길’ ‘가야불교의 고찰’ ‘가야와 초기 임나(任那)’ ‘아리랑 원류’ 등의 저서를 통해 학계에까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다.

김세호씨는 ‘가야사’와 ‘비화가야사 연구’라는 책을 통해 창녕지역 가야사의 줄기를 잡아냈고, 김도윤씨는 50여년간 가야사 연구에 매달려 ‘대가야의 철기문화’ 등 40여권의 책자를 묶어냈다.

국내외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가야사는 뒤늦게나마 긴잠에서 깨어나 한땀 한땀 조각보같은 역사를 복원해 가고 있다.

<31> 제6부 깨어나는 가야 '박노자 오슬로大 교수'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에 재직중인 박노자(30·사진) 교수가 모처럼 자신의 전공인 ‘가야사’에 대해 입을 열었다. 러시아 태생으로 지난 99년 한국에 귀화한 박 교수는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 등의 책을 통해 한국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젊은 사학자. 오슬로에 있는 그를 e메일을 통해 인터뷰했다.

-가야사를 전공했는데 요즘엔 근현대사에 더 관심을 두는 것 같다.

“근현대사에 빠져 가야사 논문을 안쓴지 3~4년이 된다. 이렇게 가야사 이야기를 들으니 양심의 가책이랄까 약간 미안한 느낌이 든다.”

-가야사는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공부했나.

“1992년부터 러시아에서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번역했다. 흥미가 있어 그것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어 박사과정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야사를 시작했다. 당시 지도교수인 모스크바 국립대 미하일 박 선생님이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파악해 보라 해서 ‘일본서기’ ‘신찬성씨록’ 같은 일본자료까지 섭렵했다.”

-임나일본부설을 어떻게 보나.

“그건 당대의 명칭이 아니다. 5세기에 일본에서는 ‘일본’이란 말도 없었다. 그래서 난 백제의 일본계 관료와 연관이 깊은 일종의 무역기구라고 생각한다.”

-박사학위 논문은 어떤 내용인가.

“1996년 10월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받은 ‘5세기말부터 562년까지 가야 초기국가의 역사’라는 논문이다. 가락국기와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남가야를 분석하고, 일본 문헌자료에 의거해 대가야 및 안라(함안), 그리고 왜와의 관계를 연구했다.”

-앞으로 가야사 연구계획이 있는가.

“있다. 근대 일본 사학에서 임나일본부라는 허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식민지 때 그곳 학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조작, 이용했는지 밝혀내고 싶다.

-국내외 가야사 연구현실에 대해 촌평한다면.

“김태식 교수를 비롯한 일련의 학자들이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발굴작업이 더 활발해져야 한다. 예산이 늘어나고 발굴기술도 보완돼야 한다.”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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