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擔魯制
양서 백제전에 의하면 구태백제에는 담로제라는 지방통치제도가 있었다. 이 담로제는 지방을 구태백제왕의 자제, 종친들에게 분봉하여 다스린 제도이다.
「왕성을 고마라 부르고, 읍을 일컬어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다. 백제에는 22 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나 종친으로 분거하였다.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擔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擔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也」
위 문구는 한반도 구태백제 지역의 지방통치제도에 관한 내용이다.
[註 온조백제는 정복지의 토착소국들을 해체하고 정복지를 직할통치하였는데, 온조왕 31년에 남.북 2부를, 온조왕 33년에 동.서 2부를 더 두고, 부에 성, 주, 군을 두어 직할통치하였다. 마한, 온조백제, 구태백제의 지방통치제도 차이점을 살펴보면, 마한은 마한연맹 내 토착소국들의 신지들로부터 조공을 받아 통치하였고, 온조백제는 정복지의 토착소국들을 해체하고 직할통치 하였으며, 구태백제는 정복지의 토착소국들을 해체하지 않고 무력을 배경으로 항복을 받은 후 자제, 종친에게 일정한 영역을 분봉하여 구태백제왕을 대신하여 토착소국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 때문에 토착소국들은 구태백제가 지방을 5방으로 개편하여 직할통치를 실시한 6세기 초~중순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일부 사학자는 위 문구에 왕성을 고마라 불렀다는 문구 다음에 담로에 관한 내용이 나오자 담로제는 백제가 고마(웅진)를 수도로 사용한 A.D 475~538년경에 시행된 지방통치제도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한반도 백제 지역에 온조백제 하나만 존재한 것으로 보고, 온조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A.D 475년부터 사비(부여)로 천도한 A.D 538년 사이에 담로제가 시행되었다고 본 것이다.
고기나 광개토왕비문을 분석해 보면 한반도 백제지역에는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가 공존하였고, 수서 백제전에는 "그 시조 구태의 사당을 고마성에 짓고 일년에 4번 제사지낸다(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歲四祠之)"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구태백제는 대방고지에서 건국하여 온조백제와 마한연맹을 정복한 A.D 205년경에 수도를 고마(웅진)에 두고 그때부터 담로제를 시행하였다.
그렇다면 담로제는 언제 폐지되었을까?
수서 백제전에 백제의 수도가 고마(웅진)로 적혀 있고, 지방제도로 5방이 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구태백제의 지방통치제도인 담로제는 백제의 수도가 고마에 있을 때 폐지되었다. 즉 구태백제는 수도가 사비(부여)에 있을 때(A.D 538년 이후), 담로제를 폐지하고 5방제를 시행하였다.
구태백제는 한반도 구태백제 지역 외에 일본열도나 중국 방면에도 후왕을 두었다.
1). 일본열도 방면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52년조에는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신공황후에게 준 내용이 나오고, 칠지도 명문에는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후왕인 왜왕에게 준 내용이 나온다.
야마대연맹은 A,D 247년 신공황후 사망 후 일어난 내란으로 와해되었는데,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에는 신공황후가 실제 사망한 A.D 247년부터 응신천황이 실제 즉위한 A.D 390년까지 천황공백기에 일어난 사실이 신공황후기 47년조부터 69년조 사이에 적혀 있는데, 그 내용 중에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의 즉위와 사망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이로 보아 신공황후 사망 후부터 응신천황 즉위 시까지 140여년간의 천황공백기 중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 진사왕 재위시기는 백제왕이 일본열도의 백제계 소국을 直轄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백제는 일본열도에 있는 백제계 소국에 구태백제왕의 자제나 종친 등을 담로로 보냈을 것이다.
그후 A.D 390년에 대화지역에 세워진 응신조나 A.D 488년에 세워진 인현조도 백제의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세워진 백제의 후국이었다. 이때도 구태백제는 구태백제왕의 자제나 종친 등을 ‘군’ 등의 이름으로 일본열도에 담로를 보냈을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에서 곤지나 사마(후의 무령왕) 등 군(君)이 일본열도에 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구태백제가 일본열도에 구태백제왕의 자제나 종친 등을 담로로 보낸 것은 천황을 견제하고, 또 일본열도에 흩어져 있는 소국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2). 중국 방면
백제는 중국의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에도 후왕을 두었는데, 후왕들의 직명은 장군, 왕, 후, 태수 등이었다.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후왕들의 명칭을 보면, 왕 명칭으로 적혀 있는 것이 도한왕, 아착왕, 매로왕, 매라왕, 벽중왕, 면중왕이고, 후 명칭으로 적혀 있는 것이 불사후, 불중후, 팔중후이고, 태수 명칭으로 적혀 있는 것이 광양태수, 조선태수, 대방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성양태수, 낙랑태수 등이다.
백제의 후왕 중에는 여씨가 아닌 사람도 보이는데, 이를 보면 구태백제는 구태백제왕의 자제, 종친이 아니더라도 유능한 사람을 후왕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9. 양나라 때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 상실사유
[백제는 6세기 초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상실하여 국력이 급격히 약화됨으로써 대화왜의 종주국의 위치에서 지원을 받는 처지로 위상이 추락하였다. 6세기 초 백제의 국력이 급격히 약화된 원인은 무엇인가?]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백제는 A.D 502-503년에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고구려에 상실하였다.
「전략. 앞서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 노, 오, 월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년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불진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로 돌아왔다.
先是 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 設官署 索籍民戶 分封王爵 屯戌險塞 軍征賦調 悉準內地 明治年間 百濟軍政衰頹不振 權益執行盡歸聖朝」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문자호태열제는 명치라고 개원하였다. 11년(A.D 502년)에 제, 노, 오, 월의 땅이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文咨好太列帝 改元明治 十一年 齊魯吳越之地 屬我 至是 國疆漸大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전략. 백제가 영유하던 곳을 요서,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는데, 그 속현으로 산음, 산월, 좌월이 있었다. 문자제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 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 진평 등지를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百濟所領曰遼西晋平 江南有越州 其屬縣 一曰山陰 二曰山越 三曰左越 至文咨帝明治十一年十一月 攻取越州 改暑郡縣 曰松江會稽吳越左越山越泉州 十二年 移新羅民於泉州 以實之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遼西晋平等郡 百濟郡廢」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백제는 왜 A.D 502-503년에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상실하였을까? 백제가 A.D 502-503년에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상실한 원인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그 당시 백제조정의 궁중암투를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구태백제는 A.D 205년에 대방고지에서 건국된 후 온조백제와 마한연맹을 정복하고, 이어서 대마도, 일본열도왜, 가야를 복속시켰으며, 그 뒤 요서와 중국동해안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다 A.D 392년과 A.D 396년에 광개토왕으로부터 연이은 공격을 받아 온조백제가 항복하고 구태백제가 괴멸되자 구태백제 지배층은 일본열도로 피신하였고, 한반도 백제지역은 온조백제가 관장하게 되었다. 다음해 A.D 397년 5월 온조백제 아신왕이 태자 전지를 일본열도에 피신해 있는 왜왕(구태백제왕)에게 인질로 보냄으로서 온조백제는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게 되었다. 그 뒤 A.D 399년에 일본열도에 피신해 있던 구태백제왕이 왜를 동원하여 신라와 가야 지방을 공격하였으나 A.D 400년에 광개토왕의 반격을 받아 대마도가 점령당하고 구주왜와 대화왜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므로서 실패하였다.
그뒤 A.D 404년에 왜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대방계를 공격하였으나 또 광개토왕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였다.대방계 공격이 실패한 후 광개토왕이 임나연정을 통하여 왜 통제를 강화하자 구태백제는 A.D 405년에 아신왕을 암살하고 인질로 와 있던 전지를 백제로 보내어 백제왕으로 즉위시켜 온조백제를 다시 장악하였고, 왜 지배층은 구태백제 지역 중 아직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바 없는 금강 이남 전라도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註 이때 전라도 지방으로 이동한 왜 지배층은 A.D 479년에 임나연정이 멸망하자 백제와 같이 A.D 487년에 대마도를,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각 평정하고 인현조를 세웠다. 인현조가 세워진 후 전라도 지방에 있던 왜 지배계층은 대부분 일본열도로 되돌아가고 일부만 잔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백제는 A.D 416년에 중국동해안지방의 전 백제분국 장군들을 도로 백제에 복귀시킴으로써 중국동해안분국을 회복하였고, 그 뒤 A.D 465년경에 요서분국마저 회복하여 다시 백제의 국력이 강성해졌다. 이때부터 백제본국은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근거지로 한 세력이 득세하였다. 그후 개로왕의 외교실패로 송이 백제에 등을 돌리므로써 백제의 요서분국이 고구려 등에 의하여 포위, 고립되었다. 그 결과 백제의 힘이 급격히 약화되어 A.D 475년에 고구려에게 한성을 점령당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그후 A.D 476년 8월 해구가 병관좌평으로 승진하여 병권을 장악한 후 임금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법을 문란케 하자 다음해 4월 문주왕은 해구를 견제하기 위하여 동생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장자 삼근을 태자로 삼았다. 다음해 A.D 477년 5월에 흑룡이 웅진에 나타났다. 이는 요서분국의 장군 모도(일명 여도)가 해구를 견제하기 위하여 요서분국 군사를 이끌고 백제본국으로 온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모도가 이끄는 요서분국 군사가 백제본국으로 오자 해구는 그 해 9월 문주왕을 죽이고 허수아비 삼근왕을 세운 후 은솔 연신과 같이 대두성을 근거 삼아 배반하였으나, A.D 478년 봄 진남과 진로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는 요서분국 세력이 백제본국 세력을 누르고 백제본국을 장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제본기에는 문주왕이 A.D 478년 9월에 죽었다고 적혀 있으나, 해구가 문주왕을 죽인 후 삼근왕을 세운 해가 A.D 477년이고, 해구의 반란이 진압된 시기가 A.D 478년 봄이므로, 문주왕은 A.D 477년 9월에 죽었다.
모도가 이끌고 온 요서분국 군사는 백제본국을 장악한 후 A.D 479년에 해구의 반란에 이용당한 삼근왕을 죽이고 모대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때 무령의 나이가 18세이고, 모대는 그 보다 더 어렸는데도 모대가 왕위에 오른 것은 모도가 이끌고 온 요서분국 군사의 지원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동성왕이 즉위한 후 모도는 병관좌평과 내외병마사를 겸직하여 백제의 군권을 장악하였고, A.D 480년에 남제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 관작을 받았다. 이는 요서분국 출신 세력이 백제본국의 모든 군권을 장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뒤 A.D 497년에 진로가 죽고 웅진을 근거지로 한 토착세력으로 추정되는 연돌이 병관좌평으로 승진하였다. 이는 A.D 501년에 일어난 내란 때 동성왕계가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다.
A.D 501년 1월 일본열도를 근거지로 한 무령왕계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 요서분국 출신 세력인 동성왕을 죽이고 무령왕을 즉위시켰다.
「동성왕 23년(A.D 501년) 봄 정월 왕도에서 늙은 할멈이 여우가 되어 사라졌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남산에서 싸웠는데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3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여름 5월 비가 오지 않았는데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7월 탄현에 목책을 설치하여 신라에 대비하였다. 8월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 지키게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사비의 동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웅천의 북쪽 벌판에서 사냥하였고, 또 사비의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막혀 마포촌에서 묵었다. 이보다 앞서 왕이 백가로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다. 백가는 가지 않으려고 병을 핑계 삼아 사양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왕을 원망하였는데 이때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렀다. 12월 왕이 죽었다.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二十三年 春正月 王都老 化狐而去 二虎鬪於南山 捕之不得 三月 降霜害麥 夏五月 不雨至秋 七月 設柵於炭峴 以備新羅 八月 築加林城 以衛士佐平백加鎭之 冬十月 王獵於泗비東原 十一月 獵於熊川北原 又田於泗비西原 阻大雪 宿於馬浦村 初王以백加鎭加林城 加不欲往 辭以疾 王不許 是以怨王 至是使人刺王 至 十二月乃薨 諡曰東城王」三國史記 百濟本紀
위 할멈 또는 여우는 동성왕의 모를, 호랑이 2마리는 동성왕과 무령왕을 지칭한 것이다. 위 문구의 의미는 A.D 501년 정월에 무령왕이 반란을 일으켜 동성왕과 싸웠고, 싸운 장소는 부여와 공주 부근이며, 그 결과 무령왕이 승리하여 12월달에 동성왕이 죽었다는 뜻이다. 위 문구에는 동성왕계인 백가 동성왕을 죽인 것처럼 적혀 있으나, 일본서기 무열천황기 4년조에는 국인이 같이 동성왕을 제거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로 보아 동성왕을 죽인 사람은 동성왕계인 백가가 아니라 무령왕계 반란군이다.
당시 백제왕실에서 일어난 내분을 이해하기 위하여 개로왕, 문주왕, 곤지, 무령왕, 모도, 모대 간의 관계를 살펴본다.
「백제왕 모대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중략..모대를 책봉하여 조부 모도를 이어받아 백제왕으로 삼았다.
牟大又表曰..牟大以大襲祖父牟都爲百濟王」 南齊書 百濟傳
「무열천황 4년(A.D 502년) 여름 4월..이해 백제의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같이 제거하고 도왕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 [백제신찬에 말하였다.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같이 제거하였다. 무령왕이 섰다. 휘는 사마왕이다. 이는 곤지 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모형이다. 곤지가 왜에 향하였을 때 축자도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섬에서 도로 보내 경에 이르기 전에 섬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지금도 각라의 바다 속에 주도가 있다. 왕이 탄생한 섬이다. 고로 백제인이 주도라 이름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도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왕은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이를 이모형이라 함은 미상이다.
是歲 百濟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遂除 而立島王 是爲武寧王[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王立 諱斯麻王 是琨支王子之子 則末多王異母兄也 琨支向倭 時至筑紫島 生斯麻王 自島還送 不之於京 産於島 故因名焉 今各羅海中有主島 王所産島 故百濟人號爲主島 今案 島王是蓋鹵王之子也 末多王是琨支王子之子也 此曰 異母兄未詳也]」日本書紀 武列天皇紀 4年條
「웅략천황 21년(A.D 477년) 전략..문주왕은 개로왕의 모제이다. 일본서기에는 구마나리를 말다왕에게 주었다 한다. 아마 이는 잘못일 것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의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다.
汶洲王蓋鹵王母弟也 日本書紀云 以久麻那利 賜末多王 蓋是誤也 久麻那利者 任那國下呼唎縣之別邑也」日本書紀 雄略天皇紀 21年條
「웅략천황 5년(A.D 461년) 여름 4월 백제의 가수리군(개로왕)은..중략..아우 군군(곤지)에 고하여 "너는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겨라"라고 말하였다. 군군이 대답하여 " 상군(개로왕)의 명에 어긋날 수는 없습니다. 원컨데 상군의 부인을 주시고 그런 후에 나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장가들여 "내 임신한 부인은 이미 産月이 되었다. 만일 도중에서 出産하면 부디 같은 배를 태워서 어디에 있든지 속히 나라로 돌려보내도록 하여라"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헤어져 조정에 보냈다.
6월 임신한 부인은 과연 가수리군의 말대로 축자의 각라도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도군이라 하였다. 그래서 군군은 배 한척을 마련하여 도군을 그 어머니와 같이 백제에 돌려보냈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 백제인은 이 섬을 주도라 하였다. 가을 7월 군군이 경에서 돌아왔다.
이미 5인의 자가 있었다. [백제신찬에 말하였다. 신축년 개로왕이 아우 곤지군을 내보내어 대왜에 가서 천왕을 모시게 하였다. 형왕의 수호를 닦았다.
百濟加須利君(蓋鹵王也)..中略..乃告其弟軍君(琨支也) 曰 汝宜往日本以事天皇 軍君對曰 上君之命不可奉違 願賜君婦 而後奉遣 加須利君則以孕婦 嫁與軍君曰 我之孕婦 旣當産月 若於路産 冀載一船 隨至何處 速今送國 遂與辭訣 奉遣於朝 六月 孕婦果如加須利君言 於筑紫各羅島産兒 仍名此兒曰島君 於是 軍君卽以一船 送島君於國 是爲武寧王 百濟人呼此島曰主島也 秋七月 軍君入京 旣而有五子[百濟新撰云 辛丑年蓋鹵王遣弟琨支君 向大倭 侍天王 以脩兄王之好也.]」日本書紀 雄略天皇紀 5年條
「웅략천황 23년(A.D 479년) 여름 4월 백제의 문근왕이 훙하였다. 천황이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 말다왕이 젊고 총명하므로 칙하여 궁중에 불렀다. 친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타이르심이 은근하여 그 나라의 왕으로 하였다. 무기를 주고 아울러 축자국의 군사 500인을 보내 백제국까지 호송하였다. 이를 동성왕이라 한다.
二三年夏四月 百濟文斤王薨 天王以琨支王五子中第二末多王 幼年聰明 勅喚內裏 親撫頭面 誡勅慇懃 使王其國 仍賜兵器 幷遣筑紫國軍士五百人 衛送於國 是爲東城王」日本書紀 雄略天皇紀 23年條
문주왕과 개로왕의 관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문주왕이 개로왕의 아들로 적혀 있으나, 일본서기 웅략천황기 21년조에는 문주왕이 개로왕의 모제로 적혀 있다. 백제신찬을 보고 지은 일본서기 내용대로 문주왕은 개로왕의 모제로 보인다.
무령왕과 동성왕의 관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적혀 있으나, 일본서기에는 백제신찬을 인용하여 무령왕이 동성왕의 이모형(어머니가 다른 형)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 웅략천황기 5년 4월조에는 가수리군이 동생 군군(곤지)의 요청에 따라 임신한 자기 부인을 군군에게 주었고, 그 부인이 군군과 함께 일본으로 가다가 축자의 각라도에서 도군(무령왕)을 낳았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무령왕은 호적상으로는 곤지의 아들이지만 실제로는 개로왕의 아들이다. 따라서 무령왕과 동성왕과의 관계는 호적상으로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이모형이지만 실제는 사촌간이다.
모도와 모대와의 관계는 남제서에는 모도가 모대의 조부로 적혀 있으나, 양서에는 모도가 모대의 부(父)로 적혀 있다. 동성왕의 부는 곤지이고, 곤지는 개로왕, 문주왕과 형제간이며, 개로왕의 부는 비유왕(A.D 455년에 사망)이다. 그런데 모도와 곤지는 동일인물이 아니므로 모도는 동성왕의 부(父)가 아니다. 또 모도와 비유왕도 동일인물이 아니므로, 모도는 동성왕의 친조부가 아니다. 일부 사학자는 모도를 문주왕이라고 주장하나, 모도는 A.D 480년에 남제로부터 2품인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관작을 수여받았고, 문주왕은 A.D 477년에 일어난 해구의 반란 때 피살되었으므로, 모도와 문주왕은 동일인물이 아니다.
모도의 다른 이름은 진로(眞老)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성왕이 즉위한 후 제일 처음 한 일은 동성왕 4년(A.D 482년)에 진로에게 병관좌평과 내외병마사 직위를 수여하여 군사에 관한 모든 업무를 위임한 것이다. 그런데 남제서 백제전에는 동성왕이 남제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제일 처음 한 일은 A.D 480년에 모도에게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관작을 내려 달라는 표문을 올린 것이었다. 백제본기와 남제서를 대비해 보면 동성왕이 즉위한 후 백제의 모든 군권을 장악한 사람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로이고 남제서에 의하면 모도이다. 따라서 모도와 진로는 동일인물이므로 모도는 진로의 다른 이름이다.
곤지, 모대, 문주왕, 개로왕, 무령왕과의 관계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동성왕과 무령왕 세계>
여영
↕부자
비유왕
↕부자
곤지 → 형제 ← 개로왕→ 형제 ← 문주왕
↕부자 ↕부자 ↕부자
동성왕→ 사촌 ←무령왕→ 사촌 ←삼근왕
[참고:동성왕=모대, 모도=진로]
앞에 나온 일본서기 무열천황기 4년조 문구를 보면 무령왕은 축자도에서 출생하여 후국인 일본열도에서 자랐다. 그 때문에 무령왕계의 세력 근거지는 일본열도였다.
당시 백제본국에 있던 무령왕계 세력들은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을 등에 업은 동성왕계 세력에 눌려 지내다가, A.D 501년 정월에 왜가 지원한 무령왕이 반란을 일으켜 동성왕을 제거하였다.무령왕계와 동성왕계의 싸움에서 동성왕계가 패배하고 동성왕이 죽자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에 있던 백제장군들이 백제본국에 등을 돌리고 고구려에 귀복함으로써, 백제는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모두 상실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제의 국력이 갑자기 약화되므로써 백제의 위상은 낮아지고 왜의 위상은 높아져, 백제는 대화왜의 종주국에서 대화왜의 지원을 받는 처지로 위상이 추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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