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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을 `김`이라고 읽는 추정 이유와 관련 휴도왕 내력

monocrop 2007. 2. 4. 03:06

1) 처음엔 금이었으나 조선의 건국 당시에.... 조선은 이씨 가문인데. 이씨는 음양오행설에 목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목은 금한테 진다고하여 금으로 읽지 말고 김으로 읽게 됐다고 합니다.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110104&docid=188282 중에서 옛날엔 어떻게 살았나요? 2권 있다는군요.  다른 지식 사이트에 의존하려는 맘은 없었지만 검색되는 것이... 이것과 아래의 것, 두 가지더군요.
 
2) 다음은 이와 다른 이야기인데, 관련도 있고 알아두시면 좋으리라 생각되어 옮깁니다.
 
금(金)을 김으로 읽는 것은 오직 성씨(姓氏)로 사용할 때 뿐인데 무슨 이유로 김 으로 읽어야 하는지 합리적인 설명을 발견할 수 없다. 금(金)에는 황금(gold)의 뜻이 있고, (감,Kahm)으로 읽을 경우 지신(地神)을 의미하여 왕성으로 쓸 수 있는데, 굳이 김으로 읽을 경우 모든 뜻은 사라지고 그냥 의미 없는 발음만 남게 된다.

비록 신라의 이두식 발음법에 따라 다 같이 金 으로 쓰고 김으로 읽고 있지만 옛 발음으로는 그 뜻이 완전히 달랐었다고 생각된다.
남중국식 발음으로는 지금도 金( ,kahm,감) 을 깜(kkam) 이라고 발음한다.

※ 바람족(풍이-風夷, 匈奴, Huhn) 계림(鷄林) 금(金)씨의 유래
우리나라 제일의 성씨(姓氏)인 김(金)씨를 역사상 최초로 가계(家系)의 성씨로 사용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중국인들에 의하여 흉노(匈奴)로 더 잘 알려진 바람족(風夷)의 후손 휴도왕(休屠王)의 태자 금일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에 의하면, 금일제의 아버지 휴도칸(休屠王)이 훈(風, Huhn, 匈奴)의 칸(Kahn,王)으로 살고 있던 땅은 지금의 서안(西安) 북쪽 땅인 무위(武危)의 언지산(焉支山)과 돈황(敦惶)의 삼위산(三危山)이 있는 감숙성(甘肅省) 지역이다.

당시 광활한 하서지방 중에서도 노른자 위 땅을 다스린 통치자는 곤사왕(昆邪王)과 휴도왕(休屠王)이었다. B.C 128~117년 한(漢)나라의 정벌군에 계속 밀리던 곤사왕은 흉노의 천자(天子)인 선우(單于)의 질책이 두려워 금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休屠王)을 설득해 투항키로 한다.

그러나 휴도왕은 투항을 거부하고 전쟁준비를 한다. 그러자 곤사왕은 휴도왕을 꾀어내 죽여버리고 4만명의 무리와 함께 한무제가 보낸 대장군 곽거병(郭去病)에게 항복하고 만다. 곽거병은 항복한 흉노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개선했는데 10만의 대군단이었다고 했다.
금일제는 휴도왕의 태자로서 자(字)는 옹숙(翁叔)이었다. 일제는 나이 겨우 14세였을 때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 알씨(閼氏)와 동생 윤(倫)과 함께 한관에게 몰수돼 황문(黃門)에 옮겨져 말태우리가 되었다.

이때 그의 인물됨을 알아본 한무제(漢武帝)에 의하여 마감(馬監)으로 승진하고,
시중부마도위(侍中附馬都衛) 광록대부(光祿大夫)를 거처 상장(上將)이 되었고,
우연히 무제(武帝)를 암살하려는 자를 격투 끝에 체포한 공으로 한(漢)나라 제후국(諸侯國)의 왕인 투후 라는 벼슬까지 받으며, 한무제(漢武帝)로부터 금(金)이라는 성(姓)까지 받고 가장 아끼는 신하가 된다.

(본시 금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이 풍(風夷)족의 오랜 전통에 따라 하늘에 제사(제천-祭天)를 지낼 때 금인상(金人像)을 만들어 모셨던 까닭으로 금(金)씨의 성(姓)을 얻었다고 한다. 이상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의 성씨를 금 이 아닌 김으로 발음해야 할 이유는 더욱 더 이해할 수가 없다.)

금일제의 아들 금상(金賞)도 투후 벼슬에 오르지만 일찍 죽자, 선제(先帝)에 이어 제위(帝位)에 오른 원제(元帝) 초에 금일제의 차남(次男)인 금건(金建)의 손자 금당(金當)을 투후로 봉하여 금일제의 뒤를 잇게 하였다.

그 후 금당(金當)의 아들인 금성(金星)이 투후를 계승했고, 5대 손인 금성(金星)까지 투후벼슬을 받아 제후국의 왕 자격으로 7대 왕에 걸쳐 궁중을 돌보며 막강한 세력을 펼친다.

※ 한왕실(漢王室) 10대 원제(元帝 B.C 49~33년)의 황후는 왕씨(王氏)가문 출신이었다.
11대 성제(成帝 B.C 33~7년)가 즉위하자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영상서사(大司馬大將領尙書事)가 되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왕망(王莽 B.C 45~서기 23년) 역시 38세(B.C 8년)에 재상 격인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한 왕실을 장악한다.

그런데 왕망은 금일제의 증손자인 금당(金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금당에게는 이모부였다. 금당은 금일제의 후손으로 이 당시에 투후벼슬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왕망은 투후 금씨 계열(金氏系列)과는 외가 사이였던 것이다.

왕망은 9살의 어린 평제(平帝)를 옹립하여 13대 제위에 올리고 자기 딸을 황후로 삼는다. 그리고 4년만인 서기 5년(紀元後5年),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9대 황제였던 선제(宣帝)의 현손인 2살짜리 영을 재위에 올려놓고 섭정을 하다가 서기 8년에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신제국(新帝國) 을 세웠다.

금일제 이후 한왕실(漢王室)에 깊숙이 개입해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금씨 계열은 왕망과 힘을 합쳐 전권을 장악하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혁명이 성공함과 더불어 외가 금씨 계열은 모조리 정치 실세가 됐다.

그러나 왕망정권은 교만하여, 풍(風, 匈奴)족을 얕보고 신흉노선우장(新匈奴禪于章)이라는 새로운 도장을 보내 선우(禪于)를 모욕하니 풍족의 선우가 대노하여 운중(雲中)을 초토화시키고 왕망군을 대파시켰다.힘의 대결에서 밀리자 교활한 왕망은 맥국(貊國-高句麗)에게 부탁하여 흉노를 제압해 주도록 하였는데, 고구려가 오히려 신제국의 동북변을 침범하므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고구려(高句麗)를 하구려(下句麗)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처럼 인근 국가들의 지속적인 침략과 위협 속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중 전국에 흩어져있던 유씨들의 저항마저 불러일으켜 불과 15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이제 신제국(新帝國)의 주축세력인 금씨계는 필사의 탈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동안 산동반도와 밝해(渤海)연안에서 항거세력으로 머물던 금씨 집단은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일부는 지금의 평양지방(龍城國古地)으로 내려왔고, 또 다른 집단은 산동반도로부터 황해를 건너 큰무라(建牟羅) 지역으로 상륙한 후 계림에 정착하니 이들이 바로 금일제의 5대 손인 금성(金星-星漢王)과 그의 금씨 집단으로 소위 계림(鷄林)의 황금(黃金)닭에서 태어났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전설의 주인공 금알(金閼)치이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세밀히 검토해보면, 금알치 세력은 계림으로 상륙한지 9년 만에 석탈해 정권을 빼앗는다. 그러나 아직은 안정적인 세력을 유지할 수가 없어서 다시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인 파사 이사금에게 탈취 당하고 만다.

※ 오늘날 중국의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한반도(韓半島)의 서북과 남쪽, 김해 및 제주도 또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와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 때 만든 화폐 오수전(五銖錢)과 봉니(封泥)들이 출토되는 것은 왕망과 신제국의 몰락으로 대륙 밖으로 이동해온 금씨 집단과 그 추종세력의 흔적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글 : kjmobile  nate.com 지식뱅크 06/04/20 18:13

  http://www.damool.net/html/emperor/105dae_09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