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홍원탁의 백제왜

[스크랩] 11. 백제왜, 미마나(임나일본부) 이야기

monocrop 2007. 1. 4. 16:02

11. 미마나 [임나일본부] 이야기



홍원탁 (서울대 교수)


일본서기는 한자로 임나(任那)라 써놓고 미마나(彌摩那)라고 읽는데, 때로는 가야연맹 전체를 의미하고, 때로는 임나왕이 다스리는 임나국을 지칭하고, 때로는 임나 안에 야마도의 관리와 군대가 거주하고 있었다는 미마나 지역을 지칭하기도 한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미마나 일본부, 미마나 대신(집사), 미마나의 야마도 관갚 등등의 표현만을 본다면, 임나 혹은 가야연맹 전체가 정말 야마도왕국의 식민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임나왕, 탁순왕, 가라왕, 안라왕, 고차한기, 자타한기, 졸마한기, 사이기한기, 산반하한기 등의 기록도 나타난다. 이러한 칭호들의 존재는 가야연맹의 어느 구성원도, 그 어느 누구의 식민지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예컨대, 일본서기는 케이타이(繼體, 507-31) 때, 임나왕 기능말다간기(任那王己能末多干岐)가 야마도 조정에 왔다고 말한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편집자 주



百濟 - 伽倻 - 倭 : 부자 / 형제 / 부부 관계

저명한 경제학자 모리시마(1982: 21-30)는 느닷없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370년경에 일본은 한반도의 남단을 점령하였었다. 이 일본 영토는 미마나라고 불렸다 당시 일본은 백제와 신라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들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 모리시마 얘기는 그가 어렸을 때 배운 명치시대 풍의 역사교과서 내용을 희미한 기억으로 더듬어 적어놓은 것이다.


한일관계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전형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Kuno, 1937: 193, 234-42): “일본이 한국을 통치 할 권한은 일본이 미마나라는 보호령을 창설할 때부터 생긴 것이다. 7세기 이전까지 일본과 한반도 남부 왕국들 사이에 일종의 종주국-조공국의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것은 널리 공인된 역사적 사실이다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합병했을 때, 일본의 『역사와 지리』라는 잡지는 특집을 발행했고, 주필은 권두언에서, ‘이 합병이라는 위업은 일본이 7세기에 잃었던 한반도 지배권의 회복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일본 사학자들은 아직까지도 고대 일본이 4세기 후반 (예컨대, 370년) 이후부터 200년 이상 한반도 남부에 미마나라는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일본서기 이외의 동아시아 어느 역사책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임나에 관한 종잡기 힘든 기록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일본서기는 한자로 임나(任那)라 써놓고 미마나(彌摩那)라고 읽는데, 때로는 가야연맹 전체를 의미하고, 때로는 임나왕이 다스리는 임나국을 지칭하고, 때로는 임나 안에 야마도의 관리와 군대가 거주하고 있었다는 미마나 지역을 지칭하기도 한다.


동이전에 기록된 12개의 변한 (성읍)국가들 중에는 미오야마(미마?)와 구야(가야?)라고 부르는 나라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변한 성읍국가들이 가야연맹으로 진화하는데, 중국 정사에는 가야연맹 전체가 종종 “임나, 가라”라는 두 개의 대표적 명칭으로 기재되어 있다. 송서(宋書)에는 야마도 지배자들이 말하는 7개국 명단에 “임나, 가라”가 오래 전에 사라진 “마한, 진한”과 더불어 “야마도(倭), 백제, 신라”3개국과 동격으로 나열이 되어 있다. 삼국사기뿐만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의 비문에서도 “임나, 가라”가 한 쌍을 이루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옛 변한이 임나(소)연맹과 가라(소)연맹으로 발전하고, 이 두 개의 소 연맹이 가야연맹 전체를 구성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1


일본서기는, 대가야의 왕자가 일본열도에 건너왔다가 후에 다시 돌아갈 때, 스이닌(垂仁)이 대가야 왕자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름인 미마끼(스진, 崇神)를 따라서 대가야 국명을 바꾸라고 권했기 때문에 대가야가 미마나로 불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에가미(1964)는 「미마」라는 “명칭의 유래는 일본서기의 기록과는 정반대 일 것이다 스진의 이름 속에 들어있는 「미마」 는 스진이 큐슈로 건너오기 전에 살았던 미마-나의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2


일본서기(N2: 42-47) 541년 조에는,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임나의 한기(旱岐)와 그 일행에게 말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긴메이(欽明) 왕은 임나[가야연맹]를 재건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임나[가야연맹]는 신라에게 속았다. 록기탄(㖨己呑)은 신라에게 시달리다 망했으며, 남가라는 너무 작아서 멸망했다. 탁순은 상하가 모두 이중거래를 하다가 멸망했다 이제 나는 신라가 빼앗아 간 지역들을 신라로부터 구해내어 [가야연맹 내의] 제 위치로 복원시키고자 한다. 야마도 고관들은 신라의 국경과 너무 가까운 미마나 땅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임나[가야연맹]에 해독을 끼치고 있다” 3


일본서기 562년 조는, “임나[가야연맹]가 붕괴되었다. 총칭 임나[가야연맹]는 가라(加羅), 안라(安羅), 사이기(斯二岐), 다라(多羅), 졸마(卒麻), 고차(古嵯), 자타(子他), 산반하(散半下), 걸찬(乞飡), 임예(稔禮) 등 모두 10개국을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4 이 [가야연맹] 명단에, (임나왕이 다스리는 임나국 뿐 아니라) 이미 6세기 초반에 신라한테 먹힌 탁순, 록기탄, 남가라도 포함을 시켜야 할 것이다. 백제와 야마도 왕국의 지배자들은 가야연맹의 재건을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일본서기에는 긴메이(531-71)가 임종 시, 태자에게 임나[가야연맹]를 회복시켜 예전처럼 부부(夫婦)와 같은 관계를 회복하라고 유언을 하는 기록이 있다. 5 일본 역사학자들은 긴메이가 말하는 이 “부부관계”를 “종주국과 식민지 관계”로 해석을 한다.


일본서기를 보면, 미마나 일본부, 미마나 대신(국사), 미마나의 야마도 관가 등등의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표현들 만을 본다면, 임나 혹은 가야연맹 전체가 야마도왕국의 식민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임나왕, 탁순왕, 가라왕, 안라왕, 고차한기, 자타한기, 졸마한기, 사이기한기, 산반하한기 등의 기록도 나타난다. 이러한 칭호들의 존재는 가야연맹의 어느 국가도, 그 어느 누구의 식민지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예컨대, 일본서기는 케이타이(繼體, 507-31) 때, 임나왕 기능말다 간기(任那王 己能末多干岐)가 야마도 조정에 왔다고 말한다. 6


일본서기(N2: 44-45)는 백제 성명왕(523-54)이 가야 사절단에게 하는 말을 기록한다 : “과거, 우리 선조 근초고왕, 근구수왕은 당시 가야의 한기들과 처음으로 친선관계를 맺었으며, 이제는 형제처럼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자네들을 마치 나의 ‘아들이나 동생’처럼 대해주고 자네들도 나를 ‘아버지나 형’처럼 대해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성실하게 이웃들과의 우호친선관계를 유지해왔고, 항상 동맹국들을 정직하게 대해왔다” 7


일본서기를 보면, 임나 지역 내에서 야마도의 존재와 임나의 존재가 분명하게 구별되는 표현들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임나 사신이, 임나 사람과 야마도 사람들 사이의 분쟁에 대해 말을 했다,” “야마도의 고위 관리들이 미마나 땅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임나와 친한 척 가장,”“임나 집사와 야마도 집사를 함께 불렀다,” “일본부 대신과 임나 한기 등에게,”“임나와 일본부가 함께 백제에서 회동,” “임나 지역의 야마도 현읍” 등등이다. 한편, “임나의 하한의 백제의 군령과 성주”는 임나 내의 백제 사람들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다. 8


일본서기 오오진 7년(396) 조는 “고구려인, 백제인, 임나인, 신라인이 모두 조정에 왔다”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의 임나는, 식민지적 성격을 주장할 근거가 전혀 없이, 고구려, 백제, 신라 등과 동격으로, 가야연맹 전체를 지칭하고 있다. 9


야마도 지배자들은, 전통적으로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한반도 남단에 지속적인 “왕래를 위한 항구시설 (津路, 往還路驛) ”들을 계속 유지하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10 일본서기를 보면 야마도 관리들과 군대가 거주하는 항구시설이 있었고, 미마나 일본부 대신이라 부르는 야마도 관리가 존재했다. 야마도 지배자들은, 가야 연맹국들의 양해 하에, 야마도 사람들을 거주시키면서, 일본열도를 왕래하는 최단 경로상에 항구 시설들을 운영했던 것 같다. 일본서기(N2: 17-18)에는, 야마도 왕국과의 왕래를 쉽게 할 수 있는 나루터 하나를 백제가 야마도 조정으로부터 인계를 받아 사용하려 했더니, 가라왕이 크게 노했다는 기록이 있다. 11


야마도 지배자들이 백제를 왕래하기에 편한 항구를 확보하려던 노력은, 19세기말에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일본사람들에 의해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200년 이상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이야기로 황당하게 과장되었다. 일본사람들이 미마나 일본부라고 부르는 구역의 위상은 1609-1856년 동안 마치 외국인이 자기들 소유지처럼 사용한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商館)과 견주어 볼 수 있다. 실제로 조선조 초기에 한반도 남부 연안에는 왜관(倭館)을 설치한 항구들이 있어, 조선관리의 감시 하에 한정된 구역 내에 일본인들의 거주가 허용되었고, 일본의 배와 화물이 출입을 할 수 있었다. 1474년에 와서는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수가 2,000명을 넘었고, 그들은 자주 허용된 구역을 벗어나 불법적으로 경작을 했다. 12


일본서기 이외의 어떠한 동아시아 역사책에서도 미마나 일본부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없다. 고사기에도 이런 표현은 없다. 아오끼(Aoki, 1974: 50)는일본의 국수주의적인 역사가들은 변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고 강변하지만, 사실은 아마 정 반대였을 것이다. 오히려 변한 사람들이 북큐슈나 혼슈의 서쪽 끝 지역을 자신들의 추가적인 영토로 간주했을 것이고, 그 지역 주민들을 자기들의 친족으로 또 교역상대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변한의 해변가에 위치한 무역항에는 사무소와 창고 등이 늘어서 있었을 것이다. 더 많은 수의 변한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게 되면서, 일본에 정착한 변한 사람들은 변한 땅의 항구들을 자신들의 교역기지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 지역이 바로 임나(미마나)로 불려졌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일본열도에서 벼를 재배하는 야요이 문화(BC 300-AD 300)는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간 가야 (변한) 농부들에 의해서 전개된 것이다. 에가미(Egami)는 고분문화 초기(circa 300-375)를 야요이 문화의 연장으로 간주한다.



國文版 부록 : 일본인의 남조선 경영론

일본 역사교과서에 등장하는 소위 “임나(미마나) 일본부 설,” 혹은 좀더 거창한 “야마도 왕국의 남조선 경영론,” 또는 “야마도 왕국, 6세기 전반에 이르러 조선내의 이권을 상실하다,”라는 자극적인 표현들은, “가야연맹국” 전체가 야마도 조정의 직접 “식민지” 통치하에 있었다는 인상을 주려 하는 저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사기에는 미마나 일본부라는 기록이 한 군데도 없다. 야마도 조정의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고사기가 편찬 완료된 이후에, 한반도 동남해안 임나 뱃길 출발점에서 (임나 왕과의 양해하에) 항구시설을 돌보던 (얼마간의 병력을 포함하는) 왜인들의 존재를 미마나 일본부라는 거창한 존재로 부각시킬 착상을 하게 된 것 같다.


일본서기가 말하고 있는 미마나 일본부 기록이란, 「가야연맹 국가들 중의 하나인 임나국 안에, 야마도 당국자들이 얼마간의 병력을 보유하며 특정 구역 내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임나왕”을 비롯해서 수많은 가야연맹 국가들의 왕들을 등장시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눈으로 보면서, 어떻게 일본 사학자들이 당시 야마도 조정이 임나라는 나라 자체를 식민지로 다스렸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가야연맹 국가들을 모두 지배했고, 급기야 한반도 남부 전체를 수백 년 간 식민지로 경영을 했다는 등, 그처럼 황당한 형태의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할 수 있는지 참으로 의아할 뿐이다.


일본서기를 조금만 읽어 보면 그 허구성이 금방 드러나는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주장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일본 사회에서 계속되는지, 그 나름대로 사회 병리학적인 분석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독자들이 일본서기의 미마나 일본부 기록을 읽게 될 때, 「임나 땅 안의 “미마나”라는 한정된 지역 내에 야마도 조정에서 보낸 관리들과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이해한다면 가장 무리가 없는 해석이 될 것이다. 야마도 조정은 “미마나 일본부”라는 존재를 야마도 왕국의 내관가(內官家)라고도 불렀다. 야마도 왕실의 근원이 백제 지배층이었고, 백제-가야-야마도 사이에 (부자/형제/부부 관계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긴밀한 동맹관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관행이었을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5 (2005. 5. 7)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BIBLIOGRAPHY



[각주]


1. 三國志 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三十 韓傳 韓 在帶方之南..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馬韓在西 有..伯濟國...凡五十餘國…弁辰 亦十二國…彌烏邪馬國…狗邪國 …斯盧國


宋書 卷九十七 列傳 夷蠻 倭國 興死弟武立 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 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廣開土王碑文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2. 垂仁 二年 是歲 任那人…欲歸于國… 一云 御間城天皇之世 額有角人乘一船泊于… 意富加羅國王之子..是時 遇天皇崩便 留之仕活目天皇 逮于三年 天皇問…欲歸汝國耶..改汝本國名追 負御間城天皇 御名便爲汝國名 …返于本土 故號其國謂彌摩那國 其是之緣也 (NI: 257-259)


3. 欽明 二年 四月 百濟聖明王謂 任那旱岐等言 日本天皇所詔者 全以復建任那 …其㖨己呑 居加羅與新羅境際 而被連年攻敗 任那無能救援 由是見亡 其南加羅 蕞爾狹小 不能卒備 不知所託 由是見亡 其卓淳 上下携貳 主欲自附 內應新羅 由是見亡 二年七月 拔取新羅所折之國南加 羅㖨己呑等 還屬本貫 遷實任那 …又日本卿等 久住任那之國 近接新羅之境 新羅情狀 亦是所知 毒害任那 (NII: 69-75)


4. 欽明 二十三年 春正月 新羅打滅任那官家 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飡國 稔禮國 合十國 (NII: 119)


5. 欽明 三十二年 夏四月 天皇寢疾不豫 皇太子向外不在 驛馬召到 引入臥內 執其手詔曰 朕疾甚 以後事屬汝

以後事屬汝 汝須打新羅 死無恨之 封建任那 更造夫婦 惟如舊日 (NII: 131)


6. 雄略 七年 新羅王...乃使人於任那王曰...伏請救於日本府行軍元帥等 由是任那王勸…往救新羅 (NI: 479)


欽明 二年 夏四月 安羅次旱岐…加羅上首位…卒麻旱岐…多羅下旱岐…斯二岐旱岐…子他旱岐等與任那 日本部吉備臣往赴百濟 俱聽詔書 (NI: 68-71)


繼體 二十三年 四月 任那王己能末多干岐 來朝…曰 夫海表諸蕃 自胎中天皇置內官家 不棄本土 因封其地 良有以也 今新羅違元所賜封限 數越境以來侵 請…救助臣國 (NII: 37-41)


7. 欽明 二年 夏四月 百濟聖明王謂任那旱岐等言…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岐等 初遣使相 通厚結親好 以爲子弟 (NII: 69-71)


欽明 二年 七月 百濟本記云…乃謂任那曰 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與故旱岐等始約和親 式爲兄弟 於是 我以汝爲子弟 汝以我爲父兄…自玆以降 勤修隣好 遂敦與國 (NII: 73-77)


8. 繼體 二十四年 秋九月 任那使奏云…日本人與任那人 頻以兒息諍訟難決 (NII: 43-5)


欽明 二年 秋七月 …日本卿等 久住任那之國 近接新羅之境…僞和任那 如斯感激任那日本府者 (NII: 73-7)

欽明 四年 冬十一月 詔百濟曰…在任那之下韓 百濟郡令城主 宜附日本府…且夫任那者 爲爾國之棟梁 …爾須早建…聖明王曰 是月乃遣施德高分 召任那執事與日本府執事 (NII: 77-79)


欽明 五年 春二月 …又謂日本府卿任那旱岐等曰 夫建任那之國...將出在下韓之百濟郡令城主 唯聞此說 不聞任那與日本府 會於百濟 (NII: 78-83)

欽明 五年 冬十一月 …今日本府臣及任那國執事宜來聽勅…安羅王 加羅王 俱遣使同奏天皇 (NII: 83-91)


欽明 十三年 夏五月 詔曰 今百濟王 安羅王 加羅王 與日本府臣等 俱遣使奏… (NII: 101-103)


9. 應神 七年 高麗人 百濟人 任那人 新羅人 並來朝 (NI: 367)


10. 神功 攝政五十年 久氐等奏曰 …皇太后勅云 善哉汝言是朕懷也 增賜多沙城爲往還路驛 (NI: 357)

繼體 二十三年 百濟王謂…曰 …請以加羅多沙津 爲臣…津路 (NII: 39)


11. 529년, 백제 성명왕은, 야마도 조정으로 가는“우리 사절은 항상 육지의 돌출부(곶)들을 피해가며 풍랑에 시달린다. 그러니 가라 땅의 다사진을 우리가 뱃길의 나루터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해 듣고, “케이타이 왕은 사람을 보내, 다사진을 백제에 넘겨주려 했다. 그러자 가라왕이 야마도 사신에게 ‘이 항구는 우리가 사용하는 항구인데, 어찌 본래 책정된 구획을 위배해서 그리 쉽게 이웃 나라에 주어 버리려 하는 거요?’ 라고 따졌다. 야마도 사신은 내놓고 그 항구를 백제에게 넘겨주지 못하고, 몰래 서기를 보내 부여(백제)에게 이양했다.” (N2: 17-18) 참조


繼體 二十三年 三月 百濟王謂…曰 夫朝貢使者 恒避嶋曲 每苦風波…請以加羅多沙津 爲臣朝貢津路 是以…爲請聞奏…是月 遣…等 以津賜百濟王 於是 加羅王謂勅使云 此津從置官家以來 爲臣朝貢津涉 安得輒改賜隣國 違元所封限地 勅使…等 因斯難以面賜…別遣錄史 果賜扶余 (NII: 39-41)


12. 조선 조정은 왜인들에게 제한된 교역 특혜를 주었다. 1443년에, 내이포(제포), 부산포, 염포에 왜인들이 상관과 거주시설을 설치해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허가 해 주었다. 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은 1510년에 그들을 감시하는 조선 관리와 충돌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왜란이 진압된 후, 삼포(웅천, 동래, 울산)에서의 왜인들의 교역특권이 박탈되었다. 조선 조정은 1512년에 다시 유화정책으로 전환하여, 요즘의 부산 동래 지역에 위치한 부산포 (1678년에 草梁으로 이전) 한군데에서만 왜인들이 교역을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Lee (1984: 191-2) 참조.





The Mimana [Imna] Story


PAEKCHE-KAYA-YAMATO: FATHER-SON/BROTHER/HUSBAND-WIFE RELATIONSHIP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Morishima (1982: 21-30), a distinguished economist, writes: “Since about 370, the Japanese had occupied the southern tip of the Korean peninsula. This Japanese territory … was called Mima-na … Japan had also had extensive influence in Paekche and Silla from about the same time, and they paid tribute to her.” Morishima’s story is simply a faint recitation from his childhood memory of the Meiji-style history textbook. A typical version of the Korea-Japan relationship goes as follows (Kuno, 1937: 193, 234-42): “The power of Japan to rule in Korea began with the creation of the State of Mima-na as her protectorate. … It is a widely accepted historical fact that prior to the seventh century a sort of suzerain and tributary relationship existed between Japan and the Kingdoms and states in southern Korea. … In 1910, when Korea was annexed to Japan, the Japanese magazine History and Geography … issued a special edition … [and] the chief editor made the following statement … ‘This great accomplishment may be regarded … as the restoration of Japan’s ruling power in Korea that she lost in the seventh century’…”


Most Japanese historians continue to claim that Japan had maintained a colony named Mimana in the southern part of Korean peninsula for more than two centuries beginning in the late fourth century (say, in 370). This claim is inspired by the fairly confusing records on Imna that cannot be found in any other chronicles of East Asia except Nihongi.


Nihongi writes “Imna” in Chinese characters and reads it “Mima-na,” and then lets it represent either the entire Kaya Federation, the Imna state ruled by the King of Imna, or the place called Mima-na in Imna where, Nihongi claims, the Omi [Minister] of the Mima-na Yamato Authority had resided.


The list of 12 Pyon-han states recorded in the Dongyi-zhuan includes “Mioyama” [presumably indicating Mima] and “Kuya” [presumably indicating Kaya]. These Pyon-han states had evolved into the Kaya Federation that often appears in the Chinese chronicles by the two representative names, Imna and Kara. According to the Song-shu, the Yamato rulers listed Imna and Kara together with the extinct “Ma-han and Chin-han” on an equal footing with “Yamato, Paekche and Silla.” Since the names of Imna and Kara appear side by side as a rather conspicuous couple also in the Kwang-gae-to epitaph as well as in Samguk-sagi, one might well assume that Pyon-han had evolved into the Imna League and the Kara League, and these two minor leagues constituted the whole Kaya Federation. 1


According to Nihongi, a prince of the Great Kara came to the Japanese islands, and the Emperor Suinin urged the prince to change the name of Great Kara after the name of his father, Mima-ki (Sujin), and that was the reason why the Great Kara became to be called Mima-na. Egami (1964) notes that “it is more probable, however, that the derivation is in the opposite direction, and that the element Mima in the name of the Emperor Sujin is derived from the word Mima-na.” 2


Nihongi records that in 541 (N2: 42-47): “Seong-myeong, King of Paekche, addressing the Kanki of Imna and the others, said: ‘[Kimmei] decrees that Imna [Kaya Federation] shall be reestablished. … they have been deceived by Silla … Tok-ki-than has been harassed and defeated [by Silla]. … South Kara, being a very small place … has come to ruin. As to Tak-sun, the upper and lower classes practice double dealing … Therefore it has come to ruin. … I therefore wish to … rescue from Silla the provinces torn off by it … restoring them to their original connection [within the Kaya Federation] … [T]he high Japanese officials, having been long resident in the Land of Imna [Mima-na], close to the Silla frontier … have been poisoning Imna [the Kaya Federation]. …” 3


Nihongi records in 562 that: “Mima-na [Kaya Federation] was destroyed. The general term Mima-na includes the states called separately Kara, Ara, Saiki, Tara, Cholma, Kocha, Chata, Sanpanha, Kwison, and Imnye, in all ten states.”4 To this list we may add (not only the Imna State ruled by the King of Imna, but also) Tak-sun, Tok-ki-tan and South Kara that had been conquered by Silla in the early sixth century. The rulers of both Paekche and the Yamato kingdom did their best to reestablish the Kaya Federation, an effort that turned out to be futile.


Nihongi records the dying words of Yamato King Kimmei (r.531-71), exhorting the Heir Apparent to restore Mima-na [the Kaya Federation], and “renewing a relationship like that of a husband and wife just as it was in former days (N2: 89).”5 Japanese historians apparently read the “husband and wife relationship” as the “suzerain and colony relationship.”


In Nihongi, we find such expressions as Yamato Authorities of Mima-na, Governor of Mima-na, and Yamato Government House in Mima-na which, by themselves, may lead one to believe in some kind of colonial status for the Kaya Federation with respect to the Yamato kingdom. However, in Nihongi, there also appear entities with such titles as: King of Imna, King of Tak-sun, King of Kara, King of Ara, Kanki of Kucha, Lord of Cholma, Lord of Saiki, Lord of Sanpanha, and Kanki of Chata. The titles of these entities indeed are not consistent with any kind of colonial status for any member states of the Kaya Federation. For instance, during the reign of Keitai (507-31), Nihongi records that “Ki-neung-mal-da Kanki, King of Imna, came to the Court.” 6


Nihongi (N2: 44-45) records the statement made by the King Seong-myung (r.523-54) of Paekche to the Kaya envoys: “In past times, my ancestors, King Keun Chogo and King Keun Kusu, were first joined in amity with the former Kanki. They became as if they were brethren. I therefore look upon you as my children or younger brothers, and you regard me as a father or elder brother. … From that time to this, I have sedulously maintained friendship with my neighbors and always dealt honestly with the allied countries.”7


In Nihongi, we can further find various expressions which suggest the existence of a Yamato entity clearly separate from the native Imna entity within the Imna area itself, such as: “disputes between the people of Yamato and the people of Imna”; “the high Yamato officials … long resident in the land of Imna … maintain a false appearance of amity with Imna”; “the Agent of Imna and the Agent of the Yamato authority”; “instructions to the Yamato authorities and to Imna”; and “villages of the Yamato domain of Imna.” Nihongi even contains a passage suggesting the existence of Paekche people as a separate entity in Imna: “the Paekche prefects and governors of castles resident in the part of Lower Kara which belongs to Imna.”8


In the 7th year of Oujin [396], Nihongi records that: “Men of Koguryeo, men of Paekche, men of Im-na, and men of Silla all together attended the Court.” In this sentence, the Imna (read Mima-na in Nihongi) is placed on an equal footing with Koguryeo, Paekche, and Silla, apparently indicating the entire Kaya Federation and without implicating any colonial status for it. 9


Because of the intimate relationship that had been maintained with Paekche, the successive Yamato rulers apparently tried to maintain port facilities at the southern tip of the Korean peninsula “to serve as a station in going and returning (N1: 250).”10 According to Nihongi, there were some “ports of passage” with Yamato troops and residents, and there existed an official entity called “Mima-na Yamato Authority.”


It seems that the Yamato rulers managed to obtain the permit from the Kaya Federation to administer some port facilities (naturally with a group of Yamato residents) as direct short-cut crossing routes from the Japanese islands. Nihongi (N2: 17-18) records that when Paekche tried to share a port facility as a convenient passage from Paekche to the Yamato kingdom, however, the King of Kara was very annoyed. 11


The efforts by Yamato rulers to secure crossing routes to Paekche seem to have been exaggerated out of all proportion by those Japanese who wanted to justify the invasion of Korea in the late 19th century into the story of Japanese colonization of the southern part of Korean peninsula for more than two centuries.


The status of what the Japanese like to call the “Imna Japanese Government” might at most be compared to that of the Dutch trading station in Nagasaki, an area which became a foreign possession during the period 1609-1856. Indeed, in the early period of the Chosun dynasty, several ports located along the southeast coast of the Korean peninsula were opened to the Japanese and constituted the ports of entry for their ships and cargoes. Here the Japanese were allowed to reside under the surveillance of Chosun officials. The number of Japanese residents had exceeded 2,000 in 1474, and they often farmed illegally outside the permitted area. 12


There is not a single chronicle in East Asia, with the exception of Nihongi, in which one can find an expression like “Imna Japanese Government.” Even Kojiki never mentions it. Aoki (1974: 50) states that: “While the Japanese nationalist historians are fervently insisting that … Pyeon Han peoples had long been under the control of the Japanese …, the fact was perhaps the other way round. The Pyeon Han peoples regarded northern Kyūshū and the western tip of Honshū as their additional territories, and peoples in these areas as their fellow tribesmen and trade partners …. There must have been rows of business officies and storehouses standing on the wharfs of the trading port in the Pyeon Han territory. As more [of the] Pyeon Han population moved to the islands, the original site of the port became a kind of trading depot for the peoples concerned. The territory came to be called Imna (or Mimana in Japanese) …”

BIBLIOGRAPHY



[각주]


1 三國志 卷三十 魏書 三十 烏丸鮮卑東夷傳 三十 韓傳 韓 在帶方之南...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馬韓在西 有...伯濟國...凡五十餘國…弁辰 亦十二國…彌烏邪馬國…狗邪國 …斯盧國


宋書 卷九十七 列傳 夷蠻 倭國 興死弟武立 自稱 使持節都督倭 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 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廣開土王碑文 九年己亥 百殘 違誓 與倭和通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 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自倭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 歸服


2 垂仁 二年 是歲 任那人 … 欲歸于國… 一云 御間城天皇之 世 額有角人乘一船泊于… 意富 加羅國王之子..是時 遇天皇崩便 留之仕活目天皇 逮于三年 天皇 問…欲歸汝國耶...改汝本國名追 負御間城天皇 御名便爲汝國名 …返于本土 故號其國謂彌摩那 國 其是之緣也 (NI: 257-259)


3欽明 二年 四月 百濟聖明王謂 任那旱岐等言 日本天皇所詔者 全以復建任那 …其㖨己呑 居加 羅與新羅境際 而被連年攻敗 任 那無能救援 由是見亡 其南加羅 蕞爾狹小 不能卒備 不知所託 由是見亡 其卓淳 上下携貳 主 欲自附 內應新羅 由是見亡 二 年 七月 拔取新羅所折之國南加 羅㖨己呑等 還屬本貫 遷實任那 …又日本卿等 久住任那之國 近 接新羅之境 新羅情狀 亦是所知 毒害任那 (NII: 69-75)


4欽明 二十三年 春正月 新羅 打滅任那官家 任那滅焉 總言任 那 別言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飡國 稔禮國 合十國 (NII: 119)


5 欽明 三十二年 夏四月 天皇 寢疾不豫 皇太子向外不在 驛馬 召到 引入臥內 執其手詔曰 朕 疾甚 以後事屬汝 汝須打新 羅 死無恨之 封建任那 更造夫 婦 惟如舊日 (NII: 131)


6 雄略 七年 新羅王...乃使人於 任那王曰...伏請救於日本府行軍 元帥等 由是 任那王勸… 往救 新羅 (NI: 479)


欽明 二年 夏四月 安羅次旱 岐…加羅上首位…卒麻旱岐…多羅下旱岐…斯二岐旱岐…子他旱岐等與任那日本部吉備臣往赴百濟 俱聽詔書 (NI: 68-71)


繼體 二十三年 四月 任那王 己能末多干岐 來朝…曰 夫海表 諸蕃 自胎中天皇置內官家 不 棄本土 因封其地 良有以也 今 新羅 違元所賜封限 數越境以 來侵 請…救助臣國 (NII: 37-41)


7欽明 二年 夏四月 百濟聖明 王謂任那旱岐等言…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之世 安羅加羅卓淳 旱岐等 初遣使相 通厚結親 好 以爲子弟 (NII: 69-71)


欽明 二年 七月 百濟本記云 …乃謂任那曰 昔我先祖速古王 貴首王 與故旱岐等始約和親 式 爲兄弟 於是 我以汝爲子弟 汝 以我爲父兄…自玆以降 勤修隣 好 遂敦與國 (NII: 73-77)


8繼體 二十四年 秋九月 任那 使奏云…日本人與任那人 頻以 兒息 諍訟難決 (NII: 43-5)


欽明 二年 秋七月 …日本卿等 久住任那之國 近接新羅之境… 僞和任那 如斯感激任那日本府 者 (NII: 73-7)


欽明 四年 冬十一月 詔百濟 曰…在任那之下韓 百濟郡令城 主 宜附日本府…且夫任那者爲 爾 國之棟梁…爾須早建…聖明 王曰 是月乃遣施德高分 召任那 執事與日本府執事 (NII: 77-79)


欽明 五年 春二月…又謂日本府 卿任那旱岐等曰 夫建任那之國

... 將出在下韓之百濟郡令城主 唯聞此說 不聞任那與日本府 會 於百濟 (NII: 78-83)


欽明 五年 冬十一月 …今日本 府臣及任那國執事宜來聽勅…安 羅王 加羅王 俱遣使同奏天皇 (NII: 83-91)


欽明 十三年 夏五月 百濟加羅 安羅 遣… 詔曰 今百濟王 安 羅王 加羅王 與日本府臣等 俱 遣使奏… (NII: 101-103)

9應神 七年 高麗人 百濟人 任那人 新羅人 並來朝 (NI: 367)


10神功 攝政五十年 久氐等奏曰 …皇太后勅云… 增賜多沙城爲 往還路驛 (NI: 357)


繼體 二十三年 百濟王謂 …曰..

..請以加羅多沙津 爲臣朝貢津路


11 In 529, “the King of Paekche addressed …. saying: ‘Now our … envoys have always to avoid the headlands and expose themselves to the winds and waves. … I pray that thou wilt make the Port of Tasa in Kara the crossing route …’ …the Emperor [Keitai] accordingly … Kasone … and others were sent to turn over the Port to the King of Paekche. Hereupon the King of Kara spoke to the Imperial Envoys, saying: ‘This Port … has been the port of passage for your servant’s tribute. How can you without grave reason change this state of things and grant it to a neighboring country, contrary to the original definitive enfeoffment of this territory?’

The Imperial Envoys … were accordingly unable to make the grant openly… They … sent a clerk specially, by whom the grant to Puyeo was affected.”

See (N2: 17-18).


繼體 二十三年 三月 百濟王謂 …曰 夫朝貢使者 恒避嶋曲 每 苦風波…請以加羅多沙津爲臣朝 貢津路 是以…爲請聞奏… 是月 遣…等 以津賜百濟王 於是 加 羅王謂勅使云 此津從置官家以 來 爲臣朝貢津涉 安得輒改賜 隣國 違元所封限地 勅使…等 因斯 難以面賜…別遣錄史 果賜 扶余


12 The Chosun court granted the Japanese limited trading privileges. In 1443, three ports (Naei-po, Pusan-po and Yeom-po) were opened to the Japanese, and trading and living quarters (called Wae-gwan) were established in each to enable the Japanese to conduct their business. In 1510, the Japanese residing at the three ports rose in arms against the Korean garrison commander, with whom they had been at odds. After this was put down, Japanese privileges at those three ports (Ung-cheon, Tong-nae, and Ul-san) were abolished. In 1512, the Chosun court took a conciliatory position, and trade again was allowed at a port located at the modern-day Pusan area.

See Lee (1984: 191-2).



http://www.wontackhong.pe.kr.

2005 by Wontack Hong

All rights reserved

출처 : 동이민족 역사사료
글쓴이 : 稽古諮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