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홍원탁의 백제왜

[스크랩] 13. 백제왜, 백제의 멸망과 야마도 왕국의 새 역사 창조작업

monocrop 2007. 1. 4. 16:03
 

13. 백제의 멸망과 야마도 왕국의 새 역사 만들기


홍원탁 (서울대 교수)



칙어구사 勅語舊辭


백제의 멸망과 신라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 야마도 지배자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을 극대화시켰다. 계속해서 백제와의 일체성을 내세운다면 일본 열도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들은 백제와 운명을 같이하려 하지 않았다.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덴무(天武)는 681년에 새 역사를 창조할 것을 명했다. 새로 창조된 역사는, 야마도 왕국이 백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아주 먼 옛날(기원전 660년)에 세워졌고, 천황족은 백제 사람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순수한 토착세력이며, 지배씨족들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게 아니라 하늘에서 곧장 일본 열도로 내려왔고, 한국과 중국 조정들은 모두 야마도 왕국을 종주국으로 모셨다는 식으로 말한다. 야마도 지배자들은, 백제 왕국과의 원초적인 연관성을 제거하고, 지배씨족의 유래를 야요이 원주민 못지않게 오래되고 토착적인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야마도 왕국의 위상을 자신들이 만든 문서상으로나마 동아시아 지역의 종주국 위치로 격상시킨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한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660~668년 : 야마도 왕국의 뉴스 헤드라인

 

 


660년 9월5일 신라가 7월 달에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로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고, 왕과 대신들은 당나라로 잡혀갔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야마도 조정에 전해졌다. 곧 이어, 백제의 대신인 복신(福信)이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군대를 재조직하고, 항전 의지를 고취하니, 당군이 감히 복신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660년 10월 복신은 야마도 조정에 사신을 보내 군대와 원조를 요청하면서, 왕자 풍장(豊璋)을 왕으로 모시려 하니 본국으로 보내달라고 말했다. 1 사이메이(齊明) 여왕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옛적에도 [아마 광개토 대왕 때를 의미하는 것 같다] 백제가 우리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 한 경우들이 있었다.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단절된 왕조를 복원시켜 주는 것은, 우리가 언제고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이다. 백제가 이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우리의 지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이번 사태에 처한 우리의 결단은 확고하다. 나는 우리 장수들로 하여금 동시에 여러 갈래로 즉시 진군하도록 명 할 것이다.”2


661년 1월6일 사이메이 여왕은 백제 구원작전을 진두 지휘하기 위하여 큐슈를 향해 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7월24일. 북큐슈 아사쿠라에 임시 행궁(行宮)을 설치하고 구원작전을 진두 지휘하던 사이메이 여왕이 돌아갔다. 11월7일 태자 덴지(天智)가 그녀의 유해를 아스카로 모시고 와서 장례를 치렀다. 3


662년 7월 태자는 소복을 하고, 큐슈의 나가쓰 임시 행궁에서 구원작전을 계속 지휘했다. 4


663년 3월 태자 덴지는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27,000명의 군대를 보냈다. 8월28일 만 명의 야마토 군대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구원하러 갔다가 백촌강(白村江) 어구에서 전멸 당했다. 백제 왕자 풍장은 소수의 시종들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피신했다. 9월7일 주유성(州柔城)이 당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됐다. 5


668년 1월3일 그동안 소복을 한 채로 한반도 위기상황에 대처하고 있던 태자 덴지가 왕위에 올랐다. 그해 9월.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


당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었을 위의 기록들은 모두 일본서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서구 학자들은 고대 한일관계에 관한 일본 학자들의 왜곡되고 편파적인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경우에는 Batten(1986: 212)이 말하는 것처럼 쉽게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다 : “비록 순수하게 한반도 내부의 갈등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일본 열도 자체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태였는데, 어째서 일본 조정이 그와 같은 열정을 가지고 거국적으로 개입을 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가 힘들다. 일본서기가 말하는 대의명분은 아주 고상하게 들리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야마토 왕국의 새 역사 만들기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야마토 조정이 670년 12월 국호를 왜국에서 일본으로 고쳤다고 말한다. 7 671년 12월3일, 덴지왕이 죽었다. 8 일찍이 덴지의 둘째 딸(훗날의 지토오 여왕)과 결혼했던 덴지의 동생은, 672년 이른바 진신의 난(壬申亂)을 일으켜, 673년 2월27일 왕위에 올라 덴무(天武)가 됐다. 9


681년 3월17일. 덴무는 6명의 왕자와 6명의 대신들에게 야마도 왕국의 역사를 편찬 하라고 명했다. 10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로 끌어들인 천적 신라에게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정복당하자, 일본 열도에 세운 자신들 왕국의 운명에 대해 야마도 지배자들이 느꼈던 위기감과 초조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에 달했다. 백제의 멸망과 신라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 야마도 지배자들에게 전례 없는 정체성의 위기감을 야기했다. 자신들이 계속해서 백제와의 일체성을 내세운다면 일본 열도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들은 백제와 운명을 같이하려 하지 않았다. 백제와는 단절된, 토착적인 존재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또 일본 열도에서의 영원한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덴무(天武, 673~86)는 681년 야마도 왕조의 새 역사를 창조할 것을 명했다.


고사기 서문은 덴무가 옛 상고 역사에 대해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과거를 완전히 꿰뚫고 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덴무가 사망한 686년 이전 어느 날, 마침내 야마도 왕국 새 역사의 윤곽이 확정됐고, 초인간적 암기력을 보유한 28세의 히에다 아레(稗田阿禮)에 의해 암기됐다.


고사기 서문에 인용된 덴무의 말은, 그가 당시에 느끼고 있던 위기감뿐 아니라, 새로운 역사 창조의 필요성을 그가 얼마나 절감하고 있었던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여러 지배 씨족들 본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들은 사실과 너무나도 다르다. 잘못된 기록들을 바로 이 시점에서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리 왕국과 왕실의 기초가 몇 년 내에 와해될 것이다. 나는 이제 이 모든 기록들을 면밀히 조사한 다음, 잘못된 부분은 삭제하고, 틀린 부분은 바르게 고쳐서, 우리 역사의 정확한 내용을 후세에 전해주고자 한다.” 11



왕명에 의해 편찬된 역사 : 칙어구사(勅語舊辭)


겐메이(元明, 707~715)는 661년에 덴지의 네 번째 딸로 태어나 덴무의 질녀가 되면서 동시에 처제이고 며느리였다. 야마도 왕실의 근친 결혼 관행의 결과이다. 그녀는 710년 수도를 후지와라(藤原京)에서 나라(平城京)로 옮겼다. 711년 9월18일, 겐메이는 (당시 54세가 넘었을 것으로 보이는) 히에다 아레가 암기하고 있는 칙어구사의 새 역사를 야스마로(安萬侶)에게 받아적도록 명했다. 히에다 아레가 구술을 하고, 야스마로는 받아썼다. 넉 달 후인 712년 1월28일, 야스마로는 받아적은 내용을 겐메이 여왕에게 제출했다. 고사기는 연월일(年月日)도 없이, 새로 창조된 역사의 개요만을 기록하고 있다


야마도 조정은 즉시 도네리(舍人) 왕자와 야스마로를 공동 위원장으로 삼아, 고사기를 바탕으로, 편년체 형식의 사서를 편찬토록 했다. 이 야마도 왕국의 공식 역사서는, 겐메이의 딸인 겐쇼오(元正, 715~724) 여왕 재위 6년 째인 720년 드디어 완성됐다. 697~791년 기간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의 공식 명칭이 “속일본기(續日本紀)” 인 것을 보면, “일본서기”라는 명칭은 후세에 사용된 것으로 믿어진다. 야스마로는 723년에 죽었다. 12



명확한 목적의식 하에 편찬된 고사기와 일본서기


야마도 지배자들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했다. 그들은 백제 왕국과의 원초적인 연관성을 제거하고, 지배씨족의 유래를 야요이 원주민 못지않게 오래되고 토착적인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야마도 왕국의 위상을 (자신들이 만든 문서 속에서나마) 동아시아 지역의 종주국 위치로 격상시키려 했다. 새로 창조된 역사는, 야마도 왕국이 백제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아주 먼 옛날(기원전 660년)에 세워졌고, 천황족은 백제 사람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순수한 토착세력이며, 한국과 중국 조정들은 모두 야마 도왕국을 종주국으로 모셨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아울러 지배씨족들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게 아니라, 하늘에서 곧장 일본 열도로 내려왔다고 말한다. 아득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토착세력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해 야마도 왕국에게 부여한 것이다


편년체의 “일본기”는 서문도 없고, 표도 없으며, 중요한 사람에 관한 열전이나, 지리지도 없다. 중국에서는 이런 식의 기록을 서기(書記)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래도 일본 사람들은 “일본기”를 항상 일본서기라고 부른다. 하긴, 본기(本紀) 내용은 그런대로 중국의 정사(正史)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출현 이후, 새로운 역사 이념은 야마도 지배층 의식 속에 끊임없이 주입돼, 마침내 일본 열도에서의 반종교적인 천황숭배 형태로 진화하게 됐다. 야마도 지배자들의 칭호는 급기야 (대)왕에서 천황으로 격상됐다. 13 그 결과, (야요이) 농민 출신 무사들이 백제에서 건너온 전통적 지배계급으로부터 실권을 빼앗은 후에도, 이들 새 지배자들은 가난한 귀족들이 교토 지역에서만이라도 체면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허용했다. 뿐만 아니라, 천황은 오늘날까지 명목상으로나마 일본 열도의 국가원수로서 계속 군림할 수 있었다. 덴무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을, 기대 이상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진신의 난을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오른 덴무는, 자수성가의 군주였을 뿐 아니라, 진실로 탁월한 선견지명의 군주였던 것이다.



일본열도로의 또 한차례 대량 이주


백제가 663년 멸망한 후, 일본 열도로 백제 유민의 대량 이주가 상당기간 계속됐다. 일본서기는 백제 피난민에 대해 많은 기록을 하고 있다. “백제 왕자 선광(善光) 일행에게 나니와(오사카 근처)에 거주지를 마련해줬다. 665년 백제에서의 직위를 감안하고 복신을 도운 공적을 참작해 귀실집사에게 소금하(小錦下) 관위를 수여했다. 백제인 남녀 400여 명을 오우미(近江國)의 간자키(神前) 고을에 살게 하고 전답을 줬다. 백제인 남녀 2,000여 명을 동국(東國)으로 보내 살도록 했다 승려와 속인을 구별하지 않고 이들 모두에게 663년부터 3년 동안 관가에서 식량을 지급했다. 669년 좌평 여자신(餘自信)을 포함한 백제 남녀 700여명을 오우미의 가마후(蒲生)로 옮겨 살도록 했다.” 14


새로 건너온 백제 사람들은 백제에서의 지위에 따라 야마도 지배자들과 같은 특권을 누리거나, 일반 백성들과 같은 혜택을 받았다. 일본서기(N2: 295~296)에는 다음과 같은 민요가 실려있다


귤은 자신의 가지에서 각각 자라지만

구슬 모양 꿸 때에는

한 개의 끈에 꿰어진다


아마 백제와 야마도 지배계급이 제각기 다른 나라에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전화위복으로 한 군데 모여서 살게 됐다는 뜻인 것 같다.



신라와 전략적 동맹을 맺어 당나라에 대항


Batten (1986)은 “백촌강에서 참패를 한 663년부터 당군이 한반도에서 물러가는 676년까지의 13년간은 패배한 일본인들에게 매우 걱정스런 기간이었다. 이들 초조감의 강도는 그 기간 중 정신 없이 방어선을 구축한 데서도 나타난다. 701년까지 계속해서 요새를 축조하고 수리하는 기록들이 여기저기 나타난다”고 말한다.


7세기 말에는 신라 뿐만 아니라 야마도 조정도 당나라의 팽창정책을 두려워했다. 664년 야마도 조정은 대마도와 이키(壹岐)섬, 북큐슈에 수비병을 배치하고 봉화대를 설치했다. 또 큐슈의 성채들 주위에 해자(垓字)를 파고 수성(水城)이라 불렀다. 665년 야마도 조정은 백제에서 건너온 장군을 보내 나가토에 성채 한 개를 쌓았고, 큐슈에 두 개의 성채를 쌓았다. 667년에는 야마토, 사누키, 대마도에 각각 한 개씩의 성채가 세워졌다. 일본기의 667년 기록에는 축자(筑紫) 도독부란 표현이 나타난다. 야마도 조정은 당나라 침략군과 벌려야 할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여 공격 예상 진로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15


비록 단기간이었지만 신라와 야마도 조정은 당나라에 대항하는 전략적 동맹관계를 수립했다. 668년 신라가 사신을 보냈고, 야마도 조정은 김유신에게 선물로 배 한 척을 보냈다. 귀국하는 사신 편에 신라왕에게도 배 한 척을 선물했다. 이는 신라와 야마도 조정 사이의 전략적 동맹의 시작을 상징한다. 16 668~695년 기간 중, 야마도 조정은 신라에 아홉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만주에서의 발해 왕국의 등장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대한 당나라의 직접적인 위협을 크게 감소시켰다. 그러자 신라와 야마도 조정 사이의 전통적 적대감이 다시 부상했다. 발해가 755~757년 기간 중에 요동 지역을 점령하자 신라와 야마도 왕국 사이의 전략적 동맹 역시 빠르게 와해됐다. 야마도 조정은 754~778년 기간 중 네 차례에 걸쳐 발해에 사신을 보냈지만, 신라에는 단 한 차례도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급기야 759년엔 야마도 조정 내에서 신라를 공격한다는 풍문이 돌았다. 17



國文版 부록 : 백제 지배층의 대량 이주


671년. 야마도 조정은 백제 좌평 여자신과 법관대보 사택소명에게 다이키무게 관위를 수여하고, 학직두(學職頭) 귀실집사에게 세우키무게 관위를 수여하고, 병법에 능한 달솔 곡나진수, 목소귀자, 억례복류, 답본춘초, 약(藥)을 지을 줄 아는 본일비자, 찬파라, 금라금수, 귀실집신 등에게 다이센게 관위를 수여하고, 약을 지을 줄 아는 달솔 덕정상과 길대상, 오경에 밝은 허솔모, 음양에 능한 각복모 등에게 세우센지야우 관위를 수여하고, 기타 달솔 등 50여인에게 세우센게 관위를 수여했다.


백제 지배층의 대량 이주는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첫 번째는 4세기 말 호무다가 야마도 왕국을 창건했을 때를 전후로 한 시기였고, 두 번째는, 7세기 후반, 백제가 멸망한 직후이었다.


백제 멸망 후, 얼마나 많은 백제 왕족들이 야마도로 건너왔는지는 속일본기의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다. 700년, 백제왕 원보(遠寶)를 히타치 수(常陸守)로 삼았다. 703년, 백제왕 양우(良虞)를 이요 수(伊豫守)로 삼았다. 708년, 백제왕 남전(南典)을 키비의 미치쿠치 수(備前守)로 삼았다. 735년, 백제왕 자경(慈敬)에게 종5위하(從五位下)를 수여했다. 738년, 백제왕 효충(孝忠)을 토호쓰 아후미 수(遠江守)로 삼았다. 740년, 백제왕 전복(全福)에게 종5위하(從五位下)를 수여했다.


의자왕의 아들 선광(禪廣)의 손자 백제왕 경복(敬福)이, 미치오쿠 수(陸奧守)로 있을 때, 최초로 금광을 발견하여 황금 900냥을 바쳤기에, 750년에 궁내경(宮內卿)으로 삼았다. 751년, 백제왕 원충(元忠)에게 종5위상(從五位上)을 수여했다. 762년, 백제왕 이백(理伯)을 히의 미치시리 수(肥後守)로 삼았다. 763년 백제왕 삼충(三忠)을 이데하 수(出羽守)로 삼았다. 764년, 백제왕 무경(武鏡)에게 종5위하(從五位下)를 수여했다. 765년, 백제왕 이선(利善), 신상(信上), 문경(文鏡)에게 종5위하(從五位下)를 수여했다


읽는 사람한테 너무 부담스러울 것 같아, 이런 기록을 계속 나열할 수가 없다. 815년에 완성된 신찬성씨록은 앞서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도래한 백제 지배층을 거의 모두 토착화시켜서 기록했다. 하지만 7세기 후반에 도래한 백제 지배층은, 모두 그 출자(出自)를 백제로 그냥 기록했다. 이들의 출자를 토착화하기엔 시기적으로 너무 근접했고, 그 충격적인 상황이 야마도 사람들 마음속에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4 (2005. 4. 30.)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BIBLIOGRAPHY


[각주]


1. 齊明 六年九月 己亥朔癸卯 百濟遣 . . 等 來奏曰 或本云 逃來告難 今年七月 新羅. . 引構唐人 傾覆百濟 君臣總俘. . 福 . . 誘聚散卒. . 旣而百濟兵翻銳 唐不敢入. . .冬十月. . .福信遣. . .等. . .乞師請救 幷乞王子余豐璋. . 將爲國主 (NII: 345-347)


2. 齊明 六年秋九月 詔曰 乞師請救 聞之古昔 扶危繼絶 著自恒典 百濟國 窮來歸我 . . 志有難奪 可分命將軍 百道俱前 (NII: 347) Aston의 Nihongi (N2: 268-9) 참조.


3. 齊明 七年春正月 丁酉朔丙寅 御船西征 始就于海路. . 居于. . 行宮. . 名曰長津 五月. . .遷居于朝倉..宮. . 秋七月甲午朔丁巳 天皇崩于朝倉宮. . 皇太子奉徙天皇喪 還至. . .歸就于海 . 還泊難波 十一月. . 殯于飛鳥 (NII: 348 -351)


4. 天智 卽位前紀 七年七月. . 皇太子素服稱制. . 遷居于長津宮 稍聽水表之軍政 (NII: 353)


5. 天智 二年三月. . 率二萬七千人 打新羅. . 秋八月. . .率健兒萬餘. . 於白村江. . 戌申 日本船師初至者 與大唐船師合戰. . .己酉. . .官軍敗續. . .百濟王豐璋 與數人乘船 逃去高麗 九月辛亥朔丁巳 百濟州柔城 始降於唐 (NII: 357- 358)


6. 天智 七年春正月 丙戌朔戊 子 皇太子卽天皇位 冬十月大 唐大將軍英公 打滅高麗 (NII: 367-371)


7. 文武王 十年十二月 ..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以爲名 (S1: 128) Nihongi was still reading the Chinese characters Nippon as Yamato. 日本 此云耶麻謄 (NI: 81) 夜麻登(倭) (K: 162)


8. 天智 十年十二月 癸亥朔乙丑 天皇崩于近江宮 (NII: 381)


9. 天武 下 二年二月 丁巳朔癸未. . 卽帝位於飛鳥淨御原宮 (NII: 411)


10. 天武 下 十年三月 ...丙戌 天皇. . . 以詔. . .令記定帝紀及上古諸事 (NII: 447)


11. 古事記上卷 幷序

臣安萬侶言. . 飛鳥淸原大宮御大八州天皇御世. . 潭探上古. . 明觀先代. . 於是天皇詔之 朕聞 諸家之所䝴帝紀及本辭 旣違正實 多加虛僞 當今之時不改其失 未經幾年其旨欲滅 斯乃 邦家之經緯 王化之鴻基焉 故惟 撰錄帝紀 討覈舊辭 削僞定實 欲流後葉 時有舍人 姓稗田名阿禮 年是二十八 爲人聰明 度目誦口 拂耳勒心卽 勅語阿禮 令誦習帝皇日繼及先代舊辭 然運移世異 未行其事矣. . 以和銅四年九月十八日 詔臣安萬侶 撰錄稗田阿禮所誦之勅語舊辭 以獻上者. . 和銅五年正月二十八日 正五位上勳五等太朝臣安萬侶 (K:. 44-46)


12. 41개의 글자가 동판에 새겨진 비문이 1979년 야스마로의 묘에서 발견됐다. Murayama and Miller(1979)는 “그 묘지(墓誌)에 새겨진 한자들을 보면, 중국어 문법상 접미어인 지(之)를 “죽었다”는 자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하는, 놀라울 정도로 한국적인 어법(語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사용법은 중국 사람들에겐 아주 비문법적이지만, 6세기부터 8세기 중엽까지 한자로 쓰여진 한국 비문들에선 뚜렷하게 나타난다. 일본의 일반 대중들이 야스마로의 비문에서 발견된 이 놀라운 한국적 어법에 대해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계속 모르고 살게 될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左京四條四坊從四位下勳五等太 朝臣安萬侶以癸亥年七月六日卒之養老七年十二月五日乙巳


13. 당 고종(唐高宗)이 병약해 657년 하궁(夏宮)으로 물러나 요양하면서 격일로 조회를 열었다. Twitchett(1979: 255)에 의하면, “고종이 660년 10월 심각한 뇌졸중을 당하자, 측천무후의 위상은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됐다. 무후는 고종이 정기적으로 무기력 해 질 때마다 자연스럽게 직접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급기야 660년 말 이후엔 명칭만 아닐 뿐 실질적인 황제가 됐다.” 그녀는 670년 중국 역사상 최초로 천후(天后)란 칭호를 스스로 사용하고, 고종에겐 천황(天皇)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일본 사람들은 이 거창한 천황 칭호를 재빨리 도입한 것이다.


舊唐書 卷五 高宗下 乾封五年秋八月 …皇帝稱天皇 皇后稱天后


14. 天智 四年 ..勘校百濟國官位階級 仍以佐平福臣之功 授鬼室集斯小錦下 其本位達率 復以百 濟百姓男女四百餘人 居于近江 國神前郡..給神前郡百濟人田

天智 五年 以百濟男女二千餘人 居于東國 凡不擇緇素 起癸亥年 至于三歲 並賜官食 天智 六年 [667] 遷都于近江 (NII: 365-7)

天智 八年 …又以佐平餘自信 佐平鬼室集斯等 男女七百餘人 遷居近江國蒲生郡 (NII: 373)


덴지는 665년 백제 유민 4백명을 오우미 가마후 고을로 보내 살도록 했고, 666년엔 백제 유민 2천명을 동국으로 보냈다. 667년 덴지는 수도를 오우미로 옮겼다. 669년엔 백제 유민 7백명을 오우미 가마후 고을로 보내 살도록 했다. 덴지는 670년 봄 바로 그 가마후 고을에 가서 왕궁 터를 둘러봤다. 오우미 천도를 전후로, 덴지는 백제에서 새로 건너온 사람들을 계속 그 지역으로 보냈다. 덴지는 백제에서 새로 도래한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에 다수 모여있는 것이 믿음직스럽고 또 마음도 편했던 것 같다.


15. 天智 三年 於對馬嶋 壹岐嶋 筑紫國等 置防與烽 又於筑紫 築大堤貯水 名曰水城 (NII: 363)


天智 四年 遣達率答炑春初 築城於長門國 遣達率億禮福留 達 率四比福夫於筑紫國 築大野及 椽二城 (NII: 365)


天智 六年 遷都于近江 .. 十一月 百濟鎭將劉仁願 遣熊津都督 府熊山縣令…等 送…等於筑紫 都督府…是月築倭國高安城…屋嶋城 對馬國金田城 (NII: 367)


天武 八年 [679] 詔曰…檢校親 王諸臣及百寮人之兵及馬 (NII: 439) 十二年 詔諸國習陣法 (NII: 461) 十三年 詔曰 凡政要者軍事也 是以文武官諸人務 習用兵及乘馬…其有馬者爲騎士 無馬者爲步卒 並當試練 (NII: 463)


持統 三年 [689] 詔左右京職及諸國司 築習射所..詔諸國司曰 今冬戶籍可造宜 限九月 糺捉浮浪 其兵士者 每於一國四分而點其一 令習武事 (NII: 499) 七年 [693] 詔 自今年始於親王 下至進位 觀所儲兵... 遣陣法 博士等敎習諸國 (NII: 523)


16. 天智 七年 [668] 皇太子卽天皇位..新羅遣…金東嚴等進調..賜新羅上臣大角干庾信船一隻...使… 賜新羅王 輸御調船一隻 付東嚴等 (NII: 371)


天武 四年 [675] 新羅遣王子忠元…爲大使…遣于新羅..詔曰 諸王以下初位以上 每人備兵 (NII: 417-21) 五年 王卿遣京及畿內 校人別兵…爲大使…遣於新羅..新羅遣…請政 (NII: 425-7)

十年 ...大使...遣新羅國... 新羅遣…(NII: 447-451) 十四年 新羅遣…請政 (NII: 473)

持統 元年 [687] 新羅遣王子…等 奏請國政 (NII: 491)


야마도 조정은 당나라의 팽창정책에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야마도로 건너온 백제 장군들의 도움을 받아, 쓰시마에서 큐슈 북부, 또 세토 내해를 거쳐 수도에 이르는 (대륙으로부터의 침략 루트가 될 수 있는) 통로에, 총력을 집중해 성을 쌓고, 봉화 체계를 갖추며, 방위선을 구축했다. 당시 신라 자신도 당나라의 팽창정책을 두려워했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점령한 다음, 즉시 도독부를 설치해 이들 지역을 통치하려 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 세력들과 힘을 합쳐, 676년에 당 군을 완전히 축출하고,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당시 동 아시아의 초강대국인 당나라가, 신라와 야마도 조정에 대해 다 같이 적대적이며 위협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공동의 적을 맞게 되자, 신라와 야마도 조정은 빈번하게 사신들을 교환하면서, 정치적 군사적 의견교환을 하고, 협조관계를 강화했다. 양국 간의 전통적인 적대관계가, 국제정세의 변화 때문에, 좋든 싫든 협조관계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17. 聖武 天平七年 [735] 新羅使…入京..而新羅國輒改本號曰王城國 因玆 返却其使 (SN2: 286)

九年[737] 遣新羅使 奏新羅國失常禮..或言遣使問其由 或發兵加征伐..以告新羅无禮之狀 (SN2: 310-2) 十五年 [743] 新羅使…大失常禮 (SN2: 418)


淳仁 天平寶字 三年[759]六月 令大宰府造行軍式 以將伐新羅也 九月 造船五百艘..爲征新羅也 (SN3: 320-8)


발해가 당나라의 동북방을 위협하게 되자, 당나라는 735년 다시금 신라와 화해하는 조치를 취했다 발해라는 완충지대가 형성되고, 또 당과는 외교적으로 화해하게 되자, 신라는 중국으로부터의 위협을 더 이상 심각하게 느끼지 않게 되었다. 신라보다 당나라의 직접적인 위협으로부터 더욱 멀어진 야마도 조정은, 8세기 중반에 이르자 신라와의 협조관계를 더 이상 지속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게 됐다. 반면, 야마도 조정은 727년 이후 발해에 13회나 사신을 보냈고, 발해는 야마도 조정에 34번이나 사신을 보냈다.




Fall of the Paekche Kingdom

and Creating a New History

of the Yamato Kingdom


History of Royal Mandate 勅語舊辭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news headlines in yamato


September 5, 660. Shocking news arrived at the Yamato court from Paekche: in July, Silla drew the Tang people onto the Korean peninsula, destroyed Paekche, and captured the King and his ministers. Shortly thereafter followed another report: Bok-sin, Minister of Paekche, collected the scattered ranks, regrouped an army, strengthened their fighting spirit, and the Tang forces dared not launch an attack against Bok-sin.


October, 660. Bok-sin dispatched an envoy to the Yamato court, asking for troops and assistance, and Paekche Prince Pung-jang returned to inherit the throne.1


Queen Saimei proclaimed: “We learn that in ancient times [likely implying the time of King Kwang-gae-to the Great] there have been cases of troops being asked for and assistance requested: to render help in emergencies, and to restore that which has been interrupted, is a manifestation of ordinary principles of right. The Land of Paekche, in its extremity, has come to us and placed itself in our hands . . . Our resolution in this matter is unshakable. We will give separate orders to our generals to advance at the same time by a hundred routes. . . .” 2


January 6, 661. Queen Saimei sailed westward to Kyūshū in order to command the entire operation to rescue Paekche at the front. July 24. Queen Saimei, who had been leading the rescue operation at the Asakura temporary palace in northern Kyūshū, died. November 7. Crown Prince (Tenji) carried her remains back to Asuka, and held the funeral. 3


July, 662. The Crown Prince, dressed in white mourning clothes, set up his residence in the Nagatsu temporary palace in Kyūshū, commanding the overseas rescue operation. 4


March, 663. The Crown Prince dispatched an army of 27,000 to attack Silla. August 28. Soldiers of Yamato, ten thousand strong, who came across the sea to rescue Paekche, were annihilated at the mouth of the Paek-chon River Pung-jang took a boat and escaped to Koguryeo along with a few followers. September 7. Fortress Chu-yu fell to Tang force.5


January 3, 668. The Crown Prince, who had been in mourning clothes coping with the emergency on the Korean peninsula, belatedly succeeded to the throne, becoming King Tenji. September, 668. Tang forces destroyed Koguryeo. 6


All of the above are excerpts from Nihongi. Western scholars have tended to accept the one-sided Japanese version of the ancient Korea-Japan relationship, but they cannot help but remain puzzled by such a question as posed by Batten (1986: 212): “Why the Japanese should have thrown themselves with such vigor into a war that, if not quite an intramural Korean conflict, had at least no direct bearing on Japanese territory, is not easy to answer. The explanation offered by Nihon-shoki . . . while high-sounding, can hardly be taken at face value.”


Creating a New History of the Yamato Kingdom


In the month of December 670, the Silla Pon-ki (the Annals of Silla in Samguk-sagi) reports that “Wa State” changed its name to “Nippon.”7 King Tenji died on December 3, 671.8 Earlier, Tenji’s younger brother had married the second daughter of Tenji (who later became Queen Jitō). He staged the so-called “Coup of Jin-shin” in 672, and made himself king on February 27, 673, becoming King Tenmu. 9


March 17, 681. Tenmu ordered six princes and six ministers to compile the histories of the Yamato kingdom. 10


As Paekche and Koguryeo were conquered one by one by their archenemy Silla that drew Tang forces onto the Korean peninsula, the sense of crisis and anxiety of the Yamato rulers regarding the fate of their kingdom on the Japanese archipelago was heightened far beyond imagination. The disappearance of the Paekche kingdom and the 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in the hands of the Silla people caused an unprecedented identity crisis for the Yamato rulers. Should they continue to identify themselves with the Paekche, they feared their days on the Japanese islands would be numbered. They did not want to cast their fate with the Paekche. In order to establish an entirely new identity as a native polity disconnected from the Paekche, and to secure a permanent future in the Japanese islands, Tenmu (673-86) ordered [in 681] the creation of new histories of the Yamato dynasty.


The Preface to Kojiki states that Tenmu had profound knowledge of ancient histories and was able to comprehend the previous age thoroughly. On an appointed day before Tenmu died in 686, the outline of the new history of the Yamato kingdom was at last finalized, and was memorized by Hieda Are, then 28 years old, who had extraordinary powers of memory.


Tenmu’s own words, quoted in the Preface of Kojiki, offer a glimpse of Tenmu’s sense of crisis and of the necessity, therefore, to create a new history: “Those chronicles handed down and kept by the head family of each clan contain records which differ greatly from the facts. Unless we correct those false records at this very moment, the foundation of our kingdom and royal family will be lost in a few years. I now intend to scrutinize all those records with great care, eliminate the falsehoods, correct the errors, and hand down the true version of our history to posterity.”11


History of Royal Mandate 勅語舊辭


Genmei (707-15), born in 661 as the fourth daughter of Tenji, was a niece, the younger sister of Tenmu’s wife, and, at the same time, a daughter-in-law of Tenmu. She had relocated capital from Fujiwara-kyō to Nara (Heijō-kyō) in 710. On September 18, 711, Genmei ordered Yasumaro to write down the new History of Royal Mandate 勅語舊辭 that had been memorized by Hieda Are, who must have been more than 54 years old by that time. Hieda Are dictated and Yasumaro wrote. Four months later on January 28, 712, Yasumaro presented the results to Genmei. Kojiki records this bare outline of the newly created history without specifying dates, months or years.


On the basis of Kojiki, the Yamato court immediately commenced, under the co-chairmanship of Prince Toneri and Yasumaro, the compilation of official annals called Nihongi. This formal history of the Yamato kingdom was finished in 720, the sixth year of the reign of Genshou (715-24), a daughter of Genmei. It came to be called Nihon-shoki in later ages. Yasumaro died in 723. 12


compiling Kojiki and Nihongi with definite

objectives in mind


The Yamato rulers compiled Kojiki and Nihongi with definite objectives in mind. They wanted to eradicate any original connection with the Paekche kingdom; they wanted to make the origin of ruling clans as ancient and as native as the Yayoi aborigines; and they wanted to make the Yamato kingdom a dominant regional force. In the new history, the Yamato kingdom is said to have been established in time immemorial (660 BC) without any connection with Paekche; the imperial family became a truly native force without any relation to the Paekche people; and all Korean and Chinese kingdoms were under the suzerainty of the Yamato court. The ruling clans were postulated to have come down to the Japanese islands, not from the Korean peninsula but directly from heaven. An entirely new identity as an ancient native polity was thus created for the Yamato kingdom.


Nihongi has neither a preface, nor tables, nor treatises on contemporary systems, customs and geography, nor biographies of important persons. In China, a chronicle without such information could hardly be called “shoki.” The main text (Annals), however, could maintain the semblance of a standard Chinese dynastic history.


Ever since the appearance of Kojiki and Nihongi, their ideology was instilled into the mind of the Yamato ruling class, and eventually evolved into the semi-religious emperor worship on the Japanese islands. The appellation for Yamato rulers had in no time been elevated from Great King (Ō-kimi) to Emperor (Tennō).13 As a result, even after the traditional ruling class of Paekche origin lost all their powers to the samurai warriors of peasant origin, the destitute nobles in the Kyōto area were left alone by the earthly new rulers. Furthermore, the emperor has continued to reign as the nominal head of the Japanese state until today. The result seems to have been far beyond anything possibly wished for by Tenmu, who was not only a self-made but also a truly farsighted monarch.


The Massive exiles to the Japanese islands


After the complete destruction of Paekche by the Silla-Tang forces in 663, there occurred a series of massive exiles to the Japanese islands. Nihongi (N2: 282-92) records extensively on the emigration of Paekche refugees: “Prince Seon-Kwang of Paekche and his people were given a residence at Naniha. … [A]fter a comparison of the Paekche degrees of official rank there was granted to the Kwi-sil, Chipsa, in consideration of the eminent services of the Minister Pok-sin, the rank of lower Shokin. Moreover Paekche common people, men and women numbering more than 400, were given residences in the district of Kanzaki, in the province of Afumi … [and] rice lands were granted to the Paekche people of Kanzaki [in 665] … Over 2,000 Paekche people, men and women, were settled in the East country [in 666]. Without distinction between black and white (i.e., of priests and laymen), they were all maintained at Government expense for three years beginning with … [663]. … [T]he Minister Yeo Cha-sin, … and others, men and women, to the number of over 700 persons, were removed and settled in the district of Kamafu in the province of Afumi [in 669]. 14


The newly arrived Paekche refugees, depending on their ranks in Paekche, received the same honors as the Yamato rulers, or the same privileges as the common people in the Japanese islands. The Nihongi (N2: 295-6) notes that: “There was a popular ditty, as follows:


The oranges – Each on their own branches,

Though they grow – When strung as pearls,

Are strung on the same string.”


Oranges allude to the rulers of Paekche and the rulers of Yamato.


strategic alliance with silla against the Tang


Batten (1986) notes that “the years between the Paekchon River debacle in 663 and the Tang retreat from Korea in 676 were worrisome for the defeated Japanese … whose anxiety can be measured by the feverish defense preparations taken during this same period. … Scattered references to the construction or repair of fortifications continue until 701.”


In the late seventh century, not only Silla but also the Yamato court was afraid of the Tang’s expansionist intention. In 664, the Yamato court established frontier guards and signal fires in Tsushima Island, Iki Island, and northern Kyūshū. Also embankments storing water were built around the fortresses in Kyūshū which were called the Water Fortress. In 665, the Yamato court sent Paekche generals to construct a rampart in Nagato, and two ramparts in Kyūshū. In 667, a rampart was constructed in the Yamato region, another one at Sanuki, and another one at the Tsushima island. One can find the expression of the Tsukusi (Northern Kyūshū) Commandery appearing in the Nihongi record for the year 667. The Yamato court intensified the preparation for a possible war against the Tang invasion forces. 15


Silla and the Yamato court formed a strategic, though short-lived, alliance against the Tang. In 668, Silla sent an envoy, and the Yamato court sent a ship to Kim Yu-shin as a gift, and also sent a ship to the King of Silla through the returning Silla envoy, symbolizing the beginning of the strategic alliance between the Silla and the Yamato court.16 Between 668-95, the Yamato court sent nine envoys to Silla.


The appearance of the Parhae kingdom in Manchuria, however, substantially lessened the direct threat of the Tang on the Korean peninsula and also on the Japanese islands. The traditional animosity between Silla and the Yamato kingdom could not but re-surface. When the Parhae came to occupy the Liao-dong in 755-7, the strategic alliance between Silla and the Yamato kingdom rapidly dissolved. The Yamato court sent no envoys to Silla (while sending four envoys to Parhae) between 754-78, and rumors of invading Silla could be heard in the Yamato court in 759. 17


BIBLIOGRAPHY


[각주]


1 齊明 六年九月 己亥朔癸卯 百濟遣 . . .等 來奏曰 或本云 逃來告難 今年七月 新羅 . . . 引構唐人 傾覆百濟 君臣總 俘 . . . 福信 . . . 誘聚散卒 . . . 旣而百濟兵翻銳 唐不敢入 . . . 冬十月 . . . 福信 遣 . . . 等 . . . 乞師請救 幷乞王子余豐璋 . . . 將爲國主 (NII: 345-347)


2 齊明 六年秋九月 詔曰 乞師請救 聞之古昔 扶危繼絶 著自恒典 百濟國 窮來歸我 . . .志有難奪 可分命將軍 百道俱前 (NII: 347)

See Aston’s Nihongi (N2: 268-9).

3 齊明 七年春正月 丁酉朔丙寅 御船西征 始就于海路. . .居于. . .行宮. . .名曰長津 五月. . .遷居于朝倉…宮. . .秋七月…天皇崩于朝倉宮. . .皇太子奉徙天皇喪 還至. . .歸就于海. . .還泊難波 十一月. . .殯于飛鳥 (NII: 348 -351)


4 天智 卽位前紀 七年七月 . . . 皇太子素服稱制 . . . 遷居于長津宮 稍聽水表之軍政 (NII: 353)


5 天智 二年三月 . . .率二萬七千人 打新羅 . . . 秋八月 . . .率健兒萬餘 . . . 於白村江 . . .戌申 日本船師初至者 與大唐船師合戰 . . . 己酉 . . . 官軍敗續 . . . 百濟王豐璋 與數人乘船 逃去高麗 九月辛亥朔丁巳 百濟州柔城 始降於唐 (NII: 357- 358)


6 天智 七年春正月 丙戌朔戊 子 皇太子卽天皇位 冬十月大 唐大將軍英公 打滅高麗 (NII: 367-371)


7 文武王 十年十二月 ...倭國更 號日本 自言 近日所出以爲名 (S1: 128) Nihongi was still reading the Chinese characters Nippon as Yamato. 日本 此云耶麻謄 (NI: 81) 夜麻登(倭) (K: 162)


8 天智 十年十二月 癸亥朔乙 丑 天皇崩于近江宮 (NII: 381)


9 天武 二年二月 丁巳朔癸未. . . 卽帝位於飛鳥淨御原宮 (NII: 411)


10 天武 十年三月 天皇. . .以詔. . .令記定帝紀及上古諸事 (NII: 447)


11 古事記上卷 幷序

臣安萬侶言. . .飛鳥淸原大宮御大八州天皇御世. . .潭探上古. . . 明觀先代. . .於是天皇詔之 朕聞 諸家之所䝴帝紀及本辭 旣違正實 多加虛僞 當今之時不改其失 未經幾年其旨欲滅 斯乃 邦家之經緯 王化之鴻基焉 故惟 撰錄帝紀 討覈舊辭 削僞定實 欲流後葉 時有舍人 姓稗田 名阿禮 年是二十八 爲人聰明 度目誦口 拂耳勒心 卽 勅語阿禮 令誦習帝皇日繼及先代舊辭 然 運移世異 未行其事矣. . .以和銅四年九月十八日 詔臣安萬侶 撰錄稗田阿禮所誦之勅語舊辭 以獻上者. . .和銅五年正月二十八日 正五位上勳五等太朝臣安萬侶 (K:. 44-46)


12 In 1979, a 41-character epitaph was excavated from the grave of Yasumaro. Murayama and Miller (1979) note that “the Chinese language of the inscription contains a startling linguistic Koreanism, in its employment of the Chinese grammatical particle Ch. zhi ‘this’ [which is used as the direct object of the intransitive verb ‘died’] … It is a usuage that is remarkably well attested [though totally ungrammatical for Chinese] from early epigraphical specimens of Chinese as it was written in Korea from the sixth through the mid-eighth centuries. … It will be interesting to see how long the Japanese reading public is kept in the dark concerning this startling Koreanism in the Yasumaro epitaph.”


左京四條四坊從四位下勳五等太 朝臣安萬侶以癸亥年七月六日卒 之養老七年十二月五日乙巳


13 Gao-zong of the Tang, in poor health for some time, had been forced to retire to a summer palace in 657, and to hold court only on alternate days. According to Twitchett (1979: 255), “the empress’s position became virtually impregnable after the tenth month of 660, when Gao-zong apparently suffered a serious stroke. The empress [Wu] took easily to administering the empire during his recurrent periods of incapacity. By the end of 660 the empress Wu was ruler of the empire in fact if not in name.” In 670, she assumed the grandiose title of Heavenly Empress (Tian-Hou), bestowing the title Heavenly Emperor (Tian-Huang) on Gao-zong, for the first time in Chinese history. The Japanese were soon to copy this august title, “the Heavenly Emperor.”


舊唐書卷五 高宗下 乾封五年秋 八月…皇帝稱天皇 皇后稱天后


14天智 三年 以百濟王善光王等 居于難波 (NII: 361) 四年 勘校 百濟國官位階級 仍以佐平福臣 之功 授鬼室集斯 小錦下 其本 位達率 復以百濟百姓男女四百餘 人 居于近江 國神前郡...給神前 郡百濟人田 五年 以百濟男女 二千餘人 居于東國 凡不擇緇素 起癸亥年 至于三歲 並賜官食 六年[667] 遷都于近江 (NII: 365-7) 八年…又以佐平餘自信 佐平 鬼室集斯等 男女七百餘人 遷居 近江國蒲生郡 (NII: 373)


15 天智 三年 於對馬嶋 壹岐嶋 筑紫國等 置防與烽 又於 筑紫 築大堤貯水 名曰水城 (NII: 363)

天智 四年 遣達率答炑春初 築 城於長門國 遣達率億禮福留 達 率四比福夫於筑紫國 築大野及 椽二城 (NII: 365)


天智 六年 遷都于近江 ... 十一 月 百濟鎭將劉仁願 遣熊津都督 府 熊山縣令…等 送…等於筑紫 都督府…是月築倭國高安城…屋 嶋城 對馬國金田城 (NII: 367)


天武 八年 [679] 詔曰… 檢校親 王諸臣及百寮人之兵及馬 (NII: 439)十二年 詔諸國習陣法 (NII: 461) 十三年 詔曰 凡政要者軍 事也 是以文武官諸人務 習用兵 及乘馬…其有馬者爲騎士 無馬 者爲步卒 並當試練 (NII: 463)


持統 三年 [689] 詔左右京職及 諸國司 築習射所 ...詔諸國司曰 今冬戶籍可造宜 限九月 糺捉 浮浪 其兵士者 每於一國 四分 而點其一 令習武事 (NII: 499) 七年 [693] 詔 自今年始於親王 下至進位 觀所儲兵... 遣陣法 博士等 敎習諸國 (NII: 523)


16天智 七年 [668] 皇太子卽天 皇位 ...新羅遣…金東嚴等進調 ...賜新羅上臣大角干庾信船一隻...使… 賜新羅王 輸御調船一隻 付東嚴等 (NII: 371)


天武 四年 [675] 新羅遣王子忠 元 …爲大使…遣于新羅 ...詔曰 諸王以下初位以上 每人備兵

(NII: 417-421) 五年 王卿遣京 及畿內 校人別兵 …爲大使… 遣於新羅... 新羅遣…請政 (NII: 425-7) 十年 ...大使 ...遣新羅 國... 新羅遣…(NII: 447-451) 十 四年 新羅遣 … 請政 (NII: 473)

持統 元年 [687] 新羅遣王子 …等 奏請國政 (NII: 491)


17聖武 天平七年 [735] 新羅 使…入京...而新羅國輒改本號曰 王城國 因玆 返却其使 (SN2: 286) 九年 [737] 遣新羅使 奏新 羅國失常禮... 或言遣使問其由 或發兵加征伐...以告新羅无禮之 狀 (SN2: 310-312) 十五年 [743] 新羅使…大失常禮 (SN2: 418)


淳仁 天平寶字 三年 [759] 六月 令大 宰府造行軍式 以將伐新羅 也 九月 造船五百艘... 爲征新 羅也 (SN3: 320-8)


http://www. wontackhong.pe.kr.

2005 by Wontack Hong

All rights reserved


출처 : 동이민족 역사사료
글쓴이 : 稽古諮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