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홍원탁의 백제왜

[스크랩] 10. 백제왜, 고사기 일본서기가 기록한 일본열도 정복과정

monocrop 2007. 1. 4. 16:02
 10. 정복의 길 : 고사기-일본서기가 기록하는 일본열도 정복과정



고사기-일본서기에 의하면, 신대(神代)에 지상왕국의 시조로 등장하는 니니기는 하늘나라에서 곧장 (近畿의) 야마도(倭)지역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큐슈로 강림을 한다. 「큐슈로 내려온다」는 것은 야마도(倭)왕국이 토착왕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완곡하게 말하는 것이다. 고사기-일본서기가 서술하는 인대(人代) 건국시조의 영웅적 동정(東征) 무용담은, 야마도 왕국이 정복왕조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사기에 의하면, 니니기가 하늘에서 구지(久士布流多氣)봉 정상으로 내려온 직후, “이 곳은 한국을 마주 바라본다(向韓國)”라고 말한다. 에가미는, 건국신화 첫머리에서 한국(韓國)이 거론된다는 사실은 천손(天孫)들의 본향이 한국임을 뜻한다고 말한다. 고사기-일본서기는 倭라 쓰고 야마도라 읽는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Text In PDF .../편집자 주



홍원탁(洪元卓, 서울대 교수)



호무다 원정군 일행의 큐슈 상륙 : 천손강림(天孫降臨)


호무다-이쯔세 형제가 이끄는 원정군은, (370년)한반도의 동남 해안 지역을 출발해, (지금의)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와 이끼섬을 지나, 야요이 원주민들로 붐비는 북큐슈 평야지대가 아니라, 요즘의 시모노세키 시의 감몬(關門)해협을 지나, 미야자키 현의 휴가라는 큐슈의 한적한 동남 해안 지역에 상륙을 한다. 나는 호무다(오오진), 이하레(진무), 니니기를 동일체로 본다.


고사기의 천손강림 은유를 본다. 아마데라스(천조대신)와 다카기(고목신)의 [“근초고왕과 진정의”라고 읽을 수 있다] 명을 받고, 니니기[호무다]는 하늘나라를 떠난다. 첩첩 구름을 힘차게 헤치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창공을 떠다니는 교량 옆에 위치한 평평한 섬 위에 잠시 섰다가, 드디어 큐슈의 휴가의 다카치호(高千穗)산 구지 봉 정상으로 내려온다. 1


고사기-일본서기에 의하면, 신들의 시대(神代)에 지상왕국의 시조로 등장하는 니니기가 하늘나라에서 곧장 (近畿의) 야마도 지역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큐슈로 강림을 한다. “큐슈로 내려온다”는 것은 야마도 왕국이 토착 왕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완곡하게 말하는 것이다. 고사기에 의하면, 니니기가 하늘에서 구지 봉 정상으로 내려온 직후, “이 곳은 한국을 마주 바라본다(向韓國) ; 여기는 카사사 곶을 거쳐 곧장 도달한다. 이 곳은 아침 햇살이 곧바로 비치고, 저녁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땅이다. 이 곳은 참으로 상서로운 곳이다”라고 말한다. 2


에가미(1964: 55-6)는, 야마도 왕국 건국신화 첫머리에서 이처럼 눈에 띄게 한국 (韓國)이 거론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천손(天孫)들의 본향을 한국이라고 간주케 한다고 말한다. 1882년에 고사기를 영어로 번역한 첌벌린(1982판 : 137-8)은, 에도(江戶) 후기 국학파(國學派)의 거장인 모도오리(本居宣長, 1730-1801)가 고사기를 (가나로) 번역을 하면서 한국이라는 표현을 삭제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모도오리가 내용을 변조하려 한 이유는 오로지 전통적인 신대 설화에서 한국이 적대적이 아닌 형태로 거론된다는 사실을 엄폐 하고 싶다는 분명한 이유에서 이었다. 자신이 논평-해설을 한다는 원문을 그렇게 부정직하게 처리한 행위는 절대로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3


오늘날의 관광객들은, 미야자키 현의 휴가 시로부터 내륙의 큐우슈우 산맥 쪽으로 40km쯤 들어간 곳에, (다카치호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 남쪽에) 백제 마을(百濟里, 南鄕村) 이라고 부르는 촌락을 보게 된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이곳 주민 3천여 명의 대부분이, 21세기가 된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자신들을 백제사람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백제 사람들이 사용했던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서(西) 정창원(正倉院) 이라고 부르는 이곳 박물관의 건설비용을 지원했다.


이 박물관은 노송나무를 사용해 나라(奈良)의 정창원을 아주 정밀하게 복제를 한 건물이다. 일본 정부가 이 서쪽의 비황실 소유 정창원의 존재를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서정창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백제의 설화와 역사를 소개하고, 백제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고대 청동 방울을 보여준다. 24개의 청동 거울, 수많은 마구류, 1,500점이 넘는 경질토기 (스에키) 등이 그 주변에서 발굴되었다. 4



이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진무 편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20여 년에 걸친 호무다의 정복 과정을 요약한다.


고사기를 본다. 다카치호의 왕궁[임시 거처]에서는, [호무다]가 이쯔세와 의논을 한다 :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느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 좋을까? 나는 동쪽으로 가려 한다.” 그리하여 휴가를 출발해, 북큐슈를 경유, 오늘날 히로시마 현의 아키군(安藝郡)을 지나, 키비(吉備)의 다카시마(오늘날의 오카야마 시)에 닻을 내렸다. 5 그들은 선단을 정비하고, 군수품을 비축했다.



건국시조의 영웅적 동정(東征) 무용담

일본서기를 본다. 일행은, 마침내 수많은 선박에 올라, 동쪽으로 나아갔다. 나니하 곶을 지나, 오오사카 만을 거쳐, 강물을 곧장 거슬러 올라가, 가와치 지역의 [오늘날 동 오오사카 시의] 쿠사카(日下) 나루터에 도착했다. 여기서 일행은 배를 내려, 대오를 지어 내륙을 향해 행진을 해 갔다. 가면서 보니, 길이 아주 험하고 좁아, 한 줄로 서서 진격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되돌아 와서, 이코마 산을 넘어가는 길을 택해, 또 다시 야마도 내륙 지역으로 접근을 해갔다. 그러자, 토착 세력의 우두머리인 나가스네 라는 자가, 천손들이 [호무다와 이쯔세 일행이] 자신의 땅을 빼앗으러 온다고 생각하여, 자기 휘하의 군사들을 모조리 이끌고 싸우러 나섰고, 드디어 쿠사카 언덕에서 접전이 벌어졌다.


전투 중에 이쯔세가 팔꿈치에 화살을 맞았다. [호무다는] “일신의 자손인 우리가, 햇빛을 마주 보면서 싸움을 한다는 것은, 하늘의 도리를 거슬리는 것이다. 약세인척 잠시 후퇴를 한 다음, 천신과 지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일신의 위세를 등에 업고 햇빛을 따라 적을 무찔러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뱃길로 남쪽으로 내려와, 오늘날 와카야마 시(和歌山市)의 키강(紀川) 하구에 도착했다. 이쯔세는, 배에서 내린 후 첫 번째의 육지전투에서 토착 저항세력의 화살을 맞고, 끝내 숨을 거두었다. 6 이제부터는 호무다가 원정군의 유일한 지휘자가 되었다.


[백제의 서울 한성에서는 근초고왕과 진정이 원정군의 근황과 함께 이쯔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걱정을 했다.] 그들은 건어뢰 를 불러 “지금 현지 상황이 우려할만한 혼란 상태이고, 우리 아이들이 모두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나라를 평정할 때 쓰던 칼이 여기 있으니 이를 내려 보내라”고 명령했다. 7 일본서기는 계속한다. [호무다의] 군대는 나구사에 도착해 적을 무찔렀다. 다시 배에 올라 바다로 나갔을 때 강풍이 급작스럽게 불어왔다. [호무다는] “내 조상은 천신들이고, 내 어머니는 해신이다”라고 외쳤다.


<편집자 :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할 때, “천제지자 하백지손”이라 한 말과, 비류 온조가 주몽의 정통을 이었다고 한 사실에 주목할 것>



[호무다는 오오사카 만으로부터 빠져 나와, 키이 물길(紀伊水道)을 거쳐] 구마노의 아라자카 나루터에 도착했다. 호무다가 [근초고왕이 하사한] 칼을 전해 받은 것은 구마노의 다카쿠라 땅에 도착했을 때였다. 8 구마노 산의 모든 무뢰한들이 제물에 섬멸되었다. [호무다가] 내륙으로 진군을 하려 했으나, 산들이 너무나도 험해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를 몰라 계속 헤매게 되었다.


고사기의 은유를 본다. 다카기는 일행에게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말고, 자기가 지금 내려 보내는 큰 까마귀가 도착하면, 그 까마귀의 인도를 받아 진군을 하라고 지시를 했다. 마침내 큰 까마귀의 인도를 받아 일행은 요시노 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9



구마노에서 요시노강을 향해 꼬불꼬불하고 험한 산길을 따라가는 요즘의 관광객은 산속 마을 교차로에서 까마귀를 그려 넣은 큰 깃발을 볼 수 있다. 10 주위를 둘러 보면, 첩첩 산중. 예전에는, 아주 숙달된 안내자 없이 왔다가는 틀림없이 길을 잃고 헤맸을 것이다. 요시노강은 태평양으로 흘러 드는데, 일본의 세 번째로 긴 강이다.


고사기는, 내가 여기서 “진정” 이라고 쓰는 대목에, “다카기(고목신)”라 쓰고 있다. 근초고왕은 이미 375년 11월에 서거했다. 아마 진정도 그 후 얼마 안 있다 죽었던 것 같다. 11 햇빛을 등에 지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남동쪽으로 우회한 다음, 강을 따르고 산을 넘어, 처음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한 것이다.


고사기에 의하면, 호무다 일행이 오늘날의 (와카야마 현의 태평양 쪽인) 히가시무로 군의 신구우 시에 해당하는 구마노까지 돌아온 것으로 되어있는데, 지도를 놓고 보면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와카야마 지역의 키이(紀) 강을 따라 올라가면 요시노강에 훨씬 더 쉽게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강한 적이 그 지름길을 가로 막고 있었던 것 같다.


일본서기는 계속한다. [호무다의] 군대는 (오늘날의 나라현 사쿠라이市) 오사카에 도착해 우다 강에 이르렀다. (야마도 바닥의 토착 세력 우두머리인) 나가스네를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전투를 벌였으나, 쉽사리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중, 앞서 [백제에서] 건너온 사람(요속일)의 도움을 받아 나가스네를 죽여버릴 수 있었다. 12

고사기-일본서기가 서술하는 건국시조의 영웅적 동정(東征) 무용담은, 야마도 왕국이 정복왕조라는 것을 의미한다.


[388년 어느 날] 호무다는 다음과 같이 말 했다 : “우리의 동방 원정이 계속된 6년 동안에 사악한 무리들은 모두 소탕되었다. 변경 지방은 아직도 평정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중앙의 [야마도 주변] 지역은 이제 전투가 끝이 났다. 나는 이곳에 장대한 도읍을 건설하려 한다. 이곳 주민들은 미개한 면도 많지만, 본성이 소박하고, 내려오는 습속에 따라 행동을 하기 때문에, 큰 인물이 법과 제도를 확립하면, 정의가 반드시 따를 것이다.


나는 궁궐을 짓고 왕위에 올라,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주겠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이 왕국을 내게 내려 주신 하늘의 덕에 보답할 것이며, 왕실을 길이 하고, 온 누리에 바른 마음을 가꾸어 나갈 것이다. 저 우네비 산의 동남쪽에 위치한 가시하라 땅은 이 나라의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도읍을 정하려 한다.”13


호무다는 2년 후, [야마도의] 가시하라 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 해가 야마도 조정의 치세 원년으로 간주된다. 일본서기는 호무다의 즉위 년도를 “경인(庚寅)년” 이라고 기록을 하고, 그 해가 270년이라 했다. 나는 호무다의 실제 즉위 년도가, 270년으로부터 정확히 120년 후인, 390년의 “경인년”이라고 추정을 하는 것이다.



백제의 축하 사절단 : 백제-야마도의 교친(交親)은 하늘의 뜻(是天所致, 是天所啓)


호무다가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수립하자, 백제는 사절단을 파견하여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일본서기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기록을 했다 : “야마도 조정의 드넓은 은덕이 이제 멀리 떨어져 있는 백제에까지 도달하여, 우리 임금님[진사왕]께서는 기뻐서 어찌 할 바를 모르셨습니다. 앞으로 천추 만세가 지난들, 어찌 왕래가 없는 해가 있겠습니까?”


이 말을 전해 듣고, [호무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대답을 한 것으로 되어있다 : “백제와의 밀접한 교분관계는, 인간의 뜻이라기보다는, 바로 하늘이 뜻하는 바입니다(朕所交親百濟國者 是天所致 非由人故). 우리는 신의 뜻에 따라, 처음으로 [남동쪽] 통로를 열었고, [일본 땅으로 오는 길에 마한지역을 평정하여] 이를 백제에 복속 시키는 사업을 거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다시금 우의의 기반을 한층 돈독히 하여, 이 우정의 결속을 영원토록 지속시킬 것입니다.”14


일본서기를 본다. 야마토 조정에 도착한 백제 사절단은, [호무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 같다 : “우리나라에는 곡나 땅의 철산으로부터 시작하는 강이 있습니다. 강 하구로부터 철산 까지는 7일도 더 걸리는 거리입니다. 우리가 이 산의 철을 확보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계속 야마도 조정에 철을 공급해 줄 수 있습니다. [아신] 왕께서는 [전지 왕자에게], ‘야마도 왕국이 바다건너 동쪽 땅에 창건되어 우리와 통하게 된 것은, 바로 하늘이 백제를 도우려 열어준 것이다(是天所啓). 이로서 우리 국가의 기반은 영원토록 공고해 졌다. 왕자는 앞으로 철을 비롯해 여러 가지 요긴한 물자들을 야마도 조정에 공급해 주면서 친교를 돈독히 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15


신공왕후 52년 9월 조는, 근초고왕(346-375년)이 그의 손자인 침류 왕자(384-385년)에게 이런 충고의 말을 해 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는 근구수왕(375-384년)의 손자인 아신왕(392-405년)이 자기 아들 전지(405-420년)에게 이런 충고를 해 준 것으로 이해한다.



가무 야마도 이하레 : 신성한 야마도의 왕

고사기에 의하면 야마도 왕국 시조의 공식 명칭이 가무(神) 야마도(倭) 이하레(伊波禮)이었다. 레드야드(1975)는 진무의 칭호와 호무다의 도읍지 이름에 나타나는 “이하레”라는 명칭에 주목을 환기 시킨다. 16 일본서기 신공왕후 섭정 3년 조는, 호무다(譽田)가 그 해에 태자로 되었기에, 도읍을 이하레(磐余)에 정했다고 말한다. 백제의 최초 수도는 위례성이다. 17


이하레의 세 번째 글자와 위례의 두 번째 글자가 동일 한 것은 둘 사이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레드야드는 이하레의 한국식 표기이발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북사(北史), 수서, 통전은, 백제 사람들이 수도를 거발(居拔)이라 한다고 기록을 했다. 그런데 “있을 거”라는 한자의 훈독(訓讀)은 “이”이기 때문에, 백제 사람들은 “거발”이 아니라 “이발”로 읽었을 것이다.


우리는 호무다의 도읍지 명칭인 이하레가 백제의 최초 도읍지인 위례를 의미하고, 이는 또한 북사의 이발에 상응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환언하면, 호무다가 야마도 왕국을 수립한 다음, 백제 최초의 도읍지 이름(위례, 이발, 이파르)을 본 따 자신의 최초 도읍지 이름을 이하레(이파레)라고 불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주몽이 부여로부터 도망을 해 왔을 당시에는 궁궐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비류수 언저리(渾江邊 桓仁)에 적당히 집을 짓고 나라를 세웠다. 그 후, 왕위를 계승한 유리명왕은 “국내 위나암”을 시찰한 다음, 서기 4년에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尉那巖)성을 쌓았다고 한다. 주서(周書)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다 한다. 도수희(1972)는 위나, 어라, 위례가 모두 동일하게 발음이 되며, 이기동(1990)은 주서의 “어라”와 마찬가지로 “위례”도 왕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즉, 위례성, 위나(암)성, 이발성(거발성), 등은 모두 왕성을 의한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건국시조라는 진무의 명칭에 “야마도 이하레”라고 “이하레”를 삽입했다. “야마도의 왕”이라는 뜻 일 것이다. 신공왕후 섭정 3년 조는, 호무다가 그 해에 태자로 되었기에, 도읍을 “이하레”에 정했다고 말했다. 여기서는“왕성”을 의미 할 것이다. 결국 야마도 왕국 시조의 공식 명칭인 가무(神) 야마도(倭) 이하레(伊波禮)는 모두 수식어일 뿐이고, 그 속에는 사람의 실명이 들어있지 않는 것이다. 즉, 호무다 라는 실명을 넣어야만, 「신성한 야마도의 왕 호무다」라는, 새 왕국을 창건한 시조의 완전(complete)한 명칭(full name)이 되는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7 (2005. 5. 21.)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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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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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백제의 근초고 왕(346-75)은 처남(혹은 왕후의 친척)인 진정을 347년에 조정좌평으로 삼았다. 근초고왕과 그 뒤를 이은 왕들은 계속 진씨 집안의 여인을 왕비로 삼았다. 마치 고사기-일본서기에서 아마데라스와 다카기가 사돈관계인 것처럼, 근초고왕과 진정도 사돈관계인 것이다. 고사기-일본서기 건국신화에서는 일본열도 지상왕국의 시조인 니니기가 아마데라스의 친손자이고, 다카기의 외손자인 것이다.

高皇産靈尊 選當遣於葦原中國者...使降之 皇孫...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NI: 141)

天神之子 則當到筑紫曰日向高千穗槵觸之峯 (NI: 149)

故…瓊瓊杵…降到於日向槵日高千穗之峯 (NI: 153-155)

皇孫…瓊瓊杵…而排披天八重雲 以奉降之...降到之處者 呼曰日向襲之高千穗添山峯矣 (NI: 161)

 故爾詔…日子…邇邇藝…而離天之石位 押分天之八重多那 雲而…於天浮橋…天降坐于竺紫日向之高千穗之久士布流多氣

天降坐于竺紫日向之高千穗之久士布流多氣 自久以下六字亦以音 (K: 128)

 於是 詔之 此地者向韓國 眞來通笠沙之御前而 朝日之直刺國 夕日之日照國也 故此地甚吉地 (K: 128)


2.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한(韓)을 “가라”라고 읽기 때문에 한국(韓國)은 “가라 구니”로 부른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와 삼국사기 김유신 조를 보면, 가야(加耶)의 시조 수로는 서기 42년에, 하늘이 그에게 명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기에, 구지(龜旨) 봉우리에 내려와 가락(駕洛)의 아홉 개 촌을 내려 보고, 그 곳에 나라를 세웠다 한다. 일본열도의 야요이 시대 600년 기간(B.C. 300년-A.D. 300년)이란, 논농사를 짓는 삼한(三韓) 사람들의 이주 정착기간이다. 이주민들이 삼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대부분은 변한, 즉 가락의 9촌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한(韓)을 “가라”라 부르게 된 것 같다. 이는 바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대 건국신화 기록에, 가야의 건국신화 일부가 그 모습을 약간 바꾸어 나타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오늘 날의 큐슈 동남부 지도를 놓고 보면, 국견산(國見山) 꼭대기가 해발 1739m, 조모산(祖母山) 꼭대기가 해발 1756m, 구쥬 산꼭대기가 해발 1791m이고, 다카치호 라는 명칭의 장소는 국견산과 조모산 사이의 계곡을 흐르는 하천의 옆자리를 지칭하고 있다.


3. 모도오리 노리나가는 소위 국학파의 지도자이었다. 18세기 일본의 국학파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모든 기록을 글자 한자 빼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무조건 적으로 수용 하고, 또 그 의미들을 가장 국수주의적으로 해석을 한다는 학파이었다. 모도오리는 “글자 한자 빼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라는 원칙을 스스로 위반을 한 셈이다.


4. 휴가 국철 역전의 버스 터미날에서 출발 해 1시간 10분쯤 가면 남향촌 버스 정거장에 도착한다. 백제촌 주민들이 말하는 전설을 들어 보면, 일본 사회 내에서의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고사기-일본서기의 내용과는 분명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2004년 2월 23일, 서울 교육문화회관에서 한일지방자치단체간 교류를 주제로 서초구와 미야자키현이 공동으로 국제세미나를 주최했을 때, 무수한 난관을 헤치고 백제촌을 건립한 다바루 마사토(田原正人) 전 촌장(村長)에게 나는 (촌장 발표의 지정 토론자로서) 난고손(南鄕村)이 바로 고사기-일본서기 천손강림(天孫降臨) 설화의 핵심지(核心地)라는 사실을 동시에 홍보하고, 그 주변일대에서 발굴된 일체의 유물을 모두 정리해서 전시하는 동시에 고고학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배포하면, 전세계 전문가들의 관심을 환기할 수 있을 것이고, 방문객의 성격도 다양하게 확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5. 神日本磐余彦天皇...謂諸兄及子等曰 昔我天神高皇産靈尊...擧此 豐葦原瑞穗國而授天祖…瓊瓊杵...是時 運屬鴻荒 時鍾草昧...何不就而都之乎 (NI: 189)

神倭伊波禮毘古命 與其…兄五瀨命 二柱坐高千穗宮而議云 坐何地者 平聞看天下之政 猶思東行 卽自日向發 幸行筑紫…亦從其國上幸而 於阿岐國… 於吉備之高嶋宮八年坐 (K: 148)

神武 卽位前紀...至安藝國...徙入吉備國 起行館以居之... 積三年間 脩舟檝蓄兵食 (NI: 191)

진무가 동정(東征)의 장도에 올라 출항을 한 바로 그 장소라는 휴가의 미미쓰 해안의 (耳川)강어귀에는 일본해군의 발상지(日本海軍發祥地)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구 일본제국 해군제독 한 명이 자신의 사비로 건립을 했다고 안내 간판이 소개를 하고 있다.


6. 神武 卽位前紀... 皇師遂東...方到難波之碕 會有奔潮太急 因以名爲浪速國 亦曰浪花 今謂難波訛也...遡流而上 徑至河內國 (NI: 191) 皇師勒兵 步趣龍田 而其路狹嶮 人不得幷行 乃還更欲東踰膽駒山 而入中洲 時長髓彦聞之曰 夫天神子等所以來者 必將奪我國 則盡起屬兵...與之會戰 有流矢中五瀨命肱脛 皇師不能進戰...今我是日神子孫 而向日征虜 此逆天道也 不若 退還示弱 禮祭神祇 背負日神之威 隨影壓躡...時五瀨命矢瘡痛甚 乃...進到于紀國...而五瀨命薨 (NI: 193-195)


故從其國上行之時 經浪速之渡而 泊…津 此時登美…毘古 興軍待向以戰...於是…五瀨命於御手負登美毘古之痛矢串 故爾詔 吾者爲日神之御子 向日而戰不良 故負賤奴之痛手 自今者行廻而背負日以擊期而…到紀國男之水門而詔 負賤奴之手乎死 男建而崩 (K: 150-2)


7. 故神倭伊波禮毘古命 從其地 廻行 到熊野村之時...熊野之高倉下 賷一橫刀…天照大神 高木神...召建御雷神 而詔…我御子等 不平坐良志 此二字以音 其葦原中國者 專汝所言向之國 故汝建御雷神可降 爾答曰僕雖不降 專平其國之橫刀 可降是刀 此刀者 坐石上神宮也 降此刀狀者 穿高倉下之倉頂 (K: 150-2)

番仁岐命 初降于高千嶺 神倭天皇 經歷于秋津嶋…天劒獲於高倉…大烏導於吉野 列儛攘賊…敬神祇 所以稱賢后 (K: 42)


8. 軍至名草邑 則誅…遂越狹野…而到熊野神邑…海中卒遇暴風…時…歎曰…吾祖則天神 母則海神…至熊野荒坂津 因誅…者...天照大神…曰 夫葦原中國猶聞喧擾之響焉…而下予平國之劒…登謂高倉曰…獻之天孫…旣 而皇師 欲趣中洲 而山中嶮絶 無復可行之路…天照大神訓于天皇曰 朕今遣頭八咫烏 宜以爲鄕導者 果有頭八咫烏 自空翔降 天皇曰 此烏之來…乃尋鳥所向…遂達于莵田下縣…至吉野 (NI: 195-9)


9. 於是亦 高木大神之命以覺白之 天神御子 自此於奧方莫使入行 荒神甚多 今自天遣八咫烏 故其八咫烏引道 從其立後應幸行 故隨其敎覺 從其八咫烏之後幸行者 到吉野河 (K: 150-2)


10. 故爾於宇陀 有兄…弟…二人 故先遣八咫烏 (K: 154)

神武 元年 頭八咫烏 亦入賞禮 其苗裔卽葛野主殿縣主部是也 (NI: 215)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팔지오가 사람이 아니라 까마귀라고 해 놓고서는, 그가 길을 안내한 공적으로 후에 포상을 받았으며, 그 자손들이 현주 노릇을 했다고 기록을 했다.


11. 神武 卽位前紀…時勅道臣命 今以高皇産靈尊 朕親作顯齋 用汝爲齋主 (NI: 203)

일행이 야마도 땅에 도착한 직후, 다카기(고목신)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12. 神武 卽位前紀...皇師遂擊長髓彦 連戰不能取勝...時長髓彦 乃遣行人...曰 嘗有天神之子 乘天磐船 自天降之 號曰…饒速日 是娶吾妹...故吾以饒速日命爲君而奉焉 夫天神之子 豈有兩種乎...天皇曰天神子亦多耳...然而凶器已構 其勢不得中休...饒速日命 本知天神慇懃 唯天孫是與 且見夫長髓彦稟性愎恨 不可敎以天人之際 乃殺之帥其衆而歸順焉 天皇素聞饒速日命 是自天降者 而今果立忠效則褒而寵之 此物部氏之遠祖也 (NI: 209-211)


13. 神武 卽位前紀 己未年... 我東征 於玆六年矣 賴以皇天之威凶徒就戮 雖邊土未淸 餘妖尙梗 而中洲之地 無復風塵 誠宜恢廓皇都 規摹大壯而今運屬屯蒙 民心朴素 巢棲穴住 習俗惟常 夫大人立制 義必隨時 苟有利民...觀夫…畝傍山東南橿原地者 蓋國之墺區乎 可治之...辛酉年…天皇卽帝位於橿原宮 (NI: 213)

가시하라(橿原)라는 곳은, 오늘날의 나라현 가시하라市의 동쪽 지역에 있다. 여기가 옛날 이하레 지역에 속한다. 오늘날 나라현의 지도를 보면, 나라市 남쪽에 덴리市가 있고, 그 남쪽에는 사쿠라이(櫻井)시가 있으며, 사쿠라이市 남부의 서쪽에는 (옛 야마도 땅의 중심부인) 다카이치군(高市郡)의 아스카 무라(明日香村)와 가시하라市가 있고, 사쿠라이市의 바로 남쪽에는 (역시 야마도에 속하는) 요시노(吉野)군이 있다.


14. 神功 攝政五十年 久氐等奏曰 天朝鴻澤 遠及弊邑 吾王歡喜踊躍 不任于心 故因還使 以致至誠 雖逮萬世 何年非朝 (NI: 357)

攝政五十一年 百濟王亦遣久氐朝貢 於是 皇太后語太子...所交親百濟國者 是天所致 非由人故 玩好珍物...常來貢獻…如朕存時 敦加恩惠…朕從神所驗 始開道路 平定海西 以賜百濟 今復厚結好 永寵賞之 (NI: 357-9) See Aston (N1: 250).


15. 神功 攝政五十二年 久氐等... 曰 臣國以西有水源 出自谷那鐵山 其邈七日行之…便取是山鐵 以永奉聖朝 乃謂孫枕流王曰 今我所通 海東貴國 是天所啓 是以垂天恩 割海西而賜我 由是國 基永固 汝當善脩和好 聚斂土物 奉貢不絶 (NI: 359) See Aston (N1: 251).


16. 亦名神倭伊波禮毘古 (K: 146)

神功 攝政三年 立譽田別皇子爲 皇太子因以都於磐余 (NI: 349)

이하레 라는 명칭의 지역은 오늘날 나라현 사쿠라이市의 중심부로부터 아스카를 지나 가시하라市의 동부에 걸쳐있는 (우네비 산 동남쪽의 가시하라 궁을 포함하는) 지역을 말한다.


17. 三國史記 卷第二十三 百濟本記 第一 百濟始祖 ...溫祚都河南慰禮城 (S2: 16)

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第六 百濟 按古典記 東眀王 第三子 溫祚...自卒本扶餘至慰禮城立都 稱王 歷三百八十九年至十三世 近肖古王…都漢城 (S2: 233)

백제본기에 의하면 시조 온조왕은 한수 북쪽 위례(慰禮)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기원전 5년에 한수 남쪽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고구려 국내의 “위나암”성과 백제의 하북 혹은 하남의 “위례”성이라는 것은, 왕이 거처하는 도읍지 즉 “왕성”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처럼 사용이 된 것 같다.


18. 北史卷九十四 列傳第八十二 百濟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차돈(異次頓)을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쓰지만, 읽기는 이차돈 이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사례이다.




Tracing the Route of Conquest the conquest dynasty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homuda and his followers landing on Kyūshū

Leaving the southeastern shore of the Korean peninsula, crossing the Korea Strait, and passing the islands of Tsu-shima and Iki, the expeditionary force led by Homuda and Ituse lands on Kyūshū; not on the northern plain area crowded by the Yayoi aborigine but, passing the Kammon Straight (at the modern-day Shimonoseki City), on Hyūga (in Miyazaki Prefecture), the secluded southeastern shore of the Kyūshū island.


Now we read the metaphor of Kojiki as follows: [Amaterasu and Takagi or King Keun Chogo and Minister Jin Zeong commanded Homuda] “to leave the Heavenly Rock-Seat. Pushing through the myriad layers of the heaven’s trailing clouds, pushing his way with an awesome pushing, [Homuda] stood on a flat floating island by the Heavenly Floating Bridge, and descended from the heavens to the peak of Kuji-furu of Mount Taka-chiho [in So] of Hiuga in Tsukusi.”1


According to Kojiki and Nihongi, Ninigi, the founder of Earthly Kingdom in the Age of God, does not descend from heaven on the Yamato region, but on the Kyūsyū island. “Descending on Kyūsyū” is a euphemism for a non-native polity. According to Kojiki, immediately after Ninigi descended from heaven to the peak of Kuji-furu, he made a statement: “This place faces towards Kara Kuni [Korea]; it is a place to which one comes directly through the Cape of Kasasa, a land where the morning sun shines directly, a land where the rays of the evening sun are brilliant. This is the most excellent place.”2 


According to Egami (1964: 55-6), this conspicuous mention of Korea at the very starting point of the foundation myth leads us “to regard Korea as the original home of the gods of heaven.” Chamberlain (1882, 1982: 137-8) notes the Motowori’s attempt to delete the word Korea in his kana rendering of Kojiku: “His evident reason for wishing to alter the reading is simply and solely to conceal the fact that Korea is mentioned in a not unfriendly manner, in the traditional account of the divine age. … [There] is no excuse for so dishonest a treatment of the text he undertakes to commentate.” 3


A modern-day tourist will find the “Paekche Village” (also called Kudara-no-Sato or Nan-go Village) about forty kilometers inland from Hyūga towards the Kyūshū Mountains, to the south of a place named Taka-chiho, whose 3,000 inhabitants still believe they are descendants of the Paekche people. Numerous artifacts used by the Paekche conquerors were excavated from the area, and the Japanese government financed the construction of a museum by the name of West Shōsoin. This Nish-no-Shōsoin is an exact duplicate of the Shōsoin (Imperial Treasure House) in Nara, using Kiso cypress. Few people know of the existence of this Non-Imperial Treasure House in the West because the Japanese Government is reluctant to advertise its presence to the world. Inside the museum, tourists first find introductions to the history and legends of Paekche, along with an ancient bronze bell said to have been brought there from Paekche. Twenty-four bronze mirrors, numerous horse trappings, and more than 1,500 pieces of Sue potteries (Sueki) were excavated from the region.4


Eastern Conquest Commencing from the Hyūga Base

Kojiki reads: “[Homuda], dwelling with his elder brother [Ituse] in the palace of Taka-chiho, consulted him and said: ‘Where (would it be best) to dwell in order to carry on the government of the kingdom peacefully? I am thinking of going eastward.’ Thus, departing from Hiuga, he journeyed to Tsukusi [Kita Kyūshū]. From there he sailed to Takeri in the land of Aki [the modern-day Aki District, Hiroshima Prefecture]. From that land he sailed and journeyed upward to Taka-shima in Kibi [the modern-day Oka-yama City].”5 He set in order the helms of his ships, and prepared a store of provisions.


Nihongi reads: “The imperial forces at length proceeded eastwards. …Proceeding upwards [from the Gulf of Ōsaka] against the stream, they went straight on, and arrived at the port … in the township of Kusaka [a wharf nearby the modern-day Kusaka-cho, East Ōsaka City], in the province of Kawachi. The imperial forces in martial array marched on to Tatsuta. The road was narrow and precipitous, and the men were unable to march abreast, so they returned and again endeavored to go eastward, crossing over Mount Ikoma [a small mountain range on the limits of Kawachi and Yamato]. In this way they entered the inner country. Now when Naga-sune heard this, he said: --‘The object of the children of the Heavenly Deity in coming hither is assuredly to rob me of my country.’ So he straightway levied all the forces under his dominion, and intercepted them at the Hill of Kusaka. A battle was engaged, and Itsuse was hit by a random arrow on the elbow. [Homuda said]: --‘I am the descendant of the Sun-Goddess, and if I proceed against the Sun to attack the enemy, I shall act contrary to the way of Heaven. Better to retreat and make a show of weakness. Then sacrificing to the God of Heaven and Earth, and bringing on our backs the might of the Sun-Goddess, let us follow her rays and trample them down. … From this place they journeyed on and arrived at the river-mouth of Wo in the land of Kii [at the mouth of the Kii River of Waka-yama City], where Itu-se died in the army.”6


According to Nihongi, [At Han-seong, King Keun Chogo, in the presence of Minister Jin-zeong] “summoned and commanded Take-mika, saying: --‘I still hear a sound of disturbance from the Central Land of Reed Plains. Our offspring seem to be in difficulties. Here is the sword with which I pacified the land. Send it down!”7 Apparently Homuda and his army could not follow up the Kii River towards the Yamato hinterland, which constitutes the logical short-cut, mostly like due to the presence of an adversary blocking the route.


Nihongi continues: “The army arrived at the village of Nagusa, where they put to death .... Finally they crossed the moor of Sano, and arrived at the village of Kami … Here they embarked in the rock-boat of Heaven, and proceeded onwards by slow degrees. In the midst of the sea, they suddenly met with a violent wind. [Homuda] cried: --‘My ancestors were Heavenly Deities, and my mother was a Goddess of the Sea.’ Leading his army forward, [Homuda] arrived at Port Arazaka in Kumano [the modern-day Shingū City], where he put to death the …. A person called Taka-kurazi of Kumano came bringing the sword [sent by King Keun Chogo]. All of the unruly deities in the Kumano Mountains were of themselves cut down. [Homuda] then endeavored to advance into the interior, but among the mountains it was so precipitous that there was no road by which they could travel, and they wandered about not knowing whither to direct their march. [At Han-seong, King Keun Chogo] said:--‘I will now send thee the Yata-garasu. Make it thy guide through the land.’ Guided by the direction taken by Yata-garasu, [Homuda] arrived at the lower reaches of the Yoshino River [in Yoshino District, Nara Prefecture]. From here they pierced their way across and came to the district of Lower Uda [the modern-day Uda District, Nara Prefecutre].” 8 King Keun Chogo died in 375.


The metaphor of Kojiki reads: “Takaki commanded, giving these instructions … do not proceed further … we will now dispatch a giant crow … Follow after it and continue your journey… Following the giant crow, they arrived at the lower reaches of Yoshino River.”9


A modern-day tourist traveling the winding narrow roads from Kumano to Yoshino River will come across a large flag with the crow symbol at a mountain village junction.10 Over the mountain, one sees another mountain. In the old days, one would surely have gotten lost without an expert guide. The Yoshino River rises in the Kama-ga-mori Mountain, passes through Awa and enters the Pacific Ocean. It is considered the third largest river in Japan.


At Han-seong, Jin Jeong also seems to have passed away.11 Nihongi continues: “The Imperial army … arrived at Osaka [in the modern-day Sakurai City, Nara Prefecture], and then River Uda. … The [Homuda’s] army at length attacked Naga-sune and fought with him repeatedly. With the help of the person who formerly came down [from Paekche] to dwell here, [Homuda] could at last put Naga-sune to death.”12


The epic saga of Eastern Expedition portrayed in Kojiki and Nihongi implies that the Yamato kingdom was a conquest dynasty.

[On a day in 388, Homuda proclaimed]:--“During the six years that our expedition against the East has lasted, owing to my reliance on the Majesty of Imperial Heaven, the wicked bands have met death. It is true that the frontier lands are still unpurified, and that a remnant of evil is still refractory. But in the region of the Central Land there is no more wind and dust. Truly we should make a vast and spacious capital, and plan it great and strong. At present things are in a crude and obscure condition, and the people’s minds are unsophisticated. They roost in nests or dwell in caves. Their manners are simply what is customary. Now if a great man were to establish laws, justice could not fail to flourish. When I observe the Kashiha-bara plain, which lies southwest of Mount Unebi [a hill between the villages of Shiraka City and Masuge in Yamato], it seems the Center of the Land. I must set it in order. Two years later, Year [390], Spring, 1st month, 1st day, [Homuda] assumed the Imperial Dignity in the Palace of Kashiha-bara.”13



Paekche congratulates the Birth of New Kingdom


Nihongi reads: “Ku-zeo and the rest arrived from Paekche, and said to [Homuda]: ‘The vast blessings of the Celestial Court reached afar to our mean village, and our king [Chin-sa, r.385-392, the second son of the former king Keun Kusu] capered with delight. Out of the fullness of his heart he has sent a mission in token of his great sincerity. Though it comes to the ten thousandth year, in what year shall we fail to attend thy Court?’ Hereupon [Homuda] addressed the [ministers], saying: --‘We owe it to Heaven and not to man that we have a friendly country like Paekche. … We, in accordance with the divine testimony, having for the first time laid open a road, subdued the lands west of the sea [Ma-han] and granted them to Paekche, would now again draw closer the bonds of friendship and make lasting our loving bounty’.”14


Nihongi continues: “Ku-zeo and the others again came along and … addressed [Homuda], saying: --‘West of thy servants’ country there is a river-source which issues from Mount Cheol-san in Kong-na. It is distant seven days’ journey. … and so having gotten the iron of this mountain, wait upon the sage Court for all ages.’ [King A-shin, r.392-405, the grandson of King Keun Kusu] addressed his [son], Prince [Cheon-ji, r.405-420], saying: --‘The honorable country east of the sea with which we are now in communication has been opened to us by Heaven. Therefore does it bestow on us Celestial bounty, and dividing off the land west of the sea [Ma-han], has granted it to us. Consequently the foundation of our land is confirmed for ever. Thou [Cheon-ji] shouldst cultivate well its friendship, and having collected our national products, wait on it with tribute without ceasing.”15


Kamu Yamato Ipare: divine yamato king

Ledyard (1975) calls our attention to the place name “Ihare” found in the title of Jinmu (Kami Yamato Ihare) and in the name of the capital for Homuda.16 According to Nihongi, Homuda was appointed Prince Imperial in the third year of Jingū’s regency, and accordingly, the capital was made at Iha-re. In Kojiki, Iha-re is written Ipa-re (Kamu Yamato Ipare). The first capital of Paekche was the Wi-rye Castle.17 The third character with which I-pa-re is written is also the second character of Wi-rye, suggesting a connection between Ipa-re and Wi-rye.


Ledyard (1975) notes that the Korean variant of Ihare is I-par, and is written as Keo-bal (居拔). According to the Bei-shi, Sui-shu and Tong Dian, the Keo-bal Castle was the name for the capital of Paekche. Since the Korean kun (訓) reading of Keo is I, Keo-bal yields the reading of I-bal or I-par. 18


We may now hypothesize that Iha-re, the name of the capital for Homuda, implies Wi-rye, the name of the first capital of Paekche, that may correspond to I-bal in the Bei-shi. That is, we may contend that Homuda established the Yamato kingdom and called its first capital Iha-re (Ipa-re) after the name of the first capital of Paekche, Wi-rye (I-bal or I-par).


Samguk-sagi records that the second Koguryeo King Yuri established his capital at Kug-nae in AD 4, and constructed the Wi-na(-am) Castle.19 According to Zhou-shu, the king was also called Eo-ra(-ha) in Paekche.20 Do (1972) regards that Wi-na, Eo-ra and Wi-rye represent the same reading, and Yi (1990) further notes that Wi-rye, just like Eo-ra in the Zhou-shu, implies king. That is, the Wi-rye Castle, Wi-na(-am) Castle, and Keo-bal Castle all represent the King’s Castle.

The official title of the founder (Jinmu) of the Yamato kingdom, “Kami Yamato Ihare,” implies “Divine Yamato King” that lacks the personal name. Only by adding Homuda, we get the full title for the founder of the Yamato Kingdom.


BIBLIOGRAPHY


[각주]

1高皇産靈尊 選當遣於葦原中國者...使降之 皇孫...天降於日向襲之高千穗峯矣 (NI: 141)

天神之子 則當到筑紫曰日向高千穗槵觸之峯 (NI: 149)

故…瓊瓊杵…降到於日向槵日高千穗之峯 (NI: 153-155)

皇孫…瓊瓊杵…而排披天八重雲 以奉降之...降到之處者 呼曰日向襲之高千穗添山峯矣 (NI: 161)

故爾詔…日子…邇邇藝…而離天之石位 押分天之八重多那 雲而…於天浮橋…天降坐于竺紫日向之高千穗之久士布流多氣 自久以下六字亦以音 (K: 128)

King Keun Chogo of Paekche (346-75) had appointed his brother-in-law, Jin Zeong, as the Chief Minister in 347. Keun Chogo and his successors kept taking their queens from the Jin clan. Keun Chogo and Jin Jeong were in-laws, as were Amaterasu and Takagi in the Kojiki-Nihongi story. In the foundation myth, Ninigi, the founder of the Earthly Kingdom on the Japanese islands, was the grandchild of Amaterasu, and Takagi was the maternal grandfather of Ninigi.


2 於是 詔之 此地者向韓國 眞來通笠沙之御前而 朝日之直刺國 夕日之日照國也 故此地甚吉地 (K: 128)


3 Motowori Norinaga (1730-1801) was the leader of so-called Koku-gaku (National Learning) tradition that supposedly takes the words and phrases in Kojiki and Nihongi literally, and then interprets their meaning in the most nationalistic way.


4 The journey to Paekche Village takes 1 hour and 10 minutes by the bus for Naka-yama from the Hyūga Bus Center in front of the Hyūga city JR station. Tourists get off at Kudara-no-Yakatamae bus stop at the Nango village 南鄕村.

The villagers’ own version of the legend, maintaining a clear distance from the Kojiki-Nihongi myth, seems to have been adapted for their own survival in the Japanese society.


5 神日本磐余彦天皇...謂諸兄及子等曰 昔我天神高皇産靈尊...擧此 豐葦原瑞穗國而授天祖…瓊瓊杵...是時 運屬鴻荒 時鍾草昧...何不就而都之乎 (NI: 189)


神倭伊波禮毘古命 與其…兄五瀨命 二柱坐高千穗宮而議云 坐何地者 平聞看天下之政 猶思東行 卽自日向發 幸行筑紫…亦從其國上幸而 於阿岐國… 於吉備之高嶋宮八年坐 (K: 148)

神武 卽位前紀...至安藝國...徙入吉備國 起行館以居之... 積三年間 脩舟檝蓄兵食 (NI: 191)

At the presumed point of Homuda’s departure at the Hyūga sea coast 美美津, on the mouth of a stream 耳川, modern-day tourists will find a huge signboard stating “The Birthplace of Japanese Imperial Navy 日本海軍發祥地.” It was erected by an admiral of the (pre World War II) old Japanese imperial navy at his own expense.


6 神武 卽位前紀... 皇師遂東...方到難波之碕 會有奔潮太急 因以名爲浪速國 亦曰浪花 今謂難波訛也...遡流而上 徑至河內國 (NI: 191) 皇師勒兵 步趣龍田 而其路狹嶮 人不得幷行 乃還更欲東踰膽駒山 而入中洲 時長髓彦聞之曰 夫天神子等所以來者 必將奪我國 則盡起屬兵...與之會戰 有流矢中五瀨命肱脛 皇師不能進戰...今我是日神子孫 而向日征虜 此逆天道也 不若 退還示弱 禮祭神祇 背負日神之威 隨影壓躡...時五瀨命矢瘡痛甚 乃...進到于紀國...而五瀨命薨 (NI: 193-195)

故從其國上行之時 經浪速之渡而 泊…津 此時登美…毘古 興軍待向以戰...於是…五瀨命於御手負登美毘古之痛矢串 故爾詔 吾者爲日神之御子 向日而戰不良 故負賤奴之痛手 自今者行廻而背負日以擊期而…到紀國男之水門而詔 負賤奴之手乎死 男建而崩 (K: 150-2)


7 故神倭伊波禮毘古命 從其地廻行 到熊野村之時...熊野之高倉下 賷一橫刀…天照大神 高木神...召建御雷神 而詔…我御子等 不平坐良志 此二字以音 其葦原中國者 專汝所言向之國 故汝建御雷神可降 爾答曰僕雖不降 專平其國之橫刀 可降是刀 此刀者 坐石上神宮也 降此刀狀者 穿高倉下之倉頂 (K: 150-2)

番仁岐命 初降于高千嶺 神倭天皇 經歷于秋津嶋…天劒獲於高倉…大烏導於吉野 列儛攘賊…敬神祇 所以稱賢后 (K: 42)


8 軍至名草邑 則誅…遂越狹野…而到熊野神邑…海中卒遇暴風…時…歎曰…吾祖則天神 母則海神…至熊野荒坂津 因誅…者...天照大神…曰 夫葦原中國猶聞喧擾之響焉…而下予平國之劒…登謂高倉曰…獻之天孫…旣 而皇師 欲趣中洲 而山中嶮絶 無復可行之路…天照大神訓于天皇曰 朕今遣頭八咫烏 宜以爲鄕導者 果有頭八咫烏 自空翔降 天皇曰 此烏之來…乃尋鳥所向…遂達于莵田下縣…至吉野 (NI: 195-9) See Aston (N1: 114-5).


9 於是亦 高木大神之命以覺白之 天神御子 自此於奧方莫使入行 荒神甚多 今自天遣八咫烏 故其八咫烏引道 從其立後應幸行 故隨其敎覺 從其八咫烏之後幸行者 到吉野河 (K: 150-2)


10 Kojiki and Nihongi first say that Yata-garasu was a giant crow, and then later say that the descendants of Yata-garasu became the village chiefs.

故爾於宇陀 有兄…弟…二人 故先遣八咫烏 (K: 154)

神武 元年 頭八咫烏 亦入賞禮 其苗裔卽葛野主殿縣主部是也 (NI: 215)


11 神武 卽位前紀…時勅道臣命 今以高皇産靈尊 朕親作顯齋 用汝爲齋主 (NI: 203)

Soon after they arrived at the Yamato region, they conducted a rite in honor of Takagi.


12 神武 卽位前紀...皇師遂擊長髓彦 連戰不能取勝...時長髓彦 乃遣行人...曰 嘗有天神之子 乘天磐船 自天降之 號曰…饒速日 是娶吾妹...故吾以饒速日命爲君而奉焉 夫天神之子 豈有兩種乎...天皇曰天神子亦多耳...然而凶器已構 其勢不得中休...饒速日命 本知天神慇懃 唯天孫是與 且見夫長髓彦稟性愎恨 不可敎以天人之際 乃殺之帥其衆而歸順焉 天皇素聞饒速日命 是自天降者 而今果立忠效則褒而寵之 此物部氏之遠祖也 (NI: 209-211)


13 神武 卽位前紀 己未年... 我東征 於玆六年矣 賴以皇天之威凶徒就戮 雖邊土未淸 餘妖尙梗 而中洲之地 無復風塵 誠宜恢廓皇都 規摹大壯而今運屬屯蒙 民心朴素 巢棲穴住 習俗惟常 夫大人立制 義必隨時 苟有利民...觀夫…畝傍山東南橿原地者 蓋國之墺區乎 可治之...辛酉年…天皇卽帝位於橿原宮 (NI: 213)


14神功 攝政五十年 久氐等奏曰 天朝鴻澤 遠及弊邑 吾王歡喜踊 躍 不任于心 故因還使 以致至 誠 雖逮萬世 何年非朝 (NI: 357)


攝政五十一年 百濟王亦遣久氐朝貢 於是 皇太后語太子...所交 親百濟國者 是天所致 非由人故 玩好珍物...常來貢獻…如朕存時 敦加恩惠…朕從神所驗 始開道路 平定海西 以賜百濟 今復厚結好 永寵賞之 (NI: 357-9)

See Aston (N1: 250).


15神功 攝政五十二年 久氐等... 曰 臣國以西有水源 出自谷那鐵 山 其邈七日行之…便取是山鐵 以永奉聖朝 乃謂孫枕流王曰 今 我所通 海東貴國 是天所啓 是 以垂天恩 割海西而賜我 由是國 基永固 汝當善脩和好 聚斂土物 奉貢不絶 (NI: 359) See Aston (N1: 251).


16 神功 攝政三年 立譽田別皇 子爲皇太子 因以都於磐余 (NI: 349)

亦名神倭伊波禮毘古 (K: 146)


17三國史記 卷第二十三 百濟本 記 第一 百濟始祖 ...溫祚都河 南慰禮城 (S2: 16)

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第六 百濟 按古典記 東眀王 第三子 溫祚...自卒本扶餘至慰禮城立都 稱王 歷三百八十九年至十三世 近肖古王…都漢城 (S2: 233)


18 北史卷九十四 列傳第八十二 百濟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


19 三國史記 卷第十三 高句麗 本記 第一 始祖東眀聖王... 而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 居之... 琉璃眀王 二十一年...至 國內尉那巖…王若移都 二十二 年 王遷都於國內 築尉那 巖城 (S1: 261-2)


20周書卷四十九 列傳 第四十一 異域上 百濟者…夫餘之別種 ... 王姓夫餘氏 號於羅瑕 民呼爲 鞬吉支 …言竝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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