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홍원탁의 백제왜

[스크랩] 7. 백제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마음에 와 닿는 얘기들

monocrop 2007. 1. 4. 16:01

7.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마음에 와 닿는 얘기들


Coming Across the Emotive Records in Kojiki and Nihongi revelation of close kinship



일본서기는 백제의 지배층과 야마도 왕족 사이가 상당히 가까운 친족관계였음을 분명히 느끼게 해 주는 수많은 감동적 일화들을 기록하고 있다. 양측이 모두, 백제와 야마도 왕국과의 관계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라고 말한다. 639년, 죠메이(舒明)왕은 구다라 강(百濟川)변에 대규모의 궁전을 지었다. 641년, 죠메이왕은 구다라 궁(百濟宮)에서 서거했다. 입관한 후 장사를 지낼 때까지 궁 북쪽에 안치를 했는데, 이를 구다라 대빈(百濟大殯)이라 불렀다. 일본서기는 고구려에서 승려가 왔을 때는 “귀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반면에, 바로 이어 백제에서 승려가 왔을 때는 시종일관 그냥 “왔다”고 올래(來) 자를 썼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마음에 와 닿는 얘기들

- 왕실 간 친족관계를 느끼게 해 주는 기록들 -


 홍원탁 (서울대 교수)


가슴에 와 닿는 기록들

일본서기는 백제의 지배층과 야마도 왕족 사이가 상당히 가까운 친족관계였음을 분명히 느끼게 해 주는 수많은 감동적 일화들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야마도 왕국과 신라- 고구려와의 관계 역시 기록을 하지만, 그런 기록들은 눈에 띄게 친밀감이 결여되어 있다.


일본서기(Aston 번역: 250-1)에 의하면, 신공왕후는 그녀의 아들 호무다에게 “우리가 한국[정직한 번역은 백제]과 친교를 맺고 있는 것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다. ... 내가 죽은 다음에도 내 생존 시와 마찬가지로 우의를 한층 더 돈독히 하여 이 우정의 결속을 영원토록 지속시켜야 한다”고 당부를 한다. 다른 한편, 백제의 근초고왕(346-75)은 그의 손자인 침류왕(384-5)에게 “지금 우리가 통교를 하는 바다 건너 동쪽의 나라는 하늘이 우리에게 열어준 것이다. 하늘의 은덕으로 우리나라의 기초가 영원토록 확고 해졌으니, 너는 우리 토산물들을 그 나라에 끊임없이 제공하면서 우의를 계속 다져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당부를 한다. 1


백제 아신왕(阿莘王, 392-405)은 397년에 태자 전지(腆支)를 야마도 왕국으로 보냈다. 2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신왕은 402년에 사신을 야마도 왕국에 보내 큰 구슬을 구하였고, 403년에 야마도 왕국에서 사자가 오니 왕이 이를 맞아 위로함이 특히 후하였다. 3 일본서기는 오오진 (호무다) 16년 조에, “백제 아신왕이 죽었다. 천황은 태자 전지를 불러 ‘왕자는 즉시 귀국해서 왕위를 계승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 하면서, 한국 동쪽 땅을 하사하였다”고 말한다. 한반도로부터 건너와, 이미 야마도 왕국의 지배자가 된 오오진(호무다)이 정식으로 백제의 강역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의사 표시인 것 같다. 4


삼국사기에 의하면, 야마도 조정이 409년에 사신을 보내면서 야광주를 전하니 전지왕(405-20)은 그 사신을 정중하게 대접하였다. 5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 전지왕이 자신의 여동생을 보내 호무다를 모시도록 했다. 신제도(新齊都)는 7명의 시녀들을 거느리고 왔다.”6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지왕은 418년에 사신을 야마도 조정에 보내면서 비단 10필을 전했다. 7


일본서기(N1: 293-4)에 의하면, “백제왕의 손자인 주군(酒君)”이 야마도 조정에 와서 고로시의 집에 머무르며 매를 길들여 닌토쿠(仁德)과 함께 사냥을 나간다: “… 낯설게 보이는 새 한 마리를 잡아서 왕에게 바쳤다. 왕은 주군을 불러서 그게 무슨 새인지 물었다. 주군은 ‘이런 새는 백제에 아주 많으며, 길을 들일 수 있는데, 백제 사람들은 흔히 이 새를 구치(매)라 부른다’고 대답하였다. 왕은 그 매를 주군에게 주어 먹이를 주고 훈련을 시키도록 했다. 주군은 얼마 안 있어 그 매를 훈련시켜, 발에는 부드러운 가죽 끈을 매고, 꽁지에는 작은 방울을 매달았다. 주군은 매를 자기 팔뚝 위에 앉혀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그날로 왕과 주군은 모즈의 들판으로 나가 함께 매 사냥을 했다.”8 모즈는 후에 닌토쿠가 묻힌 곳이다. 삼국사기는 428년에 야마도 왕국 사신이 50명의 종자들과 함께 도착했다고 기록한다. 9


일본서기(N1: 345-6)는 백제신찬(百濟新撰)을 인용한다 : “개로(45-75)가 왕위에 올랐다. 유랴쿠(雄略)는 아레토쿠를 보내 여랑 하나를 골라서 보내 줄 것을 청했다. 백제는 모니 부인의 딸인 적계 여랑을 간택해서 왕에게 보냈다. 왕은 그녀와 결혼을 할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경솔하게도 다데라는 자와 정을 통했다. 왕은 크게 노해 그녀를 불 태워 죽여버렸다.


흉보를 전해 듣고, (461년) 개로왕은 그의 동생 곤지를 야마도에 보내 천왕(天王)을 모시고 옛 왕들의 우의를 돈독히 하도록 했다(以脩兄王之好).”10 Aston은 끝 문장을 “형 왕(兄王)으로서의 우호관계가 한층 돈독해 지도록 했다”고 번역을 했어야 했다. 일본 학자들이나, 서구 학자들이나 의도적으로 묘하게 틀린 번역을 하는 관행이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백제 삼근왕(477-9)이 죽었을 때, 유랴쿠가 “곤지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이며, 나이는 어렸지만 매우 똑똑했던 말다(末多) 왕자를 궁으로 불렀다. 유랴쿠는 친히 말다의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제로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라 했다. 그가 동성왕(東城王, 479-501)이다”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11


성왕은 부처님을 모시는 공덕을 찬양하면서 긴메이 왕에게 불상을 보낸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성왕(聖明王, 523-54)과 야마도 왕국의 긴메이왕은 마치 오늘날 친한 친구들이 이-메일을 주고 받듯이 빈번하게 서신왕래를 하였다. 545년, “백제는 높이가 6장이나 되는 불상을 만든 다음, ‘6장 높이의 불상을 만든다는 것은 큰 공덕을 쌓는 것이다. 이제 삼가 만들었으니, 이 공덕의 힘으로 원컨대 긴메이왕께서 높은 덕을 얻고, 왕께서 소유한 땅에 축복이 내리고, 천하의 모든 중생이 모두 해탈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의 원문을 써 넣었다.


552년, “성명왕은 석가불 금동상 한 개, 몇 개의 사찰 깃발과 덮개, 몇 권의 경론 등을 전하면서 예배의 공덕을 크게 찬양하였다 : 이 불법은 모든 법 중에서 가장 훌륭한 법입니다. 이 법은 선행에 대한 인과응보로서 능히 무한한 복과 두터운 덕을 줄 수 있고, 수행의 결과로 우리 인간들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의 정각의 지혜를 깨닫게 해줍니다.” 긴메이는 이 말을 듣고 나자 크게 기뻐 벌떡 일어나며 신하들의 견해를 물었다. 소가 이나메 대신이 대답했다 : “서쪽 나라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들 모시고 있습니다. 유독 우리 야마도 만 모시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12


554년, 성왕이 신라 병사들 손에 죽었다. 그의 아들 여창(위덕왕, 554-98)은 샛길로 겨우 전쟁터를 빠져 나왔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당시 신라 장수들은 백제가 기진맥진한 것을 알고, 아예 완전히 없애버릴 생각을 했다. 그러자, 한 장수가 말했다 : “야마도 왕은 가야[연맹] 문제를 가지고도 우리나라를 여러 번 질책을 했는데, 이제 백제 관가(官家)를 아주 멸해 버린다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계획은 취소되었다. 13



계속해서 일본서기를 본다 : “여창은 ... 왕자 혜[威德王의 동생, 후에 惠王, 598-99]를 보내 성왕이 적에게 살해되었다는 비보를 전했다. 긴메이는 이 비보를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사자[소가 대신]를 나루터에 보내 왕자 혜를 맞아 위문케 했다. 소가 대신이 왕자 혜를 위로하며 말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이렇게도 슬픔이 간절합니까? 인간의 정을 가진 사람치고 왕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가 대신은 계속 말한다: “옛날, 유략쿠왕 때[463-79], 당신 나라는 고구려[장수왕]에 의해 핍박을 당하여 누란의 위기에 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유랴쿠왕은 가무 쓰카사 가미(神祇伯)에게, 신(神祇)으로부터 계책을 받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하후리(祝者)가 신의 말씀을 전(託神語)했습니다. ‘나라를 창건한 신(建邦之神)에게, 멸망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임금한테 가서 구원을 해 달라고 경건하게 청하면, 그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해질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시조 호무다] 신께 [백제에 가서] 구원을 해줄 것을 청했더니, [백제] 왕조의 기초가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야마도 땅에] 나라를 창건한 신(建邦神)은,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초목이 서로 말을 할 때, 하늘[백제]로부터 내려와 나라를 세운 신입니다. 제가 듣기에 당신 나라에서는 그 [호무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이제 지난날의 과오를 참회하고, 신궁을 수리하여 신령께 제사를 올리면 나라가 융성할 것입니다.’”14



구다라 강변에 왕궁을 짓고, 구다라 궁에서 서거를 하고

일본서기에 의하면, 비다쓰왕은 572년에 야마도 지역의 구다라 오오이(百濟 大井)라는 곳에 왕궁을 지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한자로 백제라 쓰고 모두 “구다라”라고 읽는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죠메이(舒明)왕은 639년에 대규모의 궁전과 사찰을 축조하도록 명했다. 궁전은 구다라 강(百濟川) 가에 자리를 잡았고, 구다라 강변에는 구중탑이 세워졌다. 641년, 죠메이왕은 구다라 궁(百濟宮)에서 서거했다. 입관한 후 장사를 지낼 때까지 궁 북쪽에 안치를 했는데, 이를 구다라 대빈(百濟大殯)이라 불렀다. 15



도래(到來)와 귀화(歸化)

일본서기는 고구려에서 승려가 왔을 때는 “귀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반면에 바로 이어 백제에서 승려가 왔을 때는 시종일관 그냥 왔다고 올래(來) 자를 썼다. 595년에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가 야마도로 귀화하여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같은 해에 백제 승려 혜총(慧聰)이 왔다. 이 두 승려는 불법을 널리 전파하였으며, 모두 3보(佛法僧)의 동량이 되었다.” 602년에 “백제 승려 관륵(觀勒)이 와서 역법, 천문지리 및 둔갑술에 관한 책을 바쳤다. ... 승륭과 운총 등, 두 명의 고구려 승려가 함께 귀화하였다.”16



중국 유학생으로 선발된 아야 씨족 사람들 (漢人)

608년, 야마도 조정은 7명의 학생과 1명의 통역을, 귀국하는 수 나라 사신 일행에 딸려, 수 나라 조정으로 보냈다. Sansom(1931: 37-38)은 “성덕(聖德) 태자가 선발한 몇 명의 학자들이 해외 유학을 하기 위해 수 나라로 갔다. 그들은 모두 귀국해서 중요한 임무의 선구자가 되었고, 특히 일부는 대화개신(大化改新, 645-50)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모두 한번 써 본다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본서기는 그들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 “학생 야마도 아야(倭漢直) 씨족의 아타헤 후쿠인, 나라 씨족의 오사(譯語, 통역) 에묘우, 다까무꾸 아야(漢人) 씨족의 구로마로, 이마끼 아야(新漢) 씨족의 오오쿠니, 학문승 이마끼 아야 씨족의 히후미, 미나부찌 아야 씨족의 쇼우안, 시가 아야 씨족의 에온, 이마끼 아야 씨족의 고사이” 등 8명이었다. Sansom(1931: 38)은 “이름과 칭호를 보건대, 그들은 모두 귀화한 한국인, 중국인, 혹은 그들의 후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Sansom은 “그들은 모두 백제에서 건너온 아야 씨족의 후손들 이었다”라고 말 했어야 했다. 17



동아시아 역사 강의: 2-12 (2005. 6. 25.)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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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神功 攝政五十一年 百濟王亦 遣久氐…於是皇太后語太子...曰 朕所交親百濟國者 是天所致 非 由人故...如朕存時 敦加恩惠… 今復厚結好 永寵賞之(NI: 357-9)


神功 攝政五十二年 久氐等 ... 曰… 乃謂孫枕流王曰 今我所通 海東貴國 是天所啓 是以垂天恩 …由是 國基永固 汝當善脩和好 聚斂土物 奉貢不絶 (NI: 359)

2. 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莘王 六年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 (S2: 45)


應神八年 百濟記云 遣王子直支 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NI: 367)

3. 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莘王 十 一年 遣使倭國求大珠 十二年 倭國使者至 王迎勞之特厚 (S2: 46)

4. 三國史記 百濟本紀 腆支王 或云直支 梁書名映… 腆支在倭聞訃 哭泣請歸 倭王以兵士百人衛 送旣至國界…國人殺碟禮 迎腆支卽位 (S2: 46)

應神 十六年 百濟阿花王薨 天皇召直支王 謂之曰 汝返於國以嗣位 仍且賜東韓之地而遣之(NI: 373)


5. 三國史記 百濟本紀 腆支王 五年 倭國遣使送夜明珠 王優禮待之 (S2: 46)


6. 應神 三十九年 百濟直支王遣其妹新齊都媛以令仕 爰新齊都媛率七婦女 而來歸焉 (NI: 379)


7. 三國史記 百濟本紀 腆支王 十四年 遣使倭國 送白綿十匹 (S2: 46)


8. 仁德 四十一年 遣…於百濟 …是時…爰酒君來之…四十三年...捕異鳥…天皇召酒君...酒君對曰 此鳥之類 多在百濟 得馴而從人 亦捷飛之掠諸鳥 百濟俗號此鳥曰俱知 是今時鷲也 乃授酒君令養馴 未幾時而得馴 酒君則以韋 緡著其足 以小鈴著 其尾居腕上 獻于天皇 是日幸百 舌鳥野而 遊獵 時雌雉多起 乃放鷲令捕 忽獲數十雉 (NI: 409) 仁德 六十七年 幸河內石津原以 定陵地 始築陵...故號其處曰百 舌鳥耳原者 (NI: 415)


9. 三國史記 百濟本紀 毗有王 二年 倭國使至 從者五十人 (S2: 46)


10. 雄略 二年 百濟池津媛 違天皇將幸 淫於石川楯 天皇大怒… 置假庪上 以火燒死 百濟新撰云 己巳年 蓋鹵王立 天皇遣…來索女郞 百濟莊飾慕尼夫人女曰適稽女郞 貢進於天皇 (NI: 463)

雄略 五年 百濟加須利君 蓋鹵王也 飛聞池津媛之所燔殺適稽 女郞也 而籌議曰… 乃告其弟軍 君 昆支也 曰汝宜往日本 以事 天皇…軍君入京 旣而有五子 百濟新撰云 辛丑年 蓋鹵王遣弟昆支君 向大倭 侍天王 以脩兄王之好也 (NI: 471)


11. 雄略 二十三年 百濟文斤王薨 天王以昆支王五子中 第二末多王 幼年聰明 勅喚內裏 親撫頭面 誡勅慇懃 使王其國… 幷遣筑紫國軍士五百人 衛送於國 是爲東城王 (NI: 499-501)

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東城王…昆支之子 (S2: 60)


12. 欽明 六年 遣…使于百濟…百濟造丈六佛像 製願文曰 蓋聞 造丈六佛 功德甚大 今敬造 以此功德 願天皇獲勝善之德 天皇所用彌移居國 俱蒙福祐 又願普天之下一切衆生 皆蒙解脫 故造之矣 (NII: 93-95)


十三年 百濟聖明王 更名聖王 遣…等 獻釋迦佛金銅像一軀 幡蓋若干 經論若干卷 別表讚流通禮拜功德云 是法於 諸法中 最爲殊勝…此法能生無量…天皇聞已 歡喜踊躍 詔使者云 朕從昔來未曾得聞如 是微妙之法…蘇我大臣稻目宿禰奏曰 西蕃諸 國一皆禮之 豐秋日本 豈獨背也 (NII: 101-103)


13. 欽明 十五年 餘昌謀伐新羅... 築…塞 其父明王憂慮餘昌長苦行陣 久廢眠食... 乃自往迎慰勞 新羅聞明王親來

新羅聞明王親來 悉發國中兵斷道擊破...斬首而殺…餘昌遂見圍繞… 餘昌及諸將等 得從間道逃歸… 於是 新羅將等 俱知百濟疲盡 遂欲謀滅無餘 有一將云 不可 日本天皇以任那事屢責吾國 況復謀滅 百濟官家 必招後患 故止之 (NII: 111-3)


14. Aston(N2: 77)은 “쯔쇼우 주석자가 이 대목에서 세이토키라는 책으로부터 ‘간무(桓武, 781-806) 치세 때 우리와 한국[백제?]은 표기법[기록?]이 동일했다. 왕은 이 말을 싫어하여 모두 불태워버렸다’라는 이해하기 힘든 문장을 하나 인용했다”는 사실에 독자의 주의를 환기 시킨다. 기다바다케 치카후사(北畠親房, 1293-1354)는 자신이 1343년에 쓴 역사서(神皇正統記)의 오오진 조에다 “옛날 일본 사람들은 삼한 사람들과 같았다”라고 말을 한 책들은 모두 간무 때 불태워졌다”고 기록을 했다.


應神 . . .昔日本ハ三韓ト同種ナリト云事ノアリシカノ書ヲ桓武ノ御代ニヤキステラレシナリ. 六地藏寺本 神皇正統記 (Tokyo: Kyuko), p. 28.

欽明 十六年 百濟王子餘昌 遣王子惠 …曰聖明王爲賊見殺 天皇聞而 傷恨迺 遣遣使者 迎津慰問 於是... 俄而蘇我臣問訊曰…何痛之酷何悲之哀 凡在含情 誰不傷悼...蘇我卿曰 昔在天皇大泊瀨之世 汝國爲高麗所逼 危甚累卵 於是 天皇命神祇伯 敬受策於 神祇祝 者迺託神語報曰 屈請建邦之神 往救將亡之主 必當國家 謐靖人 物乂安 由是 請神往救 所以社稷安寧 原夫建邦神者 天地割 判之代 草木言語之時 自天降來 造立國家之神也 頃聞 汝國輟 而不祀 方今悛悔前過 修理神宮 奉祭神靈 國可昌盛 汝當莫忘 (NII: 115-7)


15. 敏達元年 宮于百濟大井 (NII: 133)

舒明 十一年 詔曰 今年造作大 宮及大寺 則以百濟川側爲宮處 …於百濟川側 建九重塔 十二年 徙於百濟宮 十三年 天皇崩于百 濟宮...殯於宮北 是謂百濟大殯 (NII: 233-5)

16. 推古 三年 高麗僧慧慈歸化則 皇太子師之 是歲 百濟僧慧聰來 之 此兩僧 弘演佛敎 並爲三寶 之棟梁 (NII: 175)

推古 十年 百濟僧觀勒來之 仍 貢曆本及天文地理書 幷遁甲方 術之書也 潤十月 高麗僧僧隆 雲聰 共來歸 (NII: 179)


17. 推古 十六年 以小野臣…爲大 使…福利爲通事 副于唐客而遣 之... 是時 遣於唐國 學生倭漢 直福因 奈羅譯語惠明 高向漢人 玄理 新漢人大國 學問僧新漢 人日文 南淵漢人請安 志賀漢人 惠隱 新漢人廣濟等 幷八人也 (NII: 189-193)



Coming Across the Emotive Records in Kojiki and Nihongi

revelation of close kinship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The Emotive Records


Nihongi records numerous touching episodes that clearly indicate a close kinship between the Paekche rulers and the Yamato imperial clan. Nihongi also records the Yamato relationships with Silla and Koguryeo, but the narrations of these relations conspicuously lack intimacy.

According to Nihongi (Aston tr.: 250), Empress Jingū addressed her son Homuda, saying: “We owe it to Heaven and not to man that we have a friendly country like Corea [the correct translation being Paekche]. … and so long as we live will heartily bestow on it Our favor.” King Keun Chogo of Paekche (346-75) addresses his grandson, Prince Chim-nyu (who reigned during 384-5), saying (N1: 251): “The honorable country east of the sea with which we are now in communication has been opened to us by Heaven. Consequently the foundation of our land is confirmed for ever. Thou shouldst cultivate well its friendship, and having collected our national products, wait on it with tributes without ceasing.”1

King Asin of Paekche (392-405) sent the crown prince Cheon-ji to Yamato in 397.2 Samguk-sagi records that, in 402, King Asin sent an envoy to Yamato and obtained large beads and, in 403, the King accorded a warm welcome to the envoy from Yamato.3 In the 16th year of Oujin’s reign, Nihongi (N1: 263) records that: “In this year King Ahwa (Asin) of Paekche died. The Emperor then sent for Prince Cheon-ji, and addressed him, saying: ‘Do thou return to thy country and succeed the Dignity.’ Accordingly he further granted him the territory of Eastern Han.” It seems that Oujin, having already become the ruler of Yamato, formally renounced any claim on Paekche territories.4

Samguk-sagi records that the Yamato court sent an envoy to King Cheon-ji (405-20) in 409 with noctilucent beads; and the envoy was received cordially by the King.5 Nihongi (N1: 270) records that: “the King of Paekche [Cheon-ji] sent his younger sister, to wait upon [Oujin]. Now the Lady Shin-je-do came over, bringing in her train seven women.”6 Samguk-sagi records that King Cheon-ji sent an envoy in 418 to the Yamato court with 10 pils of silk.7

Nihong (N1: 293-4) records that “Lord Chu, the grandson of the King of Paekche” was sent to the Yamato court and while staying in the house of Koroshi, tamed a falcon and accompanied Nintoku in hunting: “Tsuchigura … caught a strange bird and presented it to the Emperor … The Emperor sent for Lord Chu and, pointing to the bird, said: -‘What bird is this?’ Lord Chu answered and said:-‘Birds of this kind are numerous in Paekche. They can be tamed… The common people in Paekche call them Kuchi.’ So it was given to Lord Chu to be fed and tamed… Lord Chu accordingly fastened to its leg a soft leather strap, and attached to its tail a small bell. Then, placing it on his forearm, he presented it to the Emperor. On this day [they] went to the moor of Mozu and hunted.” Mozu is the place where Nintoku was later buried.8 Samguk-sagi records that an envoy from the Yamato court arrived in 428 accompanied by 50 followers.9


Nihongi quotes the New Compilation of Paekche History (N1: 345-6): “King Kaero ascended the throne [in 455]. The Emperor [Yūriaku] sent Aretoku hither to ask for a lady. Paekche adorned the daughter of the Lay Moni, and sent her to the Emperor. … [But she], in despite of the Emperor’s intention to favor [i.e., wed] her, had an amour with Tate Ishikaha. The Emperor was greatly enraged … and she was burned to death. … [In 461] King Kaero sent his younger brother, Lord Kon-ji, to Great Yamato, to wait upon the Emperor and to confirm the friendship of former sovereigns [Aston should have translated the sentence into: ‘to confirm the friendship of big brother King.’]”10

When King Sam-keun [477-9] died, Yūriaku “summoned within the Palace Prince Mata, the second son of Prince Kon-ji’s five sons, who was young in years, but intelligent. He himself stroked the Prince’s face and head and made a gracious decree, appointing him to reign over that country. He became King Tong-seong (479-501).”11

King seong-myung sent an image of Buddha to kimmei lauding the merit of its worship


According to Nihongi, King Seong-myung (523-54) of Paekche maintained intensive communications with Kimmei (531-71) of the Yamato kingdom as if modern-day soul mates exchanging e-mails. In 545, “Paekche made an image of Buddha sixteen feet high, and drew up a written prayer, saying: ‘I [King Seong of Paekche] understand that it is extremely meritorious to make a Buddha sixteen feet high. By the merit which I have now acquired in reverentially constructing one, I pray that the Emperor [Kimmei] may obtain exceeding virtue, and that all the land of the Miyake belonging to the Emperor may receive blessings.’” In 552, “King Seong-myung of Paekche sent … an image of Shaka Buddha in gold and copper, several flags and umbrellas, and a number of volumes of Sutras. Separately he presented a memorial in which he lauded the merit of diffusing abroad religious worship, saying: ‘… This doctrine can create religious merit and retribution without measure and without bounds, and so lead to a full appreciation of the highest wisdom…’” Kimmei, “having heard to the end, leaped for joy” and inquired of his Ministers whether it ought to be worshipped. Thereby “Soga no Oho-omi, Iname no Sukune, addressed the Emperor, saying: ‘All the Western frontier lands without exception do it worship. Shall Akitsu Yamato alone refuse to do so?’”12


Seong-myung was slain by the Silla soldiers in 554. His son Yeo-chang (King Wi-deok, 554-98) narrowly escaped from the battlefield by taking a by-road. Nohongi records that at this point the Silla generals noticed that the Paekche was extremely vulnerable and hence “wished to take measures for the destruction of the remainder. But there was one general who said: ‘This would be a mistake. The Emperor of Japan has frequently attacked our country on account of Imna: much more future mischief should we certainly invite upon ourselves if we should proceed to take steps for the destruction of the Miyake of Paekche.’ This project was therefore dropped.” 13


Nihongi continues: “Yeo-chang … sent Prince Hye [the younger brother of Wi-deok, later the King Hye, 598-99] with a message to the Kimmei, saying: ‘King Seong-myung has been slain by brigands.’ When the Emperor heard this he was indignant, and sent an envoy [Soga no Omi] to meet him [Hye] at the port with a message of condolence. … Soga no Omi condoled with him, … saying: ‘… Oh! What a cruel grief. … Who is there possessed of feeling who does not lament his death?” Minister Soga continues: “Formerly, in the reign of the Emperor Oho-hatsuse [Yūryaku, ca.463-79], thy country was hard pressed by Koguryeo [ca.475], and was in an extremely critical position …. Thereupon the Emperor commanded the minister of the Shinto religion to take counsel of the Gods. Accordingly the priests, by divine inspiration, answered and said: ‘If after humble prayer to the Deity, the founder of the Land, thou goest to the assistance of the Ruler who is threatened with destruction, there will surely be tranquility to the State and peace to the people.’ Prayer was therefore offered to the Gods, aid was rendered, and the peace of the country [Paekche] was consequently assured. … Now the Gods who originally founded this country [Yamato kingdom] is the God who descended from Heaven [Paekche?] and established this State when Heaven [Paekche?] and Earth [Yamato kingdom?] became separated, and when trees and herbs had speech. I have recently been informed that your country has ceased to worship him [Homuda?]. But if you now repent your former errors, if you build a shrine to the God and perform sacrifices in honor of his divine spirit, your country will prosper.”14

Palace at kudara and dying in the kudara palace


According to Nihongi, Bidatsu “made his palace at Oho-wi in Kudara [located in Kahachi] in 572.” The Chinese characters for Paekche is read Kudara in both Kojiki and Nihongi. Nihongi further records that Jomei made a decree in 639, saying that “let there be a great palace and a great temple built.” So the bank of the Kudara River was chosen as the site for the palace; a pagoda of nine stories was erected on the bank of the River Kudara [in 639]; Jomei removed to the Palace of Kudara [in 641]; when Jomei died in the Palace of Kudara, he was temporarily interred north of the Palace; and this was called the great temporary tomb of Kudara.15

Arrived vs. emigrated [naturalized]

Nihongi (N2: 123, 126) consistently uses the term “emigrated [naturalized]” for Koguryeo priests, while simply using the word “arrived” for the Paekche priests. In 595, “a priest of Koguryeo, named He-ja, emigrated to Japan [became naturalized as a Yamato citizen], and was taken as teacher by the Prince Imperial. In the same year a Paekche priest, named He-chong arrived. These two priests preached the Buddhist religion widely, and were together the mainstay of the Three Precious Things.” In 602, “a Paekche priest named Kwal-leuk arrived and presented … books of Calendar-making, Astronomy, and Geography, and also books on the art of invisibility and of magic…. Two Buddhist priests of Koguryeo named … emigrated [were naturalized] here together.”16

Aya people chosen to study in China

In 608, the Yamato court sent seven students and one interpreter to the Sui court accompanying the returning Sui envoys. Sansom (1931: 37-38) notes that “there traveled a number of scholars chosen by the prince [Shōtoku] for study abroad. It is interesting to record their names, for they were pioneers in an important task, and some of them played an important part in Japan [in the Taika Reform, 645-50] upon their return.” Nihongi notes their names: “the student Fukuin, Yamato no Aya no Atahe, Emyo, Nara no Wosa [interpreter], Kuromaro, Takamuku no Ayabito, and Ohokuni, Imaki no Ayabito, together with the student-priests Hifumi, Imaki no Ayabito, Shoan, Minabuchi no Ayabito, Eon, Shiga no Ayabito, and Kosai, Imaki no Ayabito, in all eight persons.” Sansom (1931: 38) states that: “to judge from their names and titles they were all naturalized Koreans or Chinese, or of Korean or Chinese descent.” Sansom should have said that “they were all descendants of the Aya clan people from Pakeche.”17



[각주]

1 神功 攝政五十一年 百濟王亦 遣久氐…於是皇太后語太子...曰 朕所交親百濟國者 是天所致 非 由人故...如朕存時 敦加恩惠… 今復厚結好 永寵賞之(NI: 357-9)


神功 攝政五十二年 久氐等 ... 曰… 乃謂孫枕流王曰 今我所通 海東貴國 是天所啓 是以垂天恩 …由是 國基永固 汝當善脩和好 聚斂土物 奉貢不絶 (NI: 359)

2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莘王 六 年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 質 (S2: 45)


應神八年 百濟記云 遣王子直支 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NI: 367)

3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莘王 十 一年 遣使倭國求大珠 十二年 倭國使者至 王迎勞之特厚 (S2: 46)

4三國史記 百濟本紀 腆支王 或 云直支 梁書名映… 腆支在倭聞 訃 哭泣請歸 倭王以兵士百人衛 送旣至國界…國人殺碟禮 迎腆 支卽位 (S2: 46)

應神 十六年 百濟阿花王薨 天 皇召直支王 謂之曰 汝返於國以 嗣位 仍且賜東韓之地而遣之(NI: 373)

5三國史記 百濟本紀 腆支王 五 年 倭國遣使送夜明珠 王優禮 待之 (S2: 46)


6應神 三十九年 百濟直支王遣 其妹新齊都媛以令仕 爰新齊都 媛 率七婦女 而來歸焉 (NI: 379)

7三國史記 百濟本紀 腆支王 十 四年 遣使倭國 送白綿十匹 (S2: 46)

8仁德 四十一年 遣…於百濟 …是時…爰酒君來之…四十三年

...捕異鳥…天皇召酒君...酒君對曰 此鳥之類 多在百濟 得馴 而從人 亦捷飛之掠諸鳥 百濟 俗號此鳥曰俱知 是今時鷲也 乃 授酒君令養馴 未幾時而得馴 酒 君則以韋 緡著其足 以小鈴著 其尾居腕上 獻于天皇 是日幸百 舌鳥野而 遊獵 時雌雉多起 乃 放鷲令捕 忽獲數十雉 (NI: 409)

仁德 六十七年 幸河內石津原以 定陵地 始築陵...故號其處曰百 舌鳥耳原者 (NI: 415)

9三國史記 百濟本紀 毗有王 二 年 倭國使至 從者五十人(S2: 46)

10雄略 二年 百濟池津媛 違天 皇將幸 淫於石川楯 天皇大怒… 置假庪上 以火燒死 百濟新撰云 己巳年 蓋鹵王立 天皇遣…來索 女郞 百濟莊飾慕尼夫人女 曰適 稽女郞 貢進於天皇 (NI: 463)

雄略 五年 百濟加須利君 蓋鹵 王也 飛聞池津媛之所燔殺適稽 女郞也 而籌議曰… 乃告其弟軍 君 昆支也 曰汝宜往日本 以事 天皇…軍君入京 旣而有五子 百 濟新撰云 辛丑年 蓋鹵王遣弟昆 支君 向大倭 侍天王 以脩兄王 之好也 (NI: 471)

11雄略 二十三年 百濟 文斤王 薨 天王以昆支王五子中 第二末 多王 幼年聰明 勅喚內裏 親撫 頭面 誡勅慇懃 使王其國… 幷 遣 筑紫國軍士五百人 衛送於國 是爲東城王 (NI: 499-501)

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東城王…昆支之子 (S2: 60)

12 欽明 六年 遣…使于百濟 … 百濟造丈六佛像 製願文曰 蓋 聞 造丈六佛 功德甚大 今敬造 以此功德 願天皇獲勝善之德 天 皇所用 彌移居國 俱蒙福祐 又 願 普天之下一切衆生 皆蒙解脫 故造之矣 (NII: 93-95)

十三年 百濟聖明王 更名聖王 遣…等 獻釋迦佛金銅像一軀 幡蓋若干 經論若干卷 別表 讚 流通禮拜功德云 是法於 諸法中 最爲殊勝…此法能生無量…天皇 聞已 歡喜踊躍 詔使者云 朕從 昔來 未曾得聞如 是微妙之法…

蘇我大臣稻目宿禰奏曰 西蕃諸 國 一皆禮之 豐秋日本 豈獨背 也 (NII: 101-103)

13欽明 十五年 餘昌謀伐新羅... 築…塞 其父明王憂慮餘昌 長苦 行陣 久廢眠食... 乃自往迎慰勞 新羅聞明王親來 悉發國中兵 斷 道擊破...斬首而殺…餘昌遂見圍 繞… 餘昌及諸將等 得從間道逃 歸… 於是 新羅將等 俱知百濟 疲盡 遂欲謀滅無餘 有一將云 不可 日本天皇 以任那 事屢責 吾國 況復謀滅百濟官家 必招 後患 故止之 (NII: 111-3)

14 At this point Aston (N2: 77) notes that: The ‘Tsūshō commentator here quotes the following curious statement from a work called the Sei-to-ki: ‘In the reign of the Kanmu (781-806) we and Corea [Paekche?] had writings of the same kind. The Emperor, disliking this, burnt them.’”

Kitabatake Chikahusa (北畠親房,

1293-1354) wrote a historical chronicle in 1343, and in Oujin section, he stated that those chronicles that recorded that “the people of old Japan were the same as Three Han people” were all burnt during the reign of Kanmu (781-806).

應神 . . .昔日本ハ三韓ト同種ナリト云事ノアリシカノ書ヲ桓武ノ御代ニヤキステラレシナリ 六地藏寺本 神皇正統記 (Tokyo: Kyuko), p. 28.

欽明 十六年 百濟王子餘昌 遣王子惠 …曰聖明王爲賊見殺 天皇聞而 傷恨迺 遣遣使者 迎津慰問 於是... 俄而蘇我臣問訊曰… 何痛之酷 何悲之哀 凡在含情 誰不傷悼 ...蘇我卿曰 昔在 天皇大泊瀨之世 汝國爲高麗所逼 危甚累卵 於是 天皇命神祇伯 敬受策於神祇 祝者迺託神語報曰 屈請建邦之神 往救將亡之主 必當國家謐靖 人物乂安 由是 請神往救 所以社稷安寧 原夫建邦神者 天地割判之代 草木言語之時 自天降來 造立國家之神也 頃聞 汝國輟而不祀 方今悛悔前過 修理神宮 奉祭神靈 國可昌盛 汝當莫忘 (NII: 115-7)


15敏達元年 宮于百濟大井 (NII: 133)

舒明 十一年 詔曰 今年造作大 宮及大寺 則以百濟川側爲宮處 …於百濟川側 建九重塔 十二年 徙於百濟宮 十三年 天皇崩于百 濟宮...殯於宮北 是謂百濟大殯 (NII: 233-5)

16推古 三年 高麗僧慧慈歸化則 皇太子師之 是歲 百濟僧慧聰來 之 此兩僧 弘演佛敎 並爲三寶 之棟梁 (NII: 175)


推古 十年 百濟僧觀勒來之 仍 貢曆本及天文地理書 幷遁甲方 術之書也 潤十月 高麗僧僧隆 雲聰 共來歸 (NII: 179)

17推古 十六年 以小野臣…爲大 使…福利爲通事 副于唐客而遣 之... 是時 遣於唐國 學生倭漢 直福因 奈羅譯語惠明 高向漢人 玄理 新漢人大國 學問僧新漢 人日文 南淵漢人請安 志賀漢人 惠隱 新漢人廣濟等 幷八人也 (NII: 189-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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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稽古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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