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1 동이문명관련·동북공정

홍산문명 보충소고

monocrop 2006. 12. 27. 10:51

mars : Re 홍산문명(보충자료) [1]

4275| 2006-07-27

추천 : 0| 조회 : 112

<참고1>

“中 요서 고조선 근거지로 추정”

복기대 박사 ‘요서지역…’ 논문 … “독특한 청동기 유물과 유골 등 중원문화와 달라”

○선 안쪽이 요서 ( = 랴오시)지역. BC 2400년경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가 출현한 지역이다.

 

 

 

 

 

 

 

 

 

 

 

 

 

 

 

 

 

 

 

 

 

 

중국 동북부 지역, 행정상으로는 랴오닝(요녕) 성에 속하는

랴오시(요서 遼西) 땅.

 

남북으로 길게 누운 노노아호(努魯兒虎) 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광활한

평원지대가,

 

서쪽으로는 해발 500m 이상의 고원지대가 펼쳐지는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동북아시아의 인후부 역할을 하던 곳으로,

 

실제 랴오시(요서)의 정치·사회적 변화는 동북아시아 전체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주기도 했다.

 

게다가 이 지역은 단군이 세운 고조선의 중심지였느니, 아니니 하면서

지금도 역사학자들 사이에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지는 장소다.

 

그 논쟁의 시간대는 기원전 2400년 무렵 홍산문화(紅山文化)라는 신석기시대

후기 문화가 붕괴하면서 청동기 문화라는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던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 고고학적 용어로 하가점(下家店) 하층문화가 출현한 시기다.

 

7년간 현지서 고고학 발굴 참여

 

이와 비슷한 때 황하 중상류 지역에서는 이른바 중원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원문화는 하·은·주 및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한 시대 이후까지 포함해

현재의 중국이 그 역사적·문화적 뿌리를 찾는 곳이다.

 

중원문화, 즉 황하문화는 그 주변문화를 ‘정복’하고 최후의 승자로 부상했다.

 

이 때문에 중국 학자들은 중원문화 이외의 문화는 그 하위 범주로 취급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랴오시 지역 또한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황하유역과 동북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해 있어 중원문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왔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화주의적 문명사관은 랴오시 지역에서 속속 발굴된 유물들에

의해 크게 흔들리게 됐다.

 

이곳에서 발굴된 청동제 유물들이 중원문화보다 시기적으로 앞설 뿐 아니라,

 

그 세련된 기술도 중원문화를 능가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지역에서 출토된 채회도(彩灰陶)의 경우 중원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세련된 미적 감각을 보여준다는 것.

 

과연 랴오시 지역에서 선진 청동기 문화를 꽃피운 주체 세력은 누구일까.

 

이와 관련해 ‘요서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연구’(백산자료원)라는

한 연구논문이 처음 발표돼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논문의 주인공은 중국 동북지역인 랴오닝대와 지린(吉林)대에서 중국 고고학을

전공한 복기대 박사(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학예연구원).

 

1992년 중국으로 들어가 7년간 현지에서 발굴 작업에 참여하기도 한 복박사는

 

중국과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최근 ‘조심스레’ 자신의 연구 성과를 공개했다.

 

“랴오시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물을 연구한 결과 그동안 중원지역과 관계가

깊다는 주장과는 달리

 

자생적이며 독특한 청동기 문화를 형성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원전 24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이어진 랴오시 지역의 문화는 독자적으로

발전하면서 중원문화를 받아들여 왔다.”

 

복박사가 연구한 분야는 하가점 하층문화부터 시작해

약 2000년에 걸쳐 하가점 상층문화(기원전 14세기∼기원전 7세기)

위영자문화(魏營子文化, 기원전 14세기∼서주 중기)

능하문화(凌河文化, 기원전 10세기∼기원전 4세기)로 발전해간

랴오시 지역 전체 문화다.

 

그는 “하가점 하층문화는 기원전 15세기경에 사라지고

 

노노아호 산맥을 중심으로 서쪽의 고원지대에서는 하가점 상층문화로 발전했으며

 

동쪽인 평원지대에서는 위영자·능하 문화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서쪽의 하가점 상층문화는 중원식 용기나 북방계통의 청동기 등

각양각색의 문화요소를 수용하면서 발전한 흔적이 많이 보이지만

 

능하문화의 청동기는 독특한 면을 보인다는 점.

 

특히 능하문화에서 발굴된 비파형동검이나 청동기들은

 

랴오닝 지역과 한반도 지역에서 출토된 고조선 유물들과 매우 비슷해

거시적으로는 한 문화권으로 보인다는 게 복박사의 설명이다.

 

이 문화를 건설한 주체 세력도 중원문화의 주인공들과 차이가 난다고 한다.

 

랴오시 지역에서 발굴된 인골(人骨)들을 체질 인류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중원문화의 주체들과 다르다는 얘기다.

 

“체질 인류학적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요나라 시기까지 이 지역에서 나온

유골을 계측해보면

고동북형(古東北形)이 주류를 이루고,

고화북형(古華北形)은 부수적으로 나온다.

중원문화의 주류인 고화북형은 머리뼈가 높으며 얼굴이 좁고비교적 평평한

특징이 있다면,

고동북형은 머리뼈가 조금 높으며 얼굴이 약간 넓고 매우 평평한 특징이 있는

전형적인 동북아시아 계통이다.”

 

 

 

 

복기대 박사. 고조선 문화의 상징 중 하나인 비파형동검과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꺽창.
특히 길이가 80.3cm에 이르는 꺽창은 중원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다.
능하문화 시기의 청동기인 잔줄무늬 거울.
하가점 하층문화 시기의 세발솥. 랴오시 지역에서
출토된 채회도는 중원문화보다 세련된 솜씨를 보인다. (왼쪽부터)
 
   



 

 

 

강력한 국가 체제 城 구조가 증명

 

랴오시 문화의 주류인 고동북형은 한민족 계통이라는 게 복박사의 설명이다.

 

실제 랴오시 지역에서 발전된 청동기 문화를 꾸려온 고동북형 세력은

 

한국이나 중국의 문헌 기록에 의하면 단군조선(고조선) 외에 달리 찾아볼 수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세력이 상당한 정도의 국가 체제를 이룩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

 

“랴오시 지역에서는 영금하(英金河)와 음하(陰河) 같은 강 주변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70여개의 성곽이 발견됐다.

 

모두 하가점 하층문화 시대에 속하는 이들 성곽이 자리잡고 있는 형태를 보면

 

3만평 정도 되는 큰 성을 중심으로 그보다 규모가 작은 성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이러한 성 구조는 강력한 권력구조를 갖춘 체제이며 또한 중원문화

양식이라고 여기지도 않고 있다.” 복박사의 설명이다.

 

인류학에서는 권력의 발생 혹은 국가(state) 발생의 중요한 징표로 성곽을 꼽는다.

 

그렇다면 기원전 24세기에 개막해 기원전 15세기까지 번성한 하가점 하층문화

시대에

강력한 국가 체제를 형성했던 집단이 바로 우리 상고사의 수수께끼인

고조선이었다는 말일까.

 

복박사는 “문헌 기록이 부실해 100% 그렇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럴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귀띔했다.

 

“중국학자들 사이에서 랴오시 지역이 중원문화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 어떤 이는 개인적으로 고조선 문화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또 중원문화가 랴오시 문화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니라

 

랴오시 문화가 중원문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중국학자들은 이런 류의 논문을 정식으로 발표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중국학자들이 아니라 한국의 학문 풍토다.

 

아무도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구하려 들지도 않고,

심지어는 애써 외면하는 풍토가 만연돼 있기 때문.

 

우리나라 그 어디에도 우리 상고사를 탐구하는 연구소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아무튼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학계를 포함해

사상 처음으로 랴오시 지역 문화를 총체적으로 연구한 복박사의 연구논문은

현재 학계에서 학문적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그는 이전에도 이미 학계를 한 차례 놀라게 한 바 있다.

 

한국 상고사의 또 하나의 쟁점인 ‘한사군’ 문제에서 그가 결정적

유물을 제시한 것.

한사군은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기원전 108년 설치했다는

낙랑·임둔·현도·진번의 4군을 가리키는데,

 

그 위치가 어디냐를 놓고 ‘만주 존재설’과 ‘평양 중심설’이 부딪혀 끊임없는

논란이 벌어져왔다.

이에 복박사는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臨屯(임둔)’이라는 글자가 적힌,

중국 요서지역에서 출토된 봉니(封泥·공문서 등을 봉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로

직인이 찍혀 있는 형태임) 유물을 제시함으로써

위만조선의 통치강역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라는 학계 통설을

전면으로 뒤집었던 것.

이는 복박사가 ‘글방 서생’에 멈추지 않고 7년간 중국 현지를 도는 등 발품을

팔았기 때문에 얻어낼 수 있었던 결실이었다. (끝)




안영배 기자 3Dojong@donga.com'>ojong@donga.com
발행일 : 2003 년 01 월 23 일 (369 호)
쪽수 : 58 ~ 59 쪽

 

<참고2>

아래글의 요지는

북신문화-대문구문화-용산문화-악석문화로 이어지는 산동문화와

흥륭화문화,신락문화-홍산문화-하가점하층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인 배달한국,고조선분들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고

황하문명보다 빠른 이러한 문명의 주인공이 황하유역으로 가서 황하 문명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는 얘기인데요

중국등의 반발을 생각해서인지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를 하시는군요^^


(펀)


[인용] 홍산문화 발견의 파장


[출처] KBS 역사스페셜(http://www.kbs.co.kr/history/)

-> 제안 및 시청소감 2000/12/24 (04:07) Article Number : 2862

글쓴이 : 사학과


홍산문화 발견의 파장


발해북안의 신석기문화중 가장 주목할 문화가 <홍산문화>입니다.

이 홍산문화는 실로 엄청난 문화입니다.

이 문화를 발굴하므로 인해서 중국은 황하중심문화전파론을 지양하고 이른바

'다중심문화론'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산동반도에서 발견 되는 북신문화-대문구-용산문화가 바로 이(홍산)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문화가 바로 고조선 중심지였다고 우리나라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는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국학자 부사년이 주장하였던 이하동서설의 주인공인 夷가 바로 고조선인이거나

그 선조였다는 이론으로까지 확산될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 학계의 일부에서도 이 문화를 가지고 고조선이 실제로

기원전 2333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 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고조선의 중심이 평양으로 주장하는 학자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문화는 또한 한단고기를 중심으로 하여

꾸준히 강단 사학계를 한반도 중심의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했던

재야사학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홍산문화는 황하문명 보다도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한 유적이 보이며

성곽이나 왕궁터등이 발견되어

고조선이 건국되기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근거까지 되었습니다.

한단고기에서 나오는 배달국이 바로 홍산문화(B.C.4500~B.C.2500),


더 나아가 홍산문화의 전신인 흥륭화문화, 신락문화(B.C.6000~B.C.5000)를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산문화는 요녕지역과 내몽고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약 6천년전의 신석기시대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됩니다.

홍산문화는 앙소문화의 채도와 이전단계의 연속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등을

융합하여 한단계 발전하여 전개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고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반도
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東夷族'의 활동지역을 문헌상으로 보면, 하북성동북부와 산동일대, 양자강하류

유역등입니다.


산동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북신문화인데,

북신문화는 7천년전까지 소급되어지고 황하의 자산, 배리강문화와 뚜렷
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B.C.4500년경의 이지역 대문구문화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습니다.

대문구문화는 하남성서쪽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써 東夷系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됩니다.


홍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입니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판을 잘라 묘실벽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 상류지역 요녕성 우하량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기간 변하지 않는 그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 은(나라)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
합니다.

역사상에서 홍산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단계인 홍산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고유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고전이나 사서에 나오는 황제헌원과 대결을 벌였던 치우의
세력 근거지로도 지적이 되기도 하는데

황제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마천의)[사기]에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홍산문화 이후 하가점 하층문화(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는데

홍산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 문화는 바로 고조선의

문화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홍산(紅山)문화는 소하연(小河沿)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문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거의 공식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소하연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 하층문화, 구체적으로 풍하(豊下)문화에서는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서기전 2천4백년경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 요동, 요서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기 까지 합니다.

이 홍산문화의 발견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역사를 다시 써야할 정도로

파장이 실로 큽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문화를 들고 있습니다.

즉 홍산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산동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북신문화-대문구문화-용산문화-악석문화로 이어지는 산동문화와

흥륭화문화,신락문화-홍산문화-하가점하층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도 산동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민족이었나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전백찬같은 중국학자의 일부가 사적상에 보이는 辰國(고조선)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홍산문화는 고조선인의 선조가 일으킨 문명일까?

분명한 것은 중국학계에서도 은나라때까지 화하족이 하북성과 산동성을

넘어오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동이족이 과연 고조선인 이냐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을 예전의 평양에서

요서,요동등 요녕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기원도 그곳에서 발생하여 한반도로 이주를 해왔다는 이론이

점차로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기 때문에

홍산문화의 주인공 나아가서 중국의 문화의 중요한 획을 그었던 세력이

누구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을 떠나서 분명한 것은 이 문화가

고조선을 건국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참조-고고학님의 글 옮김

1. B.C.6000~B.C.5000


요녕(요동,요서)지역(동이족) - 흥륭화문화,신락문화
산동지역(동이족) - 북신문화
황하유역(화하족) - 자산문화,배리강문화

 

 

<참고3>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황하문명의 주역


이하동서설은 중국의 역사학자인 '부사년'에 의해 발표된 논거로써

고대에는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에는 하夏족(중국민족의 모태)이,

동쪽에는 이夷족(한민족의 모태)이 분포하여 살면서 각각 황화문명을

일으켰다는 논거이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일제시대였었는데 중국에서는 부사년이 워낙 유명한 학자였고

전통적인 중국민족의 고대사인식을 반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논거가 일반화 되었었다.


(퍼온이주: '부사년'이 '하이서동설(夏夷西東說)' 이라 하지 않고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 이라 한 것은

이夷의 東문화가 더 빠르고 우수하였다 하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으로 보임.)


당시 고고학적인 성과에 있어서도 부사년의 <이하동서설>을 뒷받침 해줄만한

충분한 성과가 있었다.

실제로 황하유역의 상류를 중심으로 발견된 <앙소문화>와

황하의 중하류에서 발견된 <용산문화>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대표적인 문화로 토기에 있어서도

서쪽의 <앙소문화>의 토기는 채색빛을 띠는 '채도'였었고

동쪽의 <용산문화>는 회색빛을 띠는 '흑도'였었다.

이러한 현격한 문화차이를 보이는 유물들은

중국의 고대문화는 중국대륙을 중심으로 서쪽의 하족과 동쪽의 이족이

각각 일으킨 것이라는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의 논거를 충분히 뒷받침 해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논거가 힘을 잃게 된 것은 고고학적인 발굴이 계속되면서

앙소문화(BC5000 -BC2000)가 용산문화(BC3000 - BC1500)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앙소문화> 상층에서 <용산문화>가 발견되어지고 나서부터이다.


이 때부터 서쪽의 <앙소문화>가 동쪽의 <용산문화>로 발전되어졌다는

논거가 우세하여졌고

중국민족의 모태가 되었던 하족에 의해서만 황하문명이 발전되어졌다는

논거가 공식화 되어졌다.

중국의 동부에 분포하여 살면서 하족과 대립하였던 동이족의 활동과 문화에

대하여 나오는 중국의 고대사서보다는

고고학적인 발굴성과를 중요시 하게 되었고 최근에 까지도 이러한 논거가

힘을 발휘했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고고학적인 발굴은 계속되었고

용산문화의 전신인 문화가 용산문화의 분포지인 요서,요동일부 산동,하북,

안휘일대에서 발굴되면서부터 또다시 부사년의 이하동서설이 거론되어졌다.

지금까지는 서쪽의 앙소문화가 동쪽의 용산문화로 발전되어졌다는 논거가

우세하였으나

앙소문화와는 다르며 용산문화와는 문화적인 동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더오래된 문화를 그 일대에서 계속적으로 발굴하면서 중국의 고대사는 또다시

재평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이족의 분포는 중국의 사서에 의하면

중국의 동부일대인 하북성, 산동성, 하남성, 안휘성과 중국동북부인

요서,요동일대이며

이는 용산문화가 발견된 지역과도 일치가 된다.


1.<북신문화>(北辛文化)는용산문화가 발견된 지역에서 발견된 가장오래된 문화로

<북신문화>는 대략 BC 5000년 이상까지 소급이 되며 이는 중국의 앙소문화가

생긴 시기와도 거의 일치가 된다.


2.<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는 대략 BC4500년까지 소급이 되며, 앙소 문화와는

많은 차이점을 들수 있다.

이는 후에 <용산문화>로 대체를 하게 되는데,

대문구문화 말기인 태산 동남쪽 거현 유적에서는 원시 한자(漢字)가

질그릇에 새겨져 출현한다.

조(早, 朝)의 원형이 되는 상형 글자이다.


(퍼온이주: 위의 '조(早, 朝)의 원형이 되는 상형 글자' 라는 것에 대하여

'아사달 문양' 즉 '(고)조선'을 의미하는 문양으로 인식되고 있음.)


3.홍산문화(紅山文化)는 요녕지역과 내몽고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6천년전(B.C.4,000)의 신석기시대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된다.

그 존속 연대는 B.C.3500 ~ B.C.2200년으로 밝혀져 있고,

분포지역은 철리목맹(哲里木盟)의 남쪽, 적봉(赤峰)지역 및 조양(朝陽),

금주(錦州) 일대이며, 남쪽으로 하북성 북쪽지역을 포괄한다.


4.용산문화(龍山文化) - <대문구 문화>의 뒤를 이어 <용산문화>는

BC 2800 BC 2000년 사이에 하남, 섬서, 산동, 하북에 근거했다.

그 중심지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역성현(歷城縣) 용산진(龍山鎭)

성자애(城子崖)유적이다.


이렇게 <용산문화>는 한민족의 모태가 되는 동이족이 세웠다는 것이 현재

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거의 공식화 되고 있으며

이 문화는 고조선을 세우는데 하나의 바탕이 되었다.

고대에 한민족의 역사무대는 한반도 보다는 중국의 동부인 하북,하남,

산동일대와 요서,요동일대였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된다.


(퍼온이주: 역설적으로 서부의 <앙소문화> 상층에서 동부의 <용산문화>가

발견된다는 것은

<앙소문화> 지역 즉 황하상류에서 동부의 문화인 <용산문화>를

받아들였다는 의미가 됨.

실제로 <용산문화>와 같은 문화권인 <요동 요서>에서 4400년전 청동기가

발굴되었는데

그동안 흔히 황하문명이라 일컬어지던 황하 상류 문화권 지역에서는

4200년전 청동기.

고대 우리 민족(동이東夷인)의 중심지였던 <요동 요서>의 청동기가

약 200년 빠름.

현재 중국에서 건국 시조로 받들어지는 동이인東夷人 <황제헌원씨> 의

후손들인 <요임금> <순임금> 이

원조 동이국인 동쪽으로부터 청동기등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임.)

 

 

 

출처 : 다음 세계엔 한류방에서 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