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1 동이문명관련·동북공정

요서지역 청동기문화 - 하가점상층문화와 동호족(東胡族)관계

monocrop 2006. 12. 29. 23:59

요서지역 청동기문화 - 하가점상층문화와 동호족(東胡族)관계

요동지역 청동기문화의 주체세력은 분명 고조선이다.  

문제는 요서지역의 청동문화의 주체가 누구냐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요서지역의 청동기문화인 '하가점상층문화'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여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하가점상층문화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문화적 점이지대로서 시베리아 대륙문화와 중국내륙문화 및

만주지역 고조선문화가 복합적으로 관계되는 중간지대였다.

이 지역 담당문화와 관련하여 역사상의 동호족(東胡族)이

거론되고 있으나, 이 또한 구체적 정황하에 이해되어져야 한다.


 대부분의 중국과 일본학자들은 요서지역의 청동기문화인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를 창출한 세력을 동호족(東胡族)으로 보고 있다.  

중국학자 근풍의(革斤楓毅)는 동호족설의 근거로

[사기(史記)] 흉노열전(匈奴列傳)의 기록과 개(犬)순장과 축견(蓄犬)의 풍속이 동호족의

후예인 오환(烏桓)의 역사기록과도 일치하고,

묘제가 동침장(東枕葬)으로 오환(烏桓)·선비(鮮卑)족이 태양숭배사상을 지니고 있음을 들면서

동호족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임병태교수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데, [사기] 흉노열전의 기록에

'연(燕)의 북방에 동호(東胡)와 산융(山戎)이 있었는데 진개(秦開)의 동호격파이후

장성(長城)이 축조되고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등지에 요서군(遼西郡)과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여 동호에 대비하였다'는 내용을 대능하유역 중심에 동호가 있어서

이를 대비한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북경부근의 연나라의 위치에서 볼 때

대능하유역은 연나라의 동방에 있어야 하지 북방에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더구나 시기적으로도 소왕대(昭王代:B.C.311-279)에 쌓았다는 동호관련 장성축조나

진개의 활약시대가 기원전 4세기말에서 3세기초의 일이므로

서주말춘추초(西周末春秋初:B.C.8-7세기)부터 전개된 이 지역 청동기문화를

기원전 3세기초의 사건과 연결시키는 것이 무리라 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와서야

등장하는 동호를 진문공(晉文公)과 진목공(秦穆公) 등이 활약한 기원전 7세기대와

같은 시기로 연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개를 기르는 축견(蓄犬)과 개를 순장하는 풍속도 비단 동호족뿐만 아니라

황하유역의 중국내륙과 동이족(東夷族)들도 다같이 있었는데 부여의 관직명에 구가(狗加)가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오환선비족이 축견하였다는 기록은 유목생활(遊牧生活)의 특이한 풍속을 중국측 입장에서

기술한 부분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하가점상층문화에서 출토된 유물의

개문양과 같은 품종의 개그림(犬畵)이 그려져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태양숭배사상도 비단 동호족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에 광범위하게 퍼진 공통된 사상이고

오히려 남만주와 한반도지역에서 더 유행하였던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호족은 후예인

오환선비족의 생활과 비추어 보아 유목사회의 성격을 지녔을 것으로 보고

정착농경사회였던 하가점상층문화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임병태의 분석은 대단히 타당한 바이지만 하가점상층문화를 정착농경문화로 본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  하가점상층문화는 북방의 유목적 요소와 남방의 농경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맺어진 반농반목적 정착생활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요동지방에

부여가 반농반목의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과도 관계된다.  이것은 자연지리적 환경으로

보아 요서지역의 대능하 유역이북과 요동지역의 동북평원이 초원지대로 연결되어 있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근풍의(革斤楓毅)는 내몽골 오한기(敖漢旗) 주가지(周家地) 45호묘의 인골(人骨)에 둘레는

밀어서 깍고 가운데의 머리만을 땋아서 기른 편발(編髮)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가점상층문화가 편발의 전통을 지닌 오환선비족의 선조인 동호족의 문화가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주가지묘는 옹우특기(翁牛特旗)와 오한기(敖漢旗)의 경계를 이루는

노합하(老哈河) 중하류역 우안(右岸)에 위치하고 있는데 석묘계통은 전혀 보이지 않고

흙구덩이를 파고 묻는 토광묘(土壙墓)를 주된 묘제로 하고 목장구(木葬具)를 사용하기도

장법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45호묘에서 마포(麻布)로 만든 복면을 하고 편발의 흔적이 두개골에 남아있는

남성인골이 나왔는데 이를 편발풍습의 증거로 보고 있는 것이다.

주가지묘들의 대다수는 머리를 서북쪽으로 둔 서북향(西北向)으로

다른 하가점상층문화의 동향(東向) 묘제들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중에는 개뿐만 아니라 소, 말 등의 머리가 순장되어 있는 점에서 개나 돼지의 머리를

순장하는 영성(寧城) 일대의 남산근유형(南山根類型)과 조양(朝陽) 일대의

십이대영자유형(十二臺營子類型)과는 다르다.

토기도 소면무문(素面無文)의 적색과 갈색계통의 관(罐)과 호(壺)를 위주로 하여 귀(耳)가

부착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으로 하가점상층문화계 토기들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청동기 또한 동포(銅泡:청동단추)와 동촉(銅鏃), 동이환(銅耳環:귀걸이), 조형식(鳥形飾),

쌍미동식(雙尾銅飾), 방형패식(方形佩飾), 연주형식(聯珠形飾), 치병동도(齒柄銅刀),

동추(銅錐:청동송곳) 등으로 주로 시베리아 북방식 청동기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어

하가점상층문화중에서도 북방식 청동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보고자에 따르면, 대략 춘추시대(春秋時代)에 해당하는 시기의 유적이라고 하는데

지역별로 보면 대정유형(大井類型)과 남산근유형의 중간지대에 해당한다.

시기별로 보면 대정유형 말기와 남산근유형 중기에 해당하며 묘제가 토광묘계통인 것을 보면

대정유형에 속하지만 청동제 장식류나 골촉, 골방추차가 남산근유적의 것들과 유사한 것을

보면 남산근유형에 가까운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하가점상층문화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유물적 정황으로 보아 유목문화적 성격을 강하게 풍기고 있으며 농경문화적 요소는

거의 보이지 않아 목축과 농경을 병행한 하가점상층문화의 남산근유형이나

십이대영자유형과는 성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주가지유적은 하가점상층문화의 일부에 속하지만 문화적 성격이 가장 먼

북부 대정유형에 가까운 문화라고 볼 수 있고, 동호족이나 동호족의 전신으로는

볼 수 있지만 하가점상층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문헌상으로도 동호가 강대하고 장구한 역사를 지닌 세력을 형성하였다면

흉노열전이나 조선열전과 같이 동호열전도 사기에 전재되어야 옳다.  

중국학계의 주장과 같이 요동의 조선에 비해 요서의 동호가 중국지역에 더 가깝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면 열전으로 기록되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일단 열전으로 되지 못한 것은 국가적 세력을 이룩하지 못하였던 증거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동호라는 명칭은 한(漢) 사마천의 [사기]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다.  

[사기] 흉노전에 나오는 흉노와 구별하기 위해 같은 북방족인 동호를 흉노의 동쪽에

있었으므로 동호라 한 것이다.  

사기 이외의 동호기사는 [산해경(山海經)]에 등장하는데 [산해경]은

진나라이전(先秦)시대의 [산해경]에 후한-위진(後漢-魏秦)시대의

[대황사경(大慌四經)]과 [해내경(海內經)]을 덧붙인 것으로 후한시대이후의

[해내서경(海內西經)]에 동호기사가 실리고 있다.

그러면 하가점상층문화가 전개되기 시작한 기원전 9세기부터

중원지역 북방에 자리잡았던 호(胡)는 동호가 아닌 임호,누번과 그선대인 알윤 등의

유목계 종족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기] 흉노전의‘연북유동호산융(燕北有東胡山戎)’기록은 임병태의 지적처럼

그 앞구절에‘진북유임호누번지융(秦北有林胡樓燔之戎)’과 같이 댓구되는 연속적인

나열에 불과할 뿐 시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동호는 흉노와 연(燕)과의 관계기록에만 등장하고 있어 기원전 4세기이전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동호가 흉노의 모돈(冒頓)에게 패하여 역사에서

사라질 때까지 요서지역서부에 일부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사기 흉노전에 보면 동호족의 생활근거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계곡에 분산하여 거주하였으므로 능히 하나로 통일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요서지역에서 계곡에 분산하여 거주할 만한 곳으로는 내몽골 동부지역인

대흥안령산맥남단이나 난하상류지역이지 대능하중상유역이나 하류지역의

평원지대일 수가 없는 것이다.



동호이전 시기부터 동호의 발흥초기까지 존재했었던 산융(山戎)역시 동호족과 유사한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도면그림의 하가점상층문화 분포지역중 임서(林西)지역

대정유형(大井類型) 청동기문화가 내몽고 동부지역 서납목륜하(시라무렌강) 상류지역의

고원지대에 분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정유형(大井類型)은 하가점상층문화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건조초원지대의

환경으로 양(羊)을 주된 가축으로 기른 유목문화적 성격이 비교적 강한 청동문화이고

시기적으로도 기원전 10세기대에서 기원전 7세기경까지 존재하여 산융의 활동시기와

유사하다.  

동호는 산융의 일파로 생각되는데 후에 오환과 선비로 나누어져 후에 북으로

이동한 곳은 대흥안령산맥 서단일대이므로 동호의 원래 근거지는

북경의 연(燕)의 북쪽, 진(秦)의 장성이북 난하상류지역 일대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정황은 흉노의 모돈이 동호를 격파하고 좌방왕(左方王)을 상곡에 배치하고

동으로 예맥조선과 접하였다는 역사적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다.  상곡은 오늘날의

장가구와 회래 일대이므로 동호의 근거지 또한 이 일대인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즉 하가점상층문화와 흉노의 수원(綏遠:Ordos) 청동기문화와의 경계지역에

동호족의 복합적 성격의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북방문화적 요소와 하가점상층문화적 요소가 융합되는 듯한 현상을 보이는데

북방식동검에 비파형동검의 검날형식이 채용되고 있는 동검의 출토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동호족의 근거지는 하북성북부 난하상류지역인 승덕, 융화 등의 장성일대이다.  

이 일대는 요서지역 하가점상층문화와 산맥으로 경계지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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