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1 동이문명관련·동북공정

동북공정은 유태인계 중국인짓? or 유태인의 영향?

monocrop 2006. 12. 26. 13:53

중국 유대인의 행적과 고난사

 

- 솔로몬왕국의 교역무대 중국으로 진출한 유대인-

 

- 역사적 유대자본이 세계적 화교자본으로 -

 

[본문스크랩] 중국의 유태인 | Faver01 포스트 삭제 2006/12/26 13:48
http://blog.naver.com/arcyoon/30012510794
출처 블로그 > 인터네피아
원본 http://blog.naver.com/killidmg/130001642158

 


 
 

이미 수 천년 전부터 중국 땅에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는 말을 믿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는 오래전부터 유대인들이 살았고 중국의 정치 경제사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오늘날 중국을 움직여 온 등소평 또한 중국계 유대인이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해외로 진출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한 화교들의 상당 수가 중국계 유대인이다. 오늘날 이들은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 주역이 되고 있으며 홍콩의 주인이기도 하다

 

 

 

 

 

 

 

 

 중국에도 유대인이 살고 있다.

 

최고의 과학 문명 속에서 살고 있는 오늘날 인간의 지식으로 파악하기 힘든 불가사의의 하나가 유대인 문제이다. 역사상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건은 거의 유대인과 연관되어 일어나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민족의 숫자는 겨우 400만 명으로 세계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극히 미약한 민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 정치 사회 문화 할 것 없이 유대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세계문제를 관심 있게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유대인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는 일이기도 하다.

 

얼마 되지 않은 유대인 그 자체가 기적이다. 유대민족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우리나라 신라 초기 전 세계로 흩어졌다. 그런 유대민족들이 오늘 날 그들의 전통과 언어를 간직한 체 그들의 고향 땅인 고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바로 그것이다.

 


 

예루살렘 Jerusalem
 
 

 

인구가 많으면 그 중의 일부가 살아남아서 자기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민족 가운데 가장 작은 민족이 그렇다. 우리나라 또한 과거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하마터면 우리의 글과 말을 잃어버릴 위험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물며 하나 둘 뿔뿔히 흩어진 민족이 2천년이 지난 오늘날 그들의 말과 글을 보존하고 자기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돌아오는 그들 가운데는 백인종이 있는가 하면 흑인도 있고 황인종도 있다.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2000년 동안 흘어져 살아온 만큼 이미 그 나라 사람화 된 것이다. 오랜 방랑생활 가운데 유대민족이 겪은 수난과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역사상 수많은 왕조가 유대인들을 몰살하기 위한 기도를 꾸몄고 근세에는 유명한 히틀러의 유태인 박해를 들 수 있을 만큼 유대인 역사는 수난과 방랑의 역사였다. 그러나 세계를 움직이는 손가락을 꼽을만한 정치가, 경제인, 학자들 가운데 대부분이 또한 유대인이다.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유대인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마인츠 유대인 묘지(사진 = 월간조선)
 
 

 

어떻든 그 유대인들이 최근에도 계속 그들이 속한 땅에서 자기들의 고향인 이스라엘로 돌아 가고 있다. 소련 내에 거주하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고향 땅으로 돌아갔고 지금도 돌아가는 중이다. 돌아가는 유대인 가운데는 동양계 유대인도 상당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랍과 인도. 인도지나에 사는 많은 유대인들이 그의 땅에 돌아갔고 중국계 유대인도 그들 대열에 끼었다. 설마 중국에도 유대인이 있었을까? 만일 중국에 유대인이 있었  다면 그 많은 중국과의 교류에서 우리나라에도 유대인이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과 인접해 있는 우리 또한  관심이 없을 수 없다. 1986년 대만 정부산하 연구 기관 인 中央硏究院이 발행한 한 문헌에 의하면 현대 중국 대륙의 실권자인 등소평도 그 조상이 유대인 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동서양의 정치적 실권자들 그 모두가 유대인 이거나 유대 인의지지 하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이스라엘과 너무나 거리가 먼 중국 땅에 정말 유대인이 살아왔는가 하는 문제 이다. 그리고 그들도 다른 이방 땅에서 많은 고난을 받았던 유대인처럼 고난을 받고 살았 는지?

 

유대사(성경) 예언서에 보면 유대민족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죄로 전 세계에 흩어 지게 되며 그곳에서 수많은 고난과 조롱을 당해야 할 것으로 운명지어진 민족이기 때문 이다.

 

유대인에 관한 기록은 무척 많지만 동양인 중국과 우리나라에는 그 기록을 찾아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더 더욱 중국 땅에 유대인이 살고 있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다. 그러나 l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이 만주에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자는 국제적인 제의에는 나름대로의 상당한 자료를 가지고 한 제의였다.

 

일본이 대륙 침략 전쟁에서 유대인들에게 큰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일본이 러일전쟁시 거의 패전 상황에서 유대인의 엄청난 재정적 도움으로 전쟁에 승리한 사실이 있다. 사실 일본은 러시아 전쟁 초기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일본은 러시아 함대에 맞설만한 전함도 없었고 엄청난 전비로 수 많은 군수물자를 선박으로 수송하는데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일본에게 뉴욕의 금융재벌 야곱 시프라는 유대인이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2억 5천만 엔의 엄청난 액수의 전쟁채권 모집에 선뜻 지원함으로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 군부는 동남아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함을 임차하여 군사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최강 러시아 극동함대를 동해상에서 격파할 수 있었다.

 

 


Jacob Schiff
 
 

물론 세계적 제국을 형성하면서 강력한 정보력을 자랑하고 있었던 영국 정보기관의 도움을 얻은 것은 물론이다. 제임스 본드 영화에 출연하는 영국 정보기관 M2는 유대인이 관장하는 세계 유대 정보통으로 유명하다. 결국 미국 유대인이 출연한 거금이 영국 유대인의 수중으로 장소만 옮겨간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만주에 유대국을 설립하자는 일본의 제안은 러일전쟁 때 진 빚을 갚으려는 동양적인 양심만은 아니었다. 물론 일본에 전비를 대준 유대인은 일본이 생각하는 것처럼 일본을 위해서 만은 아니다.

 

재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유대인 세력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혁명이 성공해야 러시아에 살고 있는 비참한 800만 동족을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러일전쟁 패배 이후 재정 러시아는 극심한 재정난에 부딪치면서 볼세비키 공산혁명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러일전쟁 자료사진
 
 
 
 
 
 
 

일본은 1938년 만주에 유대국 건설을 국제연맹에 제안

 

일본은 실제로 1938년 국제연맹 창설 후 당시 세계적 이슈로 등장한 유대국 건국을 만주에 건설하자는 안을 추진하였다. 당시 국제연맹에서 일본의 제안은 많은 나라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독일, 프랑스, 이태리 등 유대인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나라들은 이의 실현을 위해 상당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 계획은 유대인의 반발과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되었지만 한 때 국제적으로 인정되어 추진된 과제였다. 일본의 제안은 역사 상 국제무대에서 처음 유대인 국가건설을 제기 한 것이 되었고 이 제안 이후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에 대하여 미국 영국 등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아낸 것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은 전후 일본의 복구와 관련하여 국제 기구의 수많은 재정원조를 받았다.

 


 

청도에 도착하는 일본군
 
 
 

물론 일본의 이러한 발상 뒤에는 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1900년대 초 이미 만주를 비롯 한 중국지역에는 수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1912년 일본군 정보국장으로 만주에 들어 갔던 일본군 육군 중장 四王天廷孝에 따르면 만주 곳곳에는 이미 많은 유대인 사원들이 있었다.

 

단서는 중국인과 이곳에 진출한 러시아인, 러시아 군인들이 예배의식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들 중국인들은 유대 복장을 입지 않았어도 전통적인 유대종교 양식에 따르고 있었고 두루마리 토라를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곳에 나와 있던 소련군내의 유대인들과 히브리어로 서로 얘기하고 예배도 보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상당한 유대인이 만주에도 중국에도 있었다는 얘기이다.

 

중국의 유대역사는 최근 들어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구각국의 유대사는 거의 많이 알려져 있지만 우리와 아주 가까운 중국에서의 유대사는 어느 유대역사보다 흥미 있는 일일 것이다.

 

하버드 대학 역사학 교수 Walter Hicks는 중국에서의 유대사는 세계역사 중 가장 기묘한 것 가운데 하나이며 영국 내에 2천년동안 잉카의 식민지가 있었다던가 노르웨이 속에 아라비아의 식민지가 있었다는 사실보다 놀랄만한 일이라고 얘기할 정도이다. 

 

그간 별 관심 없이 보아왔기 때문에 눈에 들어 나지 않았지만 중국 정사에도 중국 유대의 기원과 최초의 역사에 대하여 확실한 역사적 기록들이 많이 나타나 있다. 다만 그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가 없었기 때문에 대체적인 역사적 기록과 사실만으로 윤곽을 살펴볼 수 있을 정도이다.

 

고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실여부는 흔히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어야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오늘날과 달리 대규모 통신 및 기록매체가 없었고 교통기관 또한 극히 미미한 당시에 소규모의 교류가 기록으로 남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다. 더욱 국가적 체계가 미비한 고대사회에서 민족간의 교류는 변경지역에서 소수의 물물교환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중국의 경우에는 한 족 이외의 교류는 오랑캐라고 하여 기록에서 제외하였다. 이런 점에서 중국에서 나타나는 역사적 기록은 변경지대에서 일어나는 소규모의 물물교환의 차원이 아닌 꽤 규모가 큰 교류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떻든 솔로몬 왕 시대의 유대에 관한 일들을 이미 중국에서 알고 있었다는 얘기는 믿을만할 이유가 있는 것으로 중국 사학계는 보고 있다. 특히 등소평이 이끄는 실용주의 대외 개방주의자들이 실권을 잡은 후 중국 역사가들은 중국의 대외 협력사나 교류사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결과로 오랫동안 묻혀왔던 초기 중국 유대인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많이 발굴되고 있다. 중국 측의 자료에 의하면 솔로몬 왕 시대에 이미 많은 유대인들이 중국 곳곳의 유명한 항구에 드나들고 있었다. 당시 기록에는 그들이 중국과 이스라엘과의 왕복에 3년 가까이 걸리는 거리로서 상당히 먼 거리를 항해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의 항해 기술과 장비로는 거의 3년이 걸리는 거리라는 것은 현대 학자들에 의해서도 밝혀지고 있다. 그 이전에 중국에 외국 상인들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많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중국에 들어왔고 인도상인들도 왔다.

 

아라비아(바벨론 땅)와는 이미 육로나 해로를 통해서 중국과 많은 무역을 해 왔기 때문이다. 바벨론에는 비단 등 중국의 산물이 많이 들어와 있었고 중국이 잘 알려져 있었다.

 

 


 

‘성막을 봉헌하는 아론’

고대 바벨로니아의 두라 유로포스에

있는 3세기 유대교 회당의 성서벽화의 일부.

 

 

 

 

 

주전 1200년경 이미 유대인이 중국에 들어오다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중국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온 유대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포로 생활시 바벨론 상인들을 통해서 중국에 관한 것을 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더러는 바벨론 사람과 함께 이미 알려져 있는 육로를 통해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낙타 대상의 일원으로 중국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에는 차와 도자기 최음제 등 서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산물이 부하여 중국과의 무역 에는 많은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이재에 뛰어난 유대인들이 각 나라와의 무역에 참여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래서 다수의 유대인들이 자연적으로 중국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오래 전 중국과 유대와는 교류가 있었고 유대인들에게 중국이 잘 알려져 있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유대사(성경) 이사야서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열국에서 피하여 고토로 돌아 올 것을 예언하는 중에 "보라 혹자는 원방에서 올 것이요 혹자는 북으로부터 서 쪽으로부터 올 것이요 혹자는 시님의 나라로부터 올 것이요" 라고 되어 있다.

 

성경 연구의 권위자들에 따르면 시님이 곧 중국을 가르칠 것이라는데 일치하고 있다. 시암은 오늘 날 중국 남부 광동 복건지역을 가리키는 말로서 고대 중국 대외무역 기지였다.


 

복건성 무이산
 
 

이사야시대 이전 유대에 중국이 알려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사야 시대 이미 유대인이 중국에 살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거주할 것이 이미 예상될 만큼 많은 교류가 있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실제로도 당시 유대인들이 중국 땅에 들어갔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중국의 옛 무역항의 하나였던 산동성 지역에서 발견된 옛 비석에는 주 나라 때 유대인이 중국에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周)나라는 기원전 l220년부터 220년까지 900년간 중국을 지배한 나라로서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시대가 그 사이에 들어있다. 

 

중국인들이 희랍이나 로마와 비단무역을 했던 시대에 중국인 스스로 외국에  나가서 장사를 했다는 기록은 지금까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이런 사실 서양의 중개자들에 의해서 무역이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옛 기록물에도 여러 곳에서 이들 중개자들 가운데 상당한 유대인들이 들어 있다. 솔로몬 왕 당시 이스라엘이 유럽 및 아시아 각국과 많은 교역을 하였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다른 중국학자에 따르면 유대인이 중국에 들어온 것은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무리들이 들어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이 앞서 말한 주나라 때이다. 그 후 유대 이민은 한나라 文帝 때 들어 온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한나라는 기원전 205년부터 기원 220년까지 계속된 나라로 문제는 기원 56년부터 75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1900년 뉴욕에서 발행된 "중국 유태인"의 저자 Jhon Etrer에 의하면 기원 3-4년 후 곧 바로 다른 유대인 이민이 중국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당시 이주민들의 증언이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과 바벨론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는 증거와 일치하고 있음을 들고 있다.

 

또한 역사학자인  Parl Grace에 의하면 기원 231년경 바벨론의 혹심한 유대인 박해를 피해 다수의 유대인이 중국에 들어왔다고 말하고 있다.

 

옥스포드 대학 Jewbernce 교수는 기원 960년과 l206년 사이에 다른 유대인 식민이 인도로 부터 중국에 들어왔다고 말하고 있다. Grace는 그 식민단은 배로 왔기 때문에 육로를 통해 왔다는 기록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베를린대학 Erger Autra는 보다 충분한 문헌을 배경으로 유대인의 중국이민을 설명하고 있다.

 

현재 중국 남서부 협서성 지역의 보가라(지명) 유대인은 그들의 조상이 바벨론의 여러 지방에 살았는데 특히 메시에스트로부터  2일 거리의 사브사와 라는 곳에 살았다.

 

그런데 1220년경 정복자 징기스칸 치하에서 바루구와 사마르간트로 이주했다. 그러다가 몽고제국 최후의 한국이 1598년 멸망했을 때 유대인들은 다시 보가라로 넘어와 유대인 식민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보가라에서 약간의 유대인이 중국의 찌엔, 「바스짼」으로 이민했지만 모국과 교통이 완전히 끊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를 비롯한 서적들은 항상 같이 가지고 다녔다고 쓰고 있다.

 

이상과 같이 유대인들이 중국에 들어간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 반면 유입경로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최근의 비교적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중국 측 문헌에 의하면 중국에 유대인이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기원전 995년경으로 굳어지고 있다. 이는 솔로몬 왕이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지난 때로서 다윗 왕을 거쳐 이스라엘의 영광이 최고에 달했던 때이다. 

 
 

 

솔로몬의 이야기가 삽화로 수록된 15세기의

중요한 사본인 (밸리공의 그림이 들어 있는 성서)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많은 나라와 무역을 하고 있었던 때로 시기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들어간 경로도 중국 해안지역에서 많은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해로를 통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중국에 많이 들어간 시대는 기원전 580년경으로 주나라 후기이다.

 

이 때는 육로로 중국 남서 산악 협로를 통해 오늘날 중앙 아세아 카슈밀 지역으로 들어왔던 기록이 있다. 이 시기는 유대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시기(BC586년에 포로에서 석방)이므로 일단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박해를 피하여 비단과 황금의 나라를 찾아 중국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가 기원 58년에서 75년경 소수의 유대인이 중국에 들어왔고 기원 103년에서 117년 사이 後漢의 和帝, 安帝 때 중국 대륙의 혼란을 틈타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중국 땅 깊숙이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들 세력은 타림분지의 넓은 초원지대를 배경으로 유목생활로 상당한 배경을 가지고 오늘날의 산동성이 있는 칭뚜(청도)까지 진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기원 78년 로마에 멸망당하고 전 세계에 흩어진 30년이 지난 후로서 흩어진 이스라엘의 일파가 중국 쪽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시대에 중국에 들어온 유대인들은 중국 변방에서 중국세력과 여러 차례 충돌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의 칭뚜 지역에서 번창했던 유대인 세력은 기원 230년경 중국 후한과 세력다툼을 벌릴 정도였다.

 

그래서 후한 이후 촉 나라는 남만의 후한을 없애려고 4년간의 추격전을 벌려서 이들 세력을 평정하고 만다. 삼국지 소설을 통해서 널리 알고 있는 제갈공명의 남만정벌이다.

 

 


 
제갈량이 남만정벌중 제사올리는 모습(드라마 장면)
 
 
 
 

 

 

제갈량과 싸운 유대인 세력

 

남만 왕 맹획(중국 남방 발음으로 미후이로 유대인 이름 가운데 흔한 이름임)은 용맹하기로 유명 하고 각종 화기와 병기, 화약을 잘 이용하여 제갈공명을 괴롭혔다. 맹획의 군대는 머리가 붉고 눈이 파란 귀신과 같으나 지략이 뛰어났다. 제갈공명은 이들을 이용하고자 하여 맹획을 7번 사로잡고 놓아준다.

 

그만큼 맹획의 군대가 용맹하고 지략이 있어 공명이 그들을 이용하려 애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덟 번째로 사로잡혔던 맹획은 제갈공명에게 충성을 맹세하나 중국대륙으로 나가기를 꺼려한다. 촉의 군사가 맹획의 맹세를 믿지 못하자, 맹획은 양을 잡아 피를 흘려 하늘에 맹세하고 일곱 촛대의 제단 에 피를 뿌리며 후일 어떤 일이 있어도 맹세를 지킬 것을 약속한다.

 

모든 것이 유대인의 습속과 같은 것이다. 삼국지에도 나오는 것이지만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낸 다 거나 돌을 쌓는 축성술이 능하다던가. 화약을 잘 이용하는 것이 모두 유대인의 장기이다. 중국 사가들은 맹획의 남만군대가 중국에 진출한 가장 큰 유대인 세력이라고 보고 있다.

 

네 번째 유입 시기는 기원 1000년경부터 1200년경 송나라 시대 때 인도와 동남아를 거친 유대인 들이 중국에 들어왔다. 송나라는 중국문화의 꽃이라고 할 만큼 문화가 발달했고 유럽과도 많은 무역을 하였다. 바다를 통한 무역뿐만 아니라 서역의 육로를 통해서도 비단무역이 성행했던 때로 이란(바밸론)이 그의 중계 무역기지였다.

 


 

 
육로를 통한 비단무역
 
 

다섯 번째, 유입이 많았던 시기는 기원 123O년경 많은 유대인들이 육로를 통해 중국 북경까지 진출 했다. 이때는 몽고가 동서양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로 역사상 동서양이 처음 만나는 시기였 다. 유명한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들어 온 것도 이 때이다. 이 시기는 중국에서도 이스라엘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원나라 태종(쿠빌라이 칸) 왕비는 평생 소원이 그리스도가 태어난 예루살렘에 한번 가보는 것이 꿈이었다고 마르코폴로에게 말했다고 동방견문록은 적고 있다. 또한 예루살렘의 성수를 가져다주기를 청하여 로마 교황이 처음으로 성유를 원나라 황실에 보내기도 하였다.

 

몽고제국인 원나라는 지방관리에도 많은 유대인을 등용하였고 유대인의 뛰어난 장사 능력과 행정, 수리, 재정능력으로 오랫동안 제국의 제정관리 등의 총리직을 유대인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몽고사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학문적 바탕이 없는 유목민인 몽고가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스페인, 터키 등 서구 깊숙이 침략하여 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누가 그들의 길 안내를 맡았고 통역을 담당했겠느냐는 것이다. 당시 몽고족의 학문적 수준은 형편없었고 초원지대에서 과학기술 수준 또한 높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뛰어난 천문 지리학으로 길 안내를 맡았고 서구 곳곳을 침략할 때마다 그 곳 주민들과의 통역을 맡았다는 것이다. 곳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과 히브리말로 통하지 않았나 싶다고 추측하고  있다.

 

사실 중국 원나라의 서방 정벌은 역사상 유대인의 제1차 엑소더스가 아닌가 한다. 기원전 1세기 이전에 중국 땅에 진출해 있던 유대인들이 당, 송나라 시대의 혹독한 박해를 피하여 본업인 목축을 위하여 초원지대인 몽고,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몽고의 새로운 실력자 징키스칸을 도와 몽고를 통일하였고 다시 중국 등 아시아를 재패한 다음 서방 정벌에 나서게 된다. 역사학자들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당시 몽고가 서방세계를 정벌할 아무런 논거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징키스칸을 도와 몽고를 장악한 그의 몇몇의 친구들의 이름이 몽고계의 이름이 아닌 유대계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점이 눈에 띌 뿐이다.

 

이들이 또한 서방정벌의 핵심 인물들이며 대부분 정벌 후 귀국하지 않았다. 중간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유대 땅에서 가까운 인도나 아라비아 지역에 생긴 몽고의 한국의 통치자로 남았는지는 불분명하다.

 

 

 

 

 
몽골박물관의 징기스칸
 
 
 
 
 
 

 

당나라 때는 중원까지 진출

 

유대인들이 중국에 들어온 것은 여러 가지 경로와 시기이지만 공통점은 유대인들 모두가 페르샤(바벨론)로부터 건너오지는 않았지만 페르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유대인이 중국 대륙에 들어온 것은 박해를 피해서였든 장사를 위해서였든 그  숫자가 눈에 띨 만큼 많아졌다.

 

활동 무대도 커서 중국인들에게는 경쟁의 대상에서 경계의 대상으로 변하게 되었다. 당나라 희종(僖宗) 황제는 특별히 유대인을 감시할 필요성을 느껴 일정한 관리를 두어 유대인을 감시하게 하였다.

 

유대인은 특히 그들 종족의 독특한 관습을 지켜왔고 유교와 불교를 배격했으며 재리에만 눈이 어두워 변방의 오랑캐와도 내통하였음으로 유대인들은 안보상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희종 때는 변방과 잦은 전쟁이 있어서 나라가 어지러웠던 때인 만큼 중국 내의 이민족이 특별한 세력을 갖는 것을 원치 않았다.

 

중국 유대인들 또한 다른 나라 유대인들이 당했던 것처럼 오랑캐와의 내통이 화근이 되어 중국에 있는 유대인에게도 커다란 재앙이 덮치게 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가장 큰 무역항이자 기후가 온화하고 산물이 풍부한 교통의 요지인 광동까지 진출하여 살고 있었다. 광동에는 유대인조합까지 생겨 상권을 거의 쥐다시피 하였다는 것이다.

 

 

 


 

중국 광동성에서 발견된 부조

부처가 서양식 천사의 날개를 달고 있다.

 

 

 

 

AD 7년(회종6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광동을 중심으로 한 양자강 이남의 농민들이 부당한 유대인 세력의 횡포와 이를 비호한 관료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 회교도, 페르샤인, 유대인을 합하여 죽은 자가 12만 이상에 달했다고 역사는 적고 있다.

 

광동지역의 유대인 식민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이 이후 중국전역에는 외국인, 특히 유대인에 대한 보복행위가 극심하여 유대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다. 이 시기 유대인 박해는 생존를 위해 지하로 숨어 들어가게 하였고  유대인들을 중국인 화하게 하였다.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해 몽고 등 내륙 깊숙이 들어가 집단을 이루거나 해상으로 나아가 국제무역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점차 자라나서 송나라 때 유대인들은 재차 집단을 이루어 동남아 등지에 진출하게 되었고 아라비아 상인들과 함께 중국 비단무역의 개발진흥과 비단제조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비단옷의 발달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오늘 날 동남아 화교의 조상이 된 것이다.

 

대륙 깊숙이 도망친 유대인들은 징키스칸을 도와 몽고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 몽고왕조의 부흥은 중국에 있어서 다른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마르코폴로(유대인)가 쓴 동망견문록에도 대한(大汗. 징기스칸 등 몽고의 황제를 가리킴)은 왕위 계승의 권리에 의하여 중국을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순전히 정복에 의해 성공했다. 중국 지배논리가 제도와 규범 등 평화적이고 논리적인 문화적 배경보다 칼과 무력을 사용하는 정복의 논리가 지배하였다. 제도적 학문적 수준이 중국인을 따르지 못했다.

 

 


 
마르코폴로의 초상화
 
 
 

중국인들이 가장 무시하는 욕설이 "뭉꾸런"이라 하여 몽고사람을 지칭한다. 중국학자들의 혹독한 표현을 빌리면 몽고족들은 머리로 중국인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인들은 몽고족들을 무시했으며 몽고족 또한 중국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때문에 몽고인들은 이민족인 돌궐인이나 사라센 사람, 또는 유대인들 가운데 그들에게 신복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외국인들을 동원하여 중국인들을 다스릴 수 있는 모든 권력을 주었다. 중국은 상위귀족계급인 몽고족과 이들의 신임을 얻어 중국인을 다스리는 중간계층의 색목인(色目人 눈이 파란 서양사람, 유대인). 나머지 피지배계층 등 3계급으로 나뉘었다.

 

몽고인들은 여기 하층 피지배계층을 하나로 묶어 한족(漢族)이라 하여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민족이 한 순간에 탄생하였다.

 

 

 

 

 

 

징키스칸을 도와 유럽정벌에

 

특히 유대인들은 국가 재정이나 각 지방정부의 세금관리나 조세처리 등 주로 돈을 맡는 관리를 맡았다. 마르코 폴로는 견문록에서 양자강 이남의 벽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지역의 지방재정을 유대인 관리들이 맡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마르코 플로 또한 유대인으로 그들 관료들과 히브리말로 대화를 하는데 조금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 자신도 대한(大汗)의 신임을 얻어 각 지방정부의 조세처리 감사관으로서 5년 동안 중국각지를 여행하였다. 당시 몽고제국의 총리 또한 유대인으로 1354년 난으로 살해되기까지 l8년 동안 몽고황실의 관리책임자였다.

 

몽고 사람들은 특히 유대인들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유목민으로서 생활풍습이 비슷하고 재리에 밝아 돈이 많았으므로 몽고 관리인들에게 뇌물을 많이 바쳐 비위를 맞추기도  하였다. 물론 유대인들이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어떻든 지능이 모자란 몽고인들은 지략 있고 수완이 좋은 유대인들을 동원하여 중국대륙 뿐 아니라 인도 페르샤 중동 유럽 등의 주요 식민지를 다스리는데 크게 이용하였다.

 

 

 


 
헨리 율 경의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 나오는 지도
 
 
 

일부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유대민족이 전 세계로(특히 동양 쪽으로) 흩어지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몽고제국에 유대인들이 깊이 관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몽고제국은 극동에서부터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대제국을 형성하고 있었고 주요 관리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중국에 정착해 있었기 때문에 특히 중국어 등의 언어에 밝았고 몽고어에도 특출한 솜씨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과 동화되어 거의 중국인화 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에 거주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칭기스칸의 정책을 교묘히 이용했던 것이 확실하다. 몽고가 대제국을 형성하는데 드는 수많은 비용을 유대인들이 조달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징기스칸의 둘째 아들 쿠빌라이 칸이 유럽정벌 당시 유럽에 대하여 "과연 내가 어려서 내 친구에게 들은 대로 아름다운 곳이다" 라고 적고 있다.

 

앞서 태종 왕비가 "살아서 예루살렘에 가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얘기와 상통한다. 그러나 태종 쿠빌라이 칸이 어려서 유럽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 얘기를 해준 친구는 누구이겠는가?  바로 유대인 친구이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일찌기 몽고가 대제국을 형성하기 전 외몽고까지 진출하여 몽고의 용맹한 젊은이들과 교분을 쌓았고 서양과 로마의 여러 가지 이야기는 몽고인들에게 유럽정벌의 꿈을 키우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른다. 그 때도 지금처럼 자기 고국 땅에 돌아가고 싶어였을까?

 

 

 

 

 

 

몽고왕조의 고위직으로 중국을 다스리다.

 

그래서인지 몽고 대제국의 유대인세력은 대단했다. 마르코 폴로 자신도 당시의 유대인이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분명히 유대인들은 몽고를 도와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고사에 보면 몽고조정의 주요관리 명단에 중국이나 몽고사람이 아닌 수많은 외국인(한문표기)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몽고는 대제국 건설이후 4개의 큰 세력으로 나서어져 한국(汗國)을 건설했다. 그중 가장 오랫동안 지속했던 킨샤샤 한국은 인도북부에 수도를 두고 오늘날의 중동을 지배한 나라이다. 다른 3개 한국의 유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킨사샤 한국의 궁전과 유적은 원형 그대로 인도 북부 아프가니스탄 접경 인더스강 유역에 그대로 남아있다.

 

이 킨샤샤 한국의 궁전과 유적은 년 전에  KBS TV에도 그 아름다움이 그대로 방영되었듯이 그의 건축양식이 사라센양식에 유대양식이 합쳐진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 관리들  대부분의 이름 또한 유대식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몽고 황제들은 그만큼 유대인들을 신뢰했고 좋아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코  폴로는 유대인들의 연회에는 항상 징기스칸으로부터 크게 우대를 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몽고왕조에 아라비아 사절로 왔었던 이븐 바스다 라는 사람이 쓴 기록에 의하면 1346년에 숫자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항주(杭州)에 들어와 살았는데 그의 거리는 매우 아름다웠다. 이로 미루어 보아 많은 유대인들이 큰 세력을 얻고 중국 땅에 들어와 살았으며 아름다운 거리를 만들만큼 부유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항주의 옛거리
 
 
 

또한 중국에 오랫동안 포로로 붙잡혀 있었던 이태리 상인 가레으스다 페라라는 당시 유대인 사회의 일 단면을 기록에 남기고 있다. 유대인들은 사법문제가 있을 때 그들의 신앙에 따라 서약하는 것이 다른 소수 민족과 달랐다는 것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외몽고 왕조의 실록(매년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일종의 왕조실록) 에도 당시 제국 내 유대인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적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많은 몽고인들이 대제국의 번영을 위하여 유대인과 인척관계를 맺었고 많은 유대 여자들이 몽고황실과 혼인한 기록이 많다. 이 외에도 유대인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대표적 사실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1329년 몽고 왕은 국교에 따라 외국인에게 세금을 무겁게 할 것을 명하였다. 장부에는 세금을 많이 내어야 할 사람의 명단과 세금을 잘 내지 않아서 처벌을 해야 할 사람의 명단이 나오는데 그 대부분이 유대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은 세금을 안 내려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또한 1340년에는 남편이 죽었을 때 그의 처가 자식이 없는 때는 죽은 자의 형제가 취하는 의무를 가진다는 유대율법에 의한 관습을 금지하는 법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 대한 무수한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 만큼 많은 유대인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이 시대에는 유대인은 잡혼을 피하고 유대의 율법을 지켜왔으며 할례를 하는 교도라 하여 몽고사람들은 이들을 챠오첸차오(客中客- 손님중의 손님이라는 뜻) 소위 客家로 오랑케(夷)로 표기하지는 않았다.

 

이 금지법을 레우이레트 금지법이라고 부르는데 이 금지령 이후 유대인과 중국인과의 혼혈이 많이 생겼고 이를 어기는 유대인 여자들을 몽고인 들이 강제로 혼인하여 민족동화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도 수난을 당하다

 

이러한 유대인의 전성시대는 또 다른 유대인의 화를 자초하게 하였다. 유대인들은 몽고인들에 붙어 큰 세력을 얻었고 그것도 세금을 매기는 일에 주로 종사하였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원망과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몽고 관리들의 폭정과 이에 편승하는 유대인들의 과도한 세금징수와 고리대금으로 각 곳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1354년에는 수도에서 큰 폭동이 일어나 유대인 재상 아부레스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회교도와 함께 유대인들이 북경에 소집된 기록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유대인의 수가 얼마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소집된 장졸이 4만에 가까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반란은 진압되어 많은 중국인 주모자들과 백성들이 피살되었고 변방으로의 추방과 함께 약 20만 이상이 손상을 입었다. 이로 인한 중국의 외국인들,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원한은 대단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몽고가 멸망한 이후 중국대륙 곳곳에는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유대인의 숫자는 격감하였고 일부는 외몽고와 만주로 쫓겨 갔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몽고를 비롯한 유대인 등 외국인을 내 쫒아야 한다는 구호로 중국민족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몽고족의 원나라를 패망시키고 명을 세웠다.

 

주원장은 그 자신 몽고세력에 극도로 시달림을 받은 중원지역 출신으로 명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을 때는 오직 중국 민족 만에 의한 중국지배를 부르짖었고 몽고를 비롯한 외국인의 추방과 철저한 탄압이 시작되는 전기를 맞았다. 명나라 초기 100년은 유대인의 대수난기였다.

 

 


 
주원장의 초상화 - 주원장의 초상은 두가지가 전해지는데, 머리에 절상건(折上巾)
쓰고(左),황포를 입은 모습(左)과 왕관이나 면류관을 쓰고있는 모습(右)으로 나뉜다
후자는 주원장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 자객을 우려해서 제작, 유포된 것이라고 한다
 
 
 

 

이 때부터 유대인들은 중국 사람과 혼인, 철저한 중국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위장술로 중국에 동화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챠오첸 챠오"들은 중국 내 다수 도시에 유대사원들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 정보장교들이 1920년 중국대륙에 들어가 하남 開封(남송의 수도였음)의 유대인 예배당에 대한 기록과 유물을 조사한 내용을 보면 중세 중국대륙 유대사원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1160넌 경 송나라가 거란에 밀려 그의 수도를 빼앗기자 새로운 지역을 찾아  수도를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 한 신하가 개봉은 물산이 풍부하며 학문이 높고 인재가 많은 곳이니 이 곳을 도읍으로 할 것을 아뢰인다. 당시 개봉은 유대인이 많이 모여 살던 곳으로 황하 이남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에 1163년 송의 황제는 수도를 지금의 개봉으로 옮기고 그곳에 정착해사는 유대인들의 도움을 얻고자 유대사원의 건립을 허가했다. 그 해에 공사를 시작하여 약2년간 사원건립을 계속했으나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그리나 개봉지역의 유대인 조합은 한층 번성하여 1279년에는 보다 훌륭한 사원을 재건하였다. 초기의 사원이 왜 완성을 보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큰 사원을 만들려던 계획이 제대로 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외국인에 대한 탄압을 계속해 왔던 명나라도 전국 곳곳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유대인 세력을 꺾기에는 애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돈이 많았기 때문에 여러 곳의 지방 토후들과 연합하여 중앙정부를 괴롭혔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이들을 회유하고 집중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송나라 이후 유대인들이 많이 살던 개봉으로 유대인들을 모으는 정책을 견지해 왔다. 개봉에는 유대인의 식민지 건설이 허가됐고 자유로운 경제활동도 보장되었다. 그 후 수많은 유대인들이 개봉으로 모여들었다.

 

 


 

개봉 청명상하원

개봉시 서북쪽에 있으며 북송의 화가 장택단이 그린

《청명상하도》를 저본으로 기초하여  만든 풍속공원이다

그당시의 동경개봉의 번영이 관광객 눈앞에 다시 나타난다

 

 

 

 

1421년 명나라 황제는 유대인들에게 개봉의 유대인 사원을 전에 것 보다 크게 건축할 것을 명하였다. 유대인들은 그의 명령대로 큰 사원을 건축하였고 황제는 사원에 피울 향료까지 기증했다. 유대인들은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리나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또 다른 재앙이 덮쳐왔다. 1461년 중국 대륙에는 역사상 최대의 폭우가 있었다. 황하의 거센 물결과 범람은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올린 개봉의 유대인 사원을 덮쳤고 유대인들을 수장시키는 비극을 가져왔다. 건물과 함께 그들이 사원에 보관했던 모든 성서들이 없어지는 재앙을 입었던 것이다.

 

그 후 다시 개봉의 사원들이 재건되었고 성서의 두루마리가 寧波 또는 寧邱(抗州 서북에 위치한 도시 이름)의 동쪽으로부터 보급되었다. 그러나 비극은 그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1세기 후 개봉의 사원들과 도읍지는 심한 화재를 입어 모두 불타 없어지고 성서들과 기물들도 모두 불타 버렸다.

 

그 후 1600년대 개봉에는 오늘날에 남아있는 조그마한 유대사원이 건립되었고 광동의 유대인들로부터 성서를 사들이고 회교도가 가지고 있는 두루마리를 사서 이곳에 안장하게 되었다.

 

당시 근처의 중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은 농업, 상업, 행정 및  군사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를 전체적 의식으로 충실하고 엄격하게 지켜 나가는 것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고 쓰고 있다.

 

 


 
유대 랍비의 경건복장
 
 

16세기 초경에 제수이트파의 선교사가 중국에 들어가 오랫동안 고립생활을  하고 있던 중국 유대인들의 자손과 그의 동포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들 동포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살펴보고 나서 가장 먼저 히브리어의 지식을 보급하는데 대단한 노력을 하였다. 그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의 풍속을 버리고 토착민의 풍속을 채용하여 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토착인의 처녀에게 장가를 들었고, 또 유대인의 처녀를 중국인들에게 시집 보내기도 하였다.

 

어떤 자는 고난을 피하여 유대인이 많이 사는 도시를 떠나기도 하였으나 그런 곳에서는 자연적으로 주민들 사이에 끼어 동화되거나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망각해 버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얼굴 모양세가 중국사람 화되어 중국 사람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경우도 있었다.

 

실로 같은 믿음과 동포로부터 떨어져 나간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유대인으로서 생존해 나갈 수 있었던 사실만큼은 주목할 만할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몰살당한 유대인 세력

 

1900년 초 중국에 들어간 유대인 사회학자 Burunor Grocker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유의해야 할 것은 그들 유대인이 19세기를 지나도록 특별한 사회조직을 유지하고 자신의 신앙과 교육을 지켜 나오면서 여호와의 명령을 따르고 준수하며, 아브라함, 이삭, 모세. 야곱의 전통을 지속하고 오늘까지도 현실로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서아시아로부터 온 마니체안과 네스트리아 교도들은 수대 또는 수세기를 계속해 내려오는 동안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떠한 다른 종교 단체보다도 아무리 멀리 격리되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신앙을 몸에 지닌 채 결코 토착민에 대해 유대교에의 개종자를 구하지 않고서도 1천년 이상(개봉에서는 약2천년동안) 아무렇지 않게 지속해 왔다. 단지 예기치 못한 참사와 재앙으로 그들 최후의 충실한 조합을 지켜오며 끝났다" 라고 쓰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오리치 라는 제수이트 파의 중국 파견 선교사는 수년간 북경에 살고 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1605년 6월 어느 날 일신교 신자로서 제수이트교를 믿는다고 말하는 남자가 찾아 왔는데 아무리 봐도 중국사람 같았다.

 

중국옷을 입었고 변발을 하여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리고 어느 하나도 중국토착민과  다른 점이 없었다. 마테오리치는 그리스도 신자라고 생각했다.

 

상대편 방문자는 아이 데이엠 이라는 유대인으로서 마태오리치를 유대인으로 생각하고 찾아왔던 것이다. 말을 나누는 사이에 쌍방이 가졌던 의심도 풀렸다. 마테오리치는 오랫동안 방문자를 살펴본 결과  얼굴 모양세가 중국사람과 어느 정도 틀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의 대화에 대하여 마테오리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남자가 말하기를 호남성의 수도 개봉에는 10-12가구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데 유대사원이 매우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것은 l만 세겔을 들여 지었다고 말하였다. 그 가운데는 모세의 율법을 중요하게 소장하고 있으며 그의 성전은 양피지에 쓴 5개의 두루마리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율법판을 받는 모세
 
 
 

그들은 5 - 6백 년 전부터 개봉에 살아왔다고 말하였다. 절강성의 수도 항주라는 곳에는 시나곡(?)도 있으며 개봉이상으로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회교도와 구별하는 것이 중국인에게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은 회교도를 싫어하며 같이 살지 않는 것으로 보여진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로부터 마테오리치는 중국 유태인 아이 데이앰의 말의 진부를 가리기 위해 사람을 개봉으로 보냈다. 그 일을 맡았던 제수이트교도는 돌아와 고하기를 개봉에서 유대인들의 환영을 받았다는 것과 아이의 말대로 건립된 유대사원이 하나 있다는 것, 그리고 유대인은 할례를 하는 일파로 알려져 있다는 것을 보고했다.

 

마테오리치 신부가 죽은 후 그의 후임으로 온 Alenie 신부는 마테오리치와는  달리 히브리 학자였기 때문에 1613년 개봉을 직접 방문하고 마태오리치가 모아놓은 것보다 훨씬 많은 유대인에 관한 서적을 조사할 수가 있었다. 다른 제수이트 교도도 알레니 신부의 조사를 도왔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개봉 가까이의 다른 4개 도시에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유대인들의 서적들의 내용을 적었고 개봉 유대사원의 설계도를 입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전한 바에 의하면 유대인은 기독교 방문자에 대하여 후대하였으며 우정적으로 가깝게 대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수이트 교도들 가운데는 그 당시 이미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유대주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16세기 중국에 들어갔던 제수이트 교도들에 의하여 중국 유대인의 상황에 대하여 많은 기록이 남아있어 당시의 유대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1713년 칙령에 의하여 제수이트 교도들이 추방되었기 때문에 상당 기간동안 중국 유대인들에 대해 어떠한 소문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단지 그 기간동안 또 한번의 유대인의 몰살기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 유대인의 최후의 비참한 상황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즉 1642년 개봉에 있는  중국유대인들에 돌발적인 큰 사고가 발생했다. 유대인들이 특별한 생활관습을 지니고 상권을 잡고서, 특별한 집단으로 사는 것을 부수기 위한 운동이 급속히 일어났다.

 

이것이 1642년 폭동화 되어 주변 각 곳의 폭도들이 개봉을 에워싸고 공격했다. 유대인들은 폭도들을 막기 위해 시가지 주변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러나 유대사원과 성서는 모두 파괴되었고 다수의 유대인과 중국 사람이 죽었다.

 

유대인들은 개봉부근의 마을로 도망가 숨어살았다.10년이 지나 유대인의 중국관리 趙仁全이 시가지 복구를 위해 파견되어 유대사원을 재건하고 전처럼 개봉에 살도록 유대인을 설복했다. 유대인들은 여러 곳에서 원조를 받아 성서와 종교 책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그들에게 닥쳐왔다. 유대인 단체에 속한 아이들은 10년 이상이나 종교교육을 받지 못했고 유대교의 교리를 쓴 책들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공동묘지는 모두 물에 씻겨 없어졌다. 미국 신시네티의 히브류 유니온 칼레지 도서관에 있는 서류를 보면 16세기 이전부티 많은 유대인들이 중국 주민들과 혼인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각 방면에서 수많은 공격과 비난을 받아왔고 이에 약해질대로 약해진 유대인 단체는 압도적으로 밀려오는 위협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잃었다. 해가 가면 갈수록 사망자는 늘어갔고. 과거와의 기억도 모두 사멸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대인들은 할례의 의식을 보존하여 음경에 식별이 되게 하였다.

 

돼지고기를 먹지는 않았지만 연회의 예의는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다. 쇠고기와 양고기 대신 물고기와 생선을 즐겨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습속이 상해를 포함한 항주 등지의 양자강 지류 주민들이 잉어 등 물고기 요리를 즐겨 들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10세기 초경 최후의 유대인 랍비가 사망하자 유대인 단체는 정신적 지도자를 잃고 히브리어에 능통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게 되어버렸다. 명나라 때 이미 중국 유대인들은 명목만 남아 있을 뿐 전멸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중국드라마 “판관 포청천”의 배경이 되었던 ‘개봉부’

 

원래 개봉부는 황하범람에 의해서 매몰되었다고 한다. 새로 지어진 개봉부 앞에 있는 호수 밑에 바로 개봉부가 있다고 했다.

 

중국드라마 “판관 포청천”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 이곳 개봉부이다.

포청천(999~1062)은 중국 송나라(북송) 시대의 명판관으로서 실존 인물이다.이름은 증(拯),자(字)는 희인(希仁)이라 하였으며,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품에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낮은 자들과 서민의 편에 서서 정의를 실천하는데 앞장섰던 당대에 보기 드문 청백리로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당시 북송은 범중엄(范仲淹)의 신정(新政)이 실패로 끝난 후 조정의 부패가 날로 극심해졌다고 한다. 특히 경성 개봉부(開封府)에서는 고관대작들과 황제 인척들의 부정부패가 더욱 심하였으며, 그들은 국법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가우(嘉祐) 원년(1056) 12월, 이러한 혼란한 정치적 상황하에서 인종(仁宗)은 개봉(開封)의 질서를 정돈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포증을 개봉부지부(開封府知府)에 임명하였다. 포증은 그 이듬해 3월에 정식으로 부임하여 가우 3년 6월까지 약 1년 4개월간 개봉부를 맡았다. 개봉부는 황실의 내외척과 권문세족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전에는 그 누구도 그 직책을 맡고 권문세족들과 내통하여 뇌물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포증

 

 


포증은 개봉부지부에 임명된 이후 이러한 부패를 척결하기로 결심하였다. 송대의 법규에 의하면, 누구든 관청에 고소를 할 때는 먼저 대리인에게 부탁하여 고소장을 쓴 다음 담당관리를 통하여 그것을 지부에게 전달해야 하였다. 이때 간악한 소송 대리인들은 사기를 쳐서 무고한 소송인들의 재물을 갈취하곤 하였다.

포증은 그러한 법규를 철폐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고소를 할 때는 직접 개봉부 앞으로 와서 북을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북소리가 울리면 개봉부에서는 정문을 열고 백성들이 직접 안으로 들어와서 고소를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개봉부의 관리들은 더 이상 중간에서 농간을 부릴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당대에 보기 드문 청백리로 널리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에 대한 많은 일화가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글과 사진 출처 : 이현승님의 중국여행기

 

 

 

 

 

 

 

유럽 유대인들이 중국 유대인의 흔적을 찾아 나서다

 

그 후 중국 내의 유대인들과 연결을 갖으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다. 1760년 런던의 포르투갈 유대인이 개봉에 사는 동포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얼마 후 중국으로부터 중국어와 히브리어로 쓴 답장이 왔는데 그것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답장의 원문은 분실되어 없어져 버렸고 안타깝게도 번역문마저 분실되어 전해 내려오지 않아 17세기 중반의 중국 유대인의 생활을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오스기스포의 간니코스트」라는 사람은 1769년에 통신을 개설해 보려고 시도했고

「오라프 데이셍」은 1777년과 1779년에 "바다우야"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개봉에 있는 유대민단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 편지가 전해지기는 했지만 가지고 간 사람이 중국의 내란이 가까워져서 답장을 가지고 돌아오지 못했다 고만 전해지고 있다. 오직 유일하게  답장을 받은 것은 1844년 James Fine이라는 사람이 보낸 것의 답이었는데 30년이 지난 1870년에야 겨우 답장이 왔다. 그 내용은 유대민단 생활상의 고통에 대한 비참한 기사뿐이고 영원히 망각되어 버릴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 뿐이다.

 

1950년에는 홍콩의 Smith 승정이 유대민단의 기독교도를 개봉에 보내어 유대민단의 상황을 보고토록 했다. 그 보고는 1851년 상해에서 발행된 팜프렡에 게재되어 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유대민단은 멸망에 처해 있다고 쓰여져 있으며, 보고서의 의견으로는 유대교의 최후의 흔적도 수년을 못 가서 사라져 없어질 것이라고 하고 있다.

 

두 명의 중국인이 개봉의 유대사원이 서 있을 때 방문한 최후의 사람이었다. 이듬해 그들은 재차 개봉에 들어가 약간의 히브리책을 상해로 가지고 돌아왔다. 또한 몇 명의 중국계 유대인들을 상해로 데리고 왔다. 그 후에 또 다른 유럽사람이 개봉을 방문하여 사라져 가는 유대민단들을 보고 왔지만 확실히 멸망했다는 말을 가지고 돌아왔다.

 

1900년까지 사태는 위와 같이 지났지만 그 해 중국 유대인 구제위원회가 상해거주 유대민단의 유력자에 의해 결성되었다. 개봉의 유대인 동족에게 유럽에서 은 상해의 동포를 방문하라는 초대장을 띄우기까지 했다.

 

그의 초대에는 개봉의 유대장노와 그의 자식이 왔지만 이 두 사람의 말로는 개봉에는 하나의 집단으로서 유대인이 존재하나 그들이 중국인들과 다른 점은 이름이 다르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뿐이고 기타 모세의 의례같은 것은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상해의 구제위원회는 대규모의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나 자금사정으로 실패로 그쳤다.

 

1912년 12월 개봉의 유대종족의 잔존자 가운데 한 장로가 영국 기독교회의 승정에제 유대사원의 주추 돌을 가져다주었다. 후일 유대사원이 다시 세워질 때까지 맡겨 놓겠다는 조건부이었다. 그 후 l년이 지나서 그 유일한 조건이 붙은 그것마저도 매각되어 끝나고 말았다.

 

1914년 유대사원 사업을 카나다 기독교회에 맡아 오직 유대종족과 조합의 일로서 하게 했다. 1924년 구제위원희가 다시 조직되고 개봉 유대인 구제에 대하여 정보를 모았지만 사업으로서 시작하지 못했다. 다수의 유대인은 마지막으로 개봉을 떠나 상해 또는 다른 대도시로 이주했다.

 

2000년 동안 계속해 내려온 개봉의 유대인 지구는 支那戰爭의 여파로 일본군과 중국 군대와의 최후의 격전지로 화하며 일본군의 가공할만한 포격으로 또 한번 완전히 멸망하는 참화를 겪게 되었다. 중국 유대주의 최후의 이름이 전쟁과 함께 끝나게 되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중국 대륙에서 완전히 멸망되었는가? 모세의 규례와 모양새는 잃어 버렸을 지라도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오늘날까지 중국대륙 곳곳에서 타고난 천재적 축재솜씨로 중요한 위치를 지키면서 중국계 유대인으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왜 일찍부터 상해와 홍콩이 중국의 경제적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리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경제의 중심 - 홍콩 코엑스
 
 
 

홍콩은 제외하고라도 대외적인 교류를 일찍 끊고 살아왔던 중국이 정권수립 이후부터 왜 상해를 대외 교역기지로 삼았는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또 영국은 아무 쓸모없는 버려진 땅이었던 구룡반도와 홍콩을 그들의 교차지로서 요구했는지 홍콩 반환을 앞두고 우리에게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이 그저 우연한 것으로 그냥 지나치는게 대부분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았던 지역이 광동지방이었다. 당나라 때는 그의 숫자가 많아 특별한 관리까지 두었던 곳이 광동이기도 하였다. 두 번째 유대인이 많았던 곳은 양자강 입구의 절강성의 수도인 항주였다.

 

세 번째는 중국대륙의 옛 수도였던 장안변방의 개봉이었다. 개봉 등 중국내륙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멸절되어 없어졌다. 그러나 해안지방에 정착했던 항주와 광동지방의 유대인은 비록 중국에 동화되기는 하였지만 해상무역을 바탕으로 그의 세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2대관문인 상해가 광주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던가 흥콩이 광동지방의 관문이라는 점은 우연한 것으로 넘기기는 어렵다.

 

 

 

 

 

 

 

아편전쟁은 유대인이  만든 작품

 

역사상 동방정책에 소련 못지 않게 관심을 크게 가진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인도를 점령하고 가장 먼저 중국에 외교관을 보내어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추진하였고 l875년 중국과 수교이후, 중국대륙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계속 외교관계를 유지했던 유일한 서방국가였다. 왜 그처럼 영국이 중국대륙에 흥미를 가졌는지는 확실히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1860년 영국의 성공회 선교사 Emillay(유대인)가 중국에 들어온 후 그는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선교사의 일보다도 북경, 상해, 광동, 만주 등 심지어 대륙 깊숙이 청도 중경까지 샅샅이 중국을 여행하면서 중국에 대한 많은 사실을 글로 엮어 내었다.

 

그 후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관계와 외교관계를 위하여 외교관을 북경에 보냈고 함대와 상선을 상해에 인접시켜 상해. 항주의 거상들과 무역을 벌이기도 하였다. 특히 그들은 아편을 밀무역하여 큰돈을 벌었고 아편을 신비의 영약으로 유럽으로 많이 실어 나갔다.

 

중국에서 발행한 근대경제 교류사를 보면 당시 중국에 온 외교관들은 외교관보다는 온통 중국의 지리와 풍물 장사에 관심이 있는 장사꾼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주요 항구에 영국 무역대리 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불법적인 국내활동으로 주권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영국 사람들은 광동의 客家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아편 밀무역으로 중국 사람들에게 큰 손해를 입히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가는 등 횡포가 심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아편전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는 영국 상선에 대한 공격도 중국관군이나 중국인과는 전혀 무관한 영국군대와 그 추종세력들이 꾸며낸 조작극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어떻든 양쯔의 항구에 있는 영국상선을 공격한데서 발발된 영국군과 중국군의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끝나고 영국은 손해 배상을 중국 정부에 철저히 보상하라고 윽박질렀다.

 

 

 


 
아편전쟁
 
 
 

당시 북경에 와 있는 영국공사 Kent경은 중국 관리들과 보상문제로 또 한번 전쟁을 치룰 만큼 험난한 협상을 벌렸다. Kent경은 영국정보기관의 장을 지낸 사람으로 후에 영국 후리메이손 협희 그랜드 롯지(Grand Lodge)를 지낸 유대인 비밀결사조직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정부는 아편전쟁의 보상을 금전으로 할 것을 요구했으나  Kent경은 영국상선이 안전하게 기착할 수 있는 항구를 요구했다. 영국이 요구한 항구는  상해와 아무 쓸모없이 버려진 광동 지방의 구룡반도와 일부 섬이었다. 협상의 마지막 중국정부는 오랫동안 항구로 이용한 상해 보다 홍콩을 영국에 넘겨주기로 하고 협상을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밝혀진 기밀문서에 의하면 당시 Kent경이 영국정부에 보낸 협상내용에서 구룡반도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광동보다 훨씬 유리한 점을 밝히고 있다. 그는 기밀 정보 보고서를 통해 광동에는 우리들 사업을 도와 줄 많은 형제들이 있으며 앞으로의 동방정책에 유력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인적자원이 풍부한 곳이라고 홍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영국은 오래 동안 쓸모 없이 버려져 왔던 구룡반도와 그 일대에 홍콩을 건설했다. 영국이 건설했다 기보다 영국의 후리메이손(유대인)이 홍콩을 건설했다고 볼 수 있다.

 

 


 

프리메이슨의 대표적 상징

(Emblems of Freemasonry)

 

 

 

1900년대 초반 영국이 홍콩에 정청을 세우고 무역기지 개발을 발표하기 전 이미 상당한 광동 의 유력자들이 홍콩으로 건너왔다. 이들은 오랫동안 광동을 중심으로 세력기반을 다져왔던 객가 출신들로서 중국 유대인이었다.

 

이것은 l951년 홍콩에서 발행된 중국 푸리메이슨협희 기관지에 보면 홍콩 실력자들의 배경과 활동상황에서 그들이 유대인으로 중국출신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영국이 홍콩을 개발한 것은 유대인의 동방정책을 추구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반면에 광동 지방에 흩어져 사는 중국 유대인을 안전하게 피신시켜 중국대륙에서 빼내는데 쓰기 위함이었다.

 

유대인들이 광동지방의 많은 중국 유대인들을 빼내기 위해 중국의 유대주의 화를 위해 아편 전쟁을 일으켜 홍콩을 식민지화하고 오늘날의 홍콩을 건설한 것이다. 오늘날의 홍콩의 발전 상을 보면 대단한 일이다.

 

영국이 동양에 건설한 중계무역지라고 쉽게 홍콩을 평가해서는 않된다. 홍콩은 이미 세계적인 곳이다. 유대인의 지원 없이 쓸모없는 자그마한 마을이 어떻게 60년이 체 못되어 세계적인 도시로 발전할 수 있을까?

 

홍콩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강대국의 중계무역기지로써 강대국의 이해가 깊이 깔려 있을 뿐 아니라 세계적 다국적 유대기업이 몰려있는 유대인 촌이다. 중국 유대인의 피난처로서 성장 한 도시이다. 최근 홍콩 반환을 앞둔 영국과 중국과의 협상은 세계적인 관심사였다.

 

중국은 중국대로 이해가 엇갈렸지만 대부분 서방의 요구대로 홍콩 반환협정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다국적 유대기업과 등소평 간의 묵계에 의해 이루어진 화합물이라고 한다.

 

상해 또한 1920년에서 1950년까지 겨우 30년 동안 이루어진 대도시이다. 상해의 번창은 해외로부터의 자본지원도 있지만 주로 절강성의 대부호들의 자본과 지원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상해시 모형도
 
 
 

1941년 상해에서 발행된 유대인 기관지에 보면 메이손조합 결성에 협력해 준 중국인 동지들의 이름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상해와 抗州거주 주요 상공인의 이름이 거의 다 열거되다시피 되어 있다. 중국인으로 유대조합에 협력해 준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그들 대부분이 중국 유대인으로시 참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만 해도 상해는 중국의 관문으로 많은 외국인과 연합군 사람들의 출입이 잦았던 때이므로 상해는 국제적 도시로서 유대인들과 큰 어려움 없이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 편리하였을 것이고, 결국 상해를 기지로 한 유대조합이 결성되었을 것이다. 이 조합이 오늘날의 상해를 국제도시로 만든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홍콩건설은 유대인의 손에 의해

 

홍콩의 중국반환은 2000년동안 실패하여 온 유대인들의 중국 대륙에서의 유대주의 운동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즉 중국 정책에 자신을 가지고 중국 대륙에 무한한 경제력을 가지고 뛰어드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중국 공산정권도 마침 경제개발을 위해 실용주의 노선으로 기울고 있으며 2000년까지 엄청난 개발자금이 필요하다.

 

그러나 중국은 홍콩을 해외자본을 들여오는 입구로 쓰겠다고 하고 있다. 국제자본이 누구의 것인가 생각하면 답은 뻔하다. 미국. 영국.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남아 각국은 홍콩 반환 후 홍콩의 장래가 어떻게 될까? 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만은 이미 홍콩반환 후 돌아을 화교기업을 위해 팽호열도에 경제특별구를 설치할 계획이며, 우리나라 또한 한동안 제주도의 홍콩대체를 위한 국제화 계획을 서두른 일이 있다. 정말 홍콩은 국제적 지위를 잃어버릴까?

 

최근 중국정부는 흥콩의 저명한 기업인인 王昌洪(董建樺)이라는 사람을 대서방 창구 역할을 맡는 中華有限公司의 주임으로 앉히고 막대한 증국 자금을 지원하여 명실공히 홍콩의 강자로 부상시켰다.

 

앞으로 홍콩을 통한 어떠한 중국진출도 이곳을 통하지 않고는 어렵다는 얘기이다.

그는 누구인가?

 

놀랍게도 그는 1951년 홍콩에서 발행된 유대조합 기관지 발행자이며 유대조합 우두머리를 지낸 王昭平(董容昭)이라는 사람의 아들이다. 홍공 상공인 명단에 보면 王昭平(董容昭)은 1940년대 이후 홍콩의 유력자로 구룡상사를 경영해 온 기업인이다.

 

구룡상사는 주로 홍콩을 저점으로 한 대중공 중계무역을 계속해 왔는데 王昌洪(董建樺)은 1962년부터 구룡상사 대표를 역임해 왔다. 그렇다면  그는 중국유대인이라고 봐도 틀림없을 것이다. 이미 홍콩은 중국 유대인의 수중에 있으며 세계적 다국적기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많은 자본이 필요한 등소평 정권에 중국 유대인을 앞세우고  원나라 이후 600년 만에 북경에 입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각국이 홍콩반환올 앞두고 나름대로 홍콩 이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헛된 꿈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 사상보다는 현실주의자 走資派의 거두로 오늘날의 중국으로 이끌었던 등소평은 누구인가?

 

등소평은 오래 동안의 죽의 장막을 열고 북경 천안문광장에 코카콜라의 선전탑을 허용하고, 청바지를 묵인하는 등 중국의 경제적 현대화에 심혈을 기울였던 사람이다. 외국자본을 들여다 각 곳에 경제 특별구라는 것을 만들어 자유기업을 인정해가고 있으며 시장도 점차 개방해 가고 있다.

 

프랑스 파리의 일류 디자이너가 북경에서 패션쇼까지 벌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북경은 변하고 있다. 시장에서 경쟁을 통한 자유기업의  바탕까지를 마련해 주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나  경제적으로는 확실한 자유시장 경제를 도모하고 있다.

 

 


사열을 받고있는 등소평

 

 

 

지금부터 등소평이 등장한지 얼마 안되어 대만의 한 학자는 등소평은 어쩔 수 없이 외국의 자본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으며 많은 외국기업들이 중공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러고 결국 등소평은 중국대륙을 다국적기업의 시장으로 만들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등소평은 본래 객가(客家)출신으로 그의 조상이 중국이 아닌 유럽이나 유대인일 것이라는 보고를 낸  일이 있었다.

 

 

http://www.ilovejesu.net

Copyright ⓒ 2002  ilovejesu.net. All Rights Reservedd

 

 

 

 

 

 

 

 

 

 

 

 

 

 

 

 

 

 

 

 

 

 

중국계 유대인 : 전설, 역사 그리고 새로운 관점


 

 

전세계 유대인들의 성지통곡의

 

 

 


발 표 : 판꽝 교수

상하이 소재 East China Normal University에서 역사학 박사 취득
뉴욕 Columbia대학교, 히브리대학교, 바르 일란대학교, Boston대학교, Ottawa & Stanford대학교에서 연구
James Friend Annual Memorial Award for Sino-Jewish Studies 수상
상하이 유대학회 부회장
상하이 유대 연구센터 교수 겸 학장
 
통 역 : 김영우 교수
 
 
 
 
 
  고대 중국의 유대인들 : 카이펑의 경우
 
최초의 유대인 그룹들이 육로로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에 처음 들어 온 것은 당나라 왕조 때 (8세기 경)였다. 다른 그룹들은 육로로 이동하기 전에 바다를 통해 해안 지역으로 들어왔다.
 
몇몇 학자들은 유대인들이 일찍이 한나라 왕조 때 (B.C. 206 - A.D. 220)들어 왔다고 믿는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유대인들의 최초의 도래 시기를 주나라 왕조 때(B.C. 6세기 경)로 잡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고고학적 발견은 아직 이루어진 적이 없다.
 
중국에 들어간 이후, 유대인들은 여러 도시와 지방에서 살았다. 그러나 카이평의 유대인 사회가 형성된 것은 송나라 왕조 때(960∼1279)에 이르러서였다.

북송 왕조 때 한 유대인 그룹이 수도인 동징(아래에서 언급되겠지만, 오늘 날의 카이평이다)에 왔다. 그들은 관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그들 자신의 전통과 종교적 신앙을 지키면서도 중국인으로서 카이평에 살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 후 그들은 한족들과 똑같은 거주, 이전, 취업, 교육, 토지거래, 신앙, 결혼의 자유를 편견없이 누렸다. 이같은 안전하고 안정적이며 편안한 환경에서 유대인들은 곧 사업과 금융 분야에서 그들의 재능을 발휘하였고 상업과 무역에서 성공을 거두어 카이펑의 부유층이 되었다.
 
동시에 그들의 종교적 활동도 활발해졌다. 1163년에 카이평의 유대인들은 도시의 중심 지역에 회당을 지었다. 그로부터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 원나라 왕조(1297∼1368)의 지원을 받아 회당은 보수되었다.
 
명나라 왕조(1368∼1644)가 들어섰던 시기에 카이펑의 유대인 사회는 가장 번성하였다. 500개 이상의 가문이 있었고 전체 인구는 4000∼5000명에 달했다. 유대인들의 사회적 지위도 계속 향상되었다. 당시 왕조가 시행한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 정부 관리가 된 유대인들도 있었다.
 

 

 
개봉 용정공원 (사진/자료: 이현승님)
용정공원은 송대 개봉성의 서북부에 위치해 있다. 명나라 홍무 11년 태조 주원장은 개봉에 책봉된

그의 다섯째 아들 주왕 주소에게 자신을 위한 궁궐을 지으라고 했는데, 이것의 이름도 자금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궁전은 명나라 말기인 숭정 15년 황하의 대범람으로 지하 몇 십 미티이래 묻히게 되었다.

 

 

 

어떤 유대인들은 사업을 통해 큰 부를 축적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세공 기술자가 되었고 혹은 열심히 농사를 지어 부농(富農)이 되었다. 또 의사나 성직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중국 유교 문화의 주류에 동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과거 시험에 참여하였고 히브리식 이름을 중국식으로 개명했으며 중국어로 말하고 공부하였으며 다른 민족과 혼인하기 시작하였고 중국식으로 옷을 입었고 중국식 관습과 전통을 흡수하였다.

 

이에 그들 고유의 관습과 전통은 점차 희미해져갔다. 1642년 황하의 홍수로 카이평의 회당이 파괴되고 많은 종교 경전들이 유실되었다. 1663년에 카이펑의 유대인들은 회당을 재건하고 경전들 중 일부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유대인 공동체의 인구는 2000명 이하로 줄어 있었다.

17세기가 되었을 때 유대인 사회는 바깥 세계의 유대인 사회와의 연결이 끊어져 버렸다. 19세기 중반이 되었을 때 카이펑의 회당은 폐허가 되었고 카이펑의 유대인들은 랍비 없이 오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처지였다. 그들은 히브리어를 읽을 수도 없었고 종교 의식의 집행도 중단되었다.

 

이 무렵, 서구의 선교사들은 카이펑에서 유대인들의 후예를 “발견”하였고 이를 계기로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에 의해 카이펑의 유대인들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후 샹하이의 유대인들이 나서서 카이펑의 유대인 후예들이 유태적 전통을 회복하도록 도우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결국 카이평의 유대인 사회는 중국 문화에 흡수되어버린 것이다.

 

 

  

 

 

 

 바그다드에서 홍콩과 샹하이까지: 세파르딤의 경험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아편 전쟁과 그 뒤를 이은 영국과의 교역의 급증의 결과로 중국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바그다드, 봄베이, 싱가포르와 같은 영국 통치 지역 출신으로서 대부분이 영국 시민권을 가진 상인들 및 사업가들이었다.

 

이들 중 사순 가문(Sassoons)은 원래 바그다드에서 살던 사랍들로서 사업의 근거지를 동쪽으로 옮겨 인도로 갔고 나중에는 홍콩과 샹하이에 회사를 세우고 정착한 최초의 유대인들이 되었다.

 

사순 가문의 뒤를 이어 하르둔 가문(Hardoons)이나 카두리 가문(Kadoories)과 같은 바그다드 출신의 세파르딤 상인들이 부를 추구하여 중국에 왔다. 외국인들에게 개방된 국제 무역의 중심인 홍콩과 샹하이는 그들의 사업의 교두보가 되었다. 그들은 곧 상업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샹하이와 홍콩의 지리적 위치의 유리한 점들을 잘 이용하고 영국인들과의 전통적인 연결점들을 십분 활용하여 수출입 무역을 크게 발전시켰고 이를 통하여 짧은 시일 내에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이 부를 부동산, 금융, 공공 사업, 제조업 등에 투자하였고 점차 샹하이와 홍콩의 가장 활발한 외국 기업군을 이루게 되었다. 그들의 영향력은 중국 전역과 극동 지역 전체에 미쳤다.

그들은 또한 사회의 공공 복지와 자선 사업에도 참여하였고 회당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들과 유럽 유대인 난민들을 도왔다. 그들은 시온주의 운동을 후원했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중국의 정치에도 때때로 관여하였다.

 

사일러스 아론 하르둔(Silas Aaron Hardoon)의 경우와 같이 중국의 예술과 문화를 후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중국의 사회적 정치적 집단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1937년에 중국을 침략하고 1941년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후 홍콩과 샹하이를 점령하고 나서는 세파르딤 상인들이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한 것이 큰 화근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들은 일본 점령 지역의 그들의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360대의 일본 전투기들이 대규모 기습공격을 감행한후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 모항에서 화염에 휩싸인 태평양 함대 전투함들의 모습을 찍은 항공 사진

 

 

 

 

 

전쟁 이후, 중국에 내전이 일어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세파르디 상인들은 그들의 재산을 홍콩과 해외로 점차 이전하였다. 1949년 이후에 그들은 중국과 서구의 주요 무역 채널로서의 홍콩의 역할을 활용하여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근래에 중국이 개혁 정책을 채택하고 외국 기업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 많은 세파르딤 상인들은 다시금 중국 본토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그들과 중국의 관계는 계속 강화되고 확장될 전망이다.

 

 

 

 

 

 

 2의 고향 : 중국의 러시아계(아쉬케나짐) 유대인들

 

세파르딤 유대인들과는 달리 러시아계(아쉬케나짐) 유대인들은 교역을 주 목적으로 하여 중국에 온 것이 아니라 1880년대 이후 러시아와 동 유럽에서 격화되어 온 반 유태주의 운동 때문에 왔다.

 

이 물결을 타고 수백만의 러시아 유대인들이 북미로 이주하였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시베리아를 통과하여 중국의 북동부와 몽골과 심지어 중국 남부 지역에까지 흘러들어왔다.

 

이 기간동안 중국 동부 철도가 건설되었고 중국에서 러시아의 세력이 확장되었으며 러일전쟁이 있었고 1905년과 1917년 두차례의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이 모든 사건들은 러시아 유대인들이 중국으로 이민오는 것을 가속화시켰다. 처음에 그들은 주로 하얼빈과 그 인근 지역에서 살며 극동지역 최대의 유대인 사회를 형성했다. 일본이 중국의 북동부를 침략한 이후 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여 샹하이, 텐진, 칭따오등지에 공동체를 이루어 정착했다.

대부분의 러시아 유대인들은 가난하게 살았고 작은 사업을 운영하며 근근히 생활했다. 훗날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열심히 일하여 중산층의 대열에 올랐다. 그들은 세파르딤 유대인들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활발한 공동체가 되었다.

 

그들 중 기술자이며 지식인이었던 사람들은 중국에 들어간 이후 중국, 러시아, 세파르딤 유대인, 그리고 다른 외국인들이 세운 기업과 기관들에서 일하며 중국의 경제와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중국에 오래 거주한 러시아 유대인들은 중국을 그들의 제 2의 모국으로 여겼다. 어떤 이들은 열심히 공부하여 중국의 문화에 융합되었고 중국과 유대인 사이의, 또 중국과 러시아사이의 문화적 교류를 진흥시키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많은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이곳에 계속 남아있었다. 러시아계 유대인들중 마지막 그룹이 중국을 떠난 것은 문화혁명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치 유럽의 대학살 난민들을 위한 피난처

 

60여년 전 나치가 유럽의 유대인들을 무섭게 박해하며 학살하고 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은 정의의 편을 선택하여 나치의 테러로 부터 유대인 희생자들을 용감히 구출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나라의 정부는 유대인 난민들의 유입을 엄격히 막았다.

 

특히 1938년 이후에는 거의 모든 나라들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입국을 막았다. 당시의 “문명 세계”가 유대인들에게 행한 일들을 돌아보면서 우리 중국인들은 유태 민족이 죽음의 문턱에서 생존을 위한 고투를 하고 있을 때 상하이 시가 그들에게 생명과 같은 피난처를 제공하고 모든 가능한 형태의 구호를 제공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는다.

 

1933년 부터 1941년 까지 상하이는 3만 명 이상의 유럽 유대인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상하이에서 다른 나라로 간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일본이 1941년 12월에 진주만을 폭격할 당시 상하이에는 2만명에서 2만 5천명에 달하는 유대인 난민들이 피난처를 제공받고 있었다.

 

시몬 비젠탈 센터(Simon Wiesenthal Center)에 따르면 상하이는 당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인디아가 받아들인 유대인 난민 수를 모두 합한 것 보다 더 많은 숫자의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진주만 폭격 이전에는 세파르딤 유대인들과 러시아 유대인들, 그리고 나치 유럽에서 온 유대인 난민들을 합하여 상하이의 유대인 난민들의 숫자는 3만명이 넘어서서 극동지역 최대의 유대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번성한 공동체는 자치 협의회, 회당, 학교, 병원, 클럽들, 공동묘지, 상공회의소, 50가지 이상의 간행물들, 활발한 정치적 그룹들(유토피아적인 사회주의 단체에서 혁명적인 시온주의 단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작은 전투 부대 - 상하이 자원병 부대의 유대인 중대 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이 부대는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유대인 정규군이었다.

나치와 그 공범들은 유럽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했을 뿐 아니라 유럽 바깥의 유대인 공동체에 대해서도 심한 악행을 저질렀다. 중국, 특히 상하이의 유대인 공동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942년 7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지 8개월이 지난 후 일본의 게슈타포(나치 친위대 : 역자 주) 대장인 요세프 마이징거(Josef Meisinger) 대령이 상하이에 와서 일본 점령군 당국에게 “상하이에서의 최종 해결책(유대인 학살 : 역자 주)”을 제안하였다.

 

비록 유태 민족에 대한 독일과 일본의 입장 차이 때문에 “마이징거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지만, 일본 측에서는 “국가 없는 난민들을 위한 지정 구역”을 선포하여 1937년 이후에 유럽에서 상하이로 온 유대인들은 한달 내로 이 구역으로 이주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나치 독일의 압력과 유대인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애매한 정책 때문에 상하이의 유대인들은 거의 4년 간 어렵고 예측불가능하며 때로는 위험한 험로를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중부 유럽 출신의 유대인 난민들 뿐 아니라 세파르딤 유대인들 및 러시아 유대인들도 포함하여 상하이의 유대인 난민들은 거의 모두가 대학살과 전쟁에서 살아남게 되었다.

 

이는 주로 미국 유대인들과 중국인들의 후원 및 이 지역 유대인들의 상호부조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일이었다.

 

“쉰들러”, “발렌버그”, “스기하라” 와 함께 “상하이”라는 이름은 홀로코스트(대학살)의 연대기에서 “구조”와 “피난처”의 동의어가 되었다.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역사 박물관 '이름들의 (Hall of Names)'

전시실에는 2차대전 당시에 나치에 학살된 수백만명의 유대인들 명부와 600명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출처 : http://blog.khan.co.kr/shoh/4137073 )

 

 

 

 

 

 

 중국인과 유대인의 전통적인 우호의 역사

 

중국에 온 어떤 유대인들은 폭넓고 심오한 중국 문화에 의해 양육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으로 중국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중요한 것은 비록 많은 유대인들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거주하였지만 중국의 토양에서는 토착적인 반유태주의 운동이 발생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자발적인 중국식 반유태주의가 생겨나지 않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그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본다:

 

1. 반유태주의는 깊이 뿌리박힌 종교적 편견에서 유래했다.

 

이는 기독교 사회인 기독교의 영향은 받은 유럽에서 더욱 현저하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대개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깊은 종교적 편견을 가진 이러한 광신적인 반유태주의는 중국에 존재하지 않으며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2.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중국 문화와 유태 문화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양자 모두 가족의 결속 기능 및 교육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비록 양자가 모두 다양한 외래 문화를 흡수 했지만 그 중심의 정수(精髓)는 처음 형성된 이래로 변하지 않고 있다.

 

1489년에 세워진 기념비에 카이펑의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의 종교와 유교는 사소한 세부사항에서만 차이가 난다. 그 사상과 행위에서 양자 모두는 하늘의 도(Heaven’s Way)를 존중하고 조상을 공경하며 군주와 재상들에게 충성하며 부모에게 효도한다. 양자 모두 아내와 자녀들과의 화목, 윗사람에 대한 공경, 친구와의 우정을 중시한다.” 이 모든 것들은 반유태주의가 중국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는데 기여하였다.

 

3. 지난 세기 중반 이래, 중국인들은 유대인들 처럼 많은 파괴적 재난을 겪었다.

 

전쟁 기간 동안 3천 5백 만명의 중국인들이 일본의 파시스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부상을 입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심지어 1998년에 인도네시아에서도 일어난 중국인들에 대한 잔혹 행위는 지난 수 세기 동안, 특히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유럽에서 발생한 유사한 반유태주의적 폭거를 상기시켜준다.

 

이러한 공통의 경험은 중국인들 안에 유태 민족에 대한 깊은 동정심이 생겨나게 했고 중국인들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반 유태주의라도 강력히 반대하게 한 것이다.특별히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유대인들과 중국인 사이의 상호 존중, 동정, 그리고 지원이다.

 

일찍이 1918년 12월 14일에 중국 정부의 외교부 차관인 첸 루(Chen Lu)는 카두리(E.S. Kadoorie)씨 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는 것을 표명했다.

 

1920년 4월 24일 상하이 유대인 공동체의 또 다른 지도자인 에즈라(N.E.B. Ezra)씨가 중화민국의 창설자 중의 한 명인 선 야첸(Sun Yat-sen) 박사로부터 받은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당신들의 훌륭한 역사적인 국가를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나라는 세계의 문명에 크게 기여해왔고 여러 국가들 중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함이 마땅합니다.”

 

히틀러의 반유태주의 운동이 시작된 얼마되지 않아서 아첸 부인( 칭링(Song Qingling) 대표단을 이끌고 상하이의 독일 영사를 만나 나치의 잔혹함에 대한 강력한 항의를 제기했다. 그녀가 이끈 대표단에는 중국 인권 협회(The China League for Civil Rights)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Sun Yat-sen and Song Qingling in 1917

(손문의 부인 송경령 여사)

 
 
 

최근에 발견된 자료가 보여주듯 1938년 부터 1940년 까지 오스트리아 비엔나 주재 중국 총영사를 지낸 펭 샨 호(Feng Shan Ho) 박사는 유대인들이 대학살을 피할 수 있도록 비자를 발급해 준 최초의 외교관들 중의 하나였다.

 

또 우리가 발견한 어떤 문서 자료에서는 1939년에 중국 정부가 유럽에서 온 유대인 난민들의 정착지로 유난(Yunnan) 지역을 지정해 놓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가지 이유로 이 계획이 실행되지는 못했다.

1937년과 1941년 사이에 수 만의 유대인 난민들이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수백만의 상하이 주민들은 일본의 상하이 강점으로 말미암아 난민이 되어있던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하이 주민들은 유대인 난민들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43년 부터 1945년 까지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홍큐(Hongkew)의 유대인 난민들과 중국인들은 서로 도우며 걱정 근심을 덜어주었다. 그들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 때문에 대체로 서로 분리된 생활을 하였지만 서로의 고통을 보면서 연대감을 형성했다.

나는 여기서 중국의 유대인들도 일본의 침략에 맞선 중국의 민족-민주주의 운동과 저항 운동을 지원하는데 최선을 다했음을 강조하고 싶다. 어떤 유대인 친구들은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고 중국인들의 지하 운동(Chinese Underground)에 협력하기도 했으며 중국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쳤다.

 

나는 깊은 존경심으로 그 수 많은 예들을 제시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모리스 “쌍권총” 코헨은 1922년 부터 1925년 까지 선 야첸 박사의 군사 보좌관이었다. 선이 죽은 후 그는 중국인 지도자들 여러명을 위해 일했고 중국 군의 유대인 장군이 되었다.

독일 출신의 작가이며 기자였던 한스 쉬프(Hans Shippe)는 중국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싸운 전투에서 전사하여 중국 땅에 묻힌 최초의 유대인 자원병이었다.

 

그는 1939년에 상하이를 떠나 중국군에 입대했다. 1941년 11월 30일, 진주만 기습이 있기 며칠 전에, 그는 상하이 지역에서의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손에 총을 든 채로 전사했다. 중국인들은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 부근에 그를 위한 기념비를 세워주었다.

 

나는 야콥 로젠필드(Jacob Rosenfield) 박사도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1939년에 유대인 난민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상하이로 왔다. 그는 1941년에 상하이를 떠나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10년간 중국 군대에서 복무하였고 외국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인 의무 사령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1952년 텔아비브에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지만 않았더라면 중화 인민공화국의 보건부의 고위관리로 임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계 유대인”과 오늘날 중국의 유대인들

 

2차 세계대전 후 중국에서는 내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여러가지 이유로 많은 유대인들이 중국을 떠났다. 중화 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중국에서 계속 평화롭게 살며 일했다. 문화혁명이 일어날 때까지는 그들은 중국을 떠나도록 강요당하지 않았다.

 

홍콩과 대만에서는 유대인 공동체가 계속 번영을 누렸다. 오늘날 “중국계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살고 있다. 그들의 성향과 추구하는 바와 직업은 다를지라도 그들은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즉 중국을 그들의 “고향”으로 기억하며 자신들을 “옛날 중국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중국에서 보낸 의미 있는 세월을 잊지 않기 위해 그들은 조직체들을 만들어 이벤트를 열고 다양한 출판물을 발행해 왔다.

중국에 개혁과 개방 정책이 도입된 이래로 그들은 자신의 뿌리를 찾고 옛 친구들을 만나는 여행을 하기 위해 자녀들을 데리고 그들의 “고향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투자를 하고 사업을 하며 그들의 옛 고향의 새로운 발전에 참여하고 있다.

 

중국을 떠난지 30년만인 1978년에 중국을 다시 찾은 로드 로렌스 카두리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우리가 자란 이 나라에 감사한다.” 그는 1985년 베이징을 방문하는 중에 뎅 샤오핑을 만났다.

 

미국의 재무 장관인 마이클 블루멘탈(Michael Blumenthal)이 1979년에 상하이를 다시 찾았을 때 그는 자신이 과거에 자주 다니던 상하이의 홍코우를 기자들에게 자랑했다.

 

 

 


 

Michael Blumenthal 재무장관

 

 

 

그는 1939년 독일에서 상하이로 처음 왔을 당시와는 한 가지 차이가 있음을 언급했다: “지금은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없다.”

 

요셉 테코아(Yosef Tekoah)(투카친스키(Tukachinsky))대사는 1989년에 중국을 다시 방문했을 때 한 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가장 멋진 시기는 청년기이다. 나는 그 시기를 중국에서 보냈다. 나는 이제 가장 좋은 어떤 것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여기에 다시 왔다.”

 

(故) 샤울 아이젠버그(Shaul Eisenberg)는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난민으로서 중국에 왔으며 나중에 유명한 사업가가 되었다. 그는 상하이의 기업들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였다. 예컨대 Y.P. 유리 공장도 그가 세운 것이다. 그는 생전에 상하이에 푸동 다이아몬드 교환 센터를 세우는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며 그것이 이제는 실현되어 가고 있다.

1992년, 중국과 이스라엘은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로써 유대인들이 중국으로 돌아 오는 일은 더욱 촉진되었다. 현재 베이징과 상하이에는 사업가들, 기술 전문가들, 외교관들, 유학생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 중국의 유대인 공동체는 다시 한번 생기를 띠게 되었다.

 

 

 

 

 

 중국의 유대인 - 학문적 연구와 대중적 관심을 끄는 주제

 

20세기 중반 이래로 중국의 유대인들에 대한 책들이 꾸준히 증가해왔다. 그리고 1980년 대와 1990년대에는 이것이 국제적으로 관심을 모으는 주제(hot topic)가 되었다.

 

특히 1992년의 중국-이스라엘 수교 이후 이 주제로 학술 회의가 정기적으로 열렸고 이 주제를 다룬 책들이 많이 출간되었다.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은 학계에만 국한 되지 않고 언론과 텔레비젼, 영화계에도 확산되었다.

 

이 주제에 대한 관심에는 사회 정치적 의미가 있다.

 

첫째, 유태 민족 역사의 이 “동양” 편은 유대학, 중국학, 역사학, 종교학, 민속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철학 분야에서 학문적 가치를 가진다. 더우기 이 주제는 인종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고 모든 민족들 간의 선린 우호와 문화적 조화를 촉진하며 세계 평화를 지키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실제적인 의의를 가진다.

 

이 주제의 의도(subtext)가 중국과 유대인들의 우호관계 증진이므로 이것은 중국의 지속적인 개방을 촉진하고 중국과 이스라엘 및 미국의 관계를 발전시키는데도 독특한 역할을 하게 된다.

 

(故)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총리는 1993년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상하이가 나치 유럽에서 피해온 유대인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준 것에 대해 이스라엘 국민들을 대표하여 깊은 감사를 표했다.

 

 

 


 
클린튼 행정부 시절 백악관에서 아라파트 PLO 의장과 중동평화안에
서명한후 화해의 악수를 하는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이스라엘 총리
 
 
 
 

1995년 오스트리아의 대통령 토마스 클레스틸(Thomas Klestil)은 홍큐(오늘날의 홍코우)를 방문하고 헌화하며 오스트리아 출신의 대학살 피해자들을 추모하였다.

 

1998년에는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 힐러리 클린턴(Hilary Clinton)과 미 국무장관 마들레인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가 상하이의 오헬 라헬(Ohel Rachel) 회당을 방문하였다.

 

이스라엘 대통령 에제르 바이츠만(Ezer Weizmann)은 1999년에 상하이의 오헬 라헬 회당의 사진 전시회장에 방문하여 중국인들이 유대인들을 구해준 것에 대해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1999년에는 독일의 총리 게르하르트 슈로더(Gerhard Schroder)가 상하이의 오헬 라헬 회당을 방문하였다. 그의 방문은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왜냐하면 전쟁 당시 상하이의 유대인들 대부분은 나치 독일 및 그 점령지에서 왔기 때문이다.

 

짧은 방문이 끝나갈 무렵 슈로더는 유명 인사 방명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시인은 ‘죽음은 독일의 특사다”라고 썼다. 우리는 박해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상하이에 피신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역사를 결코 잊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박해를 받은 사람들에게 가능한 모든 구호를 제공한 이들에게 감사와 찬사를 드리기 위해 여기에 와 있다.”

많은 평범한 중국인들과 유대인들에 의해 중국의 토양에서 지어지고 중국과 유태 민족의 우호관계의 전통을 기록하고 있는 이 역사의 페이지들은 인류의 진보의 역사에서 영원히 빛날 한 장(章)을 형성하고 있다.

 

 

 

자료출처 : 이스라엘 문화원

http://www.iscc.co.kr/seminar/4th.asp?select=1

'HAN-History > 01 동이문명관련·동북공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산문명 보충소고  (0) 2006.12.27
홍산문명 소고  (0) 2006.12.26
동북공정에 활용하는 요하문명전(홍산문화)  (0) 2006.12.26
홍산문화에 대하여  (0) 2006.12.26
요하문명론  (0) 2006.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