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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문헌에 나오는 대륙 백제 영토(어마어마)

monocrop 2006. 12. 18. 18:41
대륙백제사의 미스테리

 중국에서  역사적 정사로 인정하는 것이 있다 . 이른 바 중국 25사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25사 가운데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송서(宋書)의 순으로 전개되며 중국에서 왕조가 설립되고 멸망한 과정에서 왕조에서 편찬한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송서에 기록된 백제는 우리가 알고있는 백제와는 완전히 다르다. 필자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전쟁과정을 살펴보면서도 여러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너무나 많이 등장한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자 한다.

필자는 여기서 대륙백제설이 완전무결하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역사의 검증과정을 거쳐야만 하겠지만 적어도 필자가 살펴본 임승국교수님의 대륙백제설과 기존 사학계에서 주장하는 반도백제설을 살펴볼 때 타당성이나 근거면에서 대륙백제설이 더 크다고 본다.

필자는 여기서 과거에 일본에 의해 실제 자행되었던 음모의 하나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른 바 창씨개명은 독자 여러분들도 익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지개명(創地改名)이란 것이 동시에 시행되었다는 것은 현대에 살고 있는 60대까지의 인물들은 대부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고자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쳤으면 되었지 무엇하러 지명까지 바꾼 것인가?

혹자는 또 이렇게 물을 것이다. 증거있어? 증거대봐 증거! 라고 말할 것이다. 필자는 증거 여기있다 증거! 자자~~ 라고 이야기 한다.

필자가 살고 있는 대전만 해도 그 증거가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필자가 살고 있는 대전은 과거 지명은 태전(太田)이다. 수년전 증산도에서 대전의 지명을 본래대로 회복하자는 지명찾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면서 1920년대 이전의 행정문서와 지명에서 태전으로 표기된 문서를 제시한 것을 본적이 있다. 지금도 대전에는 태전교(太田橋)라는 다리가 있고 태전동(太田洞)이라는 지명도 있으며 간판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물론 이자료는 언제든 확보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허나 이런 하나의 도시만 창지개명을 한 것이 아니었다. 대전외곽지로 나가게 되면 조동(鳥洞)이란곳이 있는데 놀랍게도 일제시대 이전에는 봉동(鳳洞)이라는 지명이었는데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지명을 바꾸게 된 것이다. 鳳이라는 글자에서 윗부분을 지우면 쉽게 문서에서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또한 글자의 의미도 대단히 축소되고 말입니다.

대전이야 알려진 바대로 너무 명당(우리나라나 풍수학자들 주장)이라서 그 기운을 꺽기 위해 이토오 히로부미가 기차를 타고가다가 직접 명령을 해서 고쳤다고 손 치더라도 왜 다른 지역까지 명칭을 고쳤을까?

누구 아는사람 없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군요. 아마 죽은 이병도 박사는 알것입니다.증거 없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아쉽게도 이병도 박사가 알고 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그냥 객쩍은 소리 한마디 했습니다. 본론 들어갑니다.

역사왜곡의 현장에 대한 힌트는 이 창지개명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창지개명은 일본에 점령된 이후가 시초가 아니라 그 이전에도 있었다고 보는데 그것은 조선조 세조당시에 이미 민족상고사 관련 사서들이 압수되고 "삼성기, 단기고사를 비롯한 민족 상고사 관련 사서를  집안에 숨기고 있으면 사형에 처한다"는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이 정책은 당시 강대국이었던 명나라의 강압정책에 의해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행한 정책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도 그러한 희귀본들은 일부 뜻있는 집안에서 소장되기도 하였고 조선조의 규장각에 소장되었다가 일본이 침략을 하면서 모두 수탈을 당하고  소실되게 된다.

일본의 사서 수탈과 창지개명과 역사왜곡 규모에 대해 다시한번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일본이 금서룡(今序龍)의 조선사편수위원회당시 조선사 조작당시에 "조선인은 조선사 모르게 하라" 라고 명령하여 당시 천문학적 거금 100만원(당시 1원이 쌀 두가마였으며 물산장려운동당시 조선의 1년 무역거래액이 1000만원정도였다.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 군대 수천명의 무장자금이 10만원이었으며 일본경찰의 한달월급이 20원 받아 넉넉하게 살았고 이완용이 을사조약 체결후 대가로 일본에 받아먹은 돈이 5000원이었다.)을 들여 대대적인 조사를 했다. "조선인이 조선사 모르게 하라"란 명령서는 일본에서 조선총독부로 내려진 명령서의 제목이며 그 사본이 증거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과거 조선사편수위원회에서 만든 조선사와 지금의 현행 국사 교과서를 비교해본다면 얼마만한 차이점이 있을까? 비교하여 봐서 별로 다를바가 없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일본의 역사조작에 의해 자국의 역사를 전혀 모르고 있다란 등식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런조사 안하나? 공무원 없나? 나같으면 이런거 선거공약 내세우고 실행하면 엄청난 표를 얻을텐데 말이다. 친일파숙청과 역사재평가 작업을 해야 한다면 역사재평가 작업을 먼저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위의 내용을 보면서 어휴! 세조는 정말 한심한 군주였구나 하는분도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중국과 외교를 수립한 이후 최근들어서 중국이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간혹 등장한다.  고구려 역사와 백제사가 우리나라 역사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이 백제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몇가지가 생각나겠는가? 한국을 빛낸 100인이라는 노래에서 나오는 계백장군 5천 결사대와 의자왕, 삼천궁녀, 삼천궁녀와 백마강 낙화암에서 다이빙 첨벙 첨벙입니다.

필자가 중학교시절 수학여행때 공주에 갔었다. 그리고 백마강 낙화암을 보면서 백제인들 참 대단해. 저 얕은 강물에 3000명이나 빠져 죽을려면 의지가 대단했었겠다라고 감탄했었다. 얼마나 자살의지가 강했으면 깊어야 사람키정도 되지 않는 강(유량이 적은 여름에는 비가와서 물이 불지 않는 한 사람키정도도 안되는 곳이 많다)에서 뛰어내려 물속으로 억지로 들어가서 죽었겠는가?  죽을려면 뛰어내리다 서로 부딪혀서 죽었겠다 싶었다. 말이 3000명이지 필자는 그 일대에 3000명의 공간을 채워 보았더니 빠져 죽기가 거의 불가능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화암은 한쪽은 바위라서 천년동안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강폭이 변해봐야 몇미터 차이 나는 것도 아니고 강폭을 본다면 100명이 팔뻗으면 강저편까지 연결하고도 남는 거리였다. 3000명이면 막말로 강건너까지 30번 줄을 세우고 남는거리다.

중국의 송서 97권을 보면 백제의 위치가 전혀 다르게 나온다. 북경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산동반도를 지나 양자강 남북의 평야지대를 포함한 중국동해안 일대를 백제가 지배하고 있다고 나온다.그런데 거기 지도를 보면 전주도 나오고 백마강도 나온다.이른 바 중국에서 명나라때와 청나라때와 근대까지 1000년을 공인되어온 정사이다. 물론 지금은 중국 25사 서적 수입해서 눈씻고 살펴봐도 없다.

중국인들 바보 아니다. 지금의 중국 25사에서는 백제부분을 완전히 삭제하고 나머지 부분만 출간을 하고 있다.

임승국교수님이 강의하는 송서  97권 백제전 머리부분을 살펴보자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 平郡晉平縣.'

역사란 비교가능한 문헌이 있어야 한다. 환단고기는 그런 대조할 문헌도 유물도 없는 위서다 라고 주장하는 현행 사학계의 말대로 비교할 문서가 없다면 위의 송서도 위서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25사중 여덟 번째인 양서(梁書)를 살펴보면 양서 54권 백제전에도 같은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부터는 임승국교수님의 강의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양서 다음은 남제서(南濟書)입니다. 당시 양자강 남쪽에는 제(濟)나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북위(北魏)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남제서에도 백제전이 있는데, 그 내용은 더 엄청납니다.

당시의 백제왕은 무령왕의 아버지인 동성왕이었습니다. 동성왕의 무덤이 산동반도에 있다고 25사에 기록되어있고요, 동성왕은 산동반도에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직접 도읍하면서 대륙을 경영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의 군사·외교정책은 가까이에 있는 위나라와는 전쟁으로 상대하고, 양자강 남쪽의 남제와는 우호관계를 맺는 등의 정책을 폈습니다.

동성왕은 남제의 소도왕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실로 엄청납니다. 아마 간덩이가 작은 사람은 이 글만 보아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요서나 진평이라고 했던 백제의 세력이 놀랍게도 남쪽으로 확장되어 북위의 군대와 싸워 이겼고, 또 한 때는 양자강 남쪽까지 점령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땅을 일곱구역으로 나누어서 백제장군 일곱을 각각 파견하여 통치하게 합니다.

쉽게 말하면 총독 일곱명을 두고 중국동해안을 싸그리 지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을 중국인들은 다 없애 버렸습니다. 남제서 백제전의 머리부분을 다 뜯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현재 한국으로 오는 25사 중 남제서를 보면, 백제전의 앞부분이 뜯겨나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글씨가 없는 공백이 하얗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게 '똥되는 놈'(지나인)의 심뽀입니다. 오죽하면 똥되는 놈이라고 하겠습니까?

백제전이라는 제목은 있는데 그 다음이 빈칸이란 말이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강시단야(降屍丹野: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인데,

똥되는 놈을 시체로 만든 자는 백제 군대이겠죠. 그리고 그 빈칸은 그냥 남겨두었습니다.

중국본토에는 오리지날 25사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대만에는 물론이고요.

중국본토와 대만에 가공하지 아니한 원본 25사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흔하지 않지만. 중국 가는 사람들은 오리지날 25사를 구해서 남제서 백제전을 펼쳤을 때, 공백

이 아니라 글씨가 꽉 차 있다고 한다면 무조건 갖고와야 합니다.

요즘 중국에 많이 갔다왔다 하는 모양인데 다 소용없어요. 강아지 눈에 보이는 건 누런 똥밖에

없습니다.

근래 중국갔다 온 사람들의 눈에는 누런 황금덩어리만 보일 뿐입니다.

'백제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딱 꼬집어서 얘기할 때는 위와 같은 것이 적절한 예화가 될겁니

다. 백제가 이렇다는 것은 감히 생각을 못합니다. 그저 '낙화암 풍덩'만을 연상할 뿐입니다.

중국지도에 있어 동해안 지역은 사실상 중국땅의 전체나 다름없습니다. 깊은 오지에는 사람들

이 살지를 못합니다.

중국사람들이 집결되어있고 중국문화가 한데 모여 있는 곳이 중국 동해안 지역입니다.

모택동도 여기에 사는 중국인구의 수를 十億에서 二億을 뺀 수억이라고 했습니다.

전체 10억 중에서 (십억에서 이억을 밴 수억)의 인구가 이곳에 몰려 살고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지역을 몽땅 백제가 지배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요즘 남북사학자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토론하자고 하는데, 그건 위험천만한 얘기입니다.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식민사관에 푹 젖어있어서 노태우정권은 또 그런 사람을 뽑을테고, 그래

서 '마피아단'을 남한대표로 보내면 북한사학자들한테 비웃음만 당할 것입니다.

북한 사학은 60년대 초에 한사군문제를 싹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낙랑,현도,진번,임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주 앉으면 남쪽이 망신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사학의 주류가 민족주의 정예학자로 되기 전에는 위험한 주장입니다..

    사서에 등장하는 지명의 결정자와 근거는 누구일까?

위의 내용은 임승국 교수님의 역사학입문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현재의 강단사학계에서는 역사를 검증하려면 중국과 일본이 꼼짝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해야 역사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한다. 헌데 중국의 공인역사서를 입수해 있는데 못할 것은 또 무엇인지 필자는 궁금하다.필자는 여기에 임승국교수님의 대륙백제설에 대해 이것을 부정하는 학자들의 내용을 한번 들어보고 싶다. 과연 얼마나 타당성이 있기에 아예 존재자체 조차 무시를 하는지 말이다. 현재 중국에서 발간하는 중국25사에서 유독 백제부분을 그렇게 삭제해서 대외적으로 출간하는지 기왕이면 그 이유도 포함해서 듣고 싶은 것이다. "중국이 자기나라 역사 축소하는걸 왜 우리한테 묻냐?" 라고 말하면 필자도 할말없다. 본래 묵비권 앞에서는 장사 없는 법인가 보다.혹자는 대륙에서 발견되는 백제(百濟)라는 나라가 중국에서 세운 다른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나라가 적어서 기록상에도 별로 등장하지도 않은 조그만 제후국이었다나? 왕위 계보도 다르고 "그냥 그런나라 있는줄 알아! 더 묻지마" 그런사람도 보았다.

백제가 있던곳을 멸망시키고 왕조를 건국한 왕건의 무덤역시 중국대륙내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또 이런소리가 들린다. "중국에 왕건이란 왕이 있었어. 동명이인이야" 라고 말이다. 거참! 신기하기도 하다 동명이인에 동명국가가 되게 많네 어라! 그러고보니 중국에 있는 전주(기록상으로는 완산주)에 궁예와 견훤이 싸웠다는 전장의 지명이 20여군데 중에서 14곳이나 등장하고 있다. 우와! 대단한 우연의 일치 지금 전라남도 전주에는 일치하는 지몀이 불과 몇군데 되지도 않는데 말이다.

게다가 전쟁터의 강의 위치나 상황묘사까지 일치하고 있다. 역사란 반복된다더니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는 성명과 전쟁방식과 지명까지 반복되었나?   그리고 견훤과 왕건의 병사들은 상당히 나태한 군사였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다. 왕건의 병력주둔지와 견훤의 군대주둔지사이가  과연 몇날 며칠을 말을 타고 달려서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일까? 가다가 매번 술마시고 놀지 않은 다음에야 평균시속 40킬로 정도의 말을 타고 며칠을 달릴 이유는 없지 않을까? 그때도 노동법이 있어서 8시간 근무제로 퇴근했는가? 아니면 지금은 사라져 버린 방위제도가 있었서 퇴근후 다시 말을 타고 달려와서 어제 그지점부터 달렸던지 말이다. 왕건과 견훤이 싸웠던 그때의 지명은 고사하고라도 수십개의 성을 뺏었다드니 뺏겼다느니 눈씻고 찾아봐도 수십개 성의 성터는 성터 몇 개 보이지도 않는다. 필자가 태어나서 전국일주는 못해봤지만 30대 중반 나이에 성터를 본 것이라곤 임진란때 쌓은 왜성과 대구 가산산성, 그리고 수원성 인왕산뒤에 있던 성곽정도가 전부이다. 그리고 지도 가져다 놓고 비교해 보기 바란다. 한반도 지도 안에다 견훤과 왕건이 싸워서 뺏고 뺏었다는 지명과 지형을 놓고 아무리 임의로 성을 지을 만한 곳을 잡아서 그려보라 그리고 거리상 측정을 해보면 성을 쌓기에는 너무나 가까운 거리임을 새삼알 게 될 것이다. 성터가 없는 것은 그당시 성축조 기술이 발달해서 1회용 성을 축조해서 쓰고 버렸던가?

필자는 정말로 궁금한게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각종 사서에 등장하는 지명이 지금금의 어디라고 확정한 것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유래와 근거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독자들은 본적이 있는가? 본적이 있다면 필자 가리온에게 좀 알려주시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물론 조선사 편수위에서 제작한 역사서의 내용과 함께 3가지를 비교해보면 더욱 좋을것입니다.

작금의 전라남도 전주(全州)란 지명이 최초로 쓰여진 연대와 문서는 언제이며 중국에서 전주(全州)란 지명이 쓰여진 것과 고대지명의 관계등도 살펴보고 싶은게 필자의 소망이다. 앞서 이야기 했던 주원장의 고향이 전주지역 어디라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고 필자는 소개했다. 헌데 이성계의 고향과 터전은 어디일까?  이성계의 조부와 증조부는 원나라때 한반도 넘어 당시 여진족이 거주했던 터전에서 만호의 다루가치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퉁두란(이지란) 장군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남쪽지방의 농경사회에서 자란 계급이라면 그렇게 활솜씨가 뛰어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압록강넘어의 여진족 사회는 수렵과 무예가 발달된 곳이다.

헌데 주원장과 이성계는 줄곧 같이 등장을 하고 있다. 야사나 전설에서도 같이 등장하고 있으며 전해오는 이야기가 여러 가지 이다. 뭐 또 증거내놔라고 하면 필자는 할말 없으니 이쯤하고 넘어가야겠다

임승국교수님 약력
 

 고려대 정치학과 졸업, 동 대학 문학박사(영문학) 경희대 교수(영문학), 숭실대 교수(영문학) 역임 현 명지대 교수(한국사) 현 한국정사학회장 현 공군정신연수원 교수

출처 : 백두산족 역사
글쓴이 : 관리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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