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열도 대화왜에서 온 두명의 백제 왕들- 동성왕(東城王)의 대륙백제 경영과 무령왕(武寧王)의 북방정책 웅진에서 젊은 나이로 즉위한 동성왕은 초기 곤지의 섭정하에 있었으나 점차 군왕의 위엄을 갖추고 독자적 정치를 하게된다. 국내적으로는 AD 487년 임나항의 담로왕 기생반 숙미가 삼한왕을 자칭하면서 백제의 군량 수송을 방해하고 보급품을 횡령하자 동성왕은 고이해 장군을 파견하여 그 세력을 토벌하고 임나항의 지배권을 확보함으로 자유 이민항으로서 기능을 회복시켰고 신라, 가야와 군사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항하였다. 한편 국제적으로는 AD 488년 중국 하북성 일부, 산동반도 지역의 백제 세력에 대한 북위(선비족 탁발씨가 AD 386년에 세운 국가)의 공격이후 498년까지 10년동안 총 다섯 번에 걸친 대외적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어 북위에게 넘어간 옛 요서 백제 영토를 수복하였다. 당시 국제정세는 고구려와 북위가 북부동맹을, 대화왜, 백제, 남제가 남부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AD 488년 북위의 침입을 막기위해 동성왕 자신이 산동반도 수도 내주( 현 옌타이)로 직접가서 격퇴하였다. 그런데 동성왕에 패한 북위가 AD 489년 외교상 적대국 관계였던 남제와 정치우호 조약을 맺자 백제와 남제와의 동맹관계는 균열이 생기게 되었고 국제 외교상의 변화에서 AD 490년 북위의 고조는 보기군 10만명을 동원하여 하북성 지역의 백제군을 공격해왔다. 동성왕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을 파견하여 북위 군대를 크게 격파한다. 이당시 동성왕의 북위군 격퇴 기사가 남제서(백제전)에 <경오년 위나라 군대를 밤에 공격하니 북위군이 무너져 총퇴각하였고 백제군이 적을 뒤쫓아 마구 무찌르고 목을 베니 적의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고 피가 온땅에 붉게 물들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去庚午年... 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湯 乘奔追 屍丹野 한편 남제는 왕위찬탈 등 내부혼란으로 국력이 약화되자 백제는 남제에 대한 지배적인 외교 자세를 갖고 AD 495년 남제에 외교표문을 보내 과거 AD 490년의 북위 전쟁을 재확인하면서 당시 전쟁승리 유공자들에 대한 작위를 하사하고 대륙백제 각 영지에 백제 직할 태수를 임명한 사실을 통보한다. 경오년 전쟁에서 패한 북위는 AD 493년 문제때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자 백제는 산동반도와 회수이북 제남지역에 강력한 세력을 대륙백제 멸망시까지 70여년간 유지하게 된다. 그후 계속해서 북위는 각각 AD 494년, AD 497년, AD 498년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에 전쟁을 걸어왔으나 백제와 남제 연합군에 참패하게되자 제남 회수지역을 백제에게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한편 북위와의 전쟁으로 인해 동성왕이 공주를 오랫동안 떠나있으면서 AD 500년 산동 내주에 임류각 궁궐을 짓고 통치하게되자 공주 왕실과 토착 담로세력들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위해 위사좌평 겸 가림성주였던 백가를 동성왕에게 보내어 대왕이 공주로 되돌아 와 통치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임류각의 호화로운 생활에 젖어있던 대왕이 이를 거절하였다. 이때 백가가 공주의 통치를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하자 대왕이 대노하여 백가를 죽이려하니 백가는 돌연 자객으로 변해 대왕을 시해하고 만다 이로써 근초고왕에 이어 중국대륙 내에 광대한 백제식민지를 건설한 동북아 의 영웅 동성대왕은 AD 501년 12월 어이없게 자신의 신하의 칼에 맞고 죽는 어이없는 최후를 맞게 되었다. (동성대왕의 왕능은 현재 산동반도 내주부근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왕의 피살소식이 공주와 나라에 전달되자 대화왜에서는 곤지의 양아들 무령왕을 후임왕으로 임명하여 백제에 새로운 왕으로 보내게된다.(삼국사기에서는 이복 형제간인데도 불구하고 무령왕을 동성왕의 차남으로 기록하여 부자지간으로 왕위 계승한 것으로 기록) 대왕을 죽인 백가가 무령왕의 취임을 거부하고 반란을 도모하자 무령왕은 우두성 성주 해명을 시켜 이들 세력을 물리쳐 죽이고 공주에서 제25대 신왕(AD462-523)으로 등극하게 된다. 무령왕은 AD 502년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에게 빼앗긴 수곡성를 탈취하여 북방의 영토를 황해도까지 넓혔고 AD 503년, AD 506년 고구려와 말갈족의 연합군을 연속으로 격퇴하였으며, 섭라(섬진강 주변의 가야땅)를 놓고 벌인 고구려와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대화왜와 친밀한 관계를 위해 나라에서 어린시절 곤지밑에서 형제같이 자란 이복 동생 계체 (케이타이, 繼體)천황에게 AD 503년 백동 200관으로 만든 청동경을 보냈고 AD 507년 자신의 딸 수백향(手白香)을 천황의 왕후로 삼으니 대화왜는 웅진백제의 부마국이 되었다.(그래서 AD523년 62세로 무령왕이 붕어했을 때 대화왜의 계체천황은 이를 몹시 애도하여 금송으로 특별히 만든 관을 보내 왔던 것이다-국립 공주 박물관 소장) 한편 섭라에 대한 가야와의 영유권 분쟁이 국제화되자 AD 513년 왜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 조정을 설득시켜 섬진강 무역중심지 섭라에 대한 백제의 주권을 인정받는다. 한편 당시 공주에는 천황계 진씨들이 대거 왜열도로 이민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졸본부여계 대신 남부여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어서 무령왕은 AD 509년 백제유민 보호정책을 펼쳐 도왜 이민을 제한하여 인구감소를 막았고 임나지역에서 유랑하고 있는 백제유민들을 백제 본관지에 재편입시켜 귀향조치 하였다. 이로써 왜열도에서 온 두명의 왕들은 백제를 강국으로 일으킨 치세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남제에서는 동성왕을 진동(鎭東)대장군 백제왕으로, 양나라에서는 무령왕을 영동(寧東)대장군 백제왕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 글쓴이 : 홍순주 |
글 올린 시간 : 2004-12-10 오후 1:38
발췌 : JOINS 아시아 첫 인터넷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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