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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여바위왕자 진무(神武)천황, 그리고 오진

monocrop 2006. 12. 15. 23:24

부여바위왕자 진무(神武)천황, 그리고 오진

 

한국과 중국 사료에 신라가 일본에 정복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한가지 가능한 해석은 8세기 초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편찬되기 200년전 가야는 이미 신라에 통합되어 신라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측 자료에 따르면 신공왕후는 야심에 찬 인물이었으며 다케우찌노 스꼬네(무내숙미)가 항상 그녀의 강력한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추측하는 바는 신공왕후가 낳은 아이는 분명코 중애왕의 아이가 아니고 무내숙미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용감한 큰 곰 무내숙미는 동부여의 후손으로 아마 고령가야에서 높은 벼슬을 지낸 손꼽히는 장군이었을 것이다.
  
  신공이 신의 뜻을 전한다면서 자신이 중애의 아이를 가졌으며 그 아이가 장차 신공 자신이 정복할 나라를 다스릴 인물이 될 것임을 예언하고 6개월 후 그녀는 원정날짜를 택일하는 제의를 벌이게 된다.
  
  일본을 무력정복한 이 역사적인 사건에서 ‘신의 뜻’을 앞세운 샤머니즘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역사 초기에는 한국이나 일본이나를 막론하고 징조라든지 무속적인 강신술 같은 것이 모든 중요한 일의 방향을 결정했다.
  
  무내숙미와 신공은 일본정복의 계획을 세운 뒤 백제에게 그들과 합세하여 신라에 대항할 것을 종용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신공은 자신의 칭호를 가야의 여왕 또는 왜왕으로 고쳐 백제에 종속되었음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내숙미와 신공이 단둘이만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날로부터 정확하게 9개월 11일이 지나 호무다(譽田) 왕자가 태어나게 된다. 두사람은 제사후 16일 동안 그 장소를 떠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생물학적으로 보아 이 기간에 ‘용감한 늙은 곰’ 무내숙미와 ‘위대한 왕후’ 신공이 그 ‘성스러운’ 아기를 만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부여족의 일파 고구려 기마인들 ⓒ프레시안

  그 아기가 자라서 오늘날 일본이 진무(神武)천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인물이 되며 또한 만세일계를 자랑하려 꾸며낸 천황 족보상 15번째를 차지하는 오진 천황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 가운데 일본 내륙으로 진격해가는 신무의 동정(東征) 부분에 가서는 이와레(磐余彦)황자, 즉 부여바위왕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껏 한국사람들은 어린애 이름에 바위를 흔하게 붙여 부른다. 이것은 고조선 부여 이래 전통의 한 면모다.
  
  일본 국가형성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역사가들은 역사 이전에 살았던 몇사람을 합성하여 진무천황이라는 이름으로 한 위대한 신화적 존재의 탄생을 보았다. 사실 神武(하늘로부터 받은 용기를 지닌 왕의 뜻)라는 이름은 古事記 日本書紀가 편찬된 8세기를 훨씬 지나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의 실정을 보면 고구려를 통해 내려온 부여족이 남이(南夷)라고 불리던 마한을 정복한 다음 백제지역에서 결속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후 부여족의 일부, 즉 346년 북부여가 멸망한 뒤 백제의 사촌들과 합류한 무리가 낙동강 하류, 즉 김해 및 부산지방을 향해 더욱 남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규슈로 건너가고 다시 일본 내륙 나라(奈良)를 향해 동쪽으로 옮겨간 부여족과 그들이 탄 말의 이동이 일본 역사에는 ‘신성한 야마도(大和) 정권의 이와레 황자(皇子)에 의한 기나이(畿內)지방의 정복’으로 탈바꿈되었다. 다급한 경우를 당하면 신공은 어린 왕자를 용감한 늙은 곰에게 맡기기도 했는데 여하튼 이 아이는 씩씩한 이와레 왕자로 자라나 어머니의 원정길을 돕게 된다.
  
  이 이와레 왕자는 나중에 진무천황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지만 진무(神武)라는 이름보다는 이와레(磐余)라는 이름이 그의 근본을 보다 잘 나타내 준다. 이와라는 말은 아직도 일본에서 바위를 뜻하는 말로 쓰이며 부여 정복자들이 일본을 정복한 후 바위, 또는 돌을 상징하는 인명 및 지명을 많이 만들어낸 사실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레’라고 발음하는 이 이름의 두 번째 글자인 余는 씨족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 말이며 바로 夫餘의 두 번째 글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진무(神武)천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 옛 이야기에 남아있는 이같은 흔적을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다. 바위라는 뜻이 들어있는 옛날 이름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이 사람이름이건 지명이나 사건이름이건 우리는 부여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일본이 말하는 신공황후의 ‘한국정복’이 한국에 의한 일본 정복의 역사적 사실을 뒤집은 것이며 부여 바위왕자의 이름이 수많은 지명에 나타나고 있는 점을 염두에 두면 비로소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묘사된 군사의 이동경로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세밀한 부분에 이르면 서로 다른 점이 나타나지만 적어도 부여바위왕자가 당면했던 몇가지 문제에서는 일치된 설명을 하고 있다. 지도를 보면 그는 먼저 규슈에 상륙한 다음 다시 내해를 따라 천천히 나라(奈良)평원을 향해 진출한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400km가 넘는 거리였다. 이보다 빠른 길은 시고꾸(四國) 남쪽의 바다로 가는 것이었으나 그때는 배가 그럴만큼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내륙의 수로를 따라가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한가운데 몽고말 장식이 붙어있는 일본 고대의 금동관. ⓒ프레시안

  다른 정착민들(야요이 혹은 왜)의 저항에 부딪친 부여바위왕자는 내해를 지나는데 4년을 소요했다는 것이 일본서기의 주장이고 고사기에 따르면 무려 16년이 걸렸다고도 한다. 마침내 그가 이끄는 군사는 요도강(淀川) 연안 현재 오사카(大阪) 라고 부르는 지점에 상륙을 시도했으나 먼저 도착해 있던 정착민들의 반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고사기(古事記)는 오사카에서의 패전에 뒤이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즉 싸움에 패한 이와레 왕자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때까지는 태양을 향해 진격해서 태양의 여신을 노엽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에는 기병(騎兵)을 실은 배들이 기이(紀伊)반도를 돌아 서쪽에서 태양을 등지고 야마도(大和) 평원을 향해 나가면 되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큰 폭풍이 몰아쳐 부여바위왕자의 손위 형 두 사람이 바다에 빠져 숨졌다고 한다.
  
  이때 여러 신에게 제사를 올리기로 결정하고 흙으로 빚은 토기 가득 제물로 바칠 음식을 채웠다. 이 토기가 바로 기마족들이 가야를 떠나올 당시 만들어지던 것과 비슷한 받침대가 달린 잿빛 토기였다. 부여바위왕자도 토기를 직접 만들었다. 그가 만든 것과 비슷한 토기가 현재 부산대학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그런데 또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다시 시작한 싸움에서도 이길 기미가 보이지 않자 왕자의 활에 마치 매 모양의 황금빛 깃털이 달린 연이 내려와 앉아 적의 눈을 어지럽게 만든 것이었다. 결국 적은 패하여 물러나고 말았다.
  
  훗날 일본군대에서 가장 높은 훈장이 바로 황금빛 연(鳶)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은 바로 ‘제1대 천황’과 연관된 이같은 신화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매사냥이 400년경 한국에서 전래되었다는 것은 일본에서도 수긍하는 일인데 이 연대가 바로 이 원정과 대강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서로 대항하여 싸웠던 일본내 두 개의 집단이 결국 알고보니 비슷한 무기를 가졌으며 멀기는 하지만 분명히 어떤 관계가 있는 사이였음을 깨닫게 되었으리라는 점이다.
  
  먼저 정착해 있었던 무리는 백제지역으로부터 건너갔을 것으로 보이는데 야마도 평원에 자리잡은 이들이 후일 부여 기마족이 세운 정권 및 6세기에 이를 계승하는 왜왕 통치 아래 군부를 관장한 모노노베(物部) 가문을 이루었음이 암시되어 있다. 초기의 기마인들은 먼저 정착해 살고 있었던 씨족들을 봉건영주로 고용해서 다스렸다고 하는데 모노노베 경우가 그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8세기 일본의 사관들이 이처럼 중애왕의 두 아들을 물리친 무내숙미가 신공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태어나기까지 천황자리를 아무에게도 내어주지 않은 채 오랫동안 신공에게 섭정의 권리를 맡겼다고 서술한 것은 분명 왕조의 교체를 숨기기 위한 은폐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부여족에 의한 일본정복을 언급하지 않고 애매하게 흐려버린 채 그 연대까지 ‘신화시대’인 서기전 660년으로 끌어올려 놓았지만 무내숙미, 즉 다께우찌 가문만은 결코 생략해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부여족이 일본 중심지역의 세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다께우찌 가문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사기를 읽어보면 조상, 또는 혈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며 일본의 봉건주의에서 우지(氏), 즉 신분이 높은 귀족가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가를 알게 된다. 그들은 심지어 신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조상을 찾았고 중요한 가문일수록 부여바위왕자와 함께 한국에서 건너온 조상을 떠받들었다.
  
  원문: 위대한 부여족의 재출발 2 월간 자유 1984년 6월호
  (주; 이 글은 1984년 코리아타임스기자 권승철이 번역했다. 긴 글 중에서 오진과 진무가 동일인이라고 주장하는 부분, 진무의 東征 부분만을 추려 2004년 김유경이 편집했다.)

 

존 코벨/김유경 편역

출처 : 韓民族! 옛 제국을 찾아서...
글쓴이 : 주인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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