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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출처: http://cafe.daum.net/hanfuture
(위 지도가 맞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요서와 산동반도 일대가 백제의 영역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 상 가장 활발했던 국가 백제...
백제는 강력한 해상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일본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더군다나 백제의 초기 건국지는 요서 일대인 대방고지로, 백제는 자신들의 옛 땅이었던 대방고지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래서 중국 내에 세력의 공백이 생기가만 하면 여지없이 그 곳에 진출하여, 기존 세력 위에 백제에서 진출한 세력을 합해 식민지를 경영하게 된다. 중국 본토에 건설한 백제의 식민지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요즘 인정 받기 시작한 요서 · 진평을 포함한 '하북성 지구'로 산동반도를 포함한 지역이다. 다른 하나는 양자강구 좌우 양안 지방이다. 중국의 『구당서』 「백제전」에 "백제국은 서쪽으로 바다 건너 월주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 건너 왜국에 이르며, 북쪽으로 바다건너 고구려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 「백제전」에도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 경계는 왜, 북쪽경계는 고구려로서 모두 바다를 건넌다"라고 하여 백제가 중국의 요서 및 월주 그리고 왜국(일본열도)을 식민지로 거느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은 사실이 전해지지 않았을까? 그건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가 백제의 역사서를 불태웠고, 또한 일제강점 시대 일제가 이와 같은 사실을 은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백제가 넓은 중원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것이 증명된다.
1. 요서 · 진평의 백제 식민지
하북성 지구를 포함한 중국 동북부 발해만 지방은 원래 백제국의 출발지이다. 백제 고이왕 시기에 낙랑번지 점령, 분서왕이 오늘날의 천진 지방인 낙랑 서현 지방 점령, 비류왕 연대에 요서 · 진평지구 점령, 동성왕의 산동반도 지역 점령이 계속 이루어졌고, 중국 남북조 시대에 고구려에 복속된 북위에 대항하는 남조의 남제를 실질적으로 조종하는 종주국의 역할을 백제가 행사하였다. 그것은 남제 및 북위의 중요한 요충지인 산동반도 및 양자강구를 백제가 점령하여 식민지화했기 때문이다.
이것의 증거가 되는 기록으로 중국 『진서』 「모용황전」에는 "고구려, 백제, 우문, 단부의 무리들은 모두 병세지도(並勢之度)"라 하여 백제가 한반도의 백제가 아닌 것을 분명히 하였고, 『송서』 「백제전」에는 "요서를 차지한 백제의 치소(治所)는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혀 놓았으며, 『양서』 「백제전」에는 "백제는 원래 고구려와 같은 뿌리로서 요동 동쪽에 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 역시 요서를 점거하여 요서, 진평 두군을 두었다. 백제의 자치군 이었다"라고 하였고, 「자치통감」에는 "전연의 수도에 강제로 옮겨진 고구려와 백제의 사람들이 너무 많아 걱정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통전」 「백제전」에는 "원래 백가제해라는데서 백제라 부르게 되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 두 군을 영유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다"라 기록하여 이를 또한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이 곳 식민지는 백제가 멸망당할 때 까지 거의 300여 냔간이나 막강한 중국 세력이라고 허위를 일컬어 왔던 북위 등을 제압학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2. 월주지방의 백제 식민지
백제는 비류왕 때 중국 양자강구 좌우 양안 지방을 점령하여 이후 250여 년간이나 통치하였다. 다른 사서에는 이러한 사실이 전하지 아니하나 중국의 역사서인 『주서』 「백제전」과 『북사』 「백제전」에는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주서』 「백제전」을 보면 "자진 송 제 양거강좌 후위택중원(自晋 宋 齊 梁據江左 後魏宅中原)"라 기록되어 있고, 『북사』 「백제전」에는 "자진 송 제 양거강좌우(自晋 宋 齊 梁據江左右)"라 기록하여 백제가 晋(서진 시대)나라 때 양자강 연안을 점령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에서 부성군 태수로 벼슬한 최치원이 당조의 태사시중에게 제출한 상소문에도 이러한 사실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을 보면
"백제 전성시대에는 강병이 100만이었다. 남으로 월을 치고 북으로는 유, 연, 제, 노를 경계로 하였다. 커다란 중원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라 하여 백제의 양자강 유역의 점령의 근거로 활용된다. 그리고 이 곳 월주는 이후 당, 송을 거치면서 중국의 대표적 항구였던 항주로, 산동반도의 적산포와 함께 한반도와 일본으로 출발하는 중국의 유일한 무역항으로 역할하였으며 이후 동북아 해상권을 장악하는 전진기지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재당 신라인 내지는 당인, 고려시대에는 고려인 내지는 송인으로 기록되는 이 곳의 백제인은 그 당시 유일무이한 무역상들로, 이들을 통하지 않고는 무역은 물론 바다에서의 전쟁 등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 곳 양자강 양안 항주만의 무역지인 주산군도는 백제의 점령 이후 지속적으로 동북아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장보고의 완도에 똑같은 법화사, 상왕산, 관음암, 조음도, 신라국이 있듯이, 이곳 주산군도의 중심지인 보타도에도 법화동, 상왕봉, 관음사, 조음동, 신라초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어 이곳에 백제인의 해상 세력권이 있었음을 강력하게 증명해 준다. 그런데 통일신라 시대 동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가 여러 각도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그것 중의 하나가 '장보고는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었던 사실대로 통일신라에 의해 해상세력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중국의 동부 · 북부 해안지방 및 동북아 해상권은 백제인(이 시기에는 재당 신라인)이 장악하고 있었고, 반면 통일신라는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당나라는 통일 신라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하는 목적과 중국 내에서 중앙 통치의 힘이 미칠 수 없었던 중국 내의 백제 영향권 지역과 해상권을 끌어들여 조세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중국 내의 백제 영향권 출신인 장보고를 신라에 중용하라 강요하였다는 학설이 제기 되었다. 이러한 여러 사실로 보아 통일신라시대까지도 중국 동부 빛 북부 해안은 우리민족(백제인:재당 신라인)의 절대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해상권 또한 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통일신라에 반기를 든 고려 건국의 시조인 태조 왕건은 이 세력에 기반을 둔 재당 신라인으로, 왕건도 이 곳의 강력한 지원하에 집권이 가능하였을 정도로 그 영향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라의 통일에 의한 이들 백제인의 외국인화와 이들 백제인이 해상권을 장악함에 따른 국내의 향력, 사치의 억제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신라는 쇄국정책을 펴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동북아의 해상권을 거머쥔 장보고가 멍청한 신라 정부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써 우리민족은 영원히 동북아 해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참고: 한국 고대사 다시 쓰여져야 한다.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1500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