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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의자왕과 삼천궁녀-이긴 자가 기록하는 역사 왜곡의 진실

monocrop 2006. 12. 15. 23:25
 지금껏 백제의 삼천궁녀로 상징되는 의자왕의 사치는 백제 멸망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런 사정을 연상하게 하는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6년조의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成忠)이 극력 말렸더니 왕이 성을 내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는 기사이다. 이 기록에서 의자왕은 충신의 충언조차도 듣지 않는 등 국정을 도외시한 채 음란과 향락에 빠져 지내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데, 거기에는 그의 이런 실정으로 백제가 멸망하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같은 책인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의 다른 기록에는 전혀 다르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용감하고 대담하여 결단성이 있었다. 무왕이 왕위에 있은 지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그는)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백제인들은 의자왕을 중국의 증자와 같은 동방의 성인이라 하여 '해동증자'로 추앙하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삼국사기]에서는 의자왕의 인상을 극히 상반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럼 어떤 인물이 의자왕의 진실인가.

 

   의자왕은 그의 아버지인 무왕의 뒤를 이어 641년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신라에 대한 공격을 한층 강화하였다. 그는 즉위한 이듬해 내신좌평 기미(岐味) 등 유력한 귀족 40여 명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각 지역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들을 다시 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다 풀어 주는 민심수습책을 펼치는 등 국내 정치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의자왕은 2년(642) 7월에 이런 조치를 토대로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하였다. 이어 다음 달에 윤충(允忠)을 보내어 신라 공격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경남 합천)을 확보하였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청병을 요청하였지만 거부당하였다. 오히려 그 다음해 백제가 고구려와 화친관계를 맺고 신라에 대한 공격을 본격화하였다.

 

   신라의 김춘추가 제안한 동맹관계가 고구려에 의해 거부된 이유는 백제 성왕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한강 유역의 반환문제 때문이었다. 고구려가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고 나서는 바람에 김춘추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라는 당나라에 중개를 요청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신라는 진덕여왕 5년(651)에 김범민을 당나라에 보내 당시 상황을 알리고 중재를 요청하였다.

 

   이렇듯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성왕 이래 적대국이었던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당시 신라인들이 자신의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에 빠지게 할 정도로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요컨대 백제의 공격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신라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에 김춘추를 보내 군사원조를 청하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한반도 내에서 원조세력을 얻지 못한 신라는 중국대륙으로 방향을 돌려 당이라는 새로운 파트너를 찾게 된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당 태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여 자존심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가 군사동맹을 맺기를 요청했으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김춘추와 당 태종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 이남의 백제 영토는 신라가 갖고 나머지 지역은 당이 차지한다는 밀약을 맺었다. 즉 신라는 백제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당은 고구려를 정복하여 당 중심의 국제 질서를 세우기 위해 동맹을 맺었던 것이다. 그 결과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는 멸망하게 된 것이다.

 

   당나라는 660년 3월에 출병을 신라에 통보하고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수군과 육군 13만 명이 6월 18일 산둥반도의 래주(萊州)를 출발하여 덕적도에서 신라군과 만나 나당연합군을 형성하였다. 백제군은 나당연합군에 맞서 결사적으로 항쟁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백제는 멸망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백제의 멸망은 당나라와 신라가 손을 잡고 침공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외에도 재위 16년(656) 간쟁하던 좌평 성충(成忠)을 옥에 가둔 것이나, 나당연합군 침공 당시 좌평 흥수(興首)가 유배되어 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지배층 내부가 분열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런 내부 사정 때문에 백제가 망한 것이 아니라 나당연합군의 공격 때문에 망했다는 사실이다.

 

   瀏??사실이 이러한데도 당시 역사가들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백제의 멸망을 사치와 향락에 빠진 의자왕의 폭정에서 찾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그의 시대에 나라가 망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말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폭정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이지도 않고 공정한 평가도 아니다.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은 성왕 이후나라가 극도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동양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를 창건하고, 익산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으나, 이를 두고 무왕이 폭정했다고 말하는 역사가는 없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전통시대의 역사가들은 백제의 멸망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했는데, 그 결과 의자왕의 실정을 극대화하여 멸망의 주요인으로 삼은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전통시대 역사가들은 어떤 왕조이든 간에 그 왕조의 멸망 원인을 항상 그 마지막 왕의 폭정에서 찾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전 왕조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다음 왕조의 역사가들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후대 역사가들은 그 비판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내어 온전한 과거사를 복원해 내야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의 다음 말은 그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백제가 말기에 와서 행동이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많았으며 또한 대대로 신라와 원수를 맺어 고구려와 함께 화친을 계속함으로써 신라를 침공하고 유리한 조건과 적당한 기회만 있으면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진들을 떼어 가고 빼앗아 가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소위 인자(仁者)와 친하고 이웃을 잘 사귀는 것이 나라의 보배라는 것과 다르다. 이에 대하여 당나라 천자가 두 번 조서를 내려 백제와 신라 사이의 원한을 풀라고 하였으나 겉으로는 순종하는 체하면서 안으로는 위반함으로써 대국에 죄를 졌으니 그가 패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용출처 : [기타] 이덕일, 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2], 김영사, 2000

출처 : 韓民族! 옛 제국을 찾아서...
글쓴이 : 주인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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