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우리역사 문무님의 글입니다.
수경주 하수 편을 보면 ; 281) 鮮 卑 山 ☞ 釋氏《西域記》曰:牢蘭海東伏流龍沙堆, 適
皇東南四百里阿步干鮮卑山. 東流至金城?大河. 선비산 : (석씨 서역기 운 : 로란해 동복류용
사퇴, 재둔황 동남 사백리 아보간 선비산, 동류지 금성위 대하) 라고 했습니다. 최소한 서역
의 나라 편에 선비산이 기록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서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선비산에서
시원하는 선비족들이 동진하여 대륙의 중원으로 진출하는 것을 반대로 동북삼성 지역에서
서진하여 중원으로 진출, 서역으로 갔다는 말이 될 수 있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鮮卑(중국고금지명대사전) ; 黃帝의 아들인 昌意의 少子. 受封北王. 國有大鮮卑山.
因以爲號. 匈奴故地. 後漢之末最盛.以모용,척발씨 最著. 척발씨 後建國號魏.(중략)
====>흉노의 옛땅에 선비산이 있으며 燕,魏를 세운 모용,척발씨 역시 선비족이라는
기록입니다.
사기 흉노열전 : 「山戎蓋今鮮卑。」按:胡廣云「鮮卑,東胡別種」。又應奉雲[秦築長城,徒役之士亡出塞外,依鮮卑山,因以為號」。 *
상 기록에서 말해주듯이 山戎은 鮮卑다.東胡의 別種이다.진나라에서 長成을 축조하자 그들은 塞外지역으로 도망을 갔으며,선비산에 의거해서 鮮卑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들을 현 하북성이나 동북삼성지역에 있었다고 어떻게 말할수 있나 ?
====>선비는 동호의 이종이며 산융이라고 기록있으며 진시황이 장성을 쌓자 도주 선비산에 의거해서 선비라 불리웠다는 기록입니다.
아시다시피 진시황이 쌓은 장성은 중원 서북방 북방 즉 감숙성에서 섬서성 북방 즉 내몽고 남부에 쌓은 장성입니다.
魏書 1권 序紀(서기)를 보면 ;
昔 黃 帝 有 子 二 十 五 人 , 或 內 列 諸 華 , 或 外 分 荒 服 ,昌 意 少 子 , ▶受 封 北 土 , 國 有 大 鮮 卑 山 , 因 以 為 號 。 其 後, 世 為 君 長 ,▶統 幽 都 之 北 , 廣 漠 之 野 , 畜 牧 遷 徙 , 射 獵 為 業 , 淳 樸 為 俗 , 簡 易 為 化 , 不 為 文 字 , 刻 木 紀 契 而 已, 世 事 遠 近 , 人 相 傳 授 , 如 史 官 之 紀 錄 焉 。 黃 帝 以 土 德 王 , 北 俗 謂 土 為 托 , 謂 后 為 跋 , 故 以 為 氏 。 其 裔 始 均 ,入 仕 堯 世 ,☞逐 女 魃 於 弱 水 之 北 , 民 賴 其 勤 , 帝 舜 嘉 之 ,命 為 田 祖 。 爰 歷 三 代 , 以 及 秦 漢 , 獯 鬻 、 獫 狁 、 山 戎 、匈 奴 之 屬 , 累 代 殘 暴 , 作 害 中 州 , [魃 (魃 : 가물귀신발,한발(가뭄)의 신)]
☞ 상 기록은 말 그대로 <탁발>씨들의 北魏의 역사서이다. 헌원황제의 스물다섯 아들증의 <창의>의 少子가 북쪽의 땅을 하사받아 그곳의 왕으로 봉 받았다는 것이다.
그 봉 받은 나라 안에 큰 산이 있는데 <선비산>이다. 그 이름을 취하여 <호(號)>가 되었다. 그 후에 군장으로써 계속 이어 왔다.
유도(幽都)의 북쪽으로 광막( 광활한 사막지대 )한 들판에서 가축을 기르며 옮겨 다니며 사냥을 하며 살아가고 (중략) 문자가 없었다. (중략)
※ 弱水는 ; 장액하를 말하며, 옛 유사이며, 黑水이다. 북으로 흘러 거연택으로 들어간다. 이 거연택의 남쪽지대에 <부여>가 있었으며, 동북에는 挹婁가, 서쪽에는 鮮卑가 있었다. 그 남쪽에는 高句麗가 있었다고 <후한서>는 기록하고 있다.
즉 광막지대의 남쪽지대에 유도(幽都)가 있었다. 즉 유도는 유릉이며 유주다. 따라서 <유주>는 하북성 및 동북삼성 지역이 아니라 그곳으로 수 천리 서쪽으로 하투지방 서북의 음산을 포함한 그 주변일대를 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기 곽거병전을 보더라도 한해가 북해이며, 이 한해에 오르기 전에 음산을 지나 갔으므로 음산의 북쪽 지대가 한해이며, 북해인 것이다. 또한 고구려가 중국의 북지에서 시원 한다고 했을 때 “北地”는 바로 이곳 지역을 말하는 것이 된다.
資治通鑑/卷二十三 漢紀十五/孝昭皇帝上/元鳳三年 (자치통감 23권 한기15)
1) 冬,遼東烏桓反。初,冒頓破東胡,東胡餘( )散保烏桓及鮮卑山為二族,
해설자들의 注 ; [遼東郡屬幽州,唐嘗置安東都護府於其地。東胡破見十一卷高祖六年。後漢書:烏桓之地在丁零西南、烏孫東北。武帝遣霍去病擊破匈奴左地,因徙烏桓於上谷、漁陽、右北平、遼東、遼西五郡塞外,為漢偵察匈奴動靜。其大人歲一朝見。於是始置護烏桓校尉,秩比二千石。鮮卑先遠竄於遼東塞外,與烏桓相接,未嘗通中國;至後漢稍徙遼西塞外,始為中國患]
世役屬匈奴。武帝擊破匈奴左地,因徙烏桓於上谷、漁陽、右北平、遼東塞外,[해설자들의 주 : 上谷、漁陽、北平皆屬幽州。上谷,唐媯州。漁陽,唐檀、薊州。北平,唐平州之地] 為漢偵察匈奴動靜。
① (본문)겨울, 요동의 “오환”이 반(배반) 했다. 초에 흉노 冒頓(모돈)이 동호(東胡)를 파했다. 이때 살아남은 동호들은 오환산 및 선비산에 의거했는데, 두(二)족이 있었다.
② 이에 대한 자치통감의 해설자들의 주(注)를 보자.....요동군은 유주에 속해 있으며, 당나라 때 안동도호부의 그 땅이다. 동호를 파한 기록을 보면 한고조 6년이다.
ⓐ<후한서>에는 “오환”의 땅은 “정령”서남에 있었으며, 오손의 동북에 있었다. 한무제가 표기장군 곽거병을 파견해 흉노좌지(동쪽의 땅)을 격파했다. 이로 인하여 오환들은 ⓑ상곡,어양,우북평,요동,요서등 5군의 새외지역으로 옮겨갔다. 이때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 흉노(동호)들의 동정을 정찰했다. (중략).
ⓐ 정령(丁零)의 ; 신강성 토노번 경이다. 오손(烏孫)의 ; 신강성 온숙현 북쪽에 “오손”이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 후대에는 동쪽으로 이동했었을 것이다
===>상곡,어양,우북평,요동,요서가 오환들이 도망간 곳이라면 이 지명들은 당연히 흉노 오환이 있었던 중원 북방내지는 서북방에 있었던 지명일수 밖에 없습니다.
주서 1권 문제 편을 보면 요서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陰山(음산)에서 남쪽으로 옮겼다(徙),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遼西(요서)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우문씨들이 음산의 남쪽으로 이동하여 이곳에 처음 거하게 되었다는 말이며, 이곳이 <요서지방>이었다는 것이다.
===> 즉 내몽고 음산 남쪽이 요서지방이라고 주서에는 기록되 있다는 점입니다.
요동 요서의 구분이 영하성 북부를 흐르는 황하가 요하이며 이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가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기록으로 선비족을 살펴보면 이들은 흉노 동호 산융 오환과 다를바 없는 종족임을
알수 있으며 그 위치 역시 중원 북방 서북방에 넓게 흩어져 있던 종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강성 내몽고 서부 외몽고 서남부 등지에서 있었던 종족이 흉노이며 선비이고 동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 있던 종족을 역사서에는 흉노 동호 선비 오환 오손 산융 등으로 표현
하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또한 말갈이나 글안 돌궐 유연 역시 이들의 범주에서 벗어날수 없습니다.
이러한 곳에 있었던 선비족과 그 강역을 함께 했다는 부여 및 고구려의 기록을 살펴보면...
『三國志』卷30「魏書」第30 <烏桓鮮卑東夷列傳 第30> "夫餘在長城之北, 去玄 千里, 南與高句麗, 東與 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方可二千里")
부여는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에서 1000리쯤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붙어있고, 북쪽은 약수가 있다. 국토이 넓이는 사방 2000리이다
====>부여에 관해서는 대륙사서 모두 공통적으로 위와 같은 기록입니다.
부여의 서쪽에 선비가 접해 있다면 부여가 어디쯤에 있었는지 대략 감이 잡힙니다.
더구나 장성 북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한서및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기록처럼
약수의 위치가 현 감숙성에 있다면 역사서에 실린 장성은 秦나라가 감숙성에 쌓은 장성을 말하며 바로 그 장성 북쪽에 부여가 있었음이 증명됩니다.
여기서 대륙사서에 실린 燕의 진개가 東胡의 땅 2000리를 빼앗았다는 기사와 한단고기 북부여기에 연의 진개가 번조선(북부여의 신하국)의 땅 2000여리를 취했다는 기록을 보면 대륙사서는 북부여를 동호라 칭했음을 볼 수 있으며 동호의 위치가 상기의 기록처럼 대륙 북방 서북방지역에 있었음을 볼때 부여란 나라 역시 흉노,선비가 있었던 곳에 있었기에 대륙사서에서는 북부여를 동호라 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여에서 시원하는 고구려 백제 역시 그 발원지는 대륙일수 밖에 없습니다.
▶▶삼국사기 유리명왕
11년(서기전 9) 여름 4월에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는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가 된다.........................................중략..................................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으므로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삼국사기 태조대왕
봄에 한나라의 유주(幽州) 자사(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해 와서..............(중략)
여름 4월에 왕은 선비 8천 명과 함께 가서 요수현(遼隊縣)을 쳤다.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고구려가 선비를 합병했다는 기록입니다. 고구려의 강역이 어디까지 뻗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륙사서에는 고구려를 호국및 흉노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 역시 고구려의 시원지가
대륙 중원에서 볼때 북쪽 내지는 서북쪽에 있었기에 고구려를 호국,흉노라고 기록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단순한 비하식,춘추필법의 표현으로만 볼게 아니라 고구려가 중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북쪽에 있었기에 그러한 표현을 했다고 또 한편으론 볼수 있습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97 진기 목제 영화 2
앞서 부여는 녹산(鹿山)에 자리잡고 있다가, 백제(百濟)의 참략을 받아 부락이 쇠잔해졌다. 그래서 서쪽으로 연(燕)에 가까운 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는데, 연에 대해서는 전혀 방비를 하지 않았다. 이에 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모용군, 모용격, 모여근 3장군의 1만 7천 기병을 이끌고 부여를 습격하도록 하였다. … (중략) 드디어 부여를 멸하고 그 왕 현과 부락 5만여 구를 포로로 하여 귀환하였다.’
====> 감숙성 장성 북쪽에 있었던 부여를 백제가 침략한다는 기사입니다.
백제가 섬서성에 그 강역을 두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기사입니다.
여기서 백제의 강역에 등장하는 패수가 장성 남쪽에 있는 강이라는 수경주의 기록과
패수는 장안성 남쪽으로 흐른다는 삼국사기 및 대륙사서의 기록을 보면 패수는 섬서성 장안
남쪽을 흐르는 강임을 알 수 있으며 백제는 바로 최소한 섬서성 남부의 강역을 가지고 있었기에 감숙성 북방에 있었던 부여를 침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백제가 요서로 진출했다는 대륙사서의 기록을 백제가 부여를 침공했다는 기사와
연관시켜볼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후한서및 자치통감에는 영하성 북부를 흐르는 황하가 곧 요하이며 이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구분했다고 기록하기에 부여가 있었던 감숙성 중북부및 내몽고 서부는 바로
요서지역이 되는 것이며 백제의 요서진출은 바로 자치통감의 부여침공을 두고 하는 기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전연 모용황의 고구려 침공으로 고구려가 주춤거리는 시기와 백제의 요서진출시기인 근초고왕 시기가 겹친다는 점에서 백제의 부여침공이 곧 백제의 요서진출임을 더 분명히 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을 살펴보면 부여 고구려 백제는 대륙 중원을 중심으로 그 북쪽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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