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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남성 용문석굴에 백제 부여씨 불상이 왜 있나?

monocrop 2006. 12. 15. 23:01

<조선일보>(2004. 11. 07. A23)에 소개된 "中 룽먼석굴서 백제불상 첫 발견"이란 제목으로 "망국의 한을 안고 이역만리 중원으로 간 백제인의 자취가 중국 뤄양(洛陽) 룽먼석굴(龍門石窟)에서 처음 발견됐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석굴은 "7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이고,그것이 "룽먼석굴의 877번 불상 왼쪽 좌불이 조각된 두 개의 작은 감실(龕室) 아래에서 부여씨(扶艅氏)라고 적힌 명문(銘文)을 발견했다."고 했으며,그 "부여씨는 백제 왕실의 성"이라고 밝혔다.

 

왜 하필이면 백제 왕실의 성씨가 룡문석굴에서 발견되었을까?

그 글을 소개한 유기자나,그 사실을 밝힌 림성조(林性照) 뤄양대 특임교수의 주장은 "이 불상을 만든 사람은 백제 멸망 직후에 당나라로 끌려온 백제인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단연코 아니다.

 

백제의 수도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이며,"직산(稷山)"이라고도 한다. 바로 이 "직산"이 산서성 서남부에 있다. 룡문(龍門)은 룡문산(龍門山)을 말하며,산서성 직산 서쪽에도 있고,하남성 낙양현 남쪽에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룡문은 후자를 가리킨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의 건국지 河南을 황하 남쪽으로 본다면 초기 백제의 중심지는 산서성 남부 일대가 되며 또한 개로왕 때에 백제의 강역에 하남성 중악 숭산이 등장하므로 대륙 낙양 용문석굴에서 백제 왕실의 불상이 발견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으며 오히려 당연한 사실이 됩니다...

 

 

그러나 직산이 산서성 서남부에 있었으니,그 지역에 백제와 그 수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 백제의 강성시기에 하남성 룡문산 룡문석굴이 있는 곳까지 와서 불상을 조각하였던 것이다.

만약에 그 불상의 조각 시기가 정말로 7세기경이 옳다고 한다면,백제가 멸망했을 시기이니,그 백제 사람들이 신라에 끌려가 신라의 수도 경주(慶州)인 낙읍(洛邑) 남쪽에다 불상을 조각했던 것이다. 이 낙읍(洛邑)이 바로 낙양(洛陽)이다.

 

만약 한반도 서남부에 있었던 백제였다면,그럴 수는 없지만,정말 그곳 하남성 낙양 남쪽까지 끌려가서 그런 불상을 조각했을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그보다도 훨씬 가능성이 있고,훨씬 신뢰성이 있고,훨씬 합리적인/논리적인 주장이 바로 그 중원대륙 그 중심에 백제가 있었고,그 동쪽에 신라가 있었으며,백제의 서쪽에 당나라가 있었는데,그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그 사이에 있는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케 했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

 

이것은 당연히 그 부여씨가 백제의 성씨이고,그런 사람이 그 곳에서 불상을 조각하였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고구려/백제/신라/가야는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중원대륙에 함께 존재했기에 가능한 말이다.

 

그렇다면 꼭 백제에만 '부여"씨가 살았는가? 신라에는,고구려에는 없었는가?

그리고 룡문석굴이 7세기 이전에 5세기라고 한다면,백제가 멸망하기 전의 시기이므로,망명자나,끌려온 백제인 등등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설득력이 없다. 아예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작품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신라 땅에 백제와는 상관없이 신라 사람 부여씨가 살면서 신라 사람 부여씨가 살면서 불상을 조각한 것이 된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다.

 

출처 : 대륙조선사 연구회 최두환 박사님의 글..

출처 : 韓民族! 옛 제국을 찾아서...
글쓴이 : 서우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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