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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慶州와 新羅王陵

monocrop 2006. 12. 15. 22:58

慶州와 新羅王陵

 

현재 경상도 慶州를 新羅의 서울이라고 합니다. 그 증거로 慶州에는 수 많은 王陵이 있으며, 佛國寺도 있고, 토함산(吐山)도 있고, 가지가지 유물이 있다고 합니다. 新羅王陵을 지칭하면서, 이것은 누구의 王陵이니 어쩌구 합니다만, 누구의 陵이라고 알려주는 지석(誌石)이나 碑石은 하나같이 없습니다. 太祖 왕건(王建)이 新羅를 慶州라고 정했다는 기록은 있어도, 新羅의 서울을 慶州로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新羅의 서울이 慶州로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경상도 경주에, 新羅의 王陵이라는 것은 하나 같이 誌石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마총(天馬塚)이니, 금관총(金冠塚)이니 하는 것은 금관이 나와서 금관총, 말 배가리개에 천마의 그림이 있다고, 천마총이니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무덤의 주인을 말해주는 誌石은 없는 것일까요? 예전에(1911년이후 일제에 의해서)慶州의 王陵이라는 것을 발굴하고자 하니, 그 지방 노인들이 그것은 假墓(가짜 무덤)이다 파지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발굴을 해보니 유물이 나오기는 합니다만..그래서 그들이 봉분을 다시 올리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경주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朝鮮時代까지만해도 아니 현재까지도 무덤을 훼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慶州에 있다는 王陵中 어느 것은 도굴이 되기도 하고, 도굴이 안 된 것도 많습니다만,, 도굴이 되었다고 해도 값이 나가는 금은붙이를 가져가지, 돈도 안되는 돌맹이인 誌石이나 碑石은 가져가지 않습니다. 무겁기만 하고, 가지고 가다 들키기 쉽상이기 때문입니다..慶州에 있는 유물은 도굴꾼들이 돌맹이인 誌石은 모두 가져가고 금붙이는 그대로 남겨 놓았다는 희한한 유적입니다. 도굴이 안 된 것도 이상하게도 하나같이 무덤주인의 신분을 알려주는 지석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당시는 王陵주위에 배총(陪塚)이라고 해서, 당시의 신하나 공주,왕자의 무덤을 만들어 놓는데, 慶州의 고분에는 이것이 없고, 王陵옆에 바로 王陵이 있다고 합니다. 학계에서는 옆의 陪塚은 아마 도굴이 되어서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王陵과 비교해서 값이 될 만한 것은 王陵에 있지 陪塚에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돈이 되는 王陵은 도굴하지 않고, 장상(將相)의 고분만 도굴했다는 설명도 어설프게 보입니다..


    山이 경주에 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무열왕때 토함산은 화산폭발한 기록이 있습니다만, 지금의 토함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일 뿐 현무암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 토함산이 신라에 있다고 했지, 경주에 있다고 한 기록은 없습니다. 토함산이 폭발했을 때, 그것이 신라의 서울에 있었다면 상당히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을 것입니다..


     우리가  新羅中心의 半島史觀이라고 배우는 三國史記에는 신라왕릉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이상하게도 위치가 기록된 王陵은 하나같이 못 찾고 있습니다. 선덕여왕의 릉은 낭산(狼山)의 꼭대기 천림사(泉林寺) 뒷산에 있다고 기록하는데, 우리는 어느 산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上古史學會에서 대륙에서, 아직도 대륙에 그대로 남아 있는 "천림사(泉林寺)"를 찾아내고 그 뒤에 있는 낭산(狼山)의 꼭대기에서 고분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진을 찍어 온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古墳은 당국에 의해서 파헤쳐지고 지금은 그 유적만이 남았다고 합니다. 과연 新羅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이중재님의 "상고사의 재발견"이라는 책 참조)


 경주에는 신라 김유신장군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수많은 다른 장군들의 무덤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장군은 김유신만이 아니었을텐데..수많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고분은 어디로 갔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신라의 수도가 지금의 경주라면 당연히 왕궁터가 발견되어야 합니다. 신라 천년동안의 서울이었던 경주의 왕궁의 남쪽에 황룡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황룡사지가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경주가 신라의 서울이고, 경주에서 큰 절터를 발견했으니, 그곳이 皇龍寺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바로 북쪽에는 千年王都 신라의 王宮이 있었을터인데, 어째 발굴되었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물론, 수 많은 전란으로 소실(燒失)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 소실되었다고 하더라도 주춧돌은 남아 있어야 하는데, 주춧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시 신라가 불교를 신봉했던 국가라고는 하나 皇龍寺가 皇宮보다 컸을까요? 물론 컸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1,000년동안의 王宮은 어디있습니까? 건물은 파괴돼도 주춧돌까지 모조리 가져가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춧돌하나 나오지 않는 곳을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는 것도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과연 그곳은 신라의 首都가 맞는 것인가요 아니면 그러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발굴이라고 했다고 방송에 나오는 것은 돌칼이나 항아리이지 王宮에서 사용한 물건이라고 보이지 않습니다.


     
주춧돌하나 나오지 않는 것은 百濟의 서울도 高句麗의 서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째서 우리의 고도(古都)는 모두 주춧돌 없이 건물을 세운 것일까요? 慶州가 신라의 서울이라고밝혀준 일본사람들이 정말로 고마운 것인가요?

출처 : 韓民族! 옛 제국을 찾아서...
글쓴이 : 상선약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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