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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재성) 장보고는 반도인이 아닌 대륙신라 장군

monocrop 2006. 12. 15. 22:22

아래글은 오재성 선생님이 한배달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한글 병기 못하는 점 이해 바랍니다

(운영자 송준희)
김부식은 반도땅에서 "장보고, 을지문덕"의 소문을 들을수가 없어서 중국의 서적을 인용하여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반도에 없었다는 의미로 해석하여야 되는 것 아닌가 ?

어찌 한반도 고려땅 김부식이 지금으로 비교하자면 이순신 장군의 존재를 몰라 남의 나라 기록을 보고 기록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이 말이 되는가 ?  살수라는 지명도 김부식은 모르는 미상지명이라 하였는데 강단이 주장하는 "살수=청천강"은 근거가 무엇인가 ?

한심한 노릇들이다

아래는 다소 전문적인 내용이라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을수 있으나 많은 분들의 참고를 바랍니다.
-> 운영자가 직접 지명등을 표기하다 보니 보기가 불편한 점이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장보고는 반도인이 아닌 대륙신라 장군

 


 

 

 

 

 

 

 

 

 


 

 

 

 

 

 

 

자 이제 윗 자료를 바탕으로 삼국사기 장보고 열전을 다시 읽어보자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바로보는 법을 배워보자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제44 (열전 제4)  장보고/정년
  

장보고(張保皐)<신라본기에는 궁복(弓福)으로 썼다.>와 정년(鄭年)<연(年)은 연(連)으로도 쓰기도 하였다.>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 그들의 고향과 아버지 할아버지를 알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싸움을 잘하였는데, [정]년은 특히 바다 속에서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조금 뒤졌으나,
[정]년이 [장]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로 항상 서로 맞서 서로 아래에 들지 않으려 하였다.

두 사람이 당나라에 가서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말을 타고 창을 쓰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후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대왕을 뵙고 아뢰었다.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을 붙잡아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고려] 완도(莞島)라 부르는 곳이다.
대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만 명을 주었다.
그 후 해상(海上)에서 우리나라 사람[鄕人]을 파는 자가 없었다.

[장]보고가 이미 귀하게 되었을 때에 [정]년(年)은 [당나라에서] 관직에서 떨어져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사수(泗水)의 연수현(漣水縣)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수비하는 장수 풍원규(馮元規)에게
“내가 동으로 돌아가서 장보고에게 걸식하려 한다.”고 말하니, 원규가 말하였다.
“그대와 [장]보고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가서 그 손에 죽으려 하는가?”

[정]년(年)은 말하였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것은 전쟁에서 깨끗하게 죽느니만 못하다. 하물며 고향에 가서 죽는 것에 비하랴?”

마침내 그곳을 떠나 장보고를 찾아 뵈니 술을 대접하며 극히 환대하였다.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이 시해되어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의 자리가 비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장]보고가 군사를 나누어 5천 명을 [정]년(年)에게 주며, [정]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가 아니면 환난을 평정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정]년이 왕경에 들어가 반역자를 죽이고 왕을 세웠다.
왕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대신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전기(傳記)와는 대단히 다르나 두목(杜牧)이 전(傳)을 지었으므로 둘 다 남겨 둔다.>

사론(史論): 두목(杜牧)이 다음과 같이 썼다.

『천보(天寶) 연간,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에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안사순(安思順)이
녹산(祿山)의 종제(從弟)인 까닭으로 해서 사사(賜死)되고,
조서를 내려 곽분양(郭汾陽)으로 대신케 하였는데,
열흘만에 다시 이임회(李臨淮)에게 조서를 내려 부절(符節)을 가지고
삭방(朔方)의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동쪽으로 조(趙)·위(魏) 지방에 나가게 하였다.

안사순이 [절도사로 있었던] 때에는 [곽]분양과 임회가 모두 아문도장(牙門都將)으로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사이가 나빠서, 함께 한 상에서 음식을 먹더라도
항상 서로 흘겨보면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곽]분양이 사순을 대신하게 되자, 임회는 도망하려 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였다.
[그때] 임회에게 조서(詔書)를 내리어 [곽]분양으로부터
병력을 절반 나누어 받아 동쪽으로 나가 토벌하게 하니,
임회가 [곽]분양에게 가서 ‘내 한 죽음은 달게 받겠으니 처자나 살려 주시오.’라고 청하였다.

[곽]분양이 달려 내려가 [임회의] 손을 잡고 마루 위로 올라와 마주앉아
‘지금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이 파천하였는데, 그대가 아니면 동쪽을 칠 수 없소. 어찌 사사로운 분한(忿恨)을 품을 때이겠소.’라고 말하였다.

작별하게 되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충의(忠義)로써 격려하였으니,
큰 도둑을 평정한 것은 실로 두 사람의 힘이었다.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또 그 재능이 일을 맡길 만한 것을 안 후에야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평생에 분한을 쌓아 왔으니 그 마음 알기가 어렵고,
분노하면 반드시 [상대방의] 단점만 보이는 것이니 그 재능을 인정하기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점에서 [장]보고와 [곽]분양의 어짊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정]년(年)이 [장]보고에게로 투탁할 때

‘저는 귀하고 나는 천하니, 내가 자신을 낮추면 예전의 원한을 가지고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장]보고가 과연 죽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이다.
임회가 [곽]분양에게 죽임을 청한 것도 또한 사람의 상정이었다.

또 [장]보고가 [정]년에게 임무를 맡긴 것은 자신이 결정한 것이며,
[정]년은 또 추위와 굶주림 속에 있었으므로 감동되기 쉬운 일이었고,
[곽]분양과 임회는 평생을 대립하였지만, 임회에 대한 명은 천자로부터 나온 것이었으니,
장보고에 비하면 [곽]분양이 [결단하기가] 더 용이하였다.

이런 상황은 성현도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일을 이루거나 그르치는 분기점이다. 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착하고 의로운 마음[仁義]이 잡정(雜情)과 함께 섞이어,
잡정이 많아 이기면 인의가 없어지고, 인의가 많아 이기면 잡정이 사그라진다.

저 두 사람은 인의가 마음을 이미 주도하였고,
여기에 다시 자질이 밝았기 때문에 마침내 공을 이룬 것이다.
세간에서는 주공(周公)·소공(召公)을 백대의 스승으로 일컫고 있지만,
주공이 어린아이를 보좌할 때에는 소공도 의심하였다. 주공의 거룩함과 소공의 어짊으로,
젊어서 문왕(文王)을 섬기고 늙어서 무왕(武王)을 도와 능히 천하를 평정하였지만,

주공의 마음을 소공도 알지 못하였다.
진실로 인의의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밝은 자질이 아니면 비록 소공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그만 못한 사람에 있어서랴?

속담에 ‘나라에 한 사람만 있어도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대저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망할 때를 당하여 어진 사람이 쓰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진 사람을] 쓴다면 한 사람으로도 족할 것이다.』

송기(宋祁)가 썼다.
『아아! 원한으로써 서로 질투하지 않고 나라의 우환을 앞세운 경우로는
진(晉)나라에 기해(祁奚)가 있었고,
당(唐)나라에 [곽]분양과 [장]보고가 있었다. 누가 동이(東夷)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

 

출처:http://www.coo2.net/

출처 : 韓民族! 옛 제국을 찾아서...
글쓴이 : 주인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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