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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라진 구이왕의 기록(부여왕자 위구태를 가리킴)

monocrop 2006. 12. 15. 22:18
2장. 구이왕과 대방고지(仇台王, 帶方故地)




1절. 한국 역사에서 사라진 백제 구이왕(仇台王考)




190년 요동왕 공손탁(公孫度)이 자립하고, 194년에는 공손강(公孫康; 公孫度의 子)이 요동왕이 되었다.

이 무렵은 [삼국사기]에서 백제 초고왕(肖古王;166-214)시절인데 중국측 기록으로 보면 백제 구이왕(仇台王)이 백제 요양시 대방왕에 진출하고, 공손탁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다. 이때 대방고지에 백제가 세워졌다는 기록을 중국 [북사], [수서] 등에 남기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삼국사기]에는 백제 구이왕이 없다. 왜 없을까?




그러면 백제 구이왕은 도대체 누구인지 알아야 하는데 먼저 백제 왕 가계를 다시 본다.

현재 [삼국사기] 기록에서 고이왕(234-286)은 개루왕(128-166)의 둘째 아들인데 개루왕의 39년이나 재위하였으므로 고이왕은 이때 이미 장성하였다고 추정되며, 개루왕 사후에 초고왕이 재위 49년, 구수왕이 21년 도합 68년이 지나 고이왕은 나이 90세 가까이 되어 백제 대왕에 등극하였는데, 그 이후에도 고이왕은 무려 53년을 재위하였다고 전하니, 무려 141세경까지 살았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이 된다.



또한 비류왕(304-344)은 구수왕(214-234)의 차자인데 234년 구수왕 사후에, 고이왕 재위 53년, 책계왕 13년, 분서왕 7년등 도합 70년을 지나서 등극하여 재위 41년을 하였으니 최소한 121세 이상 산 것이 되어 있다.

즉 김부식이 기록한 [삼국사기](서기 1145년 편찬)의 고이왕과 비류왕의 나이는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속일본기 권40](서기 797년 발간)에서 근구수왕(375-384)은 백제 16세왕이라고 하였는데 [삼국유사]에서는 14대왕이고 추모왕부터는 15대다. 또한 [신찬성씨록](서기 815년 발간)도 백제 혜왕(598-599)에 대하여서 추모왕의 30세손이라고 하였다. 혜왕은 백제 추모왕이후 29대왕, [삼국유사]로는 28대왕이다. 즉 [속일본기]와 [신찬성씨록]에는 백제왕 한분이 사라진 것을 증거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 6대왕인 구수왕, 즉 추모왕 이후 7대왕인 구수왕은 [속일본기]에서 10대왕이라 하였다. 이는 한자로서 十과 七의 착오로서 칠이 맞다. 사라진 한분이 서너 분이 될 수는 없으니까...칠이 맞다면 사라진 한분의 백제왕은 7대 구수왕 이후 16대 근구수왕 이전에 존재한다. 특히 왕의 성과 이름이 밝혀진 15대 근초고왕 여구 이전일 것이다.



근초고왕, 근구수왕은 마치 새로운 왕조처럼 초고왕, 구수왕과 똑같은 시호를 사용했다.

초고왕, 구수왕과 근초고왕, 근구수왕은 분명 계통이 다른 것이다. 발해 때 대인수황제가 고조 대조영이 아닌 동생 대야발의 혈통이었던 것처럼...

근초고왕의 다른 계통의 선조 혈통을 추적해 올라가면 13대 비류왕(304-344)이 부왕이고, 구수왕(214-234)이 비류왕의 부왕이라 했는데 여기에 엄청난 무리가 있으므로 비류왕은 7대 구수(仇首)왕이 아닌 10대 구이(仇台)왕의 아들로 추정한다.

구이왕과 공손탁의 딸이 통혼한 것은 아무리 늦춰 잡아도 (여자의 결혼 적령 14~5세와 공손탁의 194년 죽음을 고려) 210년 이전이다.

구이왕과 고이왕이 착오하기 쉬우므로 두 왕이 겹친 것으로 본다.



여기에 백제의 연호로서 문헌상 최초인 낙초(樂初)가 [삼국유사]에 우연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서기 239년 기미년, 사비왕 2년이 낙초 2년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사비왕(沙沸王)이 너무 어려서 왕위에 세웠다가 즉시 폐하고 고이왕을 세웠다.”

이상은 [삼국사기]와 똑같은데 우리가 통설로 알고 있던 내용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여기에 또다른 기록을 인용하였다.

“혹은 낙초(樂初) 2년 기미(己未;239년)에 사비왕(沙沸王)이 붕(崩)하고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사반왕은 붕(崩)하였으므로 제위에 올랐던 것이 사실이며 무녕왕릉에서도 붕(崩)을 썼다.



여기서 234년에서 238년까지 고이왕, 238년부터 239년까지 사비왕, 239년부터 286년까지 구이왕으로 유추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고이왕 5년, 즉 238년에 궁문 기둥에 벼락이 떨어지고 황룡이 날아나왔다는데 혁명의 은유적 기록으로 보여진다.

구이왕의 재위는 239-286년으로 추정되며, 이로써 고이왕(234-238)은 98세까지만 살아도 되고, 141세까지 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구이왕의 아들인 비류왕도 41년을 통치하지만 이 비류왕도 [삼국사기]에 짜맞추기 위해 최소한으로 121세를 살지 않고 평범하게 60세여도 충분하다.



구이왕 뒤에 286년 즉위한 책계왕은 대방왕의 딸 보과 부인과 결혼한 바가 있는데 이 대방왕이 구이왕이다.

즉 평양 한성의 고이왕, 그 아들 책계왕이 있었고, 대방에 황룡왕 구이왕과 그 아들 비류왕이 있었다.

298년 책계왕은 맥인(부여인)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그의 아들 분서왕은 303년에 낙랑 서현을 공격하였다가 304년에 낙랑태수에게 암살당했는데, 낙랑의 서현은 물론, 백제의 낙랑 공격이 중국측 기록에 전혀 없으므로 이는 백제 한성왕와 백제 대방왕 사이의 분쟁이다. 분서왕을 암살한 낙랑태수도 대방고지의 비류왕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313년 고구려 미천왕은 낙랑, 대방군을 공격하여 낙랑태수 장통이 전연국으로 망명하였다. 장통은 요동인이고 그가 자립했던 낙랑, 대방군은 전연국과 고구려의 중간 지대로서 대릉하와 류하 사이다. 이때 전연국의 대방은 대릉하 남쪽, 의무려산 서쪽에 있었다. )

주: 후한이 살수남부의 영역을 쳤으므로 낙랑이 난하 서쪽에서 대릉하 유역으로 됨. 고국원왕때 잠시 고구려 요동지역을 빼앗김. 환도성이 요동의 안시성이라는 기록이 있음.

반면에 백제 대방왕은 요동반도에 있었다.

전한(前漢)의 대방현은 함자현으로부터 대수(帶水)가 바다로 나가는 해안이었다. 해성으로 추정된다.

후한시대 194년 공손강의 요동국은 영동칠현을 대방군으로 하였으므로 대방은 천산산맥의 동쪽, 즉 안산(鞍山)의 남쪽이 된다.

벽류하가 당시 비류하이고, 오고성(吳古城)이라고도 불렀던 위패산성(魏覇山城)이 237년 위나라가 요동국 배후에 바다 건너 밀파한 낙랑 태수와 , 대방 태수의 임시 치소로 고려된다.
위나라에 의해 배후를 차단당한 요동국이 238년에 멸망하고,
위나라는 246년 유주자사 무구검이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키니,
백제 구이왕이 낙랑을 쳐서 무구검을 낙랑으로 철군시킨다.
위나라는 밀파했던 낙랑, 대방 태수를 거점으로 다시 삼한 땅에 진한 팔국(辰韓八國)를 설치하려고 시도했는데
한예의 불복으로 전쟁이 일어나서 대방태수 궁존은 전사하고, 이후 낙랑 속국이 될 진한 팔국은 설치되지 않았다.
중국의 낙랑, 대방은 분명하게 철퇴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삼국유사]에서 중국에 없는 낙초(樂初)라는 연호가 백제 사비왕 즉위초에 세워졌다는 것이며, 낙초 원년은 238년 무오년이 된다. 중국의 연호는 당시 경초(景初)로서 기미년은 경초 3년이니, 경초와 낙초는 글자가 근본적으로 틀리고, 또한 태세 간지도 틀리므로, 경초 3년이 낙초 2년이 될 수는 없다. 또한 고이왕의 즉위는 청룡(靑龍) 2년이었으므로 일연(一然)도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구수왕 사후에 어린 사비왕 대신 구수왕의 삼춘인 고이왕이 즉위했고, 고이왕이 죽자 비로소 사비왕이 즉위했는데 사비성은 당과 고구려 전쟁에 나온 요동반도 성이다. 그해 요동국 공손씨가 멸망했으므로 백제가 그 뒤를 이어 연호를 세운 것으로 고려된다.

238년 요동국을 멸망시킬 때에 요동반도의 위나라 낙랑,대방군도 전쟁에 참여하여 요동군 양평으로 건너갔을 것이며, 이에 백제는 쉽게 위나라가 비운 낙랑을 취득하여 기념 연호를 세운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구수왕(214-234)의 사후에 구수왕의 아들 사반왕이 어려서 개루왕의 아들인 고이왕(234-238)을 세웠다. 고이왕이 이미 90세였으므로 5년만에 서거하니, 다시 구수왕의 아들 사비왕(238-239)을 세웠는데 2년만에 찬탈을 당하여 고이왕의 아들인 구이왕(239-286)이 즉위한 것이다.



이후 구이왕의 큰아들인 책계왕, 책계왕의 아들인 분서왕을 지나 분서왕이 일찍 죽자 구이왕의 또다른 아들인 비류왕이 등극하였다. 비류왕의 사후에는 분서왕의 아들 걸왕이 즉위하였다.

출처 : 韓民族! 옛 제국을 찾아서...
글쓴이 : 가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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