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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노모 히데오
![]() 다저스 초창기의 노모 ⓒ gettyimages/멀티비츠 |
123승.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이 기록은, 아시아의 두 위대한 개척자가 메이저리그에서 만들어낸 위대한 업적이다.
메이저리그 역대 385위에 해당되는 123승은 데니스 마르티네스가 세운 245승의 히스패닉 최다승 기록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현역 선수만 따져도 리반 에르난데스(165) 하비에르 바스케스(152) 요한 산타나(133) 프레디 가르시아(132) 4명의 히스패닉 투수가 벌써 이 기록을 넘었다(페드로 마르티네스 219승).
메이저리그에서 아시아 선수들은 철저한 마이너리티다. 올해 개막전 로스터에서 아시아 선수들은 2.3%로 히스패닉 선수들(25.7%)의 11분의1에 불과했다.
무라카미 마사노리가 1964년에 진출해 2년을 뛰고 돌아간 적이 있긴 하지만, 이들은 메이저리그에 도전한 사실상의 아시아 선수 1,2호였다. 그리고 이들의 후배들 중 누구도 이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3위가 55승(왕첸밍), 4위가 54승(김병현)인 것은 이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아시아 투수의 3번째 100승은 과연 언제 볼 수 있을까. 박찬호의 123승을 기념해 먼저 100승에 도달한 노모 히데오의 야구 인생을 먼저 돌아봤다.
일본야구를 평정하다
노모는 1968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어린 노모가 유일하게 잘하고 유일하게 좋아한 것은 야구, 그 중에서도 피칭이었다. 공부는 물론 심지어 타격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노모는, 피나는 노력을 통해 자신만의 투구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어깨를 2루 쪽으로 최대한 비틀었다 던지는 노모의 투구폼은 코치들을 경악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케빈 브라운, 제러드 위버, 팀 린스컴, 펠릭스 에르난데스 등이 노모처럼 어깨를 비틀었다 던진다. 하지만 노모처럼 극단적이었던 투수는 없다. 물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노모는 야구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의 학교는 고시엔 본선에 나가지 못했고 노모는 프로행에 실패했다. 노모는 사회인야구 팀인 신일본제철에 입단했다. 자신의 투구폼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못한다는 조건과 함께.
장무기가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후 구양신공을 배운 것처럼, 노모는 프로 입단에 실패하고 간 신일본제철에서 결정적인 '비공'을 손에 넣었다. 감독으로부터 간단하게 배운 포클볼 그립이어다. 이 때부터 노모는 포크볼만 파고 또 팠다. 그리고 포크볼이 완성되자, 노모는 사회인야구가 감당할 수 없는 투수가 됐다. 노모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알렸다.
1990년도 드래프트에서, 일본 프로야구의 12팀 중 무려 8팀이 노모를 1순위로 지명했다. 추첨을 통해 우선교섭권의 행운을 얻은 팀은 긴테쓰 버펄로스. 노모 쟁탈전에서 패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가 선택한 선수는 '대마신' 사사키 가즈히로,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선택한 선수는 '컴퓨터 포수' 후루타 야쓰야였다. 노모는 일본 프로야구 최초로 1억엔대 계약금(1억2000만엔)을 받고 긴테쓰에 입단했다. 자신의 투구폼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못한다는 조건과 함께.
1990년 일본 프로야구에는 노모 열풍이 불었다. 4번째 경기에서 시즌 첫 승과 함께 17K의 일본야구 타이기록을 세운 노모는 그 해 28경기에 선발로 나서 21번을 완투했다. 완투에 실패한 7경기 중 1경기는 10회 2사에서 교체된 것으로, 노모는 경기당 8.38이닝을 던졌다. 노모는 다승(18승8패) 평균자책점(2.91) 탈삼진(235이닝 287삼진) 승률 4관왕이 됐다. 그리고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인왕-사와무라상-MVP를 휩쓸었다.
1991년에도 노모는 29경기에 선발로 나서 22번 완투를 했다. 그리고 다시 다승과 탈삼진 1위에 올랐다(31경기 17승11패 1세이브 3.05, 242이닝 287삼진). 1993년까지 노모는 다승과 탈삼진을 4연패했는데, 데뷔 첫 해부터 4년 연속 다승왕에 오른 투수는 일본 야구 역사상 노모가 처음이었다.
메이저리그를 꿈꾸다
1990년 미일 올스타전에서 노모는 내셔널리그 MVP 배리 본즈를 상대, 볼넷을 내주고 만루에서 적시타를 맞는 완패를 당했다. 이는 노모에게 또 다른 목표를 만들어줬다(노모는 메이저리그 진출 첫 해, 샌프란시스코를 상대로 2번의 완봉승을 거두면서 본즈를 8타수 무안타 4삼진으로 완벽히 제압한다).
1993년 미일 올스타전에서 노모에게 또 다른 자극을 준 선수가 등장했다. 벌써 3개의 사이영상을 따내고 있었던 보스턴의 로저 클레멘스였다. 노모는 클레멘스의 공을 보면서 이들과 경쟁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가졌다. "미국에 와라. 너라면 가능하다" 클레멘스가 해준 이 말도 노모의 뜨거운 가슴에 불을 붙였다.
데뷔 후 첫 4년간 너무 많은 공을 던진 노모는, 1994년 마침내 어깨에 무리가 왔다. 여기에 1993년에 부임한 스즈키 게이시 감독은 입단 당시 약속을 깨고 노모의 투구폼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현역 시절 300승을 달성한 스즈키 감독은 노모가 8월에 부상을 당하자 "이제 그는 끝났다"는 발언을 했다.
시즌이 끝나갈 무렵이던 10월1일 경기에서, 노모는 4회 머리에 타구를 맞고 교체됐다. 두개골에 실금이 간 상황. 하지만 노모는 9일 경기에 자원 등판, 7⅓이닝 동안 144개의 공을 던졌다. 그리고 13일 경기에서는 10이닝 완투를 하면서 182개를 던졌다. 노모는 17일에도 연장 10회까지 177개의 공을 뿌렸다. 머리에 부상을 입은 채로 9일 동안 3경기에 나서 503개의 공을 던진 것. 이는 스즈키 감독을 향한 메시지이자, 일본에서 보여준 마지막 투혼, 그리고 작별인사였다.
시즌 후 노모는 구단에 다년 계약을 요구했다. 하지만 구단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노모는 미국행을 선언했다. 노모는 '은퇴한 선수는 어떤 팀에서도 뛸 수 있다'는 조항을 이용해 FA 자격을 얻었다(이는 이후 수정됐다).
노모는 양키스, 메츠, 샌프란시스코, 애틀랜타 등을 방문했다. 하지만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당시 메이저리그에 있는 동양인이라고는 1994년 다저스에 입단, 2경기에서 4이닝을 던진 더블A 투수 박찬호가 전부였다. 134경기에 선발로 나서 80번 완투를 하고, 140구 이상을 61차례 던졌으며, 198구 16볼넷을 기록하기도 한 노모의 일본 프로야구 경력은 감탄이 아니라 우려의 대상이었다.
결국 노모는 입단 보너스 200만달러와 최저 연봉 10만9000달러를 제안한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10만9000달러를 당시 엔화로 환산하면 980만엔. 노모의 1994년 연봉(1억4000만엔)에 14분의1에 불과한 금액이었다. 반면 메츠가 1994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 폴 윌슨에게 준 보너스는 155만달러였다. 일본 최고의 투수였던 26살의 노모는 그렇게 신인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고 미국 땅을 밟았다.
![]() 노모의 토네이도 투구폼 ⓒ gettyimages/멀티비츠 |
토네이도 마니아
1995년 메이저리그에는 1990년 일본에서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노모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이었다. 파업의 여파로 5월3일에서야 데뷔전을 치른 노모는, 일본 데뷔 4번째 경기에서 17K 타이기록을 세웠던 것처럼, 메이저리그 데뷔 4번째 경기에서 14K를 잡아냈다. 그리고 6월15일 9번째 등판에서는 16K라는 다저스 신인 최고 기록을 세웠다.
노모가 들고 나타난 포크볼은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난생 처음 보는 공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포크볼이 등장한 것은 1920년대. 하지만 던지기도 힘들고 몸에 큰 무리가 가는 포크볼은 이후 그보다 던지기 쉽고 부상 위험성도 덜한(그리고 더 효과적인) 스플리터로 대체됐다. 이에 포크볼이라는 말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미국에서 일본 선수들의 포크볼을 스플리터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다른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던지는 스플리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낙폭을 자랑하는 노모의 포크볼에 연신 헛방망이질을 해댔다. 결국 그 해 노모는 평균자책점 2위와 함께 탈삼진 1위에 올랐다(물론 2번째로 많은 볼넷도 허용했지만). 9이닝당 11.1K는 샌디 코팩스가 1962년에 기록한 10.6K의 다저스 최고 기록을 경신한 것이었다.
[mlb.com 영상] 노모의 피칭 장면
노모는 신인으로는 1981년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이후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선발로 나섰다. 랜디 존슨과 선발 맞대결. 노모는 6명 중 3명을 삼진을 잡아냈다. 노모가 과연 신인이냐를 두고 메이저리그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있었지만, 신인상 투표에 참가한 28명의 기자 중 18명은 노모, 10명은 치퍼 존스를 선택했다.
노모는 일본의 국민적 영웅이 됐다. 노모가 등판하는 날 일본은 '다저스 시절 박찬호 등판일의 한국'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노모가 주인공인 무수한 호외가 뿌려졌다. 일본 뿐이 아니었다. LA에서도 '페르난도 마니아' 때와 같은 '노모 마니아'의 열풍이 불었다. 에미상 수상자이자 다저스 열성팬인 앨런 버그먼은 노모 헌정가를 발표했으며, 노모는 그 해 11월 미일 정상회담에 초대됐다.
그렇다고 모두가 노모를 반긴 것은 아니었다. 메츠 원정경기에서 노모를 응원온 일본인 팬들이 백인 청년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 것. 하지만 그렇게 점점 메이저리그는 동양인 선수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1996년 9월18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내리는 쿠어스필드에서 대사건이 일어났다. 노모가 '투수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그 곳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것이었다. 이후 쿠어스필드에서 노히트노런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다저스 투수의 노히트노런도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997년 노모는 드와이트 구든 이후 처음으로 데뷔와 함께 3년 연속 200K를 달성한 선수가 됐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그의 투구폼에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시즌이 끝난 후 노모는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이에 포크볼의 보호막 역할을 했던 패스트볼의 구위와 구속이 뚝 떨어졌다.
1998년 노모는 12경기에서 2승7패 5.05에 그친 후 메츠로 트레이드됐다. 하지만 메츠에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16선발 4승5패 4.82). 1999년 노모는 컵스에 입단, 구단의 요구대로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마이너리그 등판을 지시하자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에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은 밀워키. 특히 필 가너 감독은 노모에 큰 신뢰를 보냈다.
노모는 밀워키에서 12승8패 4.54를 기록했다. 시즌 후 밀워키는 노모를 웨이버로 공시했고 필라델피아가 클레임을 걸어 데려갔다. 하지만 계약에 실패하면서 FA가 됐다. 2000년 노모는 가너 감독이 있는 디트로이트로 갔고 8승12패 4.74를 기록했다. 그렇게 노모의 야구 인생은 마감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사이 노모는 변신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다. 노모는 포크볼이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슬라이더와 커브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2000시즌이 끝날 즈음, 노모가 시도한 변화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에 FA시장에 나온 노모에는 의외로 많은 팀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노모는 오로지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피칭을 옆에서 보고 싶다는 일념 하에 보스턴을 선택했다.
2001년 4월5일. 노모는 보스턴 데뷔전에서 볼티모어를 상대로 생애 2번째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팀의 데뷔전에서 노히트노런을 거둔 투수가 나온 것은 사상 최초였으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빠른 날짜에 나온 노히트노런이었다. 보스턴 투수의 노히트노런은 1965년 데이브 모어헤드 이후 처음. 또한 1992년에 개장한 캠든야즈에서 나온 처음이자 마지막 노히트노런이었다.
이로써 노모는 사이 영, 짐 버닝, 놀란 라이언에 이어 양 리그에서 모두 노히터를 만들어낸 역대 4번째 선수가 됐다(이후 랜디 존슨이 역대 5번째로 등록). 마르티네스가 부상에 신음한 그 해, 노모는 팀내 최다승(13)과 함께 220개의 삼진을 잡아내고 양 리그에서 모두 탈삼진 타이틀을 따냈다(한편 노모의 9이닝당 통산 8.73K는 1500이닝 이상을 던진 역대 선발 투수 중 존슨, 마르티네스, 라이언, 샌디 코팩스, 제이크 피비, 샘 맥도웰, 요한 산타나에 이은 역대 8위다).
![]() 마지막 모습 ⓒ gettyimages/멀티비츠 |
투혼. 그가 하고 싶었던 말
2002년 댄 에반스 단장의 다저스는 노모를 다시 데려와 개막전 선발을 맡겼다. 하지만 노모는 3이닝 4실점 패전을 안았다. 이듬해에도 노모는 개막전 선발로 나섰다. 그리고 랜디 존슨과의 맞대결에서 완봉승을 따냈다. 그 다음 경기에서 노모는 동양인 선수 최초로 100승을 달성했다(2003년 4월21일).
노모는 2002-2003년 2년 연속 팀내 최다인 16승을 올렸다. 하지만 2003시즌 후 받은 어깨 수술은 노모의 마지막 불꽃을 꺼뜨렸다. 2004년 노모는 18경기에서 4승11패 8.25에 그쳤고, 다저스 역사상 15디시전 이상 최악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투수가 됐다. 800만달러의 옵션 사용은 당연히 거부됐다.
2005년 탬파베이와 80만달러에 계약한 노모는 6월17일 미일 통산 200승에 성공했다. 하지만 20경기 이상 선발로 나서면 70만달러의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던 탬파베이는 20번째 경기 이틀 전 노모를 방출했다. 노모의 성적은 가난한 구단 탬파베이가 70만달러를 지불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5승8패 7.24). 노모는 양키스와 마이너 계약을 했지만 메이저리그에 올라오지 못했다.
2006년 노모는 화이트삭스와 계약했지만 역시 메이저리그에 올라오지 못하고 방출됐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이에 노모는 자신의 자존심이었지만 팔꿈치에 부담이 큰 토네이도 투구폼을 수정하기로 했다. 2007년 노모는 베네수엘라 리그 팀과 계약하고 메이저리그 재도전을 준비했다.
2008년 노모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팀이 나타났다. 캔자스시티였다. 4월10일 노모는 2005년 7월16일 이후 거의 3년 만에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랐다. 하지만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호르헤 포사다에게 백투백 홈런을 맞았다. 3경기에서 4⅓이닝 9실점. 이 것이 노모의 마지막이었다. 노모는 4월29일에 방출됐다. 그리고 7월18일, 메이저리그 123승, 미일 통산 201승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노모는 왜 롱런하지 못했을까. 물론 일본에서의 혹사도 큰 영향을 미쳤지만 투구폼 자체가 몸을 갉아먹는 투구폼이었다. 토네이도 투구폼은 그렇다치더라도, 노모는 하이 패스트볼과 포크볼의 높이 차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팔이 귀에 닿을 정도로 붙어 나오는 극단적인 오버핸드 딜리버리를 가지고 있었다. 샌디 코팩스가 커브의 낙차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랬던 것과 같았다.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극단적인 오버핸드 투구폼으로 롱런을 한 투수는 없다.
좀더 몸을 아꼈다면, 좀더 현실과 타협했더라면 노모는 더 길고 평탄한 선수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노모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선수.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노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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