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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 천리장성의 끝자락, 비사성

monocrop 2011. 10. 11. 16:37
 

고구려 천리장성의 끝자락, 비사성


2006년 10월 24일 화요일

 

비사성은 고구려 부여성에서 시작하는 고구려 천리장성의 끝자락으로서,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예로부터 고구려 수군기지로 활용되면서 수당과의 전쟁 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그동안 책에서만 보던 곳을, 이번 기회에 답사 기회가 생겨 이렇게 가게 되었다.

 

비사성의 전경. 현재는 중국이 마구잡이식으로 개발해 놓았다. 

 

이 비사성은 현지에선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으로 불리고 있었다. 비사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꽤나 힘들었는데, 나와 학우들은 모두 힘겹게 올라가서 아래를 바라보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수려한 자연경관에 험준한 산악. 산의 중턱에 중국식으로 성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최근 들어 중국이 이를 관광지로 이용하기 위하여 처리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구려의 흔적을 찾기 힘든데, 정상부 쪽은 중국의 해양기지로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중국 내의 고구려 성들은 현재에도 상당수가 군사기지, 혹은 군사적 요충지로 쓰인다고 한다. 이 말은 당시 고구려의 성곽 배치가 얼마나 정교하였고, 군사적 요충지만 골라서 설정하였는지 잘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라고 본다.

 

 점장대 아래의 도용. 관광객들의 사진거리이나, 한편으론 씁쓸하다.

 

성에는 점장대(點將臺)가 있었는데, 점장대란 장군이 군사를 지위하는 건물을 말한다. 이 또한 중국식으로 꾸며 놓았는데, 그 앞에는 진시왕릉에서 출토된 도용들의 모형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도용들을 여기에다가 놔둔 이유는 무엇일까? 의도는 관광객들의 사진거리를 늘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모두들 여기에 올라가서 간단하게 사진이나 찍고 추억을 남기라는 의도 또한 있겠지만, 내심은 더 무서운 의도를 품고 있지 않을까?

이곳은 고구려의 성이었으나, 지금은 중국의 땅이다. 그러나 연관도 되지 않는 중국식 성이 버젓하게 들어서 있으며, 중국식 도용이 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생각 할 것인가? 이곳을 고구려라고 생각하지 않고 중국이라고 생각하게 되며 이게 몇 백 년이 흐른다면 인식 또한 고구려라는 이름은 희미하게 지워질 것이다. 중국의 속내는 바로 그게 아니었을까? 옆에 있던 한 친구가 사진 한 컷 찍자고 하였으나, 내심 심경이 불편하게 씁쓸한 미소로 답변을 대신하였다.

점장대 위의 건물 또한 중국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 희한하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한국의 전통 건축양상과 다른 부분이 많았다.

 

 비사성 내의 석고사의 모습. 이곳엔 당왕전이라는 특이한 건물이 있다.

 

비사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보니 석고사(石鼓寺)라는 절이 있었다. 이 절을 보고 처음에 도관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나라와는 그 양식에서 거리가 멀었다. 빨간 대문에, 빨간 기둥, 빨간 담장, 그리고 으르렁거리는, 그러나 왠지 익살스럽게 보이는 불독 같이 주름 많은 사자상은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중국은 빨간색을 좋아한다고 한다. 빨간색이 복을 상징하기에 그렇다고 하나, 사회주의 국가의 붉은 혁명의 기치 또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절 내로 들어가니 노란색 가사를 두르고 있는 석불 뒤에 선승들이 붉은색 가사를 덮고 반월형으로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괴이 해 보였다.

절의 건물들은 치미(雉尾)를 쓰고 있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건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치미는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까지 쓰였다고는 알고 있으나, 이곳은 아직도 쓰이고 있었다. 이 절의 공포는 주심포였는데, 상당히 간소화된 스타일로 변모 해 있었다. 신축건물이어서 전통건물과의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나라 사찰의 신축 건물과도 차이는 확연하였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붉은 기둥과 직선의 지붕에 끝부분만 살짝 들린 인위적인 곡선이었다.

중국 절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하면 바로 포대화상(布袋和尙)이다. 포대화상은 거대한 체구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과시하며 앉아 있고, 껄껄껄 웃고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는 스님의 형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절에 가면 어쩌다가 보이거나, 혹은 이 포대화상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절도 적잖아 있는데, 중국에서는 포대화상은 어디든지 다 있었다. 그것도 금불상처럼 금칠이 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의 앞에 놓여 있는 향로에는 사람들이 향을 피워서 소원을 빈 흔적이 역력하다. 석고사의 포대화상은 외부에 있었는데, 금빛 가사를 입고 있으며 근심 없는 호탕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미륵전이 있었는데, 이 미륵전에도 포대화상이 모셔져 있었다.

석고사엔 대웅보전(大雄寶殿), 관음전(觀音殿), 그리고 당왕전과 작은 건물 여러 채와 스님들이 사는 산방이 있다. 대웅보전 속엔 당연히 석가모니불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협시불처럼 그 옆에 좌우로 부처님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협시불의 크기가 본존불과 동일하여 협시불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수인이 서로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좌우로 사천왕상이 있다는 점이 특이하였다.

그 옆의 당왕전(唐王殿)에는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모셔져 있었다. 석고사라는 절의 연혁 또한 당태종이 이곳으로 휴양을 와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나, 사실 믿기는 힘들다. 그러나 당태종과 연계성이 깊은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 좌편엔 눈 3개를 부릅뜬 장군이 칼을 쥐고 있었으며, 우편엔 백발의 할머니가 있었다. 좌편은 아마 설인귀(薛仁貴)가 아닌가라는 추측을 해보며, 우편은 도교에 나오는 할머니나 여신이던가, 아니면 측천무후(則天武后)나 되려나? 그리고 좌우엔 당나라 시대의 문무관들이 3명씩 나열되어 있었다.

당왕전 앞엔 붉은 천으로 동여맨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주위 화분에 꽃을 심어 놓은 것을 보아 아마도 중국의 기복신앙과 관련이 있지 않나싶다. 그리고 우물이 있었는데, 성 내에 우물이 있다는 것을 보아 당시 군용으로 쓰인 우물과 연관되지 않나 싶다. 또한 은행나무 앞에 돌로 된 북이 있었는데, 이게 석고사의 연혁과 연관이 있지 않아 싶다. 물론 최근에 만든 것 같지만...

그 옆엔 3채의 건물이 연이어 있었는데, 각각 신을 모셔놓은 작은 건물이다. 역시 가장 많은 향이 꽂혀있는 데는 재물신의 향로였다. 그리고 용왕전(龍王殿)이라고 하여, 용왕을 따로 모셔놓은 것이 흥미로웠는데, 아마 이곳이 해양적 요충지라는 것이 잘 드러나는 대목인 듯하다.

절의 입구엔 놀랍게도 관우(關羽)와 조자룡(趙子龍)이 사천왕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 또한 중국 사찰의 특징인데, 뒤엔 관우와 조자룡의 활약상이 그려졌다. 관우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휘어잡고 있으며, 조자룡을 편(鞭)이라는 무기를 들고 있다. 처음에 보면 검과 혼동 할 수도 있으나, 편은 검과는 다른 무기이다. 이 무기는 남북조시대와 당나라에 걸쳐서 그 이후로도 융성한 무기로, 철채찍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중장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 진 무기로서 울퉁불퉁한 표면으로 적을 공격하며, 이를 잘 사용하였다고 알려진 사람이 『수호지』의 쌍편(雙鞭) 호연작(呼延灼)이다. 아마 원제작자는 청공검을 표현하려고 이렇게 만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내려오면서 찍은 모습. 계곡이 정말 험준하여 천혜의 요새이다. 일당백이 과언이 아니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온 길 보다 더욱더 장관이었다. 적갈색의 바위산들이 빼곡하게 주위를 감고 있으며 길은 좁았다. 적으로선 공격하려고 하여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험준하였는데, 가히 절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골짜기 하나하나에 성벽을 쌓아 문으로 만들어서 방어를 하더라도 일당백(一當百)의 위력을 발휘하였으리라. 비사성은 요동반도의 끝에 있으며 천리장점의 종점이고, 수군을 지휘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으며 전망도 좋았기 때문에 당시 요새 중의 요새라고 할만하다.

지금은 우리땅이 아닌, 전혀 다른 이의 땅이 된 비사성. 그러나 그 명성은 아직도 잃지 않고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인의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알지 못하는 자랑일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 아쉽게 느껴지는 게 무엇일까? 그 당시 우리의 적이었던 나라가, 이젠 이곳을 군사기지로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속의 유적들을 왜곡시키고, 뒤틀리고, 파괴하고 있다. 이 또한 동북공정의 일환이며, 우리역사 한 켠에 남는 상처가 아닐까?  

출처 : 비사인의 역사 이야기
글쓴이 : 『Be sig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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