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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훈민정음과 가림토

monocrop 2011. 10. 3. 00:05

훈민정음과 가림토
박달 김종호의 역사스페셜 - 한글날 특집
 출처 및 원문보기 / 기사입력: 2009/10/05 [11:39]  최종편집: ⓒ 문화저널21
김종호
훈민점음 반포 - 세종장헌대왕실록 제113권 세종28년(1446년) 음력9월29일

우리나라 말 소리가 중국의 말 소리와 다르므로 한문 글자로는 서로 잘 소통되지 아니한다. 그런 고로 사리에 어두운 백성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끝내 글로 써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실정인지라,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친히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배워, 쓰기 편하게 하고저 할 따름이니라.
 
위 세종대왕의 창제동기와 목적에 따라‘백성을 가르치는 바른소리’의 뜻을 지닌 훈민정음이 반포된지 금년 10월9일로 563돌을 맞이하게 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1989년에 '세종대왕상'(kingsejong price)을 제정하여 해마다 인류의 문맹률을 낮추는데 공헌한 단체개인을 선정하여 상을 주고 있으며, 1994년 미국의 과학전문지인 디스커버리지 6월호에서 '레어드 다이어먼드'라는 학자는 ‘한글이 독창성과 효율면에서 특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극찬한 바 있으며, 96년에 프랑스에서 개최된 세계언어학자들의 학술회의에서는 한국어를 세계공통어로 쓰면 좋겠다는 토론이 있었고, 1997년 10월1일에는 훈민정음이 마침내 유네스코의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또 언어 연구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옥스퍼드의 언어학 대학에서는 세계 모든 문자에 대하여 합리성,과학성,독창성등의 기준으로 순위를 매긴 결과 한글이 1위를 차지 하였다고 하며, 컴퓨터에서도 한글의 업무능력은 중국의 한자나 일본어에 비해 7배 이상의 능률을 보인다고 평가되고 있다.
 
자방고전(字倣古篆)의 수수께끼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 당시 발표된, 이 문자의 꼴과 형체의 유래가 시대를 뛰어넘는 일대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다. 실록의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자.
 
세종장헌대왕실록 제102권 세종25년(1443년)음력12월30일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옛 전서체의 글자에서 본 따온 것이다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其字倣古篆)

또 훈민정음 반포시 집현전대제학 정인지가 훈민정음의 해설서인 해례본 서문에서도 이 글자의 꼴과 형체가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를 다시한번 밝히고 있다.

계해년(세종25년 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28자를 새로 지으시고, 간략히 예의(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이 글자의 꼴과 형체는 옛 전(篆)자에서 본 뜬 것이다.(癸亥冬我殿下創制 正音 二十八字名曰  訓民正音 略揭 例義以示 象形而字倣古篆)

전(篆)자란 전서체로 쓰인 글자를 말하는 것으로써 중국의 주장에 의하면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이 있다. 대전은 주나라(bc1046년~)의 태사 주(籒)가 창작하여 주문(籒文)이라고도 하고, 소전은 진시황의 승상이었던 이사(李斯)의 창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의 꼴과 형체가 중국의 전서체를 본떴다는 것인가? 전자란 연기가 공중으로 꼬이면서 올라가듯 꼬불꼬불한 모양이 특징이고, 직선과 원형을 바탕으로 하는 훈민정음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도 중국의 전서체를 본 따왔다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의 범자(梵字)를 본뜬 것이라느니(성현), 원나라의 팔사파(八思巴)문자에서 따왔다느니(이익,유희) 학자마다 제각기 다른 주장을 내놓게 된 것이다.
 
가히 시대적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정은 어떨까? 중국의 전서체가 아닌 우리 고유의 전서체가 존재하였다는 가정 말이다. 아니 이 가정 외에는, 우리 말을 나타내는 바른소리라는 관점에서 훈민정음 반포시의 형상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여기의 고전(古篆)이란 표현에는 우리의 고대국가에 전서체가 존재했다는 자주적 선언이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가림토 출현
1911년 5월 해학 이기선생의 감수(監修)와 교열을 거친 역사서 환단고기(桓檀古記)가 문하의 계연수에 의해 간행되었다. 이 책자는 삼성기 2종과 북부여기, 단군세기,태백일사등 4종류의 사서가 합본되어 있는 책자로써 고대 환국으로부터 고려말까지 무려 8,590년 동안의 역사가 생생히 기록되어 있으며, 홍익인간의 이념으로부터 출발하는 민족의 사상과 풍습이 적나라하게 담겨있으나, 일제의 핍박으로 세간에 나오지 못하다가 1985년부터 국내 학자들의 번역으로 빛을 보기 시작한 역사서적이다.
 
특히 고려말인 1363년 행촌 이암선생에 의해 쓰여진 <단군세기>에는 bc2333년 단군조선을 건국한 제1세 왕검단군으로부터 bc238년 47세 고열가단군 58년까지 모두 마흔일곱 단군님의 2,096년간의 역사가 편년체로 전해지고 있는데 여기에 우리의 고대문자인 가림토정음38자가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가림토(加臨土) 정음38자는 bc2181년 3세단군이신 가륵단군께서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제정하신 고조선 문자이다. 가림토(加臨土)의 가(加)는 부족연합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림(臨)은 임한다 또는 다스린다는 의미이며, 토(土)는 흙이라는 뜻 외에도 고향, 뿌리등의 근본을 의미하고 있으니 가림토 정음 38자는 곧 ‘오가를 다스리는 뿌리가 되는 바른소리’라는 뜻으로써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훈민정음(訓民正音)과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이 문자중 28자는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훈민정음과 문자의 꼴이나 형체도 꼭 같다.
 
원본배열 가림토정음 38자(좌), 훈민정음 28자(우)

필자가 가림토정음 38자를 천지인으로 분류하여 배열한 것

 
어아가(於阿歌)
또 단군세기에는 2세 부루 단군 때의 어아가(於阿歌)가 수록되어 있는데 단군시대에 매년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마다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어 선조의 덕을 찬양하고 화합을 다지기 위해 부르던 노래라고 한다. 곧 어아가(於阿歌)는 고조선국의 애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어아'라는 말은 태초의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인데 음악으로 말한다면 '율려'이고 신과 인간의 화합을 상징하는 소리이며 선조와 후손의 화답을 표현하는 소리이다. 또 어머니의 '어'와 아버지의 '아'라는, 조선사람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도 '어아'로 시작되지 않는가.  고로 어아가는 '어'가 지닌 음의 성질과 '아'가 지닌 양의 성질이 하나로 어울어지는 조선 말의 효시로 여겨진다.
 
세종대왕께서 어아가를 읽으셨다면 문자에 소리를 내기 위한 연구에 힘을 얻지 않았을까. 어아가와 가림토를 놓고 회심의 미소를 띄우셨을 대왕의 모습을 그려본다.

물론 이상의 추측은 세종대왕께서 단군세기를 접하셨을 경우를 전제로 하는데,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최측근 신하 중에 단군세기를 펴내신 이암선생의 친손자인 용헌공 이원이 세종임금을 즉위년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필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암선생의 손자 이원
이원에 대해 고성 이씨 역사기 세덕편의 기록을 본다. '용헌공 휘(諱) 원(原)은 조선개국 초에 기강확립과 개혁의 일에 재간으로 발탁되어 재(才)와 기국(器局)을 인정받아 태종1년(1401년)청백리에 록선되고, 좌명공신(정종2년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움)에 봉해졌으며 태종11년 철성부원군으로 품계가 오르시고 태종18년 개국정사동덕(開國定社同德) 좌명공신(佐命功臣)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의 공신 호(號)를 받고 우의정에 오르고 세종3년 좌의정이 되시어 세종의 태평치세를 여시었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231수의 한시(漢詩)가 전한다.'
 
조선조 태종18년(1418년) 8월11일 즉위식을 거행하고 조선 제4대 임금에 즉위한 세종은 제일 먼저 대신들의 관직을 발표하는데 여기에 이원은 우의정에 봉함을 받았으며 다음날인 12일에는 임금을 대신하여 종묘에 나아가 선대왕들의 사직에 새임금의 즉위를 고한다.
 
또 이듬해인 원년(1419년)1월 19일 명나라황제가 태감 황엄, 정사 한확, 부사유천을 보내어 조선왕의 즉위를 비준하는 고서(誥書)를 보내 오니 조정에서는 이원을 사은사(謝恩使)로 파견한다. 이렇듯 용헌공 이원은 세종대왕의 최측근 신하로써  즉위년부터 정사를 보필하며 왜구에 대한 정벌 계획을 수립할 때나 관료의 구조조정 문제를 비롯하여, 중요한 정사마다 임금을 보필하였고 세종3년(1421년)에는 좌의정으로 승차하였다.
 
행촌 이암선생과 단군세기
이원의 조부인 행촌 이암선생은 고려 25대 충렬왕때 왕명을 출납하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겸 보태자감국(補太子監國:세자를 도와 국정을 처결함)을 역임한 이존비의 손자로써, 약관 17세의 나이로 고려 26대 충선왕 5년(1313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한 이후 27대충숙왕-28대충혜왕-29대충목왕-30대충정왕-31대공민왕까지 6대(代)왕을 모시는 동안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현재의 국무총리)을 두번이나 역임하는등 공민왕 11년인 1362년까지 만 50년동안 관직에 계시다가 이듬해인 1363년 2월에 강화도로 은퇴하여 10월에 단군세기를 지어 가장비서(家藏秘書)로 남겨두고 그 다음해인 1364년 5월5일 향년68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슬하에 인(寅), 숭(崇), 음(蔭), 강(岡)등 네 아들을 두어 이중 15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문명(文名)을 떨친 4남 강(岡)이 가장 현달하였으나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지고 외아들 하나를 남겼는데 바로 용헌공(容軒公) 이원(李原)이다.
 
할아버지는 단군역사 복원의 소망을 남기고 떠났고, 손자는 나라의 자주적 융성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성군의 곁을 지켰다는 이 장면에서 용헌공이 가장비서(家藏秘書)인 '단군세기'를 대왕에게 진상하였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을 것이다.

세종7년(1425년) 9월25일 평양에 단군사당(檀君祠堂)을 건립한 대왕의 업적은 그러한 심증을 더욱 굳혀주고 있다. 단군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이 왕명에 의해 공식적으로 건립된 것은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이후 최초의 일로써, 외세에 짓밟힌 민족정신과 정통성이 부활된 의미를 갖기에 충분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이를 결정하신 대왕께서 이미 단군세기를 통하여 고사를 충분히 숙지하였슴을 추측케 하는 일이다. 그러면 이러한 배경하에 다시 훈민정음 제정과 반포 때 일관되게 밝힌 바 있는 자방고전(字倣古篆)의 전(篆)에 대해서 더 알아보자.
 
한민족 문자의 유래
조선조 중종 때 찬수관으로써 궁중비서를 관장하던 이맥의 편찬서인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에는 한민족 문자의 유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시(神市)에는 녹서(鹿書)가, 자부에겐 우서(雨書)가, 치우에겐 화서(花書)와 투전문(鬪佃文)이 있었고 복희에게는 용서(龍書)가, 단군에게는 신전(神篆)이 있었으니 이 글자들은 널리 백산. 흑수. 청구. 구려에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부여사람 왕문은 처음 전(篆)이 번거롭다 여겨 새로 부예(符隸)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진(秦)나라 때 정막(程邈)이 숙신(肅愼)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隸法)을 한수(漢水)에서 얻어 그 획을 조금 바꿨으니 지금의 팔분법이다. 진(晉)나라 때 왕차중은 또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의 먼 후손이다. 지금 그 글자들의 근원을 연구해보면 모두 신시(神市)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그 지류를 계승한 것이 명백하다.

위 기사에서 우리는 엄청난 역사적 사실과 함께 전율마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서체와 예서체와 해서체가 모두 한민족에게서 나온 문자임을 당당히 천명하고 있지 않은가! 단군시대의 문자를 전이라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세종대왕은 자방고전이라는 수수께끼를 통하여 말한다. “우리는 한자의 본류인 민족이다!”라고
 
이우위직(以迂爲直)
이제 자방고전이 수수께끼로 남았어야하는 이유를 눈치채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조선의 세력이 중국을 능가하고 있는 단군세기의 내용이나, 한무제 이후 자기네 문자라고 못밖은 그 한자의 본류를 한민족으로 명시한 태백일사등의 민족사서가 세상에 나올 경우 세상이 뒤엎어질 것이 뻔한 노릇이 아닌가. 중국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고 모화사상에 빠져있던 때가 아니던가! 때로는 돌아가야 될 때가 있는 법이다.
 
만약 '훈민정음은 3세단군 가륵때 제정된 가림토에서 따온 것이다'라고 발표하는 순간 단군세기에 기록된 모든 역사가 공개되어야 할 것이고, 전쟁을 불사하지 않는 이상 단군세기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예측하여 단군시대를 상징하는, 고전(古篆)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하였으리라. 행촌이암선생도 그런 점을 염려하여 단군세기를 가문에 간직해야 했고, 이맥선생도 태백일사를 숨겨두어야 했고, 환단고기를 간행한 계연수도 역시 당대에 내놓치 말고 훗날 펴내도록 유언한 것이니, 이 모두 중근세에 외세에 부침하였던 쓰라린 민족사의 한 부분이 아닌가.
 
세종대왕의 또 하나의 업적
그렇더라도 필자는 훈민정음 반포 563돌을 맞이하여 세종대왕의 위업에 또 하나를 더할 수 있슴에 오늘 기쁨을 감출 수 없다. 대왕께서는 나랏 글을 창제하셨을 뿐 아니라 고조선 가림토문자에 소리를 냄으로써, 언젠가는 세계문화사를 다시 써야만 하는 쾌거를 이루어 내신 것이 아닌가! 세종문화는 당대와 후세는 물론 고대의 영광마저도 살려내어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저널21 김종호 master@mhj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