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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어의 변형어, 일본어의 비극(차운의 비밀)

monocrop 2010. 4. 16. 00:53

일본어의 비극

 

1.此云의 비밀(차운을 보면 한국어와 일본어가 보인다)

 

(典馬:此云)于麻柯比(우마가히)


일본서기 웅략천황조(신라(시라기)와 고려(고마))에 관한 기사중

 

時以新羅人爲典馬(典馬:此云)于麻柯比(우마가히/일본음)

 

時以新羅人爲典馬(典馬:말타는사람)此云:于麻柯比(가마돗귀자로므리/까마득히 자주 멀리)


웅략8년 봄2월, 身狹村主靑,檜畏民使博德을 吳國에 보냈다. 천황이 즉위이래 新羅國이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은지가 8년이 되었다. 그리고는 천황의 마음을 두려워하여 高麗(고마)와 수호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왕이 정병100인을 보내 신라를 지키게 하였다. 얼마 뒤에 고려의 한 군사가 잠깐동안 귀국하였다. 그 때 신라인 말을 전문적으로 타는 사람(典馬:까마득히 자주 멀리 말을 모는 者)이 말을 몰았다. 고려병사는 그에게 몰래 말하여 “너희 나라가,우리나라(고려)에게 패할 것이 오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그 말모는 신라인은 고려에서 도망하여 그 말을 신라왕에게 전하였다. 신라왕이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 국내에 있는 고려인을 모두 죽였다. 그 때 한 고려인이 살아 남아 틈을 타 탈출하여 자기 나라에 도망쳐서 모두 상세하게 말하였다. 고려왕이 즉시 군사를 일으켜 筑足流域(或本에 都久斯岐城이라 하였다)에 주둔하였다.

 

<사진:한자으로 만든 '가나' >


 

신라왕은 임나왕에게 구원을 청한다. 임나왕은 膳臣과 같은 장군들과 군사를 보내 신라군을 지원하여 고려 군사를 모두 쫓아낸다. 위에서 典馬란 此云이 보인다. 그러나 한가지 불가사의한 점은 우리가 인용한 일본서기 기사내용이 한국사중 삼국시대의 기사를 보는 것같은 신라와 임나가 위의 짧은 기사에 보인다.

 

 특히 웅략천황 기록에 비슷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기존 사학자들은 위기의 기사들이 모두 한반도의 신라 고려 임나(일본사가들은 가야연맹체라 보고있고,우리나라 강단사학자들도 그렇게 믿고있다)들을 가리키며, 사건들이 韓地에서 일어난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사인 <삼국사기>에서는 위의 사건에 대비되는 기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일본서기 기사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곤한다. 분명 고려(고마)라 표기된 일본서기의 기록, 응당 이 경우 고려가 고구려의 잘못 표기라 믿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또한 고려가 주둔한 筑足流城( 或本에 都久斯岐城)을 筑-都久-達句의 음역이라 하여 한국의 大邱에 비정하는 것이 일본과 한국사학계의 통설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같은 한국사에는 이런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는 韓地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라기에는 문제가 있다.

 

한일관계사가 물론 많은 연관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하지만 일본서기를 해석할 때 한가지 중요한 기본적 인식 점은 역시 일본서기를 해석할 때 이루어진 기록의 서술이라는데 제일 먼저 생각하고 일차적으로 지명비정에 있어서도 역시 현지의 일본이라는데 초점을 두어야 모든 내용이 순조롭게 풀어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韓地가 아닌 日本地이면 어디냐? 라는 질문을 받을 경우 답은 본문 중에 都久斯岐城의 筑足-都久斯(쯔구시)의 음역으로 일본 키타규슈(북구주)지역인 筑紫 (쯔구시) 同音異表記라 할 수 있다.

 

그러면 筑足流城와 都久斯岐城는 어떤 뜻이며 동일한 표기일까? 이는 향찰식표기(향가표기법)로서 足流=久斯岐와 대응하는 뜻이다. 足의 훈값(발),‘流’는 ‘달아날’ 流자로서 (足流)는 ‘발달아나’ 소리값으로 ‘밝달’ ‘발달’ ‘배달’과 같은 ‘밝은땅(陽達)’의 향찰식표기이다. 신라시대 향찰 식으로서 밝달=風流로 표기한 예와 견줄 수 있다. ‘風 ’이 옛 새김은 발함 풍자요,‘流’는 달아날 류자로 이 風流 역시 밝달로 읽었다.

 

 

그에 대응되는 <久斯岐>를 풀이해보면 <久斯(구시)>는 알타이계통어로 ‘빗(木節)’이며 현재 일본어 값도 ‘クシ(구시)’이다. 여기서는 빛의 고어인 ‘빗’과 동음으로 빛(光)의 소리새김하고 있다. ‘岐’는 <가지(枝)>이다. 久斯岐=빛가지,빛살(光線)의 소리새김이다.

筑자는 관현악기인 琵琶(비파)의 고대어(비화)를 (빛와)의 소리차용하면 筑足流城의 향찰식 표기값은 ‘빛(光)와 밝달(밝은땅)城’이다.

 


또한 都久斯岐城 의 표기값은 ‘都(도읍지) 빛살(구시기)城’ 筑紫岐城 또한‘빛와자주(紫)빛가지(빛살)城’ 의미로 셋 모두가 동음이음표기로 되어있다. 축자(筑紫)의 지명은 일본 북규슈에 筑前,筑後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사진:너희에겐 내일은 없다 .NHK 6부작 일본 드라마/사카구치켄지 출연>

 

웅략8년 紀의 신라국은 한반도 신라가 아니라 일본 북규슈의 쯔구시(筑紫)에 있었던<시라기쿠니(新國)를, 고려(고마/부여계통) 역시 중규슈 지방에 비정되어지며 우리 고구려 계통 이주민들의 소국임이 분명하다. 임나 역시 규슈(九州)동북방에 해당하는 ‘가라’의 이칭 혹은<광개토왕비문>상의 ‘임나가라’라고 나오는 그 지역을 말한 것이다.


일본서기상‘고려’라 표기하고서 ‘고마’로 읽고 있는 이유는 한반도 고구려와 구분하는 동시에 일본 규슈 내의 백제의 제후국(담로)을 말하고 있다. ‘고마’의 명칭은 담로에 있다.

 

백제의 고유의 "담로(擔魯)"체제이다. [梁書] <백제전>에는 당시 백제의 통치체제인 이 [담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지면 관계로 원문 생략하고 한글 해석분을 게재한다.


(다스리는 곳의 성을 이름하여 [고마]라 하고, 읍을 일컬어 [담로]라 하는데, 중국말의 군현에서 비롯했다. 그 나라는 [22담로]가 있어 모두 자제종족으로써 이를 나누어 다스린다)


 담로가 다스리는 곳 [고마=도성]의 지명 규슈 熊本(구마모토) 동일


 고대에서, [나,노,로,라]등의 음을 표기한 차용한자들은 서로 대채 가능한 글자로서, 모두 [지방]이나 [토지] 및 광의의 [읍] 혹은 [國]을 뜻했다. 따라서 <담나>의 일본식 발음인 <다마나>와 <담로>는 같은 뜻이므로, 이는 백제의 군현 명칭이었던 [담로]의 음사로 볼 수 있다. 이 점, [양서<백제전>]에 언급된 바와 같이, 다스리는 곳의 성(=都城)을 [고마(固麻)]라고 했다는 점과 관련해볼 때, 韓地 백제의 도읍지는 [熊津(고마나리,구마나리)]이었듯이,규슈의 다마나(玉名)가 熊本(=구마모토)에 속해 있는 점까지 유사하다.


이렇듯 高麗(고마)의 표기는 백제국의 ‘도성’이 있는 엄밀히 말하면 ‘부여계통’의 규슈의 소국을 말하고 있다. 일본서기를 편찬한 안만려는 암호처럼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기술하고 있다. 기성학계는 이를 까마득히 모르고 있기 때문에 눈뜬장님이 되고 말았다.


고구려와 한반도에 있던 가야를 비롯한 4국들이 이주해가서 세운 일본 규슈내의 분국들이 일본서기 상에 신라(시라기),백제(구다라),고려(고마)라는 음독으로 나타나곤한다. 임나일본부 또한 기내조의 왜국에 통제 받는 규슈에 있던 官家(미야케)이다. 자세한 역사적 논거는 필자의 저서 ‘임나신론“을 참고하면 수월하게 이해 될 것이다.(고려원/95년/金文培.仁培)


典馬란 <典歷:管掌함>,<典客/빈객의 응접을 맡은 사람>,<典職/맡음,관장함> 과 같은 맥락으로 ‘말을 관장하는 관직을 말함’ 차운을 해석해 보면  정체가 쉽게 들어난다. 于가(往也)麻(마)柯(돗귀자로:도끼자루의 고어)比(므리/무리의 고어) 발음을 모두어 새기면 ‘가마돗귀 자로 므르’ 현대어 발음으로 새기면 ‘까마득히 자주 멀리’ 말을 몰고 다니는 신라(시라기)사람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 파발마와 같은 역할과 유사한 것 같다. 柯자의 용자 법을 보면서 옛 학자들의 독특하고 치밀하게 계획적 이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柯의 새김은 도끼자루이다. 고어의 소릿값은 <돗귀자로>로서 <돗귀>의 소리값은 앞의 <가마>와 합하여 <가마돗귀> 즉 <까마득히>로 발음되어진다. <자로>(柄也)의 소릿값은 고어 동음자 <자로>로서 현대어 자주,빈범함 뜻이다.


일본어의 형성 자체를 볼 수 있는 차운


현재 쓰이고 있는 일본어의 형성 자체가 어떤 절차와 모양으로 이뤄졌나 하는 일면을 보여주는 차운 중 하나가 (典馬:此云)于麻柯比)이다. 현재 일본어 어문학자들은 일본어는 독자적 자생된 언어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다.

 

 

 


 그 증거로서 일본서기 此云(차운)을 내세운다. 차운이 고대 일본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록 지금은 해석할 수 없는 의미불명의 발음으로 남아있지만 사장(死藏)되어진 유물처럼,기념비적인 고대 글자화석으로 남겨진 자랑스러운 글자 박물관이 바로 일본서기 차운이라고 부동적 믿음을 갖고 있다.


 일본어문학자들 모두는 자랑스럽게 이구동성으로 일본고대어가 여기있다. 바로 일본서기 속에 차운이라는 형태로...!

<사진:괴물군/일본 영화/괴물이된 일본어?>

 일본민족은 독자적인 글을 간직한 문화민족이다. 일본서기 속의 노래와 차운과 만엽가들이야말로 찬란한 문화민족인 선조의 글이라고 오늘날 일본문화민족의 후예답게 자랑스레 외치고 있다. 비록 의미 불명으로 사라져버린 글이 많다하지만 그러한 고대 글들이 일본어가 아니고 순수한 고대 한민족이 쓰던 한국어라면 믿으려 하지 않은 뿐더러 청천벽력 같은 충격과 진동일 것이다.


 典馬를 기존 해석 서에 보면 <馬夫>라고 해석해 놓았다. 그 이유로는 차운의 <우미가비>를 일본음독으로 <우미가히>라 읽고 있기 때문에 ‘우마(うま)’가 일본어로 말(馬)이고 ‘우마가타(うまかた)’가 마부(馬夫)이기 때문에 차운 <우마가히>와 비슷한 발음과 典馬(전마)란 정격한문에서 연상되는 말(馬)에 관한 의미에서 ‘마부’라고 얼렁뚱땅 해석해 놓았다.


그들의 해석하는 실상이 이러하다. 그러나 여기서 자세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 할 수 있다. 현대어 일본어 말(馬)인 ‘우마((うま))가 위의 차운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한국어 향찰식표기로 기록한 것을 인쇄술의 미발달과 대거 한반도에서 도래한 백제,신라,고구려,가야 문화민족이 세운 일본 정권, 그 주역들이 새나라 세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일본열도는 완전한 통일국가가 아닌 분권적인 혼란 속에서 문자의 전달이 이뤄지기에는 장해요인이 많았다. 향찰식표기법으로 기록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고, 배우고 익히기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한국말과 일본말은 표음문자이기 때문에 발음만 정확하게 기록할 수 만 있다면 된다. 글자의 창제는 곧 발음기호 만들기이다. 오늘날 한글이 발음기호인 셈이다.  일본어의 발음기호가 오늘날 일본어 오십음도인 ‘가나’인 것이다.


한자에서 글자의 음을 따온 ‘가나’가 일본서기가 쓰인 후 약 3세기 뒷일이다. 한자의 음과 훈값의 새김을 차용한 향찰식표기가 꼭 필요한 큰 이유는 발음의 종성값인 받침의 소리값을 훈값에 의존하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어가 한국어와 점점 다르게 변한 까닭은 역시 받침을 없앤 글자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서기를 기록할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어와 일본어는 같은 한국어를 썼다는 증거가 지금 필자가 증명한 차운값과 일본서기 속에 천황시호, 일전에 펴낸 일본서기 속의 노래 모음들, 또한 ‘전혀다른 향가와 만엽가’의 순수 한국어로 된 만엽가들이다.


 일본어와 한국어는 교착어로서 어미변화 등, 세계 어느나라도 두 나라만큼 비슷한 한자식 낱말과 어순과 문법을 가진 나라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일본어를 배워 보면 가장 어려운 것은 한자의 음독에 있어서 일본어를 읽는 정칙이 없다. 하나의 관습적으로 읽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많은 외국인들이 일본어를 배우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경우가 이 경우이다.

 방법은 관용적으로 외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한다.

 

 차운에 대한 고사기 속의 읽기 방법을 제시한 태안만려

 <고사기(712년)>를 저술한 태안만려(太安万人+呂:오노야스마로)가 백제의 망명인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서 이러한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급적 당시 일본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한자로 적기 위해 고심했던 의미를 조심스레 헤아려야 할 것이다.


  “上古의 것은 말과 의미가 모두 소박하며, 문장을 만들고 또 문구를 만들려고 하였지만 문자(즉 한자)로 나타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모두 훈독하여 서술하면 말이 그 의미와 일치하지 않고, 또 이를 음독하여 서술하면 이번에는 그 내용의 문장이 너무 길어진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지금 하나의 구(句) 안에 음독과 훈독혼용하였고, 그리고 경우 따라서는 모두 훈독으로 기록한 것도 있다”


 <고사기> 서문의 이러한 내용을 대개의 일본 학자들은 <한자를 사용하여 일본어를 기록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고심을 적은 것> 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점, 우리는 그 판단이 오해라고 생각한다.


 태안만려(오노야스마로)가 하나의 句 안에 음독과 훈독을 혼용한 것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모두 훈독을 모두 적은 것으로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백제어(넓은 의미의 고대한국어)를 음독과 훈독으로 적었다고 보는 것이다.


 일본서기(720년) 집필 태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주로 <차운(此云)......>(이는.....라고 이른다)으로 표시하고, 역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당시의 일본어를 어떻게 읽는가를 시사(示唆)한 것으로 인식해 왔다. 한자를 최초로 일본에 가져와서 사용한 집단은 주지하다시피 한반도에서 도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자기 나랏말을 적는 방법에 고심했다는 것은 결국 본국이었던 고대 한국에서 행했던 방식과 유사했을 것이라고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일본어의 뿌리는 한국어다”


 이렇게 당당히 주장하고 있는 일본인 언어학자가 있다. 시미즈 기요시 교수가 바로 장본인이다. 한국어를 <반도 한어>로, 일본어를 <열도 한어>로 부르며 <한어 비교언어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의 의과대 생리학과 교수인 저자(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책에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장을 추가한 것이 한국인 독자들에게는 특별히 눈길을 끈다(문학사상사 간행) 결론부터 요약하면 “일본인의 조상은 한국인‘이라는 주장이다.  위와 같은 사례들은 한. 일 관계에 대한 연구를 깊이 파고들수록 일본어의 뿌리는 한국어라는 결론을 더욱 신빙성 있게 뒷받침해준다.

<사진:아사히 티비/곤조-전설의 형사/일본 드라마중/이자키노부아키 출연>


일본어와 한국어가 점차 달라진 이유


그러면 왜 한자의 소릿값이 들쭉날쭉한가? 그 해답은 일본학자들도 잘 모르고 있다. 그냥 예부터 쓰여 오고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필자가 일본고대어를 연구한 결과 나온 결론은 새로운 일본말의 창제의 필요성이 11세기 초에 시대적으로 부각되어진다. 일본서기 기록시대의 문화적 학문적 높은 수준의 한반도에서 도래한 정착민들이 사라진 후, 일본열도에서는 문화적 학술적 인적 뒷받침이 따르지 못한 시대적 혼란기로 접어든다. 쓰고 기록을 남기기 편리한 받침이 없는 글자제정의 필요성이 시대적으로 요구되어진다. 그 필요에 의한 문자가 일본의 ‘가나’이다. 그 시대 앞에까지 사용되어 지고 있던 일본열도 속의 한국말에 일대 혼란과 변형, 받침 없는 새로운 일본말의 창제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 일본서기가 쓰인 후 2~3백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이다. 받침 없는 일본어의 탄생으로 오늘날 한국어와 일본어는 전혀 다른 말처럼 변해갔다.


그러나 일본서기 기록 후손들은 새 낱말을 만들기 위하여 일본서기상의 기록을 참조하는 과정에서 그들 선조들이 기록한 향찰식 차운의 소릿값을 잃어버리고 몇 세기가 흐른 후 그들이 만들어 논 가나의 50음에 의지한 소릿값으로만 차운 값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선조들의 고매한 학문을 계승하지 못한 못난 후손이 되어 버렸다. 일본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본 고대시가인 만엽가의 종언시대가 왜 하필 일본 ‘가나’가 제정되어진 약 1세기 앞에 이루어졌나하는 것을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일본서기 상에 차운 및 일본서기 노래를 검토 연구한 결과 오늘날 일본어 중에서 山(야마), 歌(우타)와 같은 낱말들이 일본서기 상 차운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물론 일본식 한자의 음독값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낱말이며 본래 한국어로 쓰인 것이다. 물론 전혀 다른 소릿값으로 읽어져야하지만, 일본인 후손들은 일본서기 기록, 약 2~3백년이 지나는 동안 향찰식표기 방법을 깡그리 잊어버린 결과 엉뚱한 낱말로 현대 일본어가 탄생되어져 버렸다.

어차피 말이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살아있는 무형재라 하지만 한.일 관계사만큼 깊은 단층, 괴리가 오늘날 현해탄의 깊이만큼 깊어질 줄이야.

 

 일본어와 한국어와의 단층으로 말미암아 생겨지는 단절은 역사적으로 한민족에 깊은 상흔이 되어 살갗 속 가시처럼 비극의 아픔을 남겨놓고 있다.

한국어에서 유래된 것조차 인정하려 않는 무지의 所致(소치), 그건 일본어의 비극이다. 오히려 희극이었더라면 즐거움이라도 줄 것인데......!  


 말(馬)에 관한 재미있는 고사를 이 기회에 살펴보자. 세상에 천리마는 꽤 있었다. 주목왕(周穆王)의 팔준마(八駿馬)나, 항우(項羽)의 오추마(烏騅馬), 여포의 적토마(赤兎馬)가 그것이다. 그러나 천리마는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나타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던들 아마 수레나 끌면서 마구간에서 일생을 마쳤을 지도 모를 일이다.


 춘추시대 진(秦)의 백락(佰樂,본명 孫陽)은 말을 알아보는 명수였다. 하루는 길을 가다 소금 수레를 끄는 말을 만났다. 백락은 통탄했다. 용장을 태우고 천하를 누비도 시원치 않을 천리마가 일개 필부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명마를 가진 사람이 백락을 찾아왔다. 팔려고 내 놓았지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이가 없다면서 감정을 의뢰하는 것이었다.

백락이 말을 저자거리로 끌고 나와 찬찬히 뜯어보았다.


과연 명마가 틀림없었다. 날이 저물어 돌아오면서도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그 말의 값은 순식간에 열 배로 뛰어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백락이 있고 나서 천리마가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영웅호걸을 천리마에, 명군현상(名君賢相)을 백락에 비유하곤 한다. 아무리 훌륭한 인재도 그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재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뜻이다.


1991년 2월 27일

참고문헌:<고대 일본어의 부활/2002년10.20/아이올리브/정광산인> .<신들의 이름/오늘/2009.2./김인배,김문배>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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