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비쳐진 세상

[스크랩]삼성, 박지연씨의 죽음 그리고 글로벌 기업의 미래

monocrop 2010. 4. 5. 14:13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가 스물한 살의 나이에 백혈병에 걸린 박지연 씨가 결국 스물 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삼성 측에서는 그의 죽음과 업무 사이에 '과학적인' 연관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당연히 산업재해도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불행히도 이 사건은 크게 이슈화되지 않고 있고, 사건에 항의하던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구금되고, 연행되었다.

분명히 밝히지만, 내게는 삼성이 주장하는 '과학적' 해명에 대해 동의하거나 반대할만한 어떤 근거도 능력도 없다. 다만 과학적 인과관계는 몰라도 22명이 조혈계암에 걸리고 9명이 사망했다면 통계적인 인과관계는 있으리라 짐작한다. 또한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 인과관계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라는, 과학의 한계에 대한 의심도 있다.

그러나 과학적인 삼성의 해명보다는 이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 더 신뢰가 가는 것은 위의 이유에서가 아니다. 삼성이 하는 모든 일들이 서로 관계가 있으며, 그 일들을 통해 삼성을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삼성을 둘러싼 모든 사건은 결코 별개의 것들이 아니다.

유죄판결로 경영에서 물러난 이건희씨의 전광석화 같은 복귀를 비롯해, 북한도 아직 공식화하지 못한 3세 세습의 과감한 진행, 그 과정에서 벌어진 법을 무시한 재산의 대물림, 노동자에 대한 감시와 통제, 언론 및 정부와 권력기관에 대한 비정상적인 영향력의 확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과 국가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모습. 이 모든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박지연씨의 죽음을 본다.

그리고 그 문제들의 근본에서 노동조합이 없는 삼성을 본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전세계적으로 노동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 확인된 노조설립을 보장하지 않는 기업은 인권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인권을 무시하는 기업이 다른 문제에 있어서 인간을 배려해주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삼성의 해명을 선뜻 믿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삼성의 경제적 비중을 고려해서 너무 몰아붙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과 정의, 그리고 인권 위에 삼성을 두자는 말이다. 과연 삼성의 경제적 기여가 긍정적이기만 한 것인지, 사회적 기준을 지키고는 경제적 기여가 불가능한 것인지, 오히려 지금의 문제점들이 성장을 저해하는지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일단은 잠시 잊자.

설사 그런 부분을 다 인정해 준다고 해도, 그래서 지금처럼 하면 삼성이 계속 글로벌 기업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지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인권의 기본을 지키지 않는 기업에게 과연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기회가 계속 주어질 것인지, 세계가 계속해서 시장을 열어줄 것인지 하는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한 예로 UN Global Compact라는 것이 있다. 기업들이 인권, 노동, 환경 그리고 반부패에서 국제적인 기준을 지키도록 하기 위한 조직이다. 수 많은 한국기업들이 이미 가입했지만, 삼성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가입하지 않는 것이 솔직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Global Compact과 같은 흐름이 점점 강화될 때, 삼성은 국제시장에서 계속 경쟁할 수 있을까?


위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올 것이다. 하나는 소비자 하나는 투자자. 이미 올바른 소비에 대한 관심은 서구에서는 보편화되고 있다. 아직은 그 대상이 제한적이지만, 앞으로 인권을 경시하는 기업은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만큼이나 소비자들의 기피대상이 될 것이다. 환경마크처럼 인권마크가 보편화될 때, 삼성은 그런 마크를 달 수 있을까?

투자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책임투자는 시대의 조류이다. 대규모 투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이 점차 첨예한 문제가 될 때, 엄청난 외국인 주식비중을 가지고 있는 삼성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될 것인가. 앞으로 요구될 점점 더 천문학적인 액수의 투자자금을 국제자본시장에서 조달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인가.

기업으로써의 성장을 위해서라도 삼성은 바뀌어야 한다.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겠지만, 그때가 닥쳐서는 너무 늦는다. 기업의 체질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권을 존중하는 기업이 되는 것은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동반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때 닥칠 위기는 이건희씨가 이야기하는 '진짜 위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심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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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Global Compact

이 글은 앰네스티의 공식입장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제 개인의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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